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훗… 어둠에 이끌려 온 자들을 어찌 탓하지? 이게 다 나의 위엄에 감복해서인 것을.”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네크로맨서는 희연의 물음에 참으로 뻔뻔한 답을 들려주었다.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말 들어주지 말고 집중해!”
모짜렐라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며 희연에게 집중을 요구했다.
“너! 강자 님이랑 네크로맨서 맡아! 성기사랑 격투가는 내가 맡을 거고, 그쪽은…!”
라쀠를 본 모짜렐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정을 내렸다.
“보조! 얘나 내가 커버 못 친다 싶으면 추가 힐 날려요! 그전까지는 저것들 같이 공격하고!”
희연은 내심 그 보조 역할을 본인이 맡고 라쀠가 모짜렐라와 함께 메인 격을 맡아야 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말해봤자 혼란만 올 것 같았으므로 일단은 방패 전사 강자와 네크로맨서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전체적인 체력을 먼저 확인했다.
체력이 가장 위태로운 건 성기사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였다. 같은 탱커인 방패 전사 강자와 비교해 봤을 때 조금 의문이 드는 수치였다.
밴시 무리로부터 도망쳐 오는 과정에서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었던 건가 예상하며 희연은 일단 광역 힐을 시전했다.
“<등불의 빛>.”
[스킬 <등불의 빛>을 사용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파티원의 HP를 회복시킵니다.
‘빛 아래 사라지는 것은 없으니’]
햇살 같은 빛에 한 번 감싸진 파티원들의 체력이 안정적으로 차올랐다. 피가 차니 다들 놀란 마음이 진정된 것인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패 전사 강자와 성기사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가 가장 앞으로. 격투가인 마늘쫑쫑은 탱커들의 주위를 맴돌며 근접 전투를 시작했고 모짜렐라는 희연과 라쀠가 있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어…?
뒤편에 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행을 바라보던 희연은 사람 수가 하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힐러들의 앞에 서 있어야 할 네크로맨서가 보이지 않았다.
희연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고, 어렵지 않게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방패 전사 강자의 앞에 서서 두 팔을 들고 있었다.
마늘쫑쫑을 응원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기엔 그녀의 전적은 화려했다. 희연은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가 싶은 불안감에 자신의 스킬 창을 힐끗 보았다.
희연의 시선은 정확히 탄환 수집 목록 하단에 있는 수면 탄환 쪽으로 향해 있었다.
쏠까…?
비록 네크로맨서는 파티 내 대표 딜러, 그러니까 격수지만 그냥 재워버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희연이 고민하는 사이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는 알 수 없는 행위를 끝마쳤는지 다시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예광탄의 효과에서 벗어난 밴시들 쪽으로.
그녀가 킹스메이커 같은 근접 특화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저건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쏴 버렸어야 했는데…!”
“뭐?”
희연은 모짜렐라의 물음에 답해 줄 정신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흑염의 아이를 붙잡아야 하나 싶어 희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녀의 급박했던 마음은 기어이 혼자 멀리 가버린 네크로맨서가 해골 지팡이를 치켜들며 외치는 소리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밴시 주제에 감히 이 몸에게 이빨을 드러내다니, 이 어리석은 것들…!”
참고로 밴시는 이빨이 없었다.
“가장 깊은 심연의 어둠에서 태어난 이 몸에게 자비를 바라는가? 훗, 내 눈앞에서 사. 라. 져. 라.”
“…….”
지금이라도 그냥 쏠까? 아니면 잡아 올까?
희연은 진심으로 고민하며 총에 달린 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당이 안 된다고 희연을 묶어놨던 백희준의 마음이 이러했던 건가 하고 조금 공감이 되었다.
희연과 같은 꼴을 본 모짜렐라는 이를 꽉 악물었다가 일단은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는 판단을 내리곤 애써 침착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후우…. 일단 버프 돌려.”
“응….”
희연은 힐러는 성격 버리게 되는 직업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총을 들어 올렸다. 가장 뒤편에서 저 꼴을 다 보고 있으려니 인내심을 시험받는 기분이 들었다.
“<촛불의 숨결>.”
[스킬 <촛불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공격력, 방어력, 치명타 확률이 증가합니다!
‘꺼지지 않는 촛불의 가련한 생명력은 위대하니’]
“<천사의 날개깃>, <검의 노래>, <안식의 손길>!”
[천사의 날개깃! 일정 시간 동안 공격 속도, 이동 속도가 증가합니다.]
[검의 노래! 일정 시간 동안 적을 공격할 시 두 배의 피해를 주며 무기에 성 속성이 부여됩니다.]
[안식의 손길! 일정 시간 동안 치명적인 공격을 1회 막아주며 받는 대미지를 감소시키는 안식의 방어막이 생성됩니다.]
발밑에서 흩날리는 깃털, 머리 위에서 교차하는 하얀 검 두 자루, 몸을 감싸 안는 반투명한 커다란 깃털.
산란하는 빛 조각에 이어 여러 가지 스킬 이펙트가 펼쳐지는 것을 본 희연은 모짜렐라를 조금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다시 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파티 비고에 완숙 3이라고 적은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일행은 수가 많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마늘쫑쫑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아다니는 밴시를 공격했고, 방패 전사 강자 또한 노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성기사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장소가 장소다 보니 공격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방패와 커다란 망치를 든 그는 언뜻 보면 무척이나 잘 싸우는 것 같았지만 보면 볼수록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
방패로 밴시를 밀어내며 동시에 다른 손에든 망치로 밴시를 공격하는 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일단은 네크로맨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문제가 언뜻 보면 문제없어 보이는 반면, 네크로맨서는 눈을 뗄 수가 없는 문제를 만들고 있는 쪽이었다.
“응?”
그러나 희연은 아주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제2의 킹스메이커를 꿈꾸듯 달려 나간 근접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가 용케도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 있다 못해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둠의 손길>! <주인된 자의 몸부림>! <사령 속박>!”
심지어 꽤 잘 싸웠다.
네크로맨서와 흑마법사는 비슷한 직업 개념군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녀가 사용하는 스킬은 킹스메이커가 보여주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확실히 다른 점도 있긴 했는데, 킹스메이커의 스킬이 상대측을 짓눌러 버리는 파괴력 있는 종류인 것과 달리 네크로맨서의 스킬은 흑염의 아이가 그리도 좋아하는 단어인 종복 쪽이었다는 거였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날아다니던 밴시를 붙잡아 밑으로 끌고 내려가면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슬이 하얀 영체의 몸에 칭칭 감겼다.
뚝뚝 깎여나가는 밴시의 체력을 통해 희연은 그 사슬이 도트 대미지를 주는 스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흑염의 아이는 붙잡은 밴시들의 체력이 일정량으로 떨어지면 스킬을 사용해 그들을 제 수하로 만들었다. 수하가 된 밴시들이 특정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흑염의 아이는 그 수를 점차 늘려나갔다.
그녀가 생각보다 잘 싸운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희연은 그냥 굴복이라는 말을 좋아해서 수하로 만드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았다.
밴시의 수가 열이 넘을 때쯤,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는 희연의 걱정을 비웃듯 새로운 스킬을 선보였다.
“<오라, 어둠이여>!”
보랏빛 땅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고,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희연은 그게 백골의 손아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 막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모습의 해골 병사들이 하나둘 갈라진 땅의 틈에서 나오는 모습은 상당히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 기이함은 해골 병사들이 조각조각 분해되는 모습을 봤을 때 정점을 찍었다. 희연은 또각또각 소리 날 듯 나뉘는 뼛조각에 저도 모르게 모짜렐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가 공포를 이겨 밴시 무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모짜렐라도 그 모습에 움찔거리기란 마찬가지였다.
소환된 병사들은 점차 수가 늘어났지만 그중 멀쩡하게 서 있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소수의 멀쩡한 이들 역시 그마저도 실상 낡은 천 조각을 기워 입고 손에는 녹슨 농기구 같은 것을 들고 있어 그리 강해 보이진 않았다.
“<꿰매지는 부패>!”
하지만 흑염의 아이는 자신의 어둠, 갈망, 기타 등등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듯 곧바로 새로운 스킬을 사용하며 연약해 보이는 해골 병사들을 진화시켰다.
조각조각 나뉘었던 해골 병사들의 잔해가 그나마 멀쩡히 서 있던 해골 병사에게로 합쳐졌다. 덩치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그들은 거의 뉴비 없지만 한 크기로 변했다.
텅 비었던 두개골의 눈구멍에는 불길이 차올랐고, 녹슨 철들이 녹고 붙으며 엉키더니 그럴듯한 무기가 되었다. 그들이 걸치고 있던 낡은 천 조각은 꿰매지며 얄팍하지만 갑옷과 망토로 모습을 바꾸었다.
합쳐지지 못한 뼛조각은 저들끼리 제멋대로 엉키나 싶더니 어설프긴 해도 말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해골 병사들이 그 말을 타고 네크로맨서 옆에 섰을 때, 그 모습이 제법 그럴듯하다 못해 멋있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와….”
희연은 순순히 감탄했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만큼이나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없었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컨셉에도 불구하고 괜히 이 파티 내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에 희연은 조금 감동하기까지 했다.
네크로맨서, 흑염의 아이가 어둠이건 운명이건 전율 타령을 하든, 타락해라 신의 종! 하고 소리치건 간에 희연은 앞으로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기로 했다.
연신 감탄하며 이제는 밴시와 합쳐져 날기까지 하는 해골 병사들을 구경하던 희연은 어깨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바로 했다.
“집중해야지 희연아. 담당하기로 한 방패 전사님이 울고 계셔.”
“아.”
흑염의 아이의 놀라운 활약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희연은 방패 전사 강자를 잊고 말았다.
다행히 방패 전사 강자의 HP는 아직 60% 정도로 마리아의 기준에 따르면 별을 보러 가기까지 아직 한참 남은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저격할 듯 총을 들어 올렸다 다시 팔을 거두는 희연을 보며 마리아는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인도 집중하라는 의미였는지 힐을 안 넣어주는 희연의 모습에 그저 잔잔한 웃음만 입에 걸쳤다. 이세인이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마리아는 또 미운 소리를 했다.
“죽으려면 한참 넘었는데 재촉은.”
“…….”
이세인은 이제 달관한 것인지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인지 마리아의 시비를 무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희연은 차라리 이게 낫겠거니 생각하며 흑염의 아이와 강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제법 되는지라 조금 정신이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희연을 본 마리아는 모짜렐라가 잘하는지 한 번 확인하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네크로맨서, 어디서 이상한 것 보고 따라 하는 컨셉충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짜배기였네.”
인색한 마리아의 칭찬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흑염의 아이도 다른 면은 모르나 실력으로는 문제가 없단 게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역시 잘하는 거 맞죠?”
“어. 잘하는 거야. 앞으로 달려 나간 것까지도.”
“그것도요…?”
흑염의 아이의 실력과는 별개로 자꾸만 제멋대로 달려 나가는 점은 수용하지 못하고 있던 희연은 마리아의 말에 조금 놀란 반응을 보였다.
“네가 좀 바빠진 것 같아서 의심 들 수도 있는데, 쟤가 판단한 게 정답이야. 만약에 멀리 안 떨어지고 저 네크로맨서가 여기서 언데드 소환했으면 너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걸?”
뜬금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 것까지 단순 컨셉이 아닌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의미였다.
“길드 이름 봤을 때부터 그냥 컨셉충은 아니겠다 싶긴 했는데….”
“길드 이름이요?”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창을 훑어볼 당시 흑염의 아이에게 길드가 있는 걸 보긴 했지만 한자기에 자세히 보지 않았다.
“무슨 이름이었는데요?”
방패 전사 강자의 피가 40% 때로 진입한 것을 확인한 희연은 총을 들며 물었고, 마리아는 그런 희연의 팔을 다시 내리게 하며 답해주었다.
“사령술사.”
상당히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마법사만 있다던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 길드랑 비슷한 곳인가 생각하며 희연은 다시 총을 들었다. 마리아는 희연의 팔을 다시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