215화

마리아가 미처 답을 들려주기도 전, 네크로맨서는 다시 직업의 세계에 흠뻑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시작했다.

“대답이 없군. 두려움에 입이 안 떨어지나 보지? 아니면 어둠을 갈망하는 자신이 부끄럽나?”

“네…?”

“하! 모른 척하기는. 신의 종이라는 것들이 이 어둠의 힘이 가득한 장소에 몰려들 이유는 하나뿐이지. 갈망… 어둠의 힘이 두려우면서도 사실은 갖고 싶은 거야. 자, 이제 솔직해져라! 그리고 어둠을 경배하라!”

희연은 네크로맨서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그냥 직업에 심취해서 하는 말인지 조금 궁금했다.

더불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해도 계속 들으면 질릴 터인데 이런 난해한 이야기를 이전부터 계속 들어왔을 이들은 어떻게 버텨 온 건가 싶기도 했다.

희연의 의문을 풀어주듯 마늘쫑쫑이 달려와 네크로맨서에게 주먹질을 가했다. 갈망과 어둠이 네크로맨서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니라는 듯 그녀는 맥없이 픽 쓰러졌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늘쫑쫑은 온몸을 이용해 네크로맨서를 제압했다. 과연 격투가라는 직업답게 깔끔한 관절기였다. 곧바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친구인 듯했다.

“크윽, 이 나를 결박하다니….”

그러나 입까지 결박당한 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희연은 자기소개하기 전, 조용하기라도 하던 네크로맨서가 그리워졌다.

희연은 다시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리아도 이런 고난과 역경은 예상 못 했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마리아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방패 전사 강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네크로맨서, 미성년자?”

“아… 아마도 그럴 것 같죠?”

마리아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보다 네크로맨서가 더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희연은 마리아가 다른 무엇보다 나이를 걸고넘어지는 데에 의아함을 느꼈다.

상반되긴 했으나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나 네크로맨서나 비슷비슷하게 남달랐다. 나이가 저 두 사람의 발언보다 더 중요한 건가 싶어 희연은 모짜렐라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미성년자면 안 되는 거야?”

“마리아는 원래 파티도 길드도 성인만 받아.”

“왜?”

“성인한테 인성질 하는 건 죄책감이 안 들지만 어린 애들한테 그러는 건 자기가 쓰레기 되는 기분이라 찝찝하다고.”

“…….”

모짜렐라의 답에 희연은 참 마리아다운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애들에게나마 베푸는 그 관대함이 성인에게까지 이어지기를 조금 바랐다.

“그리고 롤플레잉 하는 사람들도 안 껴. 여긴 둘이나 있으니까 다른 파티를 고를 확률이 높겠지.”

롤플레잉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희연은 굳이 뜻을 물어보지 않더라도 모짜렐라가 지칭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 특이한 언행과 행동을 보여주는 건 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생존 본능이라는 게 뭔지, 희연에겐 망설임 없이 레이디 타령하던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마리아를 힐끗힐끗 보기만 할 뿐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마리아 앞에서도 나는야 타락한 어둠 타령을 하던 네크로맨서보다 담이 작은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이 파티는 마리아가 원치 않는 조건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롤플레잉, 미성년자.

마리아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파티원들을 훑어보고 있었지만, 희연은 그녀의 입에서 부정적인 답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딜 안 넣는 힐러는 강퇴’. 마리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건 이름밖에 없는 파티에서 그녀가 불호하는 것들을 상쇄시킬 만큼의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거슬리는 조건을 가진 파티에 합류할 리가 없다 믿은 것이다.

가엾은 방패 전사 강자를 배신하게 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희연은 일단 파티창을 열어 새로운 파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미안한 것과는 별개로 어디가 됐든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연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도 네크로맨서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희연은 일찍이 제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랬기에, 긴 침묵 끝에 나온 마리아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좋아. 여기로 해.”

“네? 왜요…?”

“왜냐고?”

희연은 답을 듣지 않아도 어쩐지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조금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내가 이 파티에서 힐러 하는 것도 아니더라고. 난 엄연히 너 하나 가르치려고 온 것뿐이잖아. 고생은 내 몫이 아니야.”

“…….”

희연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이 파티를 선택했을 때 고생하는 건 마리아와 이세인이 아니었다. 희연과 모짜렐라였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힐러가 성장한다고 믿는 마리아에게 이 파티는 희연과 모짜렐라를 고생시키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포장한들 결론은 제 일 아니고 자긴 구경하는 입장이니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 있다? 무슨 상관인가, 내가 힐러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봐도 그런 얼굴로 웃고 있는 마리아를 보며 희연은 조금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 와중에 이세인은 말 한마디 안 얹는 것으로 이 일에서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처럼 쏙 빠졌다. 그게 더 나빴다.

이세인을 노려보던 희연은 흠흠 헛기침하는 소리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마리아의 발언이 기대하게 만든 것인지 방패 전사 강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 수준은 아니나 엄연히 훨씬 나이가 많은 상대의 간절한 눈빛에 희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희연과 모짜렐라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문제는 희연이 그 점을 이해했다는 거였다. 그녀 같아도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나 흑염의 네크로맨서가 일행이었다면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거절한들 심사가 꼬인 마리아가 더 기상천외한 파티를 데리고 올지도 몰랐다. 희연은 결국 항복했다.

“잘 부탁드려요….”

진즉 포기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인지 모짜렐라는 그냥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방패 전사 강자는 정말로 이 파티가 성사될 줄 몰랐던 것인지 조금 울먹이며 희연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쩌면 조금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팀이 된 네크로맨서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내면의 어둠이 방해하라 명령이라도 한 것 같았다.

“훗… 어둠 속으로 끌어들일 신의 종이 다섯이라. 내 안의 어둠이 게걸스럽게 요동치는군.”

“…….”

희연은 애써 그쪽으론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 다짐하였다.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는 역시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나큰 존재였다.

가장 커다란 문제를 받아들여서인지,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해결됐다.

무늬만 파티장인 네크로맨서를 대신하여 방패 전사 강자에게 희연과 모짜렐라는 참관자 마리아와 이세인에 대해 설명했다.

같이 파티만 해주면 된다는 듯 그는 다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리아는 조금 더 세세한 조항을 이야기하며 약속을 받아냈다.

“사냥하는 도중에 내가 얘네 데리고 중간에 빠져서 뭐 가르친다고 해도 뭐라 안 해야 하고, 사냥감 스틸해도 아, 우리 힐러님이 심심하셨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하나가 어쩜 저렇게 부당할 수 있을까 싶은 조항이었지만 방패 전사 강자는 그마저도 다 괜찮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암묵적으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그가 전담해서 해결하기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듯했다.

약속을 어길 시 파티가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마리아의 반협박에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방패 전사 강자가 질문을 한 것은 마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나 싶긴 한데… 두 사람은 파트너 힐러 사이신가요?”

“파트너 힐러요?”

질문의 대상은 마리아가 아닌 희연과 모짜렐라였다.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친구냐고 물어보는 건가 싶어 긍정의 뜻을 표했다.

“네!”

“어쩐지! 사이가 좋아 보인다 했는데 파트너 힐러였네! 손발 잘 맞는 힐러가 둘이나 있다 하니 이것 참 든든하네요!”

“…?”

그렇게 손발이 잘 맞지는 않을 텐데…?

모짜렐라와 무언가를 함께해 본 경험이 적어 희연도 그와 손발이 잘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방패 전사 강자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그제야 파트너 힐러라는 게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는 걸 깨달았다.

희연의 당황한 얼굴을 못 본 방패 전사 강자는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겠다며 일행에게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연에게 모짜렐라는 물었다.

“너 나랑 같이 공대 들어가서 레이드 도는 것도 아니면서 왜 파트너 힐러라고 했어?”

“같이 게임하는 친구냐는 건지 알았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닌데 네가 하는 말은 틀려.”

매정한 모짜렐라의 말에 희연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리고 풀이 죽은 것은 희연 외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딜 안 넣는 힐러는 강퇴 파티에 원래부터 있던 힐러 라쀠였다.

희연과 모짜렐라가 파트너 힐러 사이라는 잘못된 정보에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라쀠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왜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물어볼 틈도 없이 날아온 파티 초대에 희연은 일단 그것을 수락하였다.

[파티 : 딜 안 넣는 힐러는 강퇴

- (Leader) <흑염의 I-E - 使靈術師 (77)>

- <12시의 모짜렐라 (75)>

- <마늘쫑쫑 – 아이엠 (73)>

- <동방의 강자 (70)>

-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 (68)>

- <눈오리의 돌격 (42)>

- <라쀠 (41)>

- <눈꽃치즈 오리>

- <이세인>]

파티창의 목록을 쭉 훑어본 희연은 라쀠 빼고 다들 참 게임 하는 유저다운 이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나하나 다 개성들이 강했다.

그 외 처음 보는 이름이 있긴 했지만 그게 눈꽃치즈 오리라는 점에서 무조건 그 상대가 마리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이세인은 원래 닉네임인 세인에 다시 성만 가져다 붙였는데, 희연은 백희준이 닉네임을 이희준이라고 지은 것만큼이나 성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반면 눈꽃치즈 오리는 조금 귀엽다 여기던 희연은 어깨에 닿는 손길에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아가 희연에게 바짝 붙은 채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속셈인가 싶어 희연은 조금 긴장했다.

“자, 오리야. 저 힐러 네가 보기에는 어때 보이니?”

“라쀠 님이요? 그냥… 힐러 같죠?”

마리아는 희연의 답에 혀를 쯧쯧 찼다.

“한참 멀었구나, 너.”

“…?”

“자고로 힐러란, 남의 장비만 보고도 아 쟤는 광기 좀 있구나 혹은 인성에 하자가 있구나 하는 걸 바로바로 알아봐야 하는 거야.”

“왜요…?”

“왜냐니. 만약에 저기 저 성기사랑 방패 전사가 옵션으로 방어는 하나도 안 두르고 공격에만 투자한 인간들이면 오늘 죽어나가는 건 누굴까?”

“…….”

“아니면 저기 저 오늘 처음 만난 힐러. 쟤 장비가 만약 힐러에게 필수인 힐량이나 버프 지속, 쿨타임 감소 옵션이 하나도 없다면? 쟤가 힐 해봤자 하나 마나라면 그때도 누가 고생하게 될까요?”

빠르게 표정이 굳는 희연의 반응에 마리아는 재밌다며 웃었다. 그녀와 달리 희연은 예시 하나하나가 뼈아프게 다가와 결코 웃지 못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장비 보는 안목 좀 키우렴. 미리 알아봐야 나중에 실전으로 들어갈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해도 제가 바로바로 막 알아볼 정도로 장비를 잘 알고 그러지는 않은데….”

“그렇겠지. 기대도 안 했어. 우리 꼬마 치즈도 아직 못 하는 건데 네가 할 줄 안다고 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빴을 거고.”

“…….”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조금 보고 싶었다.

“왜. 킹이 그립니?”

“네….”

“아 그러니까 지금 채찍질 배우라고 강요하고, 너랑 나랑 자꾸만 묶어두고, 기어이 너를 이 던전에 오게 만든 인간이 나보다 낫다 이 소리를 하는 거네? 박한 평가에 조금 슬퍼지려 해, 오리야.”

“…….”

마리아가 자신을 놀리는 데 재미 붙은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으므로 희연은 그냥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희연은 속으로 모짜렐라를 부르짖었다. 적어도 신경이 분산되면 마리아의 놀림을 혼자 감내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라 믿어서였다.

방패 전사 강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짜렐라를 희연은 간절히 바라보았고, 그런 희연을 구경하던 마리아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아, 맞아. 말 나온 김에 물어보는 건데 너 왜 그렇게 채찍질 배우는 걸 싫어한 거야?”

킹스메이커에게 들은 바도 있고, 희연이 꺼리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던 마리아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감히 자신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먹으려 했던 그 이유가 말이다.

“아, 그거….”

하늘색 머리에서 눈을 뗀 희연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신관인데 채찍질 하고 다니면 좀 이상하잖아요….”

마리아는 희연이 자신을 저격하는 건지 아닌지 긴가민가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