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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45)화 (245/251)

245화

[멈춰 버린 태양 : 검은 탑의 이름 모를 여인은 매일 구슬픈 울음을 흘린다. 멈춰 버린 태양 아래 검은 탑, 그곳에 사는 타락한 요정 왕이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의혹과 고통 속에 살다 검은 베일 속에 숨어든 그녀에게 잠깐의 안식을 안겨주자.

‘고통과 의혹 끝에 남은 것은 잔혹한 희망이다’]

[퀘스트 조건 : 방황하는 이들의 속박 풀기]

[보상 : 어느 왕국의 보물 상자

(실패 시 하루 동안 던전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 도전 불가)]

퀘스트 조건은 차일드 롤랜드를 구해와라, 같은 게 아니었다.

앞서 나눴던 대화, 던전을 진행하며 만난 NPC들이 한 말, 그 모든 걸 조합해 봤을 때 차일드 롤랜드를 만나는 건 필수였다.

그러나 막상 그를 보고 난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밝혀진 적이 없었다.

희연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조금 당황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렴풋이 차일드 롤랜드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가 알려주지 않을까 했던 예상이 무너졌다.

“그게….”

“그게?”

“부탁을 받고 오긴 했는데….”

“누구의?”

희연의 시선은 자연스레 모짜렐라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던 그녀의 친구도 요정의 무덤 던전이 초행인 건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는 하늘색 눈을 본 희연은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던 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 아이 님…!”

“멍청하게도 제 발로 안락한 요람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마늘 님!”

잘못된 제 선택을 실감하며 희연은 서둘러 대상을 바꿔 불렀다. 지금 이 대화는 싸우자고 하는 대화가 아니었다. 흑염의 아이가 말해봤자 싸움만 난다.

다행히 마늘쫑쫑은 차일드 롤랜드가 주었던 불이익에 파티원이 줄줄이 당했단 분노가 잠재워졌는지 욕을 섞지 않고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린 좋은 검 하나 믿고서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가출한 막내아들 좀 어떻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

“…….”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걸 저렇게…?

마늘쫑쫑의 분노는 별로 잠재워진 게 아니었던 듯했다. 희연은 이런 식으로 말해도 퀘스트가 진행되는 건가 싶어 긴장한 채 차일드 롤랜드를 지켜보았다.

강렬한 단어 선택에 충격을 먹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도 문장의 맥락에 집중했다. 뜻을 이해하려 했다.

“그렇군요. 당신들은 내 어머니께서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보낸 자들이었어….”

희연은 조금 긴장을 풀었다. 보아하니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내 용기가 어머니께 있어선 철없는 막내아들의 만용처럼 느껴졌으리란 걸 모르지는 않아요. 내 선택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고요.”

“…….”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죠. 나는 내 누이와 형제들을 구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건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신들이 나를 모시러 온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그래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당신들은 문책을 받게 되겠네요. 날 위해 고생한 이방인들에게 그런 불이익이 생기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퀘스트 실패하면 문책도 받나? 아닐 것 같은데….

멍하니 생각하던 희연은 이어지는 차일드 롤랜드의 말에 조금 놀라움을 표했다.

“그래, 그대들이 나를 도우면 되겠네요. 내가 하루빨리 일을 끝낼 수 있도록 말이에요. 겨우 이방인 따위가 나와 함께 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기꺼이 내 뒤에 설 영광을 주도록 하지요.”

오만하다. 존댓말로 오만해서 그런가? 더 재수 없었다.

시드론의 왕녀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희연은 제법 놀랐다.

“난 저래서 차일드 롤랜드가 싫어….”

흑염의 아이에게 꿍얼거리는 마늘쫑쫑의 말을 들은 희연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차일드 롤랜드를 향한 마늘쫑쫑의 분노는 축적된 분노였던 듯했다.

어쩐지, 무지 싫어하더라.

욕부터 하고 본 이유가 있었던 거다.

하지만 차일드 롤랜드가 재수 없다고 해도 그들은 그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퀘스트를 깰 수 있고 던전 공략도 진행되니 말이다.

비록 차일드 롤랜드는 재수 없었지만, 오만했지만, 짜증났지만, 던전과 퀘스트의 성공을 위해선 함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 물기를 빼내는 모짜렐라의 표정 역시 매우 불쾌하고 짜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말을 얹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뒤로하고 퀘스트를 선택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신기하네요. 요정의 요술인가요?”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뿐 아무도 입 밖으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음에도 차일드 롤랜드는 당연하게 그들이 제 일행이 된 양 굴었다.

그는 검을 휘두르고 공격한 건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고 나룻배에서 내려 클로버 군락 위로 올라왔다.

차일드 롤랜드가 옷 위로 걸친 갑옷 탓에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 그는 아슬아슬하게 무게를 넘기지 않았는지 클로버 줄기가 끊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갑옷이 판금 갑옷 같은 것이 아닌 가볍고, 심장과 어깨 같은 부위만 집중적으로 보호하는 가죽 갑옷이라 그런 것 같았다.

제 앞을 막는 장애물 따윈 없다는 듯 차일드 롤랜드는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희연을 포함한 다른 이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고기 방패로 써먹어 주마….”

“…….”

희연은 뒤편에서 중얼거리는 마늘쫑쫑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해 주었다.

그래도, 싸울 수 있는 인원이 하나 늘어났다는 점에 대해 그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 덕에 현재 파티는 탱커가 두 명인 듯 한 명 반인 듯한 상태로 굴러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름 탱커 역할도 하면서 근접전이 가능한 검사가 늘어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여태 그녀가 만난 NPC 중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는 게 가능했던 이중에 무력적으로 아쉬운 면모를 보여준 이가 없단 점에서 희연은 기대를 거는 거였다.

헬르벨이 그러했고, 무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힐두르도 강했다. 그리고 시드론의 왕녀 역시 아주 강했다.

차일드 롤랜드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게 희연의 바람이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으나 근거 없는 믿음인 것도 아니었다.

킹스메이커가 그랬다. 주요 NPC일수록 외양이 뛰어나다고.

희연이 아주 강하다 평가한 셋 모두 외양이 뛰어났다. 그리고 강했다. 차일드 롤랜드 역시 외양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편이니 지금껏 보았던 경우처럼 강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되는 거였다.

차일드 롤랜드가 든 검이 그런 희연의 기대심에 불을 붙였다. 앞서 만난 노인이 말했듯 귀하디귀한 보검으로 보이는 검은 흙투성이가 된 의복과 달리 깨끗하고 반짝였다.

검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일격에 끝내버리는 검사,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의 검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

희연이 어떤 희망을 품고 있을지 모를 그 희망의 대상자는 호수를 벗어나 땅을 밟자마자 입을 열었다.

“음? 당신들은 또 누군가요?”

차일드 롤랜드가 보고 있는 건 무게 탓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강자와 트롤이었다. 그가 두 사람을 훑는 사이 뒤편에 있던 희연을 비롯한 일행은 알아서 그 옆길로 빠져나와 땅 위로 올라섰다.

“아아. 이들의 일행? 동료? 그런 건가 보네요? 뭐가 됐든 상관은 없죠. 당신들 역시 나를 위해 온 것일 테니 말이에요.”

차일드 롤랜드는 참 쉽게 처음 보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제 밑으로 보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다짜고짜 칼부터 휘두르고 발을 걸어 호수에 빠트리는 것보다는 낫긴 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 배신당할 염려 같은 게 없는 걸까? 차일드 롤랜드의 오만함이 실력에서 오는 것일 거라 굳게 믿으며 희연은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언덕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죠?”

차일드 롤랜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희연은 당장 진행할 수 있는 것을 거론했다. 하지만 차일드 롤랜드는 희연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엄연히 모시는 사람을 두고 먼저 의견을 내다니. 이방인라고 해도 참….”

“…불만이면 저 대신 의견 내보실래요?”

“말투가 무례하네요.”

와. 짜증 나.

욕설도 없고 존대도 하는데 차일드 롤랜드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을 열 받게 만들었다.

이 꼴을 파티 끝날 때까지 봐야 하는 건가? 그 생각이 들자 희연은 입을 열 의욕이 사라졌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희연의 모습에 방패 전사 강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미리 예견한 듯했다. 차일드 롤랜드를 한 번만 겪어보면 알게 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우리. 파이팅 파이팅.”

파티원들을 격려한 방패 전사 강자는 차일드 롤랜드에게 물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던 게 뭔지 기억하시는지…?”

“아….”

낯을 조금 찌푸린 차일드 롤랜드는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던전에서 가장 처음 만난 노인 역시 보였던 반응이기에 의욕이 사라졌던 희연도 그 모습에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게요. 이상하네. 왜 기억이 잘 안 날까요. 호수에서 잠든 것도 그렇고 나도 모르는 새 요술에 당한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던 차일드 롤랜드는 그간의 제 행적을 짚으며 입 밖으로 내뱉었다.

“누이와 형제들을 찾으러 왔고, 말을 돌보는 노인과 소를 돌보던 남자를 만난 것이 기억나네요. 그리고 나는… 언덕 위에서 누군갈 만났죠. 날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던….”

“눈물…?”

“소를 돌보는 남자가 언덕 위에 노파를 만나러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갔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정말 요술에 당한 건가….”

고상한 낯이 찌푸려졌다. 차일드 롤랜드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믿을 구석이라곤 제 손에 들린 검밖에 없다는 듯, 검을 몸쪽에 가까이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이 일그러지니 다소 사회성이 떨어지고 재수 없던 모습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언덕 위에 노파를 만나러 가야겠네요. 그곳에 간다면 뭐든 알아낼 수 있겠죠. 날 모시러 왔다면 길 정도는 당연히 익혔겠죠? 안내해요.”

“아 옙. 물론이죠.”

사회성 있게 대답하는 방패 전사 강자의 모습이 오늘 본 모습 중에서도 손에 꼽게 힘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차던 희연은 잊고 있던 또 다른 과제가 떠올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빨래.”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차일드 롤랜드 때문도 있었지만 노인의 작은 심부름을 위해서도 있었다.

뒤돌아 호숫가 주위를 살펴보는 희연의 모습에 모짜렐라가 무엇을 찾냐며 물어보았다.

“빨랫감. 그것도 가져다 달라고 했었잖아.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아, 그거.”

모짜렐라 역시 뒤늦게 그 사실이 떠올랐는지 희연과 함께 빨랫감을 찾기 시작했다. 덩달아 근처에 있던 마늘쫑쫑과 흑염의 아이도 합류하게 되었다.

“저 이거 알아요. 여기쯤에 있는데….”

특히 마늘쫑쫑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수풀에 떨어져 있던 기다란 나뭇가지를 가져오더니 이제는 시들어 사라지기 시작한 클로버 군락 근처로 이동했다.

호수 안에 나뭇가지를 넣어 들쑤셨고, 이내 월척이라 외치며 무언가를 건져 올렸다. 물살을 가르고 튀어나온 것은 하얀 옷가지였다.

“…이거 피 묻어있는데요?”

정확히는 오래된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하얀 옷가지였다.

마늘쫑쫑이 든 나뭇가지에서 옷가지를 빼낸 희연은 이게 맞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나 핏자국이 많이 남았는지, 물비린내를 뚫고 비릿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일단 건진 건 갖고는 가자 싶어 희연은 옷가지를 쥐어짜 물기를 털어냈다. 물에 젖은 옷이라 무게가 조금 나갔지만 모짜렐라도 아니고, 희연은 이 정도는 거뜬히 들고 갈 수 있었다.

“그 옷. 그건 내 옷이네요.”

“…네?”

방패 전사 강자의 사회성이 마음에 든다는 듯 그 주위를 서성이던 차일드 롤랜드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한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언제 왔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몸을 기울이며 옷을 살피는 차일드 롤랜드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담담한 눈은 오로지 사실만을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요? 이 옷?”

“그래요. 그 옷. 여기 내 이름으로 된 자수도 있잖아요. 솜씨를 보아하니 내 유모가 정성껏 수놓아 준 내 이름이네요.”

차일드 롤랜드의 말대로 목덜미를 덮는 안쪽 천에는 금실로 작게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희연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 빨랫감은 잿빛 망토 노인의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 노인이 차일드 롤랜드의 피 묻은 옷을 대신 빨아주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설마 잿빛 망토의 노인이 차일드 롤랜드의 유모였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차일드 롤랜드의 옷이 노인의 빨랫감이 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희연의 혼란은 이어지는 차일드 롤랜드의 말에 더욱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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