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어찌 됐건, 모짜렐라는 데스 나이트에게 생긴 빈틈을 라쀠의 안전을 챙겨주는 기회로 써먹었다.
천사의 철퇴에 비틀거리던 데스 나이트가 회복하여 몸을 추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데스 나이트는 다시 검을 힘껏 들어 올려 모짜렐라의 머리를 노렸다.
“<깃털 걸음>!”
라쀠를 먼저 챙길 때부터 믿는 구석이 있겠거니 했던 희연의 믿음대로 모짜렐라는 그녀가 처음 보는 스킬을 사용해 위협을 피했다.
하얀 깃털을 흩뿌리며 근처로 이동한 모짜렐라는 비록 착지는 제대로 하지 못해 땅을 구르기는 했으나 넘어지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냈다.
“<촛불의 숨결>, <천사의 날개깃>, <검의 노래>!”
모짜렐라는 정말, 숨 쉴 틈은 있었나 싶은 속도로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는 사이 찌그러진 투구를 쓴 데스 나이트는 검을 회수하며 모짜렐라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미 그를 타깃으로 잡은 듯한 집요함이었다. 줄줄이 떠오르는 설명을 뒤로 넘기며 희연은 총을 들어 제 머리를 겨냥했다.
“<치유의 빛>!”
힐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어그로였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모짜렐라만 눈에 담고 달려들던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들어 희연을 보았다. 찌그러진 투구 속 불덩어리 같은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긴 했으나 위치상 겨냥이 쉽지 않았다.
찌그러진 머리의 데스 나이트가 코앞에 있는 힐러와 자신을 자극하는 힐러 중 누굴 보아야 하는 고민하느라 자꾸 시선을 돌리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에흐테를 이끌어 위치를 바꾼다면 데스 나이트는 금세 희연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모짜렐라에게 달려들 것이 뻔했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모짜렐라에게 말이다.
지금 잡아야 했다. 설령 다시 모짜렐라만 바라본다 한들 희연은 그 눈을 겨냥할 자신이 있었다.
방아쇠에 감아 둔 사슬을 아직 풀지 않았다.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희연은 곧바로 에흐테 위에서 뛰어내렸다. 에흐테를 타고 있는 상태론 사슬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아 선택한 결과였다.
밑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희연의 팔다리는 머뭇거림 한번 없이 움직였다. 민첩 스텟을 올린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움직임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슬을 따라 그 끝에 매달린 총도 움직였다. 총이 빙그르르 돌아가다 당겨진 사슬에 의해 위치가 고정됐다. 노리는 건 투구 속 눈.
이제는 희연에게서 등진 적의 눈이었다.
“<회개하세요>!”
“<안식의 손길>!”
희연의 스킬은 데스 나이트를 무너트렸고, 모짜렐라의 스킬은 밑으로 추락하는 희연을 보호했다. 커다란 깃털이 땅에 떨어질 희연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켰다.
두 사람을 파트너 힐러 사이로 오해한 방패 전사 강자가 보았더라면 역시 기대한 대로 호흡이 척척 잘 맞는다며 좋아했을 모습이었다.
“야!”
물론 그것과 별개로 연약한 힐러의 방어력 따윈 모른다는 듯 구는 희연의 모습에 모짜렐라는 큰 소리를 냈다.
네가 탱컨 줄 아냐 소리치는 모짜렐라를 뒤로하고 희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확인했다.
에흐테를 타고 하늘을 나는 동안 그녀가 언뜻 본 정황은 밀리는 듯하던 흑염의 아이가 하나둘 소환한 언데드로 조금씩 제 영역을 늘리는 거였다.
마늘쫑쫑과 방패 전사 강자는 머리 위에 이고 다니는 치료의 등불 덕에 상태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고,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그냥 그랬다.
그리고 현재, 드디어 모짜렐라의 버프 스킬이 걸리자 근접전에 유리한 직업인 마늘쫑쫑은 데스 나이트들의 투구를 찌그러트리며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밴시들과 달리 말과 데스 나이트들은 땅에 있기에 가벼운 몸놀림을 가진 그녀에게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흑염의 아이가 소환한 언데드들이 해골 벽을 더 단단하게 채우고 몇몇은 합쳐지며 제대로 된 무기로 공격을 시작했기에 희연은 제법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야.”
“아….”
그리고 여유가 생긴 건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없는 상황이었다면 조금 전에 있었던 무모한 시도를 그가 잊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며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같이 땅을 구르며 넘어져 있던 게 바로 전인데 모짜렐라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르륵 눈을 굴린 희연은 침착하게 변명거리를 생각해 보았다.
“나, 나… 나 너보다 튼튼해! 저 높이에서 떨어져도 안 죽는 거 전에 확인해 보고 뛰어내린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린 거 아니라는 희연의 주장에 모짜렐라는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희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뛰어내려 뉴비 없지가 너무 놀라 강제 로그아웃될 뻔한 사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추락으로 인해 닳은 피는 모짜렐라가 치료해 주리라는 일방적인 믿음도 있었지만, 희연은 불리한 점은 쏙 빼고 이야기해 그를 안심시켰다.
자신을 믿으라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희연의 모습에 모짜렐라는 일단은 넘어간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희연에게 그는 투덜거렸다.
“그런 식으로 총 쏘는 건 또 어디서 배워와서….”
희연이 이상한 방식으로 총을 쏘느라 위험한 것도 생각 안 하고 움직였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혹여나 모짜렐라가 또다시 뭐라 할까 걱정된 희연은 그가 이 이상 말을 얹지 못할 상대를 거론했다.
“마리아…!”
“…아.”
마리아가 들었다면 자기가 언제 그딴 식으로 가르쳤냐며 삐약거렸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희연은 당당했다. 어쨌든 이건 마리아한테 배우다 얻은 방식이므로 이 역시 마리아에게 배운 지식인 셈 쳤기 때문이었다.
희연이 상대는 고마워하지 않을 공을 넘기는 사이 전세는 그들에게 유리해졌다. 수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역시 이길 재량이 없는 건지 데스 나이트 무리의 기세가 꺾였다.
흑염의 아이에게 소속된 해골 병사들은 데스 나이트를 해치울 때마다 그들을 자신들의 동료로 만들었다. 애초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 싸움은 네크로맨서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만 희연이 가장 의외라 생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수적 우위를 차지하자마자 흑염의 아이가 행한 것이 힐러들의 보호라는 점이었다.
해골 병사 중 일부는 희연과 모짜렐라 주위를 서성이며 가까이 오는 적을 물리쳤다. 어디 멀리 가지 않고 맴도는 것이 누가 봐도 두 사람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주입된 모습이었다.
그들 외 병사들이 다른 파티원들과 함께 용맹하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흑염의 아이가 이런 난투극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게 누구인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세상은 혼자 고독하게 사는 것이라는 것처럼 단독 행동만 하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협동심만 없을 뿐이지 파티 활동 자체를 못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일까. 희연은 밴시와 혼합된 해골 말을 타고 날아다니며 제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는 흑염의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첫인상과 현재를 비교해 봤을 때 흑염의 아이에 대한 희연의 평가는 많이 상향되었다. 점차 낮아지는 라쀠와는 대조되었다.
흑염의 아이는 라쀠에게도 그를 보호해 줄 해골 병사들을 보냈다. 그 보호 안에서 라쀠도 나름 반격이라는 걸 드디어 하긴 했다. 적극적이지는 않았고, 해골 병사들 틈으로 포션을 던지는 정도로 말이다. 효과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희연은 아까운 포션 버리지 말고 그냥 메이스를 휘두르는 게 어떠냐 권유하고 싶었다.
라쀠 쪽을 힐끗거리는 희연을 본 모짜렐라는 약간 짜증이 서린 얼굴로 희연의 어깨를 툭 쳤다. 조금 전, 데스 나이트의 손아귀에서 구해준 것을 마지막으로 모짜렐라는 라쀠를 포기한 듯했다.
조언이건, 경고건 이 이상 라쀠에게 뭐라 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건 희연도 알았다. 라쀠에게서 눈을 뗀 희연은 병사들 틈 사이로 보이는 말과 데스 나이트를 눈에 담으며 총을 들었다.
모짜렐라 역시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희연에게 말했다.
“내가 등불 한 번 더 걸 테니까 그냥 공격에만 집중해.”
“그러면….”
“이제부턴 치료에서 손 놓으라는 거야. 너도, 나도.”
파티원 모두가 오로지 도트 힐에만 의존하라는 메인 힐러의 발언은 조금 강압적인 구석이 있는지라 그가 누구의 소속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었다.
도트 힐 정도로는 안 되는 사람 하나를 떠올린 희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트… 나이츠 님은?”
“버려. 알아서 포션 먹으라고 해.”
상당한 분노가 느껴졌다. 희연은 얌전히 탄환 변경을 하는 것으로 모짜렐라의 말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깃털 걸음>.”
모짜렐라는 또다시 깃털을 흩날리며 희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철퇴>, <철퇴>, <철퇴>!”
해골 병사들 너머로 이동한 모짜렐라를 따라 두 사람을 지켜주느라 붙어있던 병사들도 반으로 갈렸다. 모짜렐라를 쫓아가는 병사들의 걸음이 다급했다.
하지만 그들도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되는 게, 그간의 스트레스를 푼다는 듯 사방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짜렐라는 위협적이면 위협적이었지 본인이 위협을 당하는 쪽이 아니었다.
하얗게 빛나는 지팡이가 적의 머리를 맞출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과연, 전직하자마자 친구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리던 모짜렐라라고 생각하며 희연도 공격에 합류할 준비를 했다.
“?”
그러나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희연은 뒤에서 붙잡는 손길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익숙한 손길에 희연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난투극이 벌어지는 현재 상황과 동떨어진 것 같은 유유자적한 얼굴의 마리아였다. 붙잡힐 때부터 마리아일 것이라 예상했기에 희연은 놀라지는 않았지만 왜 붙잡은 건가 싶어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아. 저 지금 힐 하러 가는 게 아니라 공격하러 가는 거예요!”
혹시나 하고 꺼내 본 이야기에 마리아는 뭐 그런 당연한 얘기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기다려 봐. 이제 곧 2페이즈 시작이니까.”
“2페이즈… 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마리아의 말에 희연은 서둘러 앞을 확인했다. 전세에 밀린 데스 나이트와 분노한 말 몬스터.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 확실한 상황에서도 파티원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언가 더 있다는 걸 암시하는 모습이었다.
희연은 스킬창을 열어 <등불의 천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확인했다. 장비의 효과로 감소된 쿨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만약에 쓰러트린 데스 나이트들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에 희연이 진저리 치던 그때였다. 오로지 공격밖에 모른다는 듯 불리해지는 상황에도 후퇴하지 않던 데스 나이트들이 하나둘 말 위로 오르며 몸을 뺐다.
눈에 띄는 변화는 그들이 새로운 시험을 치러야 함을 뜻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일행들이 다시 모였고, 얼결에 방패 전사 강자에게 라쀠와 함께 붙잡혀 온 모짜렐라만이 희연처럼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인 이들을 위하여 설명을 해주어야 할 파티장 흑염의 아이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유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대신하여 방패 전사 강자가 지금 상황에 대해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 또한 차근차근 설명해 줄 시간은 없다는 듯, 곧바로 그들이 뭘 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뿐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뤘다.
“다들 2페이즈 준비하세요! 준보스급 몬스터 이제 등장합니다! 모짜렐라 님! 디스펠 준비해주시고 오리 님, 라쀠 님! 큰 공격 하나 올 거니까 힐 잘 넣어주셔야 해요!”
준보스에, 디스펠이 필요한 상황. 게다가 타이밍 맞춰서 힐 스킬 쓰라는 요구까지.
모짜렐라는 디스펠에 집중해야 하니 힐 스킬을 담당하는 것은 희연의 몫이라고 봐야 했다. 총을 든 희연은 도트 힐 스킬인 등불의 천사를 아껴놨어야 했다 후회하며 공격이 날아올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 소리조차 메아리치지 못하는 황량한 땅에 어울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 들어본 울음소리였다.
또다시 밴시가 등장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들의 울음소리는 얇은 벽에 막힌 듯 조금 먹먹하게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해골 병사들과 엉켜 싸움을 벌이던 데스 나이트들이 일제히 무기를 거두었다. 투레질하는 말을 뒤로 물리는 모습이 마치 길을 만드는 것 같았다.
흑염의 아이가 손짓했고, 벽 역할을 하던 해골 병사 중 일부가 움직였다. 이제 그들도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저 멀리, 어디서부터 시작된지 모를 이 땅의 끝에서부터 누군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보스라고 해봤자 자미엘 아니면 귀여운 하급 골렘, 마리아만 상대해 본 희연은 준보스라는 개념의 새로운 존재에 대해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보스보다는 약하지만 일반 몬스터보다 강한 개체라는 것 정도가 희연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분이, 그분이 나를 벌하시러 오고 계셔! 나 좀 살려주게, 나 좀 살려 줘…!”
해골 병사들 틈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던 노인이 툭 튀어나오며 그들에게 외쳤다. 두려움에 떠는 노인의 목소리는 준보스라는 그 몬스터가 상당히 위험한 적임을 암시했다.
“머릿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멈추지 않아…!”
희연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얌전히 서 있는 데스 나이트를 태운 말에게서가 아닌, 저 멀리 밴시의 울음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적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