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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44)화 (244/251)

244화

“깨우면 된다고 했지…?”

하얀 도자기 같은 얼굴 때문에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희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남자의 손등을 톡톡 두들겨 보았다.

“저기요?”

아무리 깊게 잠들었다 해도 이 정도로 미동이 없으면 슬슬 무서워지기 마련이었다. 희연은 꼬마 요정들이 알려준 꽃들의 의미를 떠올리며 조금 낯을 찌푸렸다.

그러다 흑염의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크로맨서가 필요한 이유가 설마…?

좀비라는 소재도 동화와 전설에 포함해도 되는 건가 싶어 희연은 조금 고민했다. 마리아의 탈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봐온 것도 있기에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봤던 NPC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게임의 장르가 꿈과 희망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동화였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던 희연은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틀었다.

“치즈? 뭐해?”

모짜렐라는 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했다. 마리아에게 뺏겼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손에 쥐고 다니던 지팡이도 옆에 내려놓은 그는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연은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드러난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모짜렐라의 양손은 마주 모은 채 오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찰랑이는 차가운 물이 담겨 있었다.

“어…?”

모짜렐라는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손으로 퍼올린 물을 청년의 얼굴 위로 뿌린 것이다!

물론 손으로 퍼올린 만큼 양이 많지 않았고 천천히 뿌렸다는 점에서 나름의 도의는 챙기기는 했지만 초면인 상대에게 다짜고짜 물을 뿌렸다는 점이 평범하다곤 할 수 없었다.

역시 마리아가 옆에 끼고 다니는 이유가 있구나. 희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모짜렐라를 보았다.

당황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번에는 일어나겠다 싶어 조금 기대도 했다.

“…….”

“안 일어나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 위로 방울방울 맺힌 물방울을 보며 정말로 지금이 네크로맨서가 활약할 때인 건가 싶어 희연은 조금 심각해졌다.

“입에 물린 꽃.”

“?”

“빼내라, 신의 종.”

명령을 내리는 흑염의 아이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던 희연은 애써 그녀 역시 요정의 무덤을 여러 번 경험한 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이 진행상 맞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점에 희연의 마음에는 의혹의 씨앗이 싹텄다.

수상한데.

흑염의 아이가 던전 진행이 안 되어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초행자들에게 먼저 공략 방법을 알려주는 조원이었나? 아니다.

라쀠가 성격으로,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실력으로 비협조적이게 굴었다면 흑염의 아이는 본인의 컨셉을 위해 비협조적으로 구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지금, 흑염의 아이가 신의 종을 앞세워 무언가를 시킬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먼저 꽃을 빼내는 사람이 무언가 불이익을 받는 구조일 경우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먼저 나섰다가 노인의 지팡이 공격에 당한 것을 기억하는 희연은 경계하며 흑염의 아이를 보았고, 덩달아 그 옆에 있는 마늘쫑쫑까지 시야에 담았다.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마늘쫑쫑의 모습이 정말 수상했다.

“이거 꽃 먼저 빼는 사람한테 무슨 일 일어나는 거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마늘쫑쫑의 말에 희연은 생각했다.

역시 이 파티에선 서로 간의 믿음을 기대할 수 없구나!

조금은 잘 굴러가나 싶으니 이제는 배신과 음모가 판을 쳤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아무도 안 말리고 발을 빼는 것을 보며 눈치챘어야 했지만, 이곳에선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만 아니라면 도와주지 말고 되도록 피해는 남이 받게 하자 주의였다.

딜 안 넣는 힐러 파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뜻을 성실히 이행하는 쪽이었다.

희연이 옅은 배신감을 느끼며 역시 이 조별 과제는 망했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돌아가는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모짜렐라가 손을 뻗었다.

“아, 잠깐…!”

“어차피 누구 하나는 해야 해.”

모짜렐라는 만류하는 희연에게 가볍게 대꾸하곤 청년의 입에 물린 마리골드를 빼내었다. 꽃에 가려져 있던 입술 역시 새파랬다.

그러나 꽃을 뺀 덕분인지 파랗던 입술과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손끝이 움찔거렸고, 몸이 움직였다. 그 반동에 나룻배가 흔들리며 물살이 일었다.

함께 흔들리는 클로버 군락 위에서 희연은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깨어나기 시작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잠들어 눈이 빛에 익숙하지 않을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눈을 뜨는 과정에는 한 번의 깜박임이 없었다.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잠들었다기보단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던 이가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눈을 뜬 이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깊게 잠들었다가 이제 막 깬 사람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손에 쥐어진 검날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는 모습이 여전히 멍해 보였다.

이제는 푸르지도 않고 생동감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희연은 여전히 그를 보며 도자기를 떠올렸다.

앞서 도자기를 떠올린 것이 창백한 낯 때문이라면 지금 생각한 도자기란 귀한 것, 혹은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단 의미에서였다.

푸른 기가 빠진 뺨은 햇살에 익은 듯 붉고, 높게 묶은 갈색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 밑에 부분이 모두 흘러내렸다. 옷에는 흙과 먼지가 묻어 있어 지저분했다.

무엇 하나 정돈되지 않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화 속 비단옷을 입은 귀족 같았다.

동시에 희연은 이번에도 시드론의 왕녀를 떠올렸다. 검은 베일의 여인도 그렇고 그 아들인 차일드 롤랜드로 추정되는 눈앞에 청년도 그렇고. 모두 비슷한 느낌이 났다.

오만한 태도와 몸에 밴 기품이 당연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특유의 느낌말이다.

단순히 같은 푸른색의 눈을 갖고 있다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눈동자 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저를 둘러싼 이들을 훑기 시작한 그 눈빛이 닮은 거였다.

“…!”

희연은 조금 움찔거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에 반사된 빛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손을 들어 올린 희연은 눈을 더듬었고, 차일드 롤랜드는 오른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그 상황에서 희연이 제대로 본 것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흩날린 꽃이 호수 위로 떨어지는 거였다.

챙…!

바로 옆에서 금속음을 듣고서 태평하게 눈이나 비비고 있을 수는 없었다. 희연은 손을 떼고 곧바로 눈을 돌렸고, 차일드 롤랜드에게서 꽃을 빼낸 불이익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다.

“이게 진짜….”

차일드 롤랜드가 모짜렐라를 공격했다. 모짜렐라는 불이익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와 힐러의 힘 싸움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희연은 그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 서둘러 총을 들어 올렸으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총을 쏘지 못했다.

차일드 롤랜드가 고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못한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짜렐라의 발을 걸었다.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어도 상대가 치졸하게 발을 걸 거라곤 예상 못 한 건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삐약 소리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치즈!”

희연은 아슬아슬하게 그런 모짜렐라를 붙잡았고, 같이 물속을 향해 비틀거렸다. 누구들처럼 멋지게 그를 단박에 끌어당기기엔 아직 희연의 힘 스텟은 부족했다.

“으왁!”

그래서 희연은 대신 바로 옆에 있던 이를 붙잡았다. 희연이 잡은 건 흑염의 아이의 망토 자락이었다. 그러나 킹스메이커처럼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힐러나 마법사나 힘 스텟은 거기서 거기였다.

두 명분의 무게를 흑염의 아이는 조금도 버티지 못했고, 그 결과 간신히 버틸락 말락 했던 희연마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뭔데 진짜!”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 불이익에 결국 이중 유일한 힘캐인 마늘쫑쫑마저 경악하며 나서게 되었다.

“누구 하나는 좀 제대로 서 봐요!”

마늘쫑쫑이 외쳤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당장에 모짜렐라는 바로 등 뒤로 물이 찰랑거리는 걸 느끼는 중이었고 희연의 두 다리는 이미 꺾였다. 흑염의 아이는 간신히 발끝만 클로버 위에 걸친 상태였다.

물에 안 빠지겠다고 몸에 힘주고 있는 건 셋 다 마찬가지였기에 졸지에 마늘쫑쫑은 힘 꽉 준 세 명을 붙잡고 있게 된 격이었다.

호수가 아니었다면 안전한 곳으로 집어 던지기라도 했을 것을, 사방이 물인 환경에선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그냥 반대쪽으로 셋 다 빠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은 셋을 끌어당기는 거였으나 그건 아무리 힘 좋은 마늘쫑쫑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지만 말고 도와!”

결국 악에 받친 마늘쫑쫑이 일의 원흉, 불이익을 주는 대상 차일드 롤랜드에게 소리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할까요?”

차일드 롤랜드는 얄궂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삐약 너 때문이잖아!”

던전 공략에 있어 중요한 NPC인데 저렇게 욕해도 되는 건가 생각했던 희연은 슬슬 모짜렐라의 앞섶을 붙잡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곤 좀 더 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마늘쫑쫑은 셋을 못 끌어당기는 것이지 현상 유지는 했다. 문제는 희연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론 모짜렐라를 한 손으론 흑염의 아이를 붙잡은 상태였다.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냥 포기하고 함께 입수해 버릴까, 하고 희연이 포기하려던 찰나, 드디어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콜록….”

비록 그 대상이 하필이면 목덜미를 잡아 목이 졸렸지만 호수에 빠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희연은 자연스레 흑염의 아이를 잡은 손에선 힘을 풀었다. 그녀 하나쯤은 마늘쫑쫑이 수월하게 구해낼 수 있었다.

모짜렐라와 함께 훅 당겨진 희연은 클로버 군락 위를 가볍게 굴렀고, 조금 축축해진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예상했던 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자는 안 죽겠다는 의지, 아주 잘 봤다?”

“…….”

이 와중에 놀리기나 하고, 나빠 진짜….

그래도 나름 감사한 마음이 생길락 말락 했는데, 방금의 한 마디로 그 마음은 반항적인 것의 종류로 뒤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마늘쫑쫑과 흑염의 아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라도 있었지 마리아는 그냥 구경하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 안 해줬다.

전자나 후자나 엇비슷하긴 했지만 당한 게 있다 보니 희연의 입장에선 후자가 더 못되게 느껴졌다.

그러나 덤빌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마리아를 조금 노려보던 희연은 한숨 한 번 내쉬고는 모짜렐라를 확인했다. 긴 머리칼이 홀딱 젖은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잠재우고 있었다.

차일드 롤랜드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화난 게 아니라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는 점에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중요한 NPC야….”

“아니까 지금 참고 있는 거야.”

“…그래 보인다.”

지팡이를 꽉 쥔 모짜렐라의 손등 위를 톡톡 두들긴 희연은 심호흡을 권장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의 원흉이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훌륭한 동료애네요.”

눈이 마주친 차일드 롤랜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 물에 빠질 뻔한 위험을 감수하고 모짜렐라를 붙잡은 희연의 모습이 그에게는 재밌는 유흥거리였던 모양이었다.

“…….”

그러나, 그녀의 고생을 구경거리 삼는 사람이 이미 있었기에 희연은 상대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았다. 비웃음? 이미 많이 당했다. 비꼼? 이미 많이 당했다. 공격? 그것도 슬프지만 당했다.

마리아는 마치 필요악처럼 희연을 단련시켰다.

덕분이라고 하기 정말 싫었지만, 희연은 그간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차일드 롤랜드?”

“그래요. 내 이름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당신들이 누구인지 나한테 알려줄 차례군요. 내가 이방인이랑 말 섞는 날이 다 오다니. 참 별일이네요.”

미소 짓는 얼굴은 여전히 고상하고 언뜻 남은 소년의 모습 덕에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말투는 공격적이었다.

“나를 찾은 이유, 내 앞에 선 까닭.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들을 적대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자, 그럼. 이제 변명해 봐요. 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노골적인 모습은 차일드 롤랜드가 그들을 경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는 방긋방긋 미소 짓는 와중에도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설마 이번 준보스는 차일드 롤랜드인 건가, 하고 생각했다. 웃는 낯만 지운다면 차일드 롤랜드는 언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동시에 희연은 던전과는 별개로 검은 베일 여인에게 따로 받은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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