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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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있고 위치를 안다 해도 드넓은 땅에서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록달록 자연의 색을 흠뻑 입은 곳에서라면 모를까 모든 것이 황폐하게 물든 곳에선 무언가를 구분해내는 것이 어려웠다.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게 있어 가까이 가보면 찢어진 낡은 무명천이거나 작은 나무거나 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지도는 NPC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줄지언정 정확한 장소를 짚어주지는 않았다. 지도가 의미 없어진 이후에는 방패 전사 강자 역시 그것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이쯤에 있을 텐데….”
“위로 올라가서 찾아볼까요?”
“그래 주시면야 고맙죠!”
땅에서 찾는 것보다 하늘 위로 올라가서 찾는 게 더 효율이 좋았다. 희연은 밴시처럼 날아다니는 몬스터가 없나 확인한 뒤 에흐테를 이끌어 하늘 위로 올라갔다.
“뭐 좀 보여?”
“아니. 애초에 이 근처라고 해도 너무 넓어.”
이동하는 내내 NPC를 찾는 게 아닌 뒤늦게나마 던전의 공략법을 검색해 훑던 모짜렐라도 지금은 희연과 함께 주위를 살폈다.
한참을 모짜렐라와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희연은 조금 더 멀리까지 살펴봐야 하나 고민했다.
괜히 멀리 갔다가 일행을 잃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이기는 했으나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워낙 눈에 띄어 다시 찾아올 자신은 있었다.
“응?”
그러던 중 희연은 무언가가 빠르게 자신의 앞을 지나쳐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새까맣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희연은 일행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흑염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늘쫑쫑이 머리를 싸맸고 방패 전사 강자가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희연을 올려다보았다.
“…에흐테!”
영리한 유니콘은 희연의 부름만으로도 그 뜻을 눈치챘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린 흑염의 아이를 쫓아 에흐테도 속력을 높였다.
“꽉 잡아!”
악령이와 넬, 모짜렐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을 한 희연은 홀스터에 꽂아 둔 총을 힐끗거리면 조금 고민했다.
만약, 흑염의 아이의 뒤를 쫓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저 밑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NPC를 보지 못했더라면 희연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총을 들었을 것이다.
물론 공격이 아니라 흑염의 아이를 붙잡는 용도로만 말이다.
어찌 됐건, 찾았다. 그것도 흑염의 아이 덕에.
“…여기 있는 거 알고 온 건가?”
흑염의 아이가 다소 제멋대로 구는 행동들이 모두 생각 없이 한 게 아닌 건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희연을 괴롭혔다.
“우연 아니야?”
모짜렐라 역시 아직까지 흑염의 아이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NPC가 목적이었다는 듯 더 이상 멀리 가지 않고 그 위를 맴돌기만 하는 흑염의 아이를 보며 희연은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움직이자.”
“으응….”
모짜렐라의 재촉에 희연은 말끝을 흐리며 답했지만 곧바로 움직이진 않았다.
당장 밑으로 내려가 아무것도 모를 NPC에게 나를 숭배하라! 하고 외쳐도 이상할 게 없는 흑염의 아이가 얌전하게 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정말 컨셉만 이상하게 잡은 진짜배기라면 그 행동을 따라 하는 게 맞았다. 희연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모짜렐라도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는 두 번 말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얼결에 하늘 위에서 NPC의 동태만 살피게 된 희연은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싶어 흑염의 아이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태평하게 해골 말 위에 늘어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했다.
때마침 희연을 이정표 삼아 달려온 다른 일행들이 NPC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결국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NPC에게 접근해 보려 했을 것이다.
“…….”
하늘에서 상황을 모두 볼 수 있던 희연은 똑똑히 보았다. 마늘쫑쫑과 방패 전사 강자가 NPC의 바로 앞에서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을 말이다.
홀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가장 먼저 NPC에게 말을 걸었다. 짧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름 모를 NPC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지탱해 주던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튼튼하고 제법 두꺼운 가지였다.
“어….”
희연은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NPC가 갑자기 나뭇가지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때린 것이다. 마치 모짜렐라가 지팡이로 그의 안면을 강타할 때처럼 말이다.
이름 모를 NPC는 계속 때렸다. 정말로 계속.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당혹스러운 것과 별개로 조금 통쾌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웬일로 얌전히 있던 흑염의 아이가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 희연도 그 뒤를 따랐다.
가까이에서 본 NPC는 키가 작고 마른 노인이었다. 희게 센 머리는 푸석푸석했고 몸에 걸친 옷은 옷이라기보단 해진 천이었다. 고집스러운 눈과 불만 가득해 보이는 입을 가진 그는 마치 한 명만 노린다는 것처럼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아무리 장비가 트롤 같다고 해도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탱커였다. 체구 작은 노인의 매질에 타격을 입지는 않았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혹시 먼저 말 거는 사람만 때리나…?”
그리도 고대하던 NPC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염의 아이와 마늘쫑쫑, 방패 전사 강자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결과가 이것이니 희연의 의심은 어찌 보면 합당했다. 모짜렐라 역시 희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처음 파티의 비고를 보았을 때 특이 사항으로 해당 파티에 완숙이 셋, 반숙이 하나라는 말이 기재되어 있었다.
반숙 하나가 누구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누가 완숙 셋에 포함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앞으로 완숙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몸을 빼면 같이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그들 쪽으로 이동했다.
“저거 그냥 피해도 되는데….”
때마침 작게 중얼거리는 마늘쫑쫑의 말을 들은 희연은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어지간히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럴 만했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중간부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도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는 등 나름 머리를 썼다. 힘든 것은 노인뿐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한참을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에게 의미 없는 공격을 강행하던 노인이 멈춘 것은 제 풀에 지쳐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였다.
다짜고짜 공격한 사람치고 노인은 저가 더 억울한 것처럼 흰 눈을 떴다.
“이 몹쓸 것! 또다시 나를 죽이러 온 거냐 이 괘씸한 것!”
노인의 말은 갑작스러웠지만, 희연은 이게 퀘스트 내용이구나 싶어 놀라지 않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성마른 성정을 가진 듯한 노인은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제 억울함을 줄줄이 토해냈다.
“내가 네 물음에 얼마나 친절하게 답해줬냐! 어리고 뭣 모르는 것이 제 죽을 자리인 것도 모르고 누이와 형제를 구해야 한다며 배회하기에 기껏 친절을 발휘했더니 나를 죽여! 나를, 나를…!”
누이와 형제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배회한 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더불어 검은 베일 여인의 막내아들, 차일드 롤랜드가 노인을 죽였다. 그것이 노인이 주장하는 바였다.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인이 억울함에 이곳을 맴도는 악령일 경우 이쯤 되면 떠야 하는 업적 효과 알림이 잠잠했다.
악령도 아니고, 유령 NPC라고 하기엔 그의 몸은 선명했다. 희연이 보기에 노인은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차일드 롤랜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점에 충격을 먹어 정말로 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부풀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희연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화를 내던 노인은 분을 못 참고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방패를 내리쳤다.
다시 시작된 무차별적인 화풀이에 방패 전사 강자와 마늘쫑쫑이 서둘러 외쳤다.
“훌륭한 기사는 노인 공경!”
“공격하시면 안 돼요!”
두 사람의 말에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묵묵히 고행을 감당했다. 후자의 말보다는 전자의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이미 파티 내에서는 훌륭한 기사로 평가받기 그른 것 같은데도 그는 자신의 컨셉을 고집했다.
대상이 잘못된 노인의 분노는 마리아와 이세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이 넓은 부지에서 그들을 찾아냈다는 점이 놀랄 법도 하지만 희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마할라틴 숲에서 이미 마리아의 대단한 추적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치 못한 두 사람의 모습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킬 못 쓰는 페널티를 안고 던전에 입장한 사람들치고 제법 험하게 싸웠는지 두 사람 다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희연은 언제 또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아주 약간의 걱정과 더불어 신기해하는 마음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러니 오리야.”
“아…. 걱정했어요.”
“그래, 그것참 그래 보이네.”
손끝을 까닥이는 마리아가 보복을 가하기라도 할까 싶어 희연은 냉큼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에서 희연은 살기라는 게 무엇인지 느꼈다.
“저, 저희 지금 NPC 찾아서 얘기 중이었어요!”
대화 주제를 바꾸려는 희연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마리아는 순순히 관심을 돌려주었다. 노인에게 툭툭 맞고 있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본 그녀는 성큼성큼 움직이더니 노인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아 들었다.
우득…!
제법 두께가 있던 나뭇가지를 반으로 쪼개버린 마리아는 자신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는 초보자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하면 악당 같았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러나 파티의 일행들은 마리아의 인성에 놀랄 틈이 없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자마자 노인이 마치 저주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머리를 짚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가 노인의 공격성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눈에 띄게 수그러진 모습으로 낯선 이들을 훑어보았다. 희연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건가 싶어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완숙 셋이라 하지 않았나? 어떻게 아는 인간 하나 없어 여태껏 이 구간을 못 넘기고 그냥 맞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하하… 이런 방법은 처음 봐서….”
멋쩍어하는 방패 전사 강자의 말에 마리아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인이 몸을 지탱하고 있는 지팡이를 뺏어 부러트린다는 발상이 쉬운 게 아니라는 말을 해 봤자 먹힐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찌 됐건 노인과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헛기침을 흘려 제게로 시선을 집중시킨 방패 전사 강자가 노인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혹시 차일드 롤랜드에 대해서 말씀 좀 여쭐 수 있을까요?”
“차일드 롤랜드…?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네….”
노인은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답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던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화를 내지 않을까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희연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성기사는 노인 공경이란 말의 여파 때문인지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제법 기사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장비도 기사답게 바꿔주면 좋으련만. 희연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노인에게 다시 집중했다.
노인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지 방패 전사 강자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화는 잠시 끊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던 노인은 갑자기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시끄럽군,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아이고 어르신 왜 그러시나요.”
“왜 그러냐고? 사방에서 들리는 이 말굽 소리, 자네들은 들리지 않는 건가? 내 머릿속에서 망아지가 뛰어다니는 것만 같네!”
말굽 소리?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말굽 소리가 날 만한 것이 없었다. 아주 멀리 무언가 기어가는 게 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질척한 액체를 닮은 이름 모를 언데드 몬스터는 말굽 소리와는 연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떨쳐내려 애썼다. 주위를 둘러본 노인은 자신 외엔 아무도 말굽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자 절망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군, 그런 거였어…! 이건 벌이야! 나는 벌을 받는 거야!”
노인이 외치자 그들 주위로 검은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당장 무언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각자의 무기 위로 손을 올렸다.
“모두 준비하세요! 이제 사방에서 몬스터가 나올 겁니다! 여기서부턴 탱커가 지키고 이런 거 못 한다고 봐야 하니까 다들 최대한 알아서 공격 피하세요!”
방패 전사 강자의 경고와 함께 노인 역시 외쳤다.
“그래, 맞아! 기억났네! 나는 요정 나라 왕의 말을 돌보는 자였다네. 그런데 그만, 책무를 다하지 못했던 거야! 죽었으니까! 이 소리는 내가 돌보지 못한 말들이 내는 소리였어!”
따각, 따각, 따각.
이제는 희연도 들을 수 있었다. 말굽 소리를.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의 소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