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방패 전사 강자를 바라보던 희연은 꼬마 요정이 다시 말문을 열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쉬워.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거잖아.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별이 아쉬워서인지 꼬마 요정들은 조금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아쉬워할 시간도 아깝다며 희연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들을 읊어주었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좋아해.”
“햇살도 좋아.”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인 너! 정말 좋아! 우리가 준 선물 잃어버리면 안 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꼬마 요정들은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에 희연을 포함시켜 주었다. 희연은 설핏 웃으며 잘 묶인 나뭇잎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잘 가지고 있겠다는 뜻을 비쳤다.
“어? 그거 어떻게 받았어요?”
“네?”
그리고 희연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것은 경험자들이었다.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늘쫑쫑과 나뭇잎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본 희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친구 하게 되면서 받았어요.”
“원래 그거 과제 하나 더 달성해야 주는 건데….”
그냥 선물이 아니라 퀘스트 아이템이었구나?
원래도 잃어버릴 생각 따위 없었지만 희연은 더더욱 소중히 나뭇잎 주머니를 챙겼다.
마늘쫑쫑은 희연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싶다는 듯 눈을 빛냈지만 꼬마 요정들이 다시 입을 열었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해야 했다.
“그거 알아? 옛날 옛날엔 말이야, 우리가 살던 숲에 아주 많은 인간들이 찾아왔어. 하나하나 내쫓기 참 힘들었었다!”
“내쫓아…?”
꼬마 요정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희연은 일단 그들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간들이 이곳을 찾아올 때면 그 이유는 항상 꽃을 얻기 위해서였어. 후회가 깊을 때 아스포델을 필요로 했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사이프러스를.”
“비탄하며 마리골드를 찾았으며.”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로즈마리를 바치려 했지.”
꼬마 요정들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연은 무엇 하나 닮은 구석 없던 꽃과 나무의 연관 관계를 알게 되었다.
후회, 애도, 비탄, 추억. 그리고 가장 먼저 꼬마 요정들이 찾아달라고 한 주목의 뜻은 죽음.
연관 없다고 하기엔 참 공교로운 뜻을 가진 꽃과 나무의 모임이었다.
희연은 던전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요정의 무덤, 정확히는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 요정들은 모두 무덤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에서 태어났다. 마치 멸망한 요정 왕국에 바쳐진 꽃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희연의 얼굴은 조금 굳었지만 꼬마 요정들은 다시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악의라곤 하나 모르는 순수한 모습이었다.
“이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 이 땅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땅엔 우리가 필요하지.”
“맞아, 맞아. 이 땅엔 우리가 너무 많이 필요해.”
“하지만 이젠 우리가 마지막 요정이고 끝나는 것만 기다리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너희를 도와줄 거야. 마지막으로 꽃을 받은 자에게 갈 수 있게 해줄게.”
꼬마 요정들이 손을 뻗자 그들의 뿌리 부근에서 연한 초록색의 빛이 맴돌았다. 빛은 작디작은 클로버로 피어났고, 그것은 하나둘 늘어나더니 군락을 이루었다.
희연은 뒤로 물러났다.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클로버 군락이 그녀가 서 있는 곳마저 덮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범위를 늘리며 활짝 피어난 클로버 군락은 호숫가까지 도달했고 이내 물 위에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연한 초록빛이 은은히 맴도는 클로버 길이 호수 위로 피어난 모습은 제법 낭만적이고 동화 같은 모습이었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 위로도 초록빛이 스며들어 반짝였기에 새삼스레 이곳이 요정들이 있는 숲이란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연은 귓가에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그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질 거야.”
“드디어 우리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거야.”
“즐겁지만 아쉬운 만남이었어. 그래도 좋았어.”
“안녕.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는 더 재미있게 놀자.”
손을 흔드는 요정들은 생기를 잃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미동 없는 꽃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요정들은 헤어지는 것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쉬워할 시간에 즐거움을 만끽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들은 곧이어 눈을 감았고, 잠들었다. 요정이 떠난 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꼬마 요정들은 다시 만나자 했지만 희연이 다시 한번 요정의 무덤 던전을 오지 않는 이상 그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설령 다시 온다고 해도 처음부터 시작할 테니 꼬마 요정들은 그녀를 기억 못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건 정말 마지막 만남이었던 셈이다. 짧게 끝나버린 만남에 희연의 얼굴은 흐려졌다.
“요정은 죽지 않아.”
“…네?”
그런 희연의 모습에 이세인은 특유의 다정한 어조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정은 죽으면 가장 근처에 있는 요정 왕국으로 돌아가 잠들고, 나중에 자신의 몸에 맞는 매개체를 찾으면 다시 인간 세계에서 태어나는 구조야.”
“그러면….”
“여기서 죽은 요정들은 이미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거지. 물론 그전의 기억도 어느 정도는 갖고 태어나고.”
여전히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기약 없는 약속이란 건 마찬가지였다. 던전 속에서 이루어진 특수한 만남이기에 이후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요정들이 희연을 기억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너무나 짧게 끝나버린 만남이라는 점에서 오던 허무함은 사그라들었다. 희연은 아쉬우면서도 결국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결 얼굴이 밝아진 희연은 던전을 마저 진행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세인을 쳐다보는 방패 전사 강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
“요, 요정… 다시 태어납니까?”
요정의 무덤 던전을 여럿 통과해본 노련한 방패 전사 강자였지만 그 역시 본질은 레벨 100을 못 넘긴 초보일 뿐이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건 비단 희연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건 신기한 것이고, 실상 본인들과는 그리 큰 연관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덕에 파티의 수런거림은 금방 잦아들었다.
“저 클로버 길, 내가 알기론 시간제한이 있던 것 같은데.”
“빨리 빨리 갑시다 여러분!”
이세인이 덧붙인 조언 탓도 있었다.
기껏 꼬마 요정들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만들어준 기회를 어이없이 날려 겨우겨우 여기까지 이끌어 온 파티를 해산시킬 수는 없단 마음으로 방패 전사 강자는 양 떼 모는 개처럼 다른 이들을 이끌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떠밀려 호숫가로 이동하면서도 희연은 발치에 클로버가 생각보다 단단하고 질기다는 점에 신기해했다. 나룻배까지 이어져 있긴 해도 다리 삼아 건널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았다.
산골 꼬마 요정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동굴에서 본 탄자냐만큼 튼튼하지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솔직히 그들에겐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이 몸이 앞서가도록 하지!”
“잠깐! 안 돼요! 가지 마!”
그리고 존재만으로 감지덕지한 클로버 다리를 탱커로서의 능력치는 부족하면서 무게만큼은 일반적인 탱커와 다를 게 없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끊어먹을 뻔했다.
“…트롤.”
호수에 반쯤 빠져 허우적거리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보며 희연은 작게 중얼거렸고, 모짜렐라는 삐약거렸다.
결코 작지 않은 해프닝이 벌어지긴 했지만 해결 자체는 수월하게 되었다.
언제나 앞서 달려 나가는 흑염의 아이로 인해 방패 전사 강자는 상시 대기를 타게 되었고, 그 덕에 물에 빠져 바동거리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클로버 길을 다 끊어먹기 전에 그를 구출하는 것을 성공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희연이 알게 된 것은 파티란의 비고에 적혀있던 반숙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아닌 라쀠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 역시 희연과 모짜렐라와 같은 이번 던전의 초행자였던 것이다. 희연은 하도 라쀠가 몸을 빼 그쪽이 그녀와 같은 초행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편견을 버리고 여태껏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린 지금은 왜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멋모르고 앞서 행동하다 된통 당하는 역할을 맡은 건 라쀠가 아닌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였다. 지금 역시도 그랬고 말이다. 물론 그것과 트롤인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무게 제한 있나 보네.”
너덜너덜해진 클로버 다리를 발로 꾹꾹 눌러보는 모짜렐라만 보아도 그랬다. 초행자라고 해서 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처럼 무턱대고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이리 와봐.”
클로버 다리 위로 완전히 올라선 모짜렐라는 희연을 불렀다. 몇 명이 올라갈 수 있는지 무게 체크라도 해보려는 성싶었다.
“불안불안하다….”
모짜렐라의 옆으로 이동한 희연은 줄기 사이로 스며드는 물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면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클로버 아래, 줄기는 모두 가라앉았다.
한걸음 뗄 때마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나는 것이 나룻배로 가는 와중에 끊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게 했다.
다만 희연과 모짜렐라를 합한 무게가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보다 적을 리는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클로버 다리의 무게 제한은 총합의 무게가 아닌 각각 개인의 무게 제한일 가능성이 높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냉큼 클로버 다리 위로 올라서 나룻배 쪽으로 뛰어가려다 잡힌 흑염의 아이가 그 생각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사람이 셋인데 끊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총합의 무게로 제한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무게가 많이 나가는 갑옷 종류의 직업군은 안 되고 천 옷 같은 가벼운 차림새의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길이란 뜻이 된다.
그래서 방패 전사 강자가 클로버를 안 밟으려 애썼던 건가 생각하며 희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방패 전사 강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물에 빠질 뻔한 사실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옷 무게 가벼운 사람만 갈 수 있어서요. 저는 못 가고, 나이츠 님도 못 가니까 여러분께서 잘 해주셔야 해요!”
“뭘 하면 되는 건데요?”
“별건 없고, 그냥 나룻배에 가서 차일드 롤랜드만 깨워오시면 됩니다! 대신에….”
“?”
말을 흐린 방패 전사 강자가 눈을 굴리며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저렙 유저를 눈치 보게 만드는 존재는 하나였기에 희연은 자연스레 마리아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방패 전사 강자에게 조용히 하라며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은 조용히 하라는 의미를 ‘쉿!’하고 검지를 들어 표현하지 네 목을 ‘스윽’으로 표현하지 않을 텐데 참 남달랐다.
스토리 스포일러 방지를 해준 것이라고 마리아의 행동을 미화해서 생각한 희연은 몇 번 더 클로버를 꾹꾹 눌러본 뒤 흑염의 아이를 놔주었다.
본인 또한 달려 나가다 잡히는 걸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흑염의 아이는 답지 않게 얌전히 서서 모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기다렸다.
앞서 나눈 대화대로 두 탱커는 다른 이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탱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옷차림이 가벼운 편이라 클로버 다리가 제한한 무게를 넘지 않았기에 다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 함께란 이세인과 마리아도 포함된 구성을 뜻했다.
그 둘은 도와주러 따라온다기보다는 구경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혹시 모를 위험에서는 구해주겠지 싶어 희연은 뒤따라오는 두 존재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클로버 길은 그리 폭이 넓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 줄지어 걸어야 했다. 아주 잠깐 얌전해지긴 했으나 언제 또 날뛸지 모른다는 이유로 흑염의 아이는 맨 앞자리에서 뒤로 이동되었다.
원래라면 이중 가장 몸이 튼튼한 마늘쫑쫑이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가장 앞에 서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임무인 흑염의 아이 붙잡기란 과제가 있었기에 뒤로 이동되었고, 선두는 모짜렐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희연은 모짜렐라 바로 뒤인 두 번째였다. 여차할 때 선두의 모짜렐라를 바로 회복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 이세인은 가장 뒤에서 그들을 쫓아오며 구경하는 역할이었다.
클로버 다리는 다리를 지탱하는 힘이 줄기인 만큼 누구 하나가 격렬하게 움직일 때마다 크게 출렁였기에 그들은 상당히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다행인 점은 차일드 롤랜드가 잠들어 있을 나룻배 주위엔 클로버 군락이 둥글게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까지만 가도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는 것보다는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
마침내, 호수의 중앙에 다다른 그들은 나룻배 안에 탄 이를 확인하게 되었다. 아직은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그는 호숫가의 찬기 탓인지 마치 죽은 사람처럼 파리한 안색을 한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주위를 장식한 꽃이 하얀 아스포델과 꽃이 핀 로즈마리여서인지, 아니면 입에 물린 마리골드의 색이 창백한 안색과 달리 생기가 넘쳐서인지 상대의 낯은 더욱 핏기 없어 보였다.
주위의 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손에 들린 검이 오히려 그 주인보다 생동감 있어 보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