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당혹스러움에 굳어버린 희연을 붙잡은 마리아는 사람 하나를 절벽 밑으로 밀어버린 일 따위 없다는 듯 무척이나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죽하면 바로 코앞에서 라쀠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봤음에도 희연은 자신이 잘못 봤던 것인가 하고 의심을 했다.
저 밑에서 들려오는 살려달라는 라쀠의 비명이 아니었다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마리아가 나오는 악몽을 꾼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자, 오리야? 마폭탄을 하나 꺼내 봐.”
“어…, 그, 저기, 라쀠 님….”
“아, 혹시 없어? 내 거 빌려줄게. 나중에 킹한테서 받아내지 뭐.”
“있어요!”
킹스메이커에게서 받아내겠다는 말에 일단 대답부터 한 희연은 복잡한 심경으로 마폭탄을 꺼내 들었다.
현재 몬스터보다 위험한 상대가 누구인지 다들 깨달아서인지 아무도 라쀠를 지옥 속에 내던진 마리아에게 무어라 하지 못했다.
어쩌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지팡이로 때리던 모짜렐라를 아무도 말리지 않던 것에 대한 연장선일 수도 있었다.
하하 호호 떠들다가도 트롤이다 싶으면 매정해진단 점에서 희연은 앞으로 파티 활동을 할 시 절대 다른 이들에게 누를 끼치지 말자 다짐하게 되었다.
희연이 파티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되는 비즈니스적인 친분에 어떤 감상을 느끼는 중일지 모를 마리아는 모짜렐라도 잡아 와 마폭탄을 꺼내게 했다.
“신성의 제작 스킬 갖고 있어?”
“아, 네….”
“그러면 마폭탄에다가 그 스킬 걸어 봐.”
그래도 되는 건가? 희연은 연신 마리아와 마폭탄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재촉의 눈빛에 못 이겨 스킬을 사용했다.
희연의 손안에 하얀빛이 어른거리다 이내 마폭탄 안에 스며들었다. 붉은 보석의 안쪽에서부터 점차 일렁이기 시작한 하얀 빛은 붉은색에 섞이지 않은 채 외따로 어지럽게 엉켜 들었다.
마치 붉은 액체에 하얀 우유를 뒤섞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모짜렐라 쪽을 확인한 희연은 그가 들고 있는 마폭탄 역시 그녀의 것처럼 변한 것을 확인했다.
[<정화의 마폭탄> : 일부의 마법사만 만들 수 있는 초소형 폭탄에 정화의 기운이 뒤섞인 보석이다.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한 희연은 이 이상 마리아에게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폭탄, 확실히 사람을 타지 않고 사용자를 빠르게 파티 내 최고의 딜러로 만들어 줄 위협적인 물건이었다.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설명에 따르면 특히나 언데드 몬스터에게 효과적인 것 같았다.
“폭발은 예술이지.”
“…….”
그리고 마리아의 취향인 것 같았다.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다른 보상에 희연은 손쉬운 방법이라며 좋아해야 할지 폭탄이라는 점에 꺼려야 하는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폭탄과 폭발을 좋아하는 구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예로 떨떠름해하는 희연과 달리 다른 파티원들은 굉장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폭탄을 바라보았다.
“우와… 저게 섞이네…?”
특히나 마늘쫑쫑이 폭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마리아는 무서워도 처음 보는 폭탄 제조 방식의 등장에 호기심이 동한 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그녀는 특히나 많은 관심을 표했다.
연신 주위를 기웃기웃거리는 기척에 희연은 조금 더 자세히 보라는 의미로 마늘쫑쫑에게 폭탄을 가까이 가져다 보여주었다.
“이런 거 처음 봐요. 경매장에도 이런 건 안 팔던데…. 왜 안 팔지? 이거 나오면 요정 던전 깨는 사람들한테 인기 좋을 텐데.”
희연은 마늘쫑쫑의 말이 꽤 뼈 있는 지적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법사와 신관의 합작품인 정화의 마폭탄은 제법 수요가 있을 아이템이었다.
아마 그래서 정보가 안 풀렸을 것이다. 희연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듀라한의 정보가 그랬듯,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만의 비전이라 여기며 정보를 독식 중일 터였다.
그 예로 마리아는 이세인을 멀리 보냈다. 정보를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세인이 정말로 정화의 마폭탄이라는 정보를 모르고 있을지는 본인이 아닌 이상 모를 일이었다.
희연은 일행을 훑은 뒤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보 독식을 위해 이세인은 멀리 보냈으면서 마리아가 그들은 여기에 가만 내버려 둔 것은….
“남한테 말하고 다니면… 다들 알 거라고 믿어요?”
협박할 자신이 있어서 여기 둔 것이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스산함을 못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늘쫑쫑은 제 입과 흑염의 아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고 방패 전사 강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제 손으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경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회복 스킬을 쓰며 아직 별님을 보러 떠나지 않고 버티던 라쀠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미노타우로스들에게 굴려지느라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 따로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희연은 매사 느슨한 듯하면서도 철저하게 계산된 마리아의 행동을 하나하나 짚어 보다 다시는 까불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정리도 끝났으니….”
희연과 모짜렐라를 앞으로 내세우며 마리아는 말을 맺었다.
“던져.”
“…….”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최근에도 몇 번이나 들어 본 말이었다. 희연은 결과를 보지 않아도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것 같았다.
그런 희연의 예상대로 그녀와 모짜렐라가 힘차게 던진 정화의 마폭탄은 얼마 못 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던진 게 의미가 있나 싶은 거리였다.
그 꼴을 모두 지켜본 마리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묻더니 아주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
“정말 속상하다. 너희는 어쩜… 그래, 말을 말자.”
누가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안 하는 것, 그게 더 나빴다. 모짜렐라보다는 멀리 던진 것에 만족하려 했던 희연은 그런 마리아의 반응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
마리아는 놀랍게도 정말 그 이상 싫은 소리 하지 않았고, 말없이 두 사람의 손에 마폭탄만 새로 넘겨주었다. 농도가 짙은 보랏빛 마폭탄에 희연은 조용히 스킬을 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던져.”
“이번에 던져도 똑같을 텐데….”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던져.”
손을 휙휙 내젓는 마리아의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과 조금 지루하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모짜렐라와 서로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핀 끝에 희연은 들고 있던 폭탄을 다시 힘껏 집어 던졌다.
영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라도 악령이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려 한 희연은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앞으로 뻗어 나가는 하얀 채찍을 보고 마리아의 알아서 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마리아는 정말 알아서 했다. 맥없이 추락하던 두 개의 폭탄은 채찍의 끝에 맞아 더 멀리 날아가게 되었다.
앞서 던진 폭탄이 두 사람이 던진 것을 던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듯 터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던져진 폭탄은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터졌다.
농도 짙은 보랏빛 마폭탄을 기본 재료로 사용해서인지 폭발의 범위는 넓었고, 효과 또한 강력했다. 일반적인 마폭탄과 다른 점이라 한다면 폭발 특유의 소음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랬기에 조용히 퍼지는 빛과 그 빛에 저항 한번 못 하고 쓸려나가는 몬스터 무리의 모습은 조금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쓸어버렸다는 표현이 알맞았기 때문이다.
“와….”
학살이라도 한 것 같은 결과물에 희연은 여러 의미를 담아 감탄했다. 앞서 말과 데스 나이트, 듀라한을 상대하느라 고생한 것에 비해 이번 싸움은 너무나 손쉽게 정리됐다.
희연은 마리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런 엄청난 비전을 알려준 사람답지 않은 무심한 표정을 한 그녀는 슬슬 이 던전에 있는 게 지겨운지 빨리빨리 진행하라며 손만 휘적거렸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방패 전사 강자가 미노타우로스를 키운 장본인에게 뛰어갔다. 다음 진행을 위한 대화를 하러 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희연은 다시 절벽 밑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없어진 땅은 다른 곳과 다를 게 없이 황량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새하얀 신관복이었다.
“아, 살아있다….”
희연이 말한 대상은 다름 아닌 라쀠였다. 그렇게 많은 미노타우로스 무리에 둘러싸여 공격당했음에도 라쀠는 별님을 보러 떠나지 않았다.
그 결과물에 희연은 정화의 마폭탄 때보다 더욱 놀랐다. 진심으로 말이다.
아무리 약한 힐러라 할지라도 힐 스킬을 자신에게 집중해서 사용하면 탱커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라쀠가 증명해 낸 것과 다름없었다.
“저걸 사네.”
모짜렐라 역시 라쀠를 발견하고 제법 놀란 눈치를 보였다. 그 역시도 라쀠가 진즉 별님을 보러 떠났을 거라 여긴 것이다.
“음….”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희연은 침음을 흘리며 라쀠와 마리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리아가 라쀠를 절벽에서 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실수도 아니었다.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라쀠가 따지고 든다면 마리아는 그에 대해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물론 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너무나 쉽게 이번 구간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은근히 기뻐하던 파티원들도 라쀠가 살아남았다는 묘한 결과물에 슬금슬금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와 모짜렐라가 싸울 때도 함부로 말 얹기 힘들었지만, 이번 건 더했다. 비틀거리면서 샛길로 올라오는 라쀠를 희연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마, 마리아… 님….”
“너 나 부를 때 님자 붙이기 싫지. 너무 종교적으로 느껴져서 그런가?”
“그, 저기….”
“그냥 마리아라고 불러도 봐줄게.”
희연은 딴소리만 하는 마리아에게 눈짓으로 울먹이는 라쀠를 보라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꿋꿋하게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단호한 모습에 희연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의미로 모짜렐라를 돌아보았고, 다 포기한 듯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 얼굴을 보니 희연도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저기요…!”
라쀠는 용기 있게 마리아를 불렀다. 내내 라쀠를 무시하던 마리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아는 척을 해주었다. 비웃음을 걸친 입꼬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 왜?”
“왜, 왜냐니… 그, 그쪽이 저 밀쳤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는데 모른 척이나 하고…! 당장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뭐 하자는 건데요!”
희연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다른 파티원들 역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와 모짜렐라가 싸울 때만큼이나 흥미롭고도 불안하다는 눈빛을 한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라쀠에게 마리아는 화내지는 않았다. 그저 배배 꼬인 것 같은 어투로 말할 뿐이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지금까지 입 꾹 다물고 있었던 거네?”
“지금 중요하건 그런 게 아니라…!”
“안 중요하다고? 진짜? 진심으로?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파티에 들어온 거니? 정말?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아, 그래서 내내 뒤에 숨고, 손은 놀고 아주 상 차려다가 입에 떠넣어 줘야만 움직이고 그랬던 건가?”
라쀠는 화를 낼 때도 목소리가 떨리고 소리가 작아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엿보였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는 상대하기 좋은 적이 아니었다.
기 싸움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끼리 해야 하는 거였다. 그런데 라쀠와 마리아가? 이건 잔혹할 정도로 차이 나는 싸움이었다.
“저러다 울겠네.”
“응….”
희연은 모짜렐라의 말에 긍정했다. 실제로 라쀠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라쀠가 울면 마리아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보일까? 하지만 마리아는 원래 좀 나쁜 사람이었으므로 라쀠가 운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자, 다른 사람 의견을 한 번 들어볼까? 여기서 파티 많이 좀 해봤다 하는 게 누구지? 그쪽? 자, 우리 함께 말해볼까요?”
마리아가 지목한 것은 방패 전사 강자였으나 그녀가 정말로 대화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라쀠를 다다다 쪼는 것에 방패 전사 강자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누가 잘못을 했을까. 힐러가 반드시 필요한 이런 던전에서는 다들 힐러한테 슬슬 기는 게 암묵적인 룰임에도 아무도 힐러 편은 안 들어주는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건 누구일까. 아이참, 난 잘 모르겠네?”
못됐다. 여전히 라쀠가 잘못한 거고 유감이 많다는 것과는 별개로 희연은 마리아랑은 정말 싸우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저렇게 약자 핍박 같은 모습을 이끌어 내는가 싶어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리 친구가 나중에 가서도 트롤링이나 하고 다닐 것 같아 조언 하나 해주자면, 공팟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단다. 힐러가 힐슬아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지. 너도 잘 들어.”
“아, 네….”
함께 지적받은 희연은 조금 움찔거리며 마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리아는 이제 웃지도 않고 라쀠를 대하고 있었다.
“물론 너한테 그런 권한이 생기긴 할까 싶긴 한데, 여기저기서 제발 와달라고 비는 힐러쯤 되면 파티 내에서 힘이 생기는 법이거든?”
마리아는 일단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뺙같은 파티원 하나는 그냥 내보낼 수 있는 즉결 처분권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너 같은 애들이 물 흐리다 보면 힐러는 그냥 입 닥치고 힐이나 하라며 삐롱하는 애들이 꼭 나온단 말이지. 내가 삐약 이 레벨에 그런 별 뺙같은 시비나 받으려고 그런 삐롱 떨면서 애쓴 줄 아니?”
마리아의 분노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그라데이션 분노가 아니었다. 희연은 순식간에 늘어난 새소리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소리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래. 우리 친구. 내가 삐약삐약거리려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닌데. 우리 친구를 보다 보니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조언이 아니라 욕부터 박아 버렸네? 아, 실수야 실수.”
실수 아닌 것 같던데….
희연은 덜덜 떠는 라쀠를 보며 이 파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리아와 라쀠가 함께 파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희연의 고민은 예상 못 한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왜, 꼬와? 불만이니? 그럼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어디서 그런 얌생이 같은 짓을 배워 와서 짜증 나게 굴어. 귀엽게.”
“흐윽… 저 나갈래요….”
라쀠가 파티를 탈퇴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