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희연은 마리아를 한 번 힐끔 쳐다보곤 계속해 힐을 못 받고 있는 방패 전사 강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밴시 무리에게 방패를 휘두르며 울먹이는 방패 전사 강자의 얼굴에는 힐러가 자기를 버린 것인가 하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바로 옆에 함께 있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마치 후광이라도 단 것처럼 연속적으로 힐이 들어오는 것에 반해 자신은 아니니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지금 30%인데….”
“안 죽어, 안 죽어. 탱커는 원래 좀 피가 깎인 상태로 있어야 더 단단해지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
마리아는 희연의 대꾸해도 굴하지 않았다. 조금 오기가 생긴 희연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치즈는요? 계속 힐 스킬 쓰는 중이잖아요.”
“그거야 딱 보면 알 수 있지. 자, 오리야. 저 성기사 피통 좀 보렴. 어때 보이니?”
“…….”
성기사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피통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피가 깎이는 방패 전사 강자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 자신이나 모짜렐라의 피통 같은 말랑말랑한 방어력을 보여주는 성기사의 모습에 희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말했지? 상대를 파악할 땐 장비를 보라고. 금색이란 건 르센을 선택했다는 거고 결국은 방어력에 치중했다는 의미인데, 그런 것치고 방어구 파츠 하나하나가 멋 부리는 용도지 실용성은 없어. 이건 너도 눈치챘지?”
“네에….”
“킹을 생각하면서 겉모습은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했나 본데 그런 건 레벨 좀 높이고 난 다음에 얘기지 지금 너희 레벨 대에 저런 거 입고 다니면 애초에 파티에서 안 받아줘.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걸 거고.”
“…….”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쟤, 탱커로서 실력 별로야. 공격을 좀 흘리고 그래야 대미지 들어오는 게 덜한데 간신히 막거나 그냥 맞거나 둘밖에 없잖아.”
“아….”
그래서 좀 이상하게 보였던 건가?
희연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를 보며 느꼈던 의문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또한 새삼스레 마리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마리아는 말투와 성격이 조금 그래서이지 확실히 실력만 본다면 어딜 가도 대우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를 보자마자 이런 결과를 예상한 듯했고 알고서도 이 파티에 들어가라 추천한 게 문제기는 했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방패 전사 강자의 HP는 25%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희연은 이번에는 총을 들지 않았다.
탱커는 피가 깎여야 단단해진다는 말도 마리아의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편견을 버리고 봤을 땐,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어서였다.
남은 HP가 부족한 만큼 방패 전사 강자는 더욱 집중했고 조심했으며, 공격을 흘리거나 막는 것 하나하나 신중을 기했다. 비록 그가 그만큼 고생하게 되었긴 하지만 ‘편안한 힐러 인생’을 주장하는 마리아의 취지에는 이게 맞는 모습이었다.
힐러가 고생 안 하려면 딜러와 탱커가 고생해야 하는 거고, 그 둘이 편해지려면 결국 힐러가 고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편안한 힐러 인생을 맛보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
느릿느릿 깎여나가는 방패 전사 강자의 HP와 의외로 멀쩡한 흑염의 아이의 HP.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마늘쫑쫑의 상태까지 확인한 희연은 고민 끝에 총을 들어 올렸다.
“<등불의 빛>.”
탕…!
비교적 뒤편에 서 있어 체력이 깎일 일이 없는 힐러들을 제외한 모두의 HP가 차올랐다. 어두운 배경에 맞지 않는 환하고 노란 불빛이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스며드는 것을 본 희연은 조금 긴장한 상태로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마리아의 말을 따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란 사실을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따르기 싫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희연에겐 지금이 그랬다.
자신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한 희연을 보는 마리아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어디 한 번 이 행동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보라며 집요하게 눈치를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조금 더 나중에 해도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제가 불안해서요.”
“담이 작네? 아니면 내 말은 듣기 싫다는 오기인가?”
“오기는 아니고… 그냥, 저는 이게 더 좋아요!”
편하면 좋긴 하다. 그러나 희연은 자신의 그 편안한 힐러 생활을 위해 다른 딜러, 탱커를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도 결국 앞서 마리아나 킹스메이커가 말했던 눈치 보기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연은 그냥 자신이 좋을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고 싶었다.
마리아는 물끄러미 희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든가. 네 맘대로 하렴.”
“…화 안 내시네요?”
“내가? 왜? 네가 내 파트너 힐러면 모를까 나랑 같이 레이드 돌 일도 없는 앤데 그 정도로 신경 쓰진 않지 애초에.”
“강자 님 치료하려 할 때마다 말리시길래 이번에도 뭐라 하실 줄 알았죠….”
희연의 말에 마리아는 살짝 웃었는데, 희연이 보기엔 비웃음에 가까워 보였다.
“그건 충고지. 제 발로 불꽃 길로 뛰어드는 애 보는 구경 값.”
희연은 제 선택이 그렇게 잘못된 선택인가 싶어 이세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의외로 던전에 진입한 이후로는 마리아보다 조용해진 이세인은 그 시선에 뜻 모를 웃음만 지었다.
“재미없는 말만 하는 인간한테 답 구하는 것보단 나한테 진짜 괜찮은 거냐고 묻는 게 효율적일 텐데, 오리야.”
“진짜 괜찮아요?”
“시킨다고 진짜 하는구나 너.”
“시켰으면서….”
마리아는 희연을 놀리는 것에 재미 들린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놀림과는 별개로 답을 들려주기는 했다.
“네가 잡캐처럼 성장한다 해도 문제는 없어. 나중에 만렙 찍었을 때쯤 육성이 잘못된 것 같다 싶으면 그건 네 잘못 아니라 킹 잘못이 될 거고.
“결론이 왜….”
“그리고, 애초에 그 인간이 네 성격을 몰랐을까? 너한테 나를 붙였을 때 지금처럼 될 걸 정말 몰랐을 것 같아?”
희연이 생각해도 킹스메이커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희연이 끝내 마리아의 말을 전부 듣지는 않을 거라는 지금의 상황을 말이다.
총신을 만지작거리는 희연을 보며 마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내 눈치 볼 필요는 애초에 없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눈치를 보니. 솔직히 우리가 오늘 아니면 이 이상 볼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긴 하죠….”
“어. 맞아. 그리고 힐러는 원래 눈치 보는 거 아니야.”
마리아는 정말로 힐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이제는 조금 존경스러울 지경이라 희연은 그냥 웃고 말았다.
“물론, 네가 나한테 배우겠다고 한 이상 지금처럼 힐 안 할 때 손 놀고 있는 꼴은 못 봐주지만.”
“네에….”
어쩐지 그 점에 대해선 별말 없다 싶었다. 희연은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총을 들어 올렸다. 때마침 방패 전사 강자의 방패에 둘러붙은 밴시 하나가 보였다.
“회….”
“그거 말고 철퇴 스킬 써. 총 쏘지 말고 그냥 들어 올린 상태로 스킬명 말해.”
“…<이단을 향한 철퇴>.”
[스킬 <이단을 향한 철퇴>를 사용합니다. ‘영원한 안식을 저들에게 주소서’]
하얗게 빛나는 총을 본 희연은 예상과는 다른 결과물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총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연의 어깨를 붙잡으며 마리아는 빠르게 말했다.
“넌 총이라서 쏘냐 안 쏘냐로 결과물이 갈려. 총 쏘면 웬 하얀 게 나와서 적 머리를 철퇴로 칠 거고 그냥 쓰면 이렇게 무기가 강화돼.”
“강화면….”
“네가 직접 적의 머리에 철퇴의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
정말 힐러의 공격 스킬은 하나하나가 왜 이런 걸까 하는 것과 별개로 희연은 마리아의 설명대로면 저격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뽐내는 것에 대해 제법 자신이 있던 희연은 마리아가 제 실력을 의심해 이런 방식으로 스킬을 쓰게 한 건가 싶었다.
“저 사격 잘하는데….”
조심히 제 의견을 전하는 희연에게 마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던져.”
“…네?”
마리아는 희연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탱커의 뒤로 와 잠시 쉬고 있던 마늘쫑쫑의 옆으로 옮겼다. 갑작스러운 위치 변경에 희연도 놀랐고 마늘쫑쫑도 놀랐다.
양손에 하얗게 빛나는 총을 꼭 쥔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희연에게 마리아는 물었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뭐지 오리야?”
“그거야 던전….”
“아니.”
“…훈련?”
정답이라며 마리아는 방긋 웃더니 친절하게도 희연의 자세를 손수 교정해 주었다.
최소 필요 힘 스텟 3000짜리 채찍을 들고 다니는 마리아에게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희연은 순전히 타인의 의지로 바뀌는 제 자세를 그저 신기하다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밴시가 참 많지? 그냥 던져도 한 번에 열 마리는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야. 그렇지?”
“저 지금 힐러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 들어오기 전에 이미 약속도 다 했는데 뭘. 중간에 빠져서 네가 나랑 이것저것 연습 좀 한다고 문제 안 생겨.”
“아, 그 협박….”
“그리고 힐러가 너랑 치즈 둘뿐이니? 내내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애 하나 있잖아. 걔가 알아서 네 역할 맡겠지.”
여태껏 라쀠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희연은 마리아가 그 점을 지적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을 눈치챈 마리아는 비소를 지었다.
“왜, 내가 편안한 힐러 생활 운운하다 갑자기 말 바꾸는 것 같아서?”
마리아는 희연의 사슬 길이를 조절해주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쟤가 내내 가만있던 게 다 죽어가는 애들을 후딱 살릴 자신이 있어서인 것 같아 아니면 그냥 얹혀 가려 한 것 같아?”
“…….”
“킹한테 경고 들었지? 여기 오는 애들 중에 인성 기대할 만한 애들은 별로 없다고. 그건 상당히 함축적인 말이야. 인성 문제 말고도 파티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은 다양하다는 걸 기억하렴.”
딜 안 넣는 힐러도 강퇴감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뼈 있는 농담을 한 마리아는 희연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자세는 이 정도면 됐고.”
희연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마리아는 제 앞의 두 사람이 뭘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마늘쫑쫑을 돌아봤다.
“왜요? 죽을 것 같아요? 힐 필요해요?”
“아, 아뇨….”
마리아의 기백에 밀린 마늘쫑쫑은 빠르게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주위 공간까지 확보한 마리아는 밴시 하나를 가리키며 희연에게 말했다.
“맞춰.”
희연은 마리아의 말을 이번에는 군말 없이 따랐다.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못 맞추네.”
“…….”
“숲에서는 발로도 날 저격하더니만.”
“그건…!”
“그건?”
되묻는 마리아에 희연은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그건 사실 다 스킬빨이었답니다 같은 소리를 하면 마리아가 그녀를 가만 안 둘 것 같았다.
“사격을 잘하면 보통 던져서 맞추기 같은 것도 잘하던데.”
“편견이에요….”
마리아는 고민된다는 듯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편술 패시브 생길 때까지 던지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네. 자, 오리야. 조금 더 의욕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
“…….”
침묵하는 희연의 의욕을 증진시키기 위해 마리아는 상품을 걸었다.
“하나라도 맞추면 내가 좋은 거 알려줄게. 오늘 이 파티에서 네가 최고의 딜러가 될 수 있는 방법. 참고로 이세인도 킹도 모르는 나만의 비전이야.”
“…….”
“너도 지금 당장 쓸 수 있어.”
“…진짜요?”
희연은 조금 귀가 솔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