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딜을 원한다는 점에서 희연이 이세인 쪽 스타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거의 반영되지 않은 선생 노릇이라지만 마리아는 제자 되는 애가 고루한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을 참아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마음이 관대해진 마리아는 조금 더 친절해졌다.
“땅바닥에 내리꽂으려는 거 아니면 어깨 그만 올려, 오리야. 밴시는 땅이 아니라 네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고 있단다.”
“…….”
비록 희연은 비꼬기 정도로만 받아들였지만, 마리아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관대함과 친절함을 발휘하는 거였다.
“내가 채찍질할 때는 뭐라고 했지?”
“던진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손목으로… 그리고 허리는 장식이 아니야…?”
“잘 기억하네. 자 그럼 그걸 이제 몸으로 보여줘 봐.”
“…….”
불쌍한 표정을 짓는 희연을 보며 마리아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킹인 줄 아니? 네가 그런 눈으로 본다고 봐주게?”
“조금은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 말도 하는 거 보면 너 이젠 진짜 내가 안 무섭구나?”
전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마리아가 무서웠으므로 희연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말로는 뭐라 한 것과 달리 마리아는 시범을 보여줄 셈인지 무기를 내놓으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없을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희연은 냉큼 들고 있던 총과 체인을 넘겼다.
“한 번만 보여준다, 집중해.”
희연에게 경고를 날린 마리아는 인벤토리에서 무기 교환권을 꺼내 곧바로 찢었다.
웨이브 보상으로 같은 교환권을 받았던 희연은 그게 소모품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서둘러 같은 것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마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거 뭐. 나 가지라고?”
“저 때문에 쓰셨으니까….”
오묘한 표정으로 교환권과 희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마리아는 내밀어진 교환권을 일단 밀어냈다.
“이런 짓은 킹한테나 가서 해. 아주 좋아 죽으려 할 테니까. 네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면서 초보자를 위한 패키지? 뭐 그런 거 하나 쥐여줄걸?”
“비슷한 거 이미 받았….”
“?”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던 희연은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름 없는 그분이 보냈던 스타터 패키지! 에빌론에서 우편을 보낼 때 함께 되돌려 보내야 했다는 게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난 일이라 잊고 말았다. 이제라도 생각나서 다행이라 여기며 희연은 던전 공략을 끝나는 대로 우체국에 다시 가야겠다 결심했다.
되돌아오지 않는 선물에 뉴비님이 내 선물을 잘 받았구나 하며 행복해하고 있을 이름 없는 그분에겐 참 슬픈 결심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그래. 뭐, 됐어. 이제 슬슬 다시 집중하자. 언제까지 시작점에서 놀 것도 아니고.”
희연에게 집중하라 주의를 준 마리아는 늘어져 있던 체인을 정리하며 동시에 길이를 더 늘였다. 희연은 그 모습을 보며 제 힘 스텟으로도 저 정도의 길이를 휘두를 수 있을까 상상해보다 체념했다. 안 된다.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걸어보기도 하고 총신을 쥐어보기도 하던 마리아는 이윽고 체인 쪽으로 손을 옮기는 것으로 낯선 타인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감을 잡았다.
체인 끝자락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총을 보며 희연은 그 모습이 조금, 돌팔매질 같다 생각했다. 주체가 주체인 만큼 위협적이었지만 말이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체인을 빙글빙글 허공에서 돌리던 마리아는 희연에게 떨어지라며 손짓을 보냈다. 애초에 마리아가 체인을 휘두를 때부터 거리를 두었던 희연은 그녀의 신호에 더욱 뒤로 물러났다.
“다시 말한다. 두 번은 안 보여줘.”
희연에게 재차 경고를 날린 마리아는 인벤토리에서 불길해 보이는 포션을 하나 꺼내 마시고는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듯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한쪽 다리를 내밀며 바닥에 콱 찍어 눌렀다. 무게 추를 잡자마자 그녀는 허리를 크게 비틀며 체인을 휘둘렀다.
정말로 돌팔매질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채찍을 휘두를 때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그 결이 조금 달랐다. 나름 희연이 따라 할 수는 있게끔 배려해 준 모습이었다.
사선으로 날아든 체인은 그 굵기가 얇다 해도 길이가 만만치 않은 만큼 웬만한 힘으로는 한 번에 그 전부를 휘두르기가 쉽지 않았으나 마리아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촤르릉, 촤르릉 체인이 곧게 뻗어 나가는 소리는 맑은 반면 밴시들은 비명 같은 울음을 내질렀다.
체인이 얇아서일까, 밴시의 몸에 칭칭 감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체인 끝자락에 달려 있던 총이 마지막에 밴시의 머리를 가격했으나 공격 직전 마리아가 마신 포션 탓인지 밴시는 비틀거리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마치 잡힌 물고기를 낚아채듯 체인을 잡아당겼다. 그 손길에 맥없이 땅으로 끌려 내려온 밴시는 부유하는 유령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의심되는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체인에 칭칭 감기고, 머리에는 혹이 나고. 땅에 반쯤 파묻혀 훌쩍이는 밴시는 하필이면 또 소녀의 모습이기까지 해서 몬스터라 할지라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희연은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약자 핍박의 광경을 보며 공감을 했다. 밴시 쪽에.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희연과 마리아의 관계가 이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희연이 밴시 쪽이었다.
적이라면 상대가 레벨도 없는 갓 생성한 뉴비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마리아는 이미 사지가 묶여있는 밴시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의심된다는 듯 지그시 발로 밟기까지 했다.
“이리 와 오리야. 나 참관자라 여기서 뭐 하나 죽이면 안 돼. 네가 마무리해.”
“네에….”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은 희연은 마리아 쪽으로 움직였다. 마리아는 발을 뗐고, 총은 희연에게 돌려주었다.
희연이 건네받은 총으로 밴시를 저격하려던 그때였다. 눈물만 방울방울 흘리던 밴시가 나름 반항을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까이 온 희연의 다리를 잘근잘근 문 것이다.
“아야….”
희연은 아프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아픈 소리를 냈다. 그리고.
쾅…!
“짜증 나게 하고 있어.”
“…….”
희연에게 건네준 총을 다시 뺏어가더니 밴시의 얼굴 바로 앞에 집어 던지는 마리아를 보고는 침묵했다.
자신이 실수로 사람을 때릴 때와는 소리부터가 다른 결과물에 희연은 할 말을 잃었다. 겁먹은 밴시는 희연을 놔준 것도 모자라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조금 머뭇거리다 땅에 박힌 총을 빼어 든 희연은 곧바로 스킬을 사용해 밴시를 처치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잡는 몬스터였지만 희연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
하마터면 밴시와 같은 꼴이 될 뻔했단 과거가 자꾸만 그녀의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건 마리아와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질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이 약자들에게 어떤 존재로 정의되는지 모른다는 것처럼 태평했다. 희연의 어깨에 팔을 두른 마리아는 아직까지도 하늘 위를 열심히 날아다니는 밴시를 가리켰다.
“자, 해봐 한 번. 숲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저격 실력이 단순히 운과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줄 거지 오리야?”
“…노력하겠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에 처치당하는 대상은 자신일까 싶어 희연은 서둘러 답했다. 하지만 막상 답하고 나니 더욱 막막해지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인벤토리에서 새로 꺼낸 무기 교환권을 찢는 마리아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희연은 일단은 앞으로 조금 걸어 나갔다. 뒤통수가 시선에 쪼이는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조금 어색하긴 하나 희연은 나름 배운 대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희연의 머릿속은 직접 볼 수 있다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여러 생각이 엉켜 있었다.
희연의 머리를 채운 주된 생각은 여기서 결국 실패하고 나면 마리아가 정말 공격할까 하는 걱정과 마리아가 자꾸만 걸고넘어지는 숲에서의 일이었다.
마리아가 그때 그 저격 건으로 하도 이야기를 하니 희연은 이젠 그때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 나무에 체인을 걸 때만 해도 정말 이게 될까 싶었던 희연은 총을 쏘려고 하는 순간 체인을 건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던 감각에 백발백중 패시브가 대단하긴 하구나 하며 조금 신나 하기까지 했다.
그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으면 내가….
“…….”
과거를 후회하던 희연은 문득 든 생각에 체인과 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차피 여기서 갑자기 낭만의 프라이쉬츠 급의 편술 패시브가 생기지 않는 이상 희연은 마리아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뭐라도 보여줘야 마리아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하던 희연은 마리아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굳게 다짐한 뒤 손을 꼼질거리기 시작했다.
“뭐하니?”
“그냥 조금….”
마리아의 시선을 외면하며 희연은 할 일을 마쳤다. 이전에 그랬듯 방아쇠에 체인이 제대로 감겼는지 확인을 끝낸 희연은 마리아의 눈치를 조금 살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악령이한테 도움받아도 되나요?”
“네 인형? 또 걔 보고 총 들고 있으라 하게? 왜, 사실 명사수는 네가 아니라 그 인형이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제가 힘 스텟이 부족해서 멀리 던지는 걸 못 해서요!”
“몇인데.”
“…102요.”
“장비 빼면?”
“…2.”
마리아는 참 잔인한 사람이었다. 기어이 희연이 가장 아쉬워하는 점을 콕 집어 답을 말하게 해놓고는 보는 사람 상처받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스텟이야?”
말도 했다.
절로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지만 희연은 어쨌든 마리아로부터 허락을 받아낸 셈 치고는 악령이에게 물어보았다.
“전에 돌 던질 때처럼 내가 던지는 총도 멀리 날아가게 해줄 수 있어?”
“응!”
잔인한 질문을 계속하던 마리아와 달리 악령이는 흔쾌히 답해주었다. 곧바로 희연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간 악령이는 언제든 시작하라는 듯 짧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자신은 준비됐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러다 떨어질 뻔했지만 넬의 도움으로 간신히 희연의 머리 위에 다시 안착했다. 악령이가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랐던 희연도 안도하며 총을 들어 올렸다.
그 꼴을 처음부터 구경하던 마리아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이쯤 되니 그냥 네가 뭘 하려는지 정말 궁금하다.”
희연은 속으로 두고 보라 으름장을 놓으며 자세를 잡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밴시 중 다수는 방패 전사 강자의 도발 스킬에 걸려 앞쪽을 맴도는 중이었다. 그 외는 기본 패시브가 어그로인 힐러를 노리느라 허공을 부유 중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존재만으로도 성스러운 마리아나 이세인 탓에 그들은 내려오지 못하고 주위만 서성이는 중이었다. 공격을 가한다 해도 다른 몬스터까지 몰려들 걱정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 상황은 희연이 무언가를 연습해 보기 무척이나 적절했다.
짧게 심호흡한 희연은 더 지체할 것도 없이 곧바로 총을 위로 집어 던졌다. 마리아가 그리도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던 방식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희연은 실패하면 이번에는 1:1로 숲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집중했다.
악령이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순간, 희연이 힘껏 던진 것에 비해 빠르게 추락의 과정을 밟던 총과 체인이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밴시 하나를 노린 방향이었다. 저 밑에서부터 저를 노리고 날아오는 정직한 공격을 밴시는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희연을 노려보며 두 손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마리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달려드는 밴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희연은 체인을 잡아채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될까, 정말 될까, 걱정하면서도 희연은 밴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추락하는 총이 이대로 운 좋게 밴시의 머리를 맞춘다거나 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희연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마할라틴 숲에서 악령이에게 총을 맡긴 채 마리아를 맞추고 말겠다 세뇌하듯 대뇌인 것처럼, 지금은 밴시를 맞추고 말겠다고 말이다.
던지지 않은 총을 꼭 쥐고 있던 왼손에서 힘이 풀렸다. 희연의 다리도 저절로 움직였다. 희연은 멋대로 움직이는 몸에 저항하지 않고 최대한 그 흐름을 따라가려 애썼다.
빈 왼손에 체인이 잡히고, 오른손이 그 위를 타고 올라 체인을 한 바퀴 둘렀다. 양손이 힘차게 움직였다. 힘없이 떨어지던 체인에 반동이 들어가더니 추락하던 총의 총구가 밴시 쪽으로 돌아갔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밴시에 머뭇거리던 악령이는 입을 벌렸고 넬은 허둥거리며 날아다녔다. 마리아는 저걸 냅둬야 하나 도와줘야 하나 고민하느라 발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희연은 끝까지 밴시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체인을 당겼다.
“<회개하세요>!”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체인이 그 끝,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탕! 멀리서 퍼져 나가는 총소리는 폭죽 소리를 닮아 있었다.
“…….”
희연은 이마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표정을 굳혔다. 바로 앞, 손의 주인인 밴시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의 앞을 부유했다.
반투명한 몸은 밴시의 머리에 박힌 총알을 가려주지 못했다. 희연은 숨을 몰아쉬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거 아직 안 죽었다, 오리야.”
“<이단을 향한 철퇴>!”
마리아의 말을 듣자마자 희연은 스킬을 사용하며 왼손으로 잡아챈 총을 밴시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쾅!
조금 전 마리아가 땅으로 내리칠 때와 비교하면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철퇴라는 스킬명에 어울리는 위력이었다. 밴시는 비틀거리다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됐다…!”
마리아가 보여준 것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