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모짜렐라 또한 이젠 화조차 안 나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를 바라보았다. 희연은 모짜렐라가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손수 별님에게 보내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짜렐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가라앉은 기색으로 담담히 서 있었다. 모짜렐라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열반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다음 진행 가죠.”
심지어 그는 그렇게 열 낸 것이 무색하게도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주장했다.
모짜렐라의 성질머리를 아는 희연은 깜짝 놀랐고 문제의 원인,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 또한 그가 이렇게 넘어갈 줄은 몰랐는지 내내 유지하던 잘난 척하는 표정도 잊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연이 모짜렐라가 무슨 속셈인가 싶어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때였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파티의 리더 흑염의 아이가 제 해골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야!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마늘쫑쫑의 말에 흑염의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손만 까딱 움직였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말을 탄 해골 병사 하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끝이 모두 헤진 낡은 양피지 지도였다.
“지도?”
“이게 벌써 나왔어요?”
의아해하는 희연과 모짜렐라와 달리 방패 전사 강자는 그게 뭔지 아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감탄하던 것도 잠시 이번 던전이 초행길인 사람들을 위해 지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여기 던전이 필드가 워낙 넓어서 다음 스테이지로 쉽게 넘어가려면 지도가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이걸 얻으려면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데 나올 확률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통들 포기하고 막 돌아다니죠.”
“그럼 이건….”
“아무래도 조금 전에 밴시를 잡다 나온 모양이네요. 아이고 우리 네크로맨서님이 큰일 해주셨어! 오오오오! 오오오! 오오오…!”
자기소개 시간 때만 해도 부끄러워했던 행동을 방패 전사 강자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다시 했다. 만족하기는 흑염의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몸의 위대함에 감복했는가, 어둠의 종복들이여…!”
멋대로 일행을 어둠의 종복으로 만들어버린 흑염의 아이는 조금 더 자신을 찬양하라 주장했다. 방패 전사 강자와 마늘쫑쫑은 그 장단에 맞춰주었고 희연은 고민하다 손뼉만 몇 번 쳤다.
“…….”
희연은 흑염의 아이를 보며 밴시를 끌고 왔던 것도 지도를 얻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던 건가 하는 의심을 했다.
마리아가 진짜배기라고 인증까지 해주었지만 희연이 보기에 흑염의 아이는 여전히 실력 외에는… 그랬다.
물론 실력도 없으면서 직업에 심취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보다는 낫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도.
“라쀠 님 왜 혼자 거기 계셔요! 어서 와요 이리로, 이리로!”
방패 전사 강자의 부름에 쭈뼛쭈뼛 일행 쪽으로 걸어오는 라쀠를 보며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을 떠올렸다. 여차하면 엎어라.
하지만 아직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만큼 파티가 개판인 것은 아니었다. 땃쥐 미 때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일단 배신과 음모는 없었다.
현 파티에서 남의 게임 방해하는 트롤이 누구인지 밝혀졌으니 그 일로 더 말 나오지는 않을 거다. 마리아가 이세인이랑 싸우는 동안은 희연도 힐러로서의 주 업무를 수행할 것이니 라쀠의 문제도 대충 못 본 척할 수는 있었다.
뒷맛이 영 찝찝했지만 희연은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 결론을 내렸다.
“자자, 그러면 이제 그만 다음 장소로 이동해 볼까요? 아유 지도가 있으니 참 편하네요!”
쾌활한 방패 전사 강자의 말에 일행은 어슬렁어슬렁 발을 떼기 시작했다. 직전의 일 때문인지 그리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어둠의 속삭임에 전율이 흐른다…!”
여전한 사람도 물론 있긴 했다.
“?”
일행의 뒤를 쫓던 희연은 저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모짜렐라가 조용히 하란 수신호를 보내며 희연을 뒤쪽으로 끌어냈다.
“왜?”
“마리아는?”
“싸우러….”
모짜렐라는 예상했는지 혀만 끌끌 찼다.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혹여나 두 사람이 못 쫓아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건가 싶어 희연은 제 의견을 내놓았다.
“싸움 끝나면 알아서 오지 않을까?”
희연은 마리아와 이세인을 믿었다. 고인물의 경험, 지식, 감 아무튼 그런 것들! 두 사람은 알아서 잘 쫓아올 것이다.
“그러겠지.”
모짜렐라도 희연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듯 불편한 기색이 느껴지는 얼굴로 앞쪽을 힐끗거렸다.
불편한 분위기가 싫어 발걸음을 재촉한 방패 전사 강자에 반해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은 일행과 제법 거리를 둔 상황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모짜렐라와 단둘이 일행으로부터 멀어진 적이 있던 희연은 자연스레 옛일을 떠올렸다.
이러다 케이아일이 죽었었지….
즐거운 추억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번 던전 역시 즐거운 추억으로 마무리되지 않음을 예상한 모짜렐라는 그 원흉 중 하나인 라쀠에 대한 이야기를 희연에게 꺼냈다.
“저 사람, 네가 마리아한테 끌려가고 난 뒤에도 스킬 한 번 안 썼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만 잡기에 라쀠 건은 모르나 싶었던 희연은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싶어 담담히 그의 이야기에 동조했다.
“나도 알아.”
모짜렐라가 라쀠를 탐탁지 않게 여기리란 것도, 희연은 예상했다. 사실 희연도 라쀠가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놓고 얹혀 가려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뻔뻔하지만 않을 뿐 하는 행동은 실상 얹혀 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긴 했다.
힐러가 셋이나 되니 힐러 외 직업군인 일행들은 아직 라쀠의 행동이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이걸 파티장한테 건의할 수도 없고.”
“그렇지….”
흑염의 아이에게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해 봤자 그녀는 훗, 역시 신의 종들은 배반을 일삼는군! 어둠에게 굴복하라! 같은 소리만 할 것 같았다.
희연과 모짜렐라가 라쀠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들은 일행과 더욱 멀어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방패 전사 강자가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들었기에 두 사람은 일단 라쀠에 대한 건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현재 가장 좋은 해결법은 그냥 이 파티로 빨리 던전을 클리어한 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를 시전하는 거였다. 무작정 나가자니 아직 그렇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더불어 여기보다 나은 파티를 찾을 자신도 없었고 말이다. 두 사람은 일단 일행에 다시 합류했다.
방패 전사 강자가 걷던 것을 멈춘 건 단순히 두 힐러가 멀어진 것을 알아서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지도를 들고 서 있었다.
희연은 여기서 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건가 싶어 서둘러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그게….”
그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지도를 희연에게 내밀었다.
“사실 이 던전 진행 방식이 NPC들을 만나서 서브 퀘스트를 해결해 줘야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방식이거든요. NPC 위치는 랜덤이고요.”
희연은 지도를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이제 보니 약식으로 그려진 지도에 이질적인 빗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그들이 만나야 하는 NPC가 있는 위치인 듯했다.
방패 전사 강자는 표식이 있는 곳과 상당히 동떨어진 곳을 짚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가 우리 위치죠.”
“머네요…?”
“예에… 이것 참. 웬만하면 이렇게까지 나쁘게 배정 안 되는데 운이 나빴죠… 하하….”
애써 웃긴 했으나 방패 전사 강자의 안색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긍정적인 구석이라곤 티끌 하나 없었다.
밴시 무리를 무찌른 후 느낀 들뜬 기분은 가시진 오래고, 그도 슬슬 이 파티가 조별과제 절망편을 향해 내달리고 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요정의 무덤에서 만난 사람치고 방패 전사 강자는 크게 모나지 않은 성격에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같이 전방에 서는 탱커가 트롤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그는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파티의 가능성을 점치는 희망찬 성격도 아니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파티 분위기를 타계하기 위해서든, 파티가 터지기 전에 클리어하든 진행은 서둘러야 했다.
“아무래도 걸어서 가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다들 탈것 있으신지….”
서두르려 하는 방패 전사 강자의 마음을 이해하며 희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 역시 비슷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라쀠만이 우물쭈물한 반응이었지만 만난 이래로 계속 그랬기에 아무도 그 점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나마 희소식에 화색이 돋는 얼굴로 방패 전사 강자는 제일 먼저 제 탈것을 끄집어냈다. 그의 것은 참 특이하게도 날개 달린 커다란 방패였다.
흑염의 아이는 멀뚱멀뚱 서 있다 마늘쫑쫑의 재촉에 못 이겨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로운 탈것, 혹은 펫을 꺼내는 게 아닌 소환한 해골 병사를 밀어내 말을 갈취했다. 마늘쫑쫑의 것까지 함께.
말을 뺏겨 훌쩍이던 해골은 다른 해골 병사들과 합류했다.
그 과정을 바라보던 희연은 이어 옆에서 터져나가듯 강렬한 빛과 함께 소환된 펫에 시선을 빼앗겼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펫이었다.
“…유니콘?”
금색 투구를 쓴 하얀 말의 이마에 돋아난 뿔을 보고 놀랐던 희연은 그것도 잠시, 그 뿔이 그저 투구의 장식인 것을 알아보았다.
희연이 순간이나마 속은 것이 기분 좋은 사유가 된 것인지 조금 기세가 꺾였던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려고 했다.
그 모습을 조금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희연은 에흐테를 소환했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빛을 퍼트리며 등장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말과 달리 에흐테는 유니콘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우아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유순한 금색 눈으로 희연을 바라본 에흐테는 이어 고개를 들더니 어설픈 뿔을 장식으로 단 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얀 말은 그 시선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
그 일련의 모습을 모두 지켜본 희연은 에흐테의 구름 같은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애먼 말과 기 싸움 하지 마라 얼러야 했다. 에흐테는 제게로만 향하는 애정을 제법 만족해했다.
에흐테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 희연은 이제, 이중 유일하게 탈것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라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쀠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방패 전사 강자에게 무어라 속닥거리고 있었다.
“아, 정말요?”
방패 전사 강자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그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파티원 하나하나를 바라본 끝에 희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공비행만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방패를 타고 희연 쪽으로 온 방패 전사 강자는 조심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고 이것 참… 라쀠 님이 탈것이 없다 하네요.”
“아….”
그래서 지체되고 있던 거구나 싶어 희연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의 볼일은 단순히 상황을 전달해주는 것까지가 아니었다.
“그… 일단 저는 1인 태우기가 조금 그렇거든요. 혹시 우리 오리 님이 어떻게 좀 해주시면 안 될까 하는데….”
라쀠를 태우는 것 자체는 문제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묘하게 찝찝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희연은 곧바로 그러마,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그럴싸한 명분조차 없어 이걸 어떻게 하나 희연은 고민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치즈?”
“앞에 봐.”
희연에게 그리 자랑하던 크림을 소환도 안 한 모짜렐라가 당당하게 에흐테의 위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얘는 저랑 타야 해서 안 되는데요. 우리가 게임 초반부터 파트너 힐러 사이라, 탈것도 공유하고 그래서요.”
파트너 힐러도 아니고 탈것 공유도 생전 해본 적 없으면서 모짜렐라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희연은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걸 깜박했네요. 파트너 힐러 사이였지 참,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그러면 라쀠 님은 어디 보자….”
흑염의 아이 쪽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듯 희연이라는 기회를 놓친 방패 전사 강자는 새로운 상대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골랐다.
라쀠를 데리고 자리를 뜨는 방패 전사 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희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희연을 본 모짜렐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모르니까 붙어 있는 게 나을 거 아니야. 언제 뒤통수 맞을 줄 알고.”
모짜렐라는 라쀠를 땃쥐 미 급의 배신자로 낙인찍은 듯했다.
“지금 내게, 지금 내 등 뒤에 이 자를 태우라고? 내 글라디우스에게 감히 나를 제외한 사람을 태우라고 명령하다니!”
그런 것치고 라쀠가 받는 취급은 땃쥐 미와 달리 조금 안쓰러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저 트롤 삐약, 진짜….”
확실한 건 모짜렐라는 라쀠보다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싫어했다. 결국 억지로 1인 탑승 탈것, 방패 전사 강자의 방패 위로 올라서는 라쀠를 보며 희연은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
그나저나 안 빛나네?
라쀠에게 관심을 기울이던 것도 잠시, 희연은 에흐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체발광으로 빛날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에흐테에게선 변화가 없었다.
빛나기엔 이 장소가 그리 어둡지 않은 건가 싶던 희연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가령, 에흐테가 빛나는 조건이 단순 주변의 밝기 같은 게 아닌 다른 요소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에흐테의 뿔이 독에 특효약임을 알던 킹스메이커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나가면 꼭 물어봐야겠다 다짐하며 희연은 이동하는 것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