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거하게 사고 쳤다는 생각에 희연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망가트린 물건이 얼마나 귀하고 만들기 까다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희연의 낯은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조심히 총을 주우려던 희연은 뜨끈뜨끈한 열기에 놀라 다시 손을 거두어야 했다.
“마, 망가진 거예요…?”
다급하게 물어보는 희연에게 마리아는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 건 했구나, 오리야.”
마리아에게선 제대로 된 답을 못 들을 거라는 판단에 희연은 이세인 쪽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야. 나중에 수리하면 돼.”
“다행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친 건 아니구나 싶어 희연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희연은 자신이 만든 결과를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앞쪽에서 벌어진 소란에 금세 시선을 빼앗기긴 했지만 말이다. 소란스러움의 원인은 몇몇 소리 지르는 이들의 목소리였다.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된 해골 병사들이 추락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반응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특히나, 얼음이 추락하는 곳 바로 밑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두 탱커는 말이다.
그나마 방패 전사 강자는 흑염의 아이가 해골을 소환하고 희연이 그것을 얼려버릴 때부터 모두 보고 있었기에 자신이 다음으로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으아아아악!”
방패 전사 강자는 기합을 내지르며 방패로 마차를 밀어냈다. 아주 조금, 불덩어리나 다름없는 마차가 뒤로 밀려났다. 해골 병사들이 그 틈을 파고들어 아주 잠시라 할지라도 마차를 막아낼 벽을 만들어 냈다.
두 탱커가 뒤로 물러났고, 다른 이들 역시 훌쩍 뒤로 물러나며 혹시라도 주변으로 퍼질 여파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얼음은 떨어지며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깨지고 부딪히는 큰 소리를 내기 전 열기에 의해 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녹지 않은 얼음은 그 크기가 작아 소리를 들으려 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조용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거대한 얼음과 거대한 불은 그 둘이 만나자 뜨겁게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입구에서나 날 법한 소리를 냈다.
주위에 하얀 연기가 훅 퍼져 나갔다. 불붙은 성냥을 후 불었을 때 나는 그런 냄새가 연기와 함께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은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은 아니었으나 주변이 탁 트여 있었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연기는 금세 걷혔다.
해골 벽은 무너졌고, 물이 끼얹어진 마차는 눅눅해진 과자처럼 흐물거리며 느릿느릿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타다 남은 잔해는 힘을 내지 못했다.
“…부, 부숴요!”
멍하니 마차의 잔해를 바라보던 방패 전사 강자가 방패를 마차 쪽으로 집어 던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뒤로 훌쩍 물러나 있던 마늘쫑쫑이 곧바로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한 방, 한 방의 공격이 강한 직업군답게 마늘쫑쫑의 공격은 마차의 잔해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잿가루를 흩날리며 마차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됐다….”
일을 진행하면서도 정말 이게 될까 싶었던 희연은 제 뜻대로 된 상황에 무기 하나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도 잊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준보스는 마차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듀라한 남았으니까 다들 긴장 풀지 마세요!”
방패 전사 강자는 가장 큰 공격을 막아냈다는 점을 즐기다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며 다른 이들에게 외쳤다. 해이해진 사람 중 하나인 희연은 조금 움찔했다.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면 누가 이곳을 여러 번 경험한 유경험자인지 티가 났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총을 옷소매로 감싸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은 희연은 연결된 사슬까지 집어넣은 다음 총 한 자루만 들고 앞을 보았다. 오랜만에 한 손이 비는 느낌이 어색했다.
그러한 어색한 감각에 어서 빨리 익숙해지라 경고하듯 무너지는 마차의 잔해 너머, 듀라한은 천천히 말을 이끌고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박자감이 느껴지는 목 없는 기사의 걸음에선 어떠한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말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그 진동에 반응하듯 대열을 지키던 데스 나이트들이 몸을 틀고 무기를 들었다. 불덩어리 같은 눈을 빛냈다.
설마하니 치사하게 한 번에 공격하는 건가 싶어 희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희연의 생각을 불순하게 여기기라도 한 듯 듀라한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으아…!”
“<치유의 빛>!”
갑작스레 머리 위로 쏟아진 축축하고 미적지근한 액체의 감촉에 희연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희연의 소리에 곧바로 반응한 모짜렐라가 치료 스킬을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애초에 희연은 놀란 것이지 공격을 당한 게 아니었다.
“피?”
희연은 손을 들어 온몸을 흠뻑 적신 액체를 확인했다. 새빨간 액체는 조금 끈적거렸고 초콜릿 냄새를 물씬 풍겼다.
마치 낙인처럼 하얀 신관복에 스며드는 붉은 액체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당황하던 희연은 이어 붉은 흔적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희연의 의문을 풀어주듯 멀지 않은 곳에서 놀란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
희연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희연에게서 사라진 붉은 흔적이 모짜렐라로 옮겨졌다. 하늘색 머리가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붉은색으로 흠뻑 젖었다.
설마 모짜렐라가 자신을 치료해 준 바람에 대신 피를 뒤집어쓴 건가 싶어 희연은 방아쇠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마늘쫑쫑이 서둘러 희연은 만류했다.
“그거 공격이나 디버프 아니에요! 듀라한이 누구부터 죽일지 정할 때 쓰는 표식 같은 거예요!”
“표식이요?”
“자기한테 위협적이라 여겨지는 상대부터 없애려 하거든요! 힐러가 일 순위! 그다음이 성기사! 이후로는 딜량으로! 힐러 같은 경우엔 힐량이랑 그 외 잡다한 거 합쳐서 순위 매겨요!”
그러니까, 지금 듀라한은 누굴 먼저 죽일까 간을 봤다는 소리였다. 그중에서도 희연과 모짜렐라를 두고 고민했고 말이다.
희연에게 새겼던 흔적을 모짜렐라로 옮긴 이유는 방금 전에 그가 사용한 스킬로 희연의 HP가 회복되어 위험 대상 순위를 다시 매기는 바람에 그런 거였다.
방어력도 힘도 없는 모짜렐라가 최우선 처치 대상이라는 말에 희연은 그쪽으로 어그로가 모두 끌릴 것을 염려하고 총을 들었다. 여차하면 탱커 둘은 뒤로 미뤄두고 모짜렐라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희연이 이제 막 모짜렐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축축하게 젖은 붉은 머리에서 다시 하늘색 머리로 돌아가 있었다. 신관복 역시 눈부시게 희었다.
“…?”
“뭐야?”
혼란스러운 건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혹시 표식이 다시 희연에게 넘어갔나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론 희연은 피에 젖지 않았다.
힐러는 존재 자체만으로 어그로라는 점에서 듀라한이 매기는 점수에 추가점을 기본으로 받았다.
듀라한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먼저 처치할지 마음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둘의 던전 공략 기여도가 비등비등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표식의 대상 역시 그들과 기여도가 비슷한 이라는 걸 뜻했다. 힐러라는 기본 점수가 있다 해도 라쀠일 리는 없었으므로 희연은 방패 전사 강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늘쫑쫑 역시 제법 활약하긴 했으나 1:1 전투가 기본인 격투가였기에 해치운 적을 생각해 보면 듀라한의 1순위가 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라쀠처럼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희연은 자연스레 방패 전사 강자가 현재 1순위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붉게 물들어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잘 싸웠고 나름 제 역할을 다했으며 난투극에서 활약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붉은 빗방울 같은 것이 그녀의 뺨 위로 떨어졌다. 하늘에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흑염의 아이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제야 희연은 흑염의 아이가 지상에 있던 해골 병사들로 듀라한의 명령을 기다리느라 대기 상태였던 데스 나이트들을 공격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피에 젖은 모습이 되고 싶어서 공격했나…?
합리적인 의심을 하던 희연은 어쨌든 듀라한의 1순위가 흑염의 아이로 결정 난 지금,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리라 예상하고 앞을 보았다.
예상대로 듀라한은 위엄 있게 서 있던 모습을 버리고 처음 보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제 잘린 목을 잠시 내려놓은 듀라한은 도끼를 든 손을 힘껏 뒤로 젖혔다.
마리아가 채찍을 멀리 보내기 전 취하는 자세처럼 말이다.
“피…, 피해요!”
희연의 외침에 피에 젖은 어둑한 자신에 취해있던 흑염의 아이가 곧바로 해골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러나 늦었다.
듀라한의 도끼는 그 크기에 어떻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흑염의 아이를 향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흑염의 아이가 빠르게 움직이긴 했으나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해골 말의 머리가 도끼 끝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흑염의 아이는 해골 말 위에서 떨어지다 간신히 붙잡은 고삐의 끈에 매달렸다.
“뒤에!”
희연의 외침에 흑염의 아이는 아슬아슬하게 되돌아온 도끼의 공격을 피했다. 마치 자유 의지를 가진 것처럼 몇 번이고 되돌아가 흑염의 아이를 공격하는 도끼가 소름 끼쳤다.
흑염의 아이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땅 위의 파티원들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을 이겨낼 준비 또한 해야 했다.
무늬만 파티장 흑염의 아이를 대신하여 감투를 쓰게 된 방패 전사 강자는 제거 대상 1순위가 된 흑염의 아이가 아닌 다수에게 가해진 위협을 막길 택했다.
“다들 앞에 봐요!”
무기를 든 채 대치 상태로 굳어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열을 정비하는 모습이 공격의 의도가 다분했다. 듀라한의 첫 공격이 그들에게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탐으로써 기동성까지 손에 넣었으니 데스 나이트에게 있어 해골 벽을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너무나도 쉽게 벽을 뛰어넘는 그들은 마치 듀라한의 가호라도 받는 것처럼 위풍당당했고, 그게 허세만이 아니라는 듯 실력을 보여줬다.
흑염의 아이가 제 목숨 보전도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해골 벽의 높이를 올려주어 그들이 지나치게 몰리는 걸 막아주긴 했으나 언제까지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가 너무 많았다. 기껏 해치워도 다음 몬스터가 그들을 기다렸다. 자연스레 지쳐갔다.
누군가 광범위한 공격이라도 사용해 수를 줄여준다면 모두의 부담이 줄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광역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중 하나인 흑염의 아이는 해골 벽을 높일 잠깐의 틈은 있을지언정 아직까지도 도끼를 피해 하늘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느라 바빴다.
또 다른 한 명인 모짜렐라는 이미 앞서 스킬을 사용한지라 아직 사용이 불가능했다.
희연은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흑염의 아이부터 구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어 약간 후회했다. 하지만 아직 늦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흑염의 아이를 구해오면 됐다.
현재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것도, 여차할 때 에흐테를 불러와 하늘 위로 날 수 있는 것도 희연이었으므로 그녀는 다시 라쀠를 붙잡아 와 제 자리에 앉혀두었다.
“지팡이 들고 스킬 써요!”
“저, 저기…, 잠깐만요…!”
라쀠에게 제 일을 일임한 희연은 흑염의 아이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섣불리 에흐테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듀라한의 도끼 때문이었다.
되돌아오는 시간이 제법 길고, 단 하나뿐이었지만 크기만 봐도 공격력이 아주 높을 거라는 게 예상이 갔다. 게다가 자유 의지를 가진 것처럼 집요하게 흑염의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언제 또 처치 대상 1순위가 될지 모르는 희연에게 듀라한의 도끼는 제법 부담스러운 걸림돌이었다. 타이밍을 잘 보고 흑염의 아이를 구출해야 했다.
희연은 혹시 듀라한을 보면 뭐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멀리 있는 적을 힐끗거렸다.
생각해 보면 듀라한은 전투를 재개하고 난 이후 도끼만 던졌을 뿐이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런 만큼 또 다른 수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희연은 예상 못 한 방식이기는 하나 우려했던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어…?”
듀라한은 이미 도끼에는 관심을 끊은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머리를 던질 준비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잘린 채 따로 존재하는 자신의 머리말이다.
듀라한은 자기 머리를 던져서 공격하는 용도를 쓰려 하고 있었다.
물론 자기 머리인 만큼 어떻게 사용하건 그건 듀라한의 마음이지만 설마하니 제 머리마저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할 줄은 몰랐던지라 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듀라한이 한 손에 꽉 쥔 머리, 투구 밑에 드러난 하관의 입꼬리가 이죽거리며 올라간 것으로 보아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본인 의지로 제 머리로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연 준보스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