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성공했다는 기쁨에 흥분하던 희연은 머리를 콩콩 두들기는 다급한 악령이의 손길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향해 밑으로 뚝 떨어지고 있는 총이 보였다.
“어….”
저거 어떻게 잡지…?
반사적으로 손을 들긴 했으나 저 높이에서, 저 속도로 떨어지는 묵직하고 딱딱한 총을 잡을 자신이 희연에게는 당연히 없었다. 다급한 마음이 표출된 듯 손을 허우적거리던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그러나 떨어지는 총에 맞았다고 하기엔 희연은 너무 멀쩡했다. 통각 수치를 내렸다고 해서 모든 감각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희연도 이상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혹여나 떨어지는 총에 맞아 한 번에 별님을 보러 이동된 것은 아닌가 걱정하며 희연은 조심히 눈을 떴다. 다행히 그녀의 앞엔 꼬마별도 어둑한 풍경도 없었다.
“눈을 감아?”
“아….”
대신, 감히 위험을 앞두고 눈을 감은 희연의 모습에 삐딱해진 마리아가 있었다. 희연은 저를 보는 집요한 금색 눈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을 보게 되었다. 그 채찍 끝에 묶여 땅에 굴러다니는 자신의 무기 역시도 말이다.
희연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본 마리아는 혀를 쯧, 차고는 채찍을 돌돌 감아 갈무리했다. 그런 마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희연도 서둘러 제 무기를 수습했다.
“…….”
“…….”
묘한 침묵 속에서도 뺨이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져 희연은 혹시 마리아는 노려보기 스킬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희연은 애써 마리아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리아의 기세는 비단 눈빛만이 아닌 말로도 표현 가능한 감정이었다. 마리아는 희연을 말로 쪼았다.
“그리고 되긴 뭐가 돼. 내가 때려 맞추랬지 언제 쏴 맞추랬어.”
“마, 마지막엔 때렸어요!”
“하…!”
희연의 대꾸에 마리아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사실 희연도 외치면서 스스로도 양심 없는 발언이라 생각하긴 했다.
“너….”
“?”
마리아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말을 끊었다. 희연은 그제야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이채 도는 금색 눈의 소유자는 안색이 조금 어둑해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말 걸지 말아 봐. 생각 중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채찍을 쥔 마리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아 결코 좋은 쪽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 안 좋은 생각에 자신이 관련된 듯한 낌새를 감지한 희연은 지금이라도 이세인한테 달려가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세인이 그리 믿음직한 사람은 아니나 백희준의 얼굴을 봐서라도, 혹은 마리아가 싫어서라도 희연의 목숨을 잘 보전해 줄 것 같았다.
고민에서 그치는 게 아닌 실제로 희연이 발끝을 움찔거린 건 마리아가 손을 들었을 때였다. 희연의 오해와 달리 그녀는 인벤토리를 뒤지는 듯 허공에서 손을 휘적였다. 이어, 마리아는 웬 새까만 구름 조각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때 탄 메우메우의 털 뭉치 같은 아이템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못한 희연은 일단 발끝에 준 힘을 풀었다. 잠깐이지만 도망을 포기한 희연을 확인하자마자 마리아는 외쳤다.
“치즈! 광역기 날려!”
“…<성전의 정화>!”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한 희연과 달리 정작 그 명령을 받은 모짜렐라는 군말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밴시들의 사이사이로 그어지는 하얀 선을 바라보던 희연은 저를 붙잡는 마리아의 손길에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마리아는 희연을 한 번 노려보고는 들고 있던 것을 이세인 쪽으로 집어 던졌다. 모짜렐라를 보고 있느라 방심한 이세인은 마리아가 던진 정체불명의 아이템에 당해 검은 구름 속에 갇혔다.
이세인을 가볍게 해치운 마리아는 다시 희연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이 물었다.
“너, 무기 패시브 갖고 있지.”
“…….”
“던지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애가 버그나 다름없는 사격 솜씨를 보여주면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마리아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섣불리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희연은 침묵을 고수했다.
“네가 보여준 게 패시브면 그건 최소 등급이 동화 이상일 거고, 50도 안 된 애가 그런 패시브를 얻는 건 말도 안 되지. 정확히는 그런 패시브만 얻는 게.”
“…….”
마리아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최근에 길드 순위가 바뀌었었지. 그리고 에빌론에서 이벤트도 없는데 불꽃놀이가 터졌었고. 소란의 중심에 킹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인간이 심심해서 테러라도 했나 여겼는데….”
들켰다. 마리아의 말대로 발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희연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킹스메이커의 경고, 불꽃놀이가 터지자마자 몰려들었던 인파. 그리고 마리아는 메인 퀘스트의 선구자 자리를 노린다는 것까지.
“너구나. 새로운 오페라 칭호가.”
놀라 굳어버린 희연에게 마리아는 마치 선고라도 내리듯 말했다.
마리아는 지금까지 보여준 위협은 장난이었다는 듯 희연을 대했다. 희연은 통각 수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붙잡힌 목덜미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색만큼은 봄볕 같다 생각한 금색 눈은 하얗게 일렁이는 불이었다. 희연은 그 불 속에서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분으로 저를 붙잡은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일단 이건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천천히 손아귀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희연은 애써 침착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애초에 마리아가 희연에게 별님과의 만남을 한 번 더 성사시켜 주려 했다면 진즉 그랬을 것이다. 마리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희연의 HP는 멀쩡했다. 마리아가 힘 조절을 했다는 의미였다.
마리아는 아직까진 희연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희연은 잔뜩 긴장한 채 마리아와의 대화를 기다렸다.
희연에겐 꽤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리아는 말문을 열었다. 침묵하는 동안 생각 정리를 한 것인지 형형하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우리가 그렇게 짧은 시간 함께 있던 것도 아니고, 내가 널 가르치는 거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참 많이 보인 것 같은데….”
“…….”
“어쩜 먼저 말할 생각을 한번 안 한 건지. 어쩔 수 없이 배신감이 느껴지려 하네.”
어조 또한 장난스러웠다. 희연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마리아의 장단에 맞췄다.
“배신감 안 들잖아요….”
배신감이 아니라 괘씸함일 것이다. 또한 단순히 킹스메이커의 도움으로 선구자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든 경계심일 것이고 말이다.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아니? 정말로 배신감 든다니까? 부모님이 내 성격 좀 잡아보겠다고 한서하 앞으로 데리고 갔을 때 느꼈던 배신감과 같은 급이야.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지. 그런데 지금 갱신됐어. 어떻게 생각하니 오리야?”
어린 마리아가 어린 킹스메이커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을 희연이 알 리가 없었다. 희연은 그냥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 모습에 마리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희연에게 답을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신의 긴 머리채를 만지작거리던 마리아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너한테 물어봐서 뭘 하겠니. 뻔하지. 킹이 입단속 시켰거나, 아니면 네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정답이었다. 정확히는 둘 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입단속을 시켜 칭호를 얻은 초반에는 입조심을 했고 이후부터는 백발백중 스킬 완전 좋다 정도만 생각하고 끝냈다. 본인이 대단한 칭호 보유자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는 거다.
비록 말과 달리 마리아는 희연의 칭호를 눈치채자마자 그녀에게 한 번 더 별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희연은 손으로 목을 조금 문질렀다.
상당히 노골적인 행동이었지만 마리아는 못 본 체했다. 희연은 그 모습에 조금 약이 올랐지만 이어지는 말에 솟구치던 반항심을 다시 잠재웠다.
“이 파티 끝나고 나서, 나중에 나랑 많은 대화 좀 나누자?”
“…….”
희연은 그 대화라는 것을 할 때 킹스메이커도 꼭 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연이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한편, 마리아는 사무치는 배신감에 뒤로 미뤄뒀던 과제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녀가 요구했던 건에 대하여 희연이 어설프게나마 내놓은 결과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기준에서 희연은 낙제생이었다.
던지는 것도 혼자 못 하고 알고 보니 눈부신 사격 솜씨도 반쯤은 사기였다.
만약 희연이 뉴비세스 메이커 소속이 아닌 힐러들의 요람, 양떼목장 소속이었다면 마리아는 당장 힐러 때려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어디 가서 자신에게 배웠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희연은 양떼목장 소속이 아니었다. 남의 집 일이라는 건 생각보다 기준을 느슨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더불어 희연이 오페라 칭호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나중에 뭐가 됐던 한 번은 뜯어먹을 구석이 생길 게 분명했다. 지금 빚을 달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판단 끝에 마리아는 방긋 웃었다.
“그나마 칭호 패시브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우리 오리는 나한테 보여줄 만한 것도 없었을 거야. 그렇지?”
“…….”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좋아. 특별히 내 비전을 알려줄게. 단, 지금 아니고 조금 이따.”
“?”
굳이 다음을 기약하는 이유가 있나 싶어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뭉스러운 마리아의 계획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녀는 일단 지금의 상황이 나름 좋게 넘어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괘씸하고 위험한 경계 대상으로 낙인찍혀 정말로 게임 접을 때까지 마리아의 손에 의해 별님만 계속 만나게 될까 걱정했던 희연에겐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결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이 이상 마리아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기에 희연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뒤늦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다행히 주변은 제법 정리된 상태였다. 모짜렐라의 광역 공격 스킬에 대부분의 밴시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남은 밴시들 역시 파티원들이 수월하게 해치우는 것을 본 희연은 혹시 이래서 나중에 알려준다고 한 것인가 예상해 보았다.
얼마 없는 적을 상대로 써먹기엔 마리아는 자신의 비전이 아까운 거라고 여긴 걸지도 몰랐다.
“…?”
그러다 희연은 보았다. 찬찬히 주위를 살피던 희연의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방패 전사 강자와 흑염의 아이의 간당간당한 HP였다.
아무리 희연이 힐러의 역할을 놓고 있던 상황이라고 해도 이 파티에는 힐러만 셋이었다. 희연은 라쀠를 찾아 눈을 굴렸다. 그는 나무 둥치 쪽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라쀠의 빈손, 그의 허리춤에 매인 메이스를 보며 슬쩍 낯을 굳히던 희연은 그것도 잠시, 그 옆에 있는 구름 덩어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리아가 던진 이세인을 가둔 검은 구름은 조금 전보다 크기가 줄어 있었다.
“저거….”
“시간 끝났네.”
희연과 같은 것을 본 마리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 어조가 어찌나 단조롭던지, 희연은 순간 마리아가 한 짓이 굉장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세인의 입장에선 가만히 있다가 마리아에게 봉변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이다.
“아….”
순간적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 희연은 눈을 감았다. 그러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운 기척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지팡이와 채찍. 서로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 같은 두 무기가 맞대어진 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이세인이 의외로 힘 스텟이 높구나, 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순간적으로 스텟을 뛰어넘는 괴력을 발휘할 정도로 이세인이 화가 났구나 싶기도 했고 말이다.
언제나 생글생글, 백희준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표정을 잃는 일이 많지 않던 이세인은 현재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리아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힘겨루기하는 것을 지켜보던 희연은 눈을 깜박이다 발을 돌렸다. 괜히 고래 싸움에 등 터지지 말자 결심하고 자리를 옮기기로 한 거였다.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