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희연이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단순히 힘겨루기만 하는 게 아닌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휘말리면 죽을 수 있는 평화의 벽이 없어지자 고삐가 풀린 것 같았다.
뒤편에서 들리는 소란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그녀는 옹기종기 모여 있던 파티원들에게 합류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심각하게 하는 건지 희연이 접근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파티원들을 보며 희연은 일단 총을 들었다. 방패 전사 강자의 HP가 보기에 심히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커다란 방패 전사 강자를 맞추는 건 희연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치유의 빛>.”
비록 갑작스레 날아온 총알이 공격인 줄 알고 방패 전사 강자가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희연과 제 HP를 확인한 뒤에야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그는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희연은 그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일행과 합류했다.
“…?”
그리고, 가까이서 보게 된 일행 사이에선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짜렐라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번 몬스터와 부딪힐 때마다 훅훅 닳던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HP를 떠올린 희연은 이 분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구태여 이유를 묻거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거론해 봤자 모짜렐라만 분노할 뿐이었다. 하지만 희연이 입을 다문다고 해도 이곳엔 모짜렐라의 화를 돋우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이제야 발걸음 하다니. 매정한 구석이 있었군. 그대가 내 사그라지지 않는 빛을 볼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쉽겠소 레이디.”
“…아, 네에….”
빛이 사그라지는 기색이 없긴 했다. 모짜렐라가 따박따박 힐 스킬을 계속 사용했으니 말이다.
희연의 긍정은 모짜렐라에게 보내는 일종의 찬사였다. 하지만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그것을 제 것이라 여겼다.
“훗, 레이디의 축복을 받은 이상 기사로서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
쏠 뻔했다 진짜.
희연은 손끝에서 애써 힘을 풀었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아군, 파티의 둘밖에 없는 탱커에 이번 던전에서 유리한 성기사임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아 방아쇠 위를 맴도는 제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번은 실수로 맞춰도 되는 거 아닐까?
조금 고민이 되었다. 자꾸만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가 아무리 방어력 없는 탱커 같다고 해도 힐러한테 맞는다고 죽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연은 스스로의 충동에 넘어가지 말자, 나름 부동심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철퇴>!”
그러나 모짜렐라는 내면의 충동에 기꺼이 넘어갔다.
하얗게 빛나는 지팡이가 큰 소리를 내며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안면을 강타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늘쫑쫑과 방패 전사 강자는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아….”
힐러가 탱커를 때리는 진귀한 장면을 보며 희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희연의 기억에서 모짜렐라에게 저렇게 두들겨 맞은 대상은 졸렬한 나뭇잎이었다.
그때 당시 모짜렐라를 말렸던 것은 파티의 리더였던 케이아일. 그리고 지금 파티의 리더인 흑염의 아이는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를 저 구타 속에서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
희연은 벗어나는 것도 못 하고 그냥 전부 다 맞는 중인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를 보며 들어 올렸던 총을 다시 늘어트렸다. 그래도 탱커는 탱커라고 맞은 거에 비해서 피는 별로 안 닳았다. 조금 더 냅둬도 될 것 같았다.
희연은 마리아가 다음에 탱적힐, 힐적탱이 뭔지 아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자신이 생겼다. 확실히, 탱커랑 힐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고 싸움 나기도 참 쉬워 보였다.
울분이 느껴지는 모짜렐라의 모습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자, 이제 그만 합시다 하고 말하지 못했고, 이 와중에도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끝까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없느니만 못한 탱커의 방어력, 제대로 힐 스킬도 못하면서 딜 욕심이나 내는 힐러.
모짜렐라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가 각자에게 비난하는 것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물론 이 말을 하는 과정에서 새소리 같은 게 많이 섞였다. 모두 모짜렐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실 누가 보아도 모짜렐라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완벽한 힐러였다.
라쀠가 희연의 몫을 대신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기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도 있으나 마나라 방패 전사 강자에게 몬스터가 몰린 와중에도 그가 죽지 않았던 건 그나마 모짜렐라가 중간중간 전체 힐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인지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짜렐라를 말리지 않았다.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모짜렐라가 아니었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아닌 반짝반짝 작은 별이나 만나러 갔을 실력이면서 끝까지 힐러가 문제라고 비꼬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태도도 희연이 손 놓고 구경만 하게 만드는 것에 한몫했다.
희연은 그나마 자신은 안 걸고넘어지는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말에 따르면 희연이 보여준 모습이 딱, 그가 말한 대로 힐 신경 안 쓰고 딜 욕심이나 낸 거였기 때문이다.
사전에 합의 본 사안이라고 하나 모짜렐라도 문제라고 말하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에게 그 조건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 점을 걸고넘어지지 않는다는 건 역시 마리아가 무서워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묘하게 마리아를 볼 때마다 굳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파티에 둘이나 있었다. 누구 잘못인지 시시비비를 가려줄 경험과 연륜 있는 마리아와 이세인 말이다.
특히나 마리아를 무서워하는 듯한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마리아가 네가 문제였다고 말한다면 반항하지 않고 곧바로 순응할 것 같았다.
문제는 경험, 연륜 둘 다 있는 두 사람이 싸우느라 종적을 감추었다는 거였다.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싶더니 어디 멀리 싸우러 간 듯했다.
“음….”
희연도 이젠 파티 내 불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대충은 알았다. 말싸움에서 진 케이아일이란 결과물을 봤기 때문이었다.
모짜렐라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치열한 싸움은 그 결과에 따라 이번 파티가 끝날 때까지 누가 목소리 한 번 키우지 못하냐는 건이 걸려 있었다. 당연하게도 절대 서로에게 안 밀리려 했다.
가능하다면 모짜렐라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희연으로선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확실한 귀책 사유를 찾아야 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그런 거로 말이다.
희연은 눈을 굴리다 곤란하다는 얼굴로 서 있던 방패 전사 강자에게 질문했다.
“저분은 전에도 저러셨나요?”
“아… 사실, 저도 같이 파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고정팟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만난 사람이라….”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가 헛소리만 할 줄 알고 실속은 없다는 걸 그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그를 탓할 일은 아니었지만 희연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은 했다.
사실 모짜렐라에게 맞아서 피가 저만큼 깎였다는 것만으로도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문제점은 증명된 거나 다름없긴 했다.
하지만 남의 HP 상태는 직업이 힐러인 유저에게만 보이므로 여기서 희연이 그의 HP를 걸고넘어진다 한들 같은 힐러라 편드냐는 소리만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희연은 이래서 케이아일이 졸렬한 나뭇잎을 때리던 모짜렐라를 열심히 말렸던 건가 싶었다. 본격적으로 싸우니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섣불리 말을 얹지도 못했다.
그녀는 특히나 더 그런 입장이었는데, 그 뜻을 아직 잘 모르나 두 사람이 파트너 힐러 사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어쩌다 만난 파티원, 파트너 힐러. 둘 중 어느 사이가 더 친밀한지는 뜻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희연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세인이 말해 주었던 백희준의 가장 중립적으로 남 탓하기 방법으로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잘못을 증명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고민 끝에 희연은 평소 백희준의 언행을 떠올렸다. 남 탓은 아니었지만 백희준은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말하는 게 그랬다.
백희준은… 반박하기 어려운 점을 걸고넘어졌다. 항상.
그리고 대부분 증거와 객관적인 사실을 함께 제시했다. 자기 교과서에 그려진 낙서와 희연의 크레파스 색이 같다, 이 집에서 교과서에다가 낙서할 사람도, 꽃을 그릴 때 꽃에다가 눈이랑 입도 그려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말귀를 알아듣던 나이부터 당해봤던 입장에서 희연은 그걸 잘 따라 할 자신이 있었고,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장비 정보 좀 볼 수 있을까요?”
툭 튀어나온 희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희연은 그 시선들에 조금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제 말을 조금 더 길게 설명했다.
“지금 문제가 로얄… 님이….”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레이디.”
“아, 네. 어쨌든 지금 문제가 탱커가 탱커 같지도 않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서 힐러인 치즈가 힘들었다 이거잖아요. 그러면 문제가 되는 방어력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되지 않나 해서….”
말끝을 흐리는 희연을 보며 모짜렐라는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실 희연은 말하면서도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어 조금 걱정했다.
킹스메이커가 레벨, 장비, 스킬, 스텟 정보 같은 건 가족이라도 섣불리 알려주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듣기에 따라 그녀의 말은 상당히 무례한 발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연이 몰랐던 것은 그 무례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 바로 여러 타인과 함께하는 파티라는 점이었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은 그 무례한 짓을 해도 본인은 당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다소 편파적인 지식을 가르친 거였다.
그런 희연과 달리 마리아에게서 파티 중 다소 아니꼬운 일이 발생할 시 힐러의 위엄을 보이라는 의미의 다소 강압적인 가르침을 받은 모짜렐라는 곧바로 그 무례한 짓을 시작했다.
“야. 너 당장 장비 까.”
“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장 안 까면 내가 널 PK 시켜서라도 당장 이 파티에서 내보낼 거니까. 왜, 내가 못 할 것 같냐?”
모짜렐라의 으름장에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표정을 구기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희연을 제외하고 모두가 로얄 임페리얼 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희연도 일단 따라했다. 그러자 희연의 눈앞에 낯선 문구가 담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파티원 <로열 임페리얼 나이츠>의 장비 정보를 확인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되는 거구나….
장비 정보를 봐도 아이템을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는 식일 줄 알았던 희연은 의외로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신기했다.
확인을 누르니 희연의 앞에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장비가 정리된 창이 나타났다. 왼편에는 장비가, 오른쪽에는 모든 장비를 합한 전체 능력치가 쓰여 있었다.
장비 쪽에 손을 가져다 대면 해당 장비 하나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구조였다.
“…….”
희연은 봐도 잘 모르겠어서 그냥 손만 꼼질거렸다. 보는 건 좋았는데 지금껏 열람한 장비가 제 것밖에 없는 희연은 이 정보가 탱커로서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사라진 둘보다는 아닐지언정 희연보다 경험 있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와 같은 탱커이기까지 했다.
방패 전사 강자는 장비 정보를 열람하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어이구 이건 뭐….”
결코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마늘쫑쫑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면 고의성 트롤 수준인데….”
“트롤…?”
희연은 마늘쫑쫑의 말에 장비가 남의 게임을 방해하는 쓰레기가 되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 조금 놀랐다. 새삼스레 자신의 장비를 만들어준 킹스메이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던 희연은 결론이 난 상황에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해서 다시 주위 상황에 집중했다.
장비 정보를 꼼꼼하게 본 모짜렐라는 코웃음 치고 있었고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는 입꼬리 끝이 조금 굳어 있긴 했으나 첫 만남부터 고수하던 태도를 아직까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목덜미를 덮는 조금 긴듯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 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물이지. 모두 이해해 주리라 믿고 싶은데.”
요정 닉의 효과로 안목이 높아진 희연에게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커스터마이징은 솔직히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 안타까운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희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그의 말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그딴 이유로 트롤짓을 하냐는 무언의 뜻이 담긴 눈빛들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