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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46)화 (246/251)

246화

“하지만 난 이런 옷을 가진 기억이 없어요.”

“본인 옷이라면서요?”

“내 이름이 수놓아져 있으니까요.”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깃구깃해진 옷을 펼쳐 보았다. 발목까지 올 정도로 긴 옷은 이제 보니 평범한 옷이 아닌 제의에 입을 법한 의복이었다.

모짜렐라나 이세인의 옷과 비슷한 다소 신실해 보이는 옷이었다. 비록 피가 잔뜩 묻어있었지만 말이다.

조금 고민해 보던 희연은 들고 있던 것을 차일드 롤랜드에게 내밀며 물어보았다.

“그러면… 돌려줄까요?”

어쨌든 본인 옷이라면 돌려주는 게 맞긴 했다. 그러나 차일드 롤랜드는 희연의 질문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더러운 옷을 어디에 쓰라고요?”

“…….”

“필요하다면 당신이 가지던가요. 나는 별로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네요.”

“아, 그러시구나….”

재수 없어.

희연은 또다시 마늘쫑쫑의 마음에 공감하며 들고 있던 옷을 패대기쳤다. 인벤토리 안으로.

상당히 뚱해진 얼굴에 마리아가 웃는 게 느껴졌지만 희연은 꿋꿋하게 숲길만 따라 걸어 나갔다.

볼일은 모두 끝났으니 이제 다시 언덕 위의 수상한 노인을 만날 차례였다.

***

차일드 롤랜드는 말이 좀 많았다.

굉장히 뜬금없는 평가였으나, 언덕으로 이동 중 희연은 확실히 그 점을 느꼈다. 차일드 롤랜드는 수다스러웠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아쉽게도 이세인이 개인 탈것을 꺼냈기에 희연은 에흐테를 다시 소환하게 되었고, 모두의 탈것을 쭉 훑어본 차일드 롤랜드는 당당하게 희연에게 함께 탈것을 요구했다.

에흐테가 유니콘이라는 점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이다.

차일드 롤랜드는 별로 뒤에 태우고 싶은 동승자는 아니었지만 빠른 던전 공략을 위해 희연은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일드 롤랜드를 뒤에 태우고 이동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거였다. 차일드 롤랜드는 말이 좀 많았다.

“내 어머니는 수완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이방인을 끌어들인 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곳까지 발걸음 하려는 자들이 없는 걸 생각해 보면 이방인인 당신들을 택했다는 점에서 명석하신 나의 어머니의 면모가 아주 잘 느껴져요.”

“아, 네….”

시작은 가족 자랑이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엔 곤란한 주제이기에 희연은 짧게 긍정만 했다.

“알다시피 나의 고향은 조금 폐쇄적인 경향이 있죠. 하지만 날 잘 수행한다면 당신들이 나의 고향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향이 있어요.”

“우와. 그렇구나.”

고향 자랑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방인이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주워듣는 게 많았겠네요. 그러면 그 이야기도 들었나요? 혜미안 성주가 가장 신뢰하는 자의 딸을 위해 사냥 대회를 열어주었다는 소식 말이에요.”

“그랬구나.”

“솔직히 이해되지 않아요. 어떻게 딸의 혼약자를 겨우 유흥의 우승자로 선택하죠? 난 절대 내 누이의 혼약자를 그런 식으로 고르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가여운 신부의 아비는 성주의 압박에 못 이겨 그런 선택에 동의한 거겠죠.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이지만요.”

본인 자랑도 했다.

“아, 혜미안 하니 생각나네요. 성주에게 훌륭한 양조장인이 있다고 하던데, 성주 본인이 그 양조장인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그 술이 그렇게나 특별하다더라고요. 내 형님이 술을 좋아하셔서 관심을 기울였었죠.”

“신기해라….”

자랑을 넘어 가족의 기호 취향까지 알려주었다. 피곤해서 중간부터는 다 흘려듣기 시작한 희연의 태도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티가 났고 차일드 롤랜드는 조금 부루퉁해졌다.

“조금 더 성의 있게 굴어 봐요. 대화는 둘이 하는 거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

지금까지 혼자 잘만 말해왔으면서….

하지만 속내 그대로 말하기엔 차일드 롤랜드는 이번 던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아주 짧게 고민한 끝에 희연은 대충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저는 오빠가 있는데… 술은 안 좋아하고 양배추즙을 즐겨 먹어요.”

“양배추즙? 음. 별로 궁금하진 않은 이야기네요. 이야기에 소질이 없어 조용했던 거였나요?”

“…….”

그러니까 말이다. 이런 남의 가족 기호 성향 같은 게 적절한 이야기 주제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 왜 본인은 했나 모르겠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보라는 의미로 말문을 연 희연이지만 돌아오는 답에는 말할 의욕이 다시 시들해졌다.

희연은 조금 고민했다. 이제라도 방패 전사 강자에게 차일드 롤랜드를 떠맡긴다면, 그는 울까?

비록 방패 전사 강자는 속이 좀 쓰리겠지만, 울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파티가 엎어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응, 역시 지금이라도….

희연이 막 결심하고 에흐테에게 방패 전사 쪽으로 이동하자 말하려던 찰나, 차일드 롤랜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농담이에요. 계속 나만 말하는 것 같아 조금 심술을 부려봤어요.”

두 번 심술부리면 유니콘 위에서 떨어지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희연은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으며 의미 없는 웃음만 지었다.

“당신은 내게 궁금한 게 없어요? 이방인이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희연의 목 뒤로 조금 소름이 돋았다. 역시 뒤에 태우면 안 됐다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차일드 롤랜드에게 물어볼 만한 것. 그게 뭐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희연은 요정의 무덤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혹시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가 뭔지 알아요?”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와 검은 탑의 비밀. 킹스메이커도 그에 대해 알아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혹여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고 던져 본 질문이었다.

“신의 기사? 얼굴 없는 신들의 신도를 말하는 건가요?”

“네? 얼굴 없는 신들이요…?”

그리고 희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돌려받게 되었다.

“…얼굴 없는 신들이라는 게 르센이랑 미르그 말하는 거죠?”

“르센? 미르그? 누구의 이름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설마하니, 신의 이름이라고 할 셈은 아니겠죠?”

“…….”

“맙소사. 농담이죠? 아니면 신을 사칭하는 사람에게 멍청하게 속기라도 한 건가요? 그렇다고 해도 버젓이 이름을 말하는 이를 신이라고 믿다니, 이방인들은 다 그런가요?”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에 차일드 롤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나먼 이국땅, 사막의 나라에선 신에게도 이름이 있단 말을 듣긴 했지만 그곳 또한 이름이 아닌 신을 뜻하는 수식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잡스러운 신앙을 배운 건지 모르겠네요.”

사막이란 말에 반응한 건 악령이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린 인형을 본 희연은 사막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아타마드흐…?”

악령이는 다시 움찔거렸고 차일드 롤랜드에게서도 반응이 나왔다.

“그 이름은 용케 아네요. 하지만 의미는 없어요. 그자는 지금쯤 죽었을 테니.”

“…?”

안 죽고 잘 살아있을 텐데? 술도 만들고 노예 계약서도 뿌리고 스킬 전수도 해주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던데?

킹스메이커와 이름 없는 그분, 두 마법사가 가끔씩 아타마드흐를 언급하거나 뇌물용을 비롯한 아이템 중 그와 관련 있는 것들을 꺼냈기에 희연은 본 적은 없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희연의 입장에선 차일드 롤랜드가 멀쩡히 살아있는 아타마드흐라는 사막의 NPC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였다.

“…….”

설마, 여기 먼 미래 같은 건가?

자연이 모두 파괴되고 피폐해져 모든 생명체가 멸종 직전인 가상의 미래 배경. 던전의 배경으로 써먹기에 적절하긴 했다.

꿈과 희망의 동화세계를 컨셉으로 잡은 게임이 그런 가상의 미래 배경 던전을 깨라고 내도 되나 싶긴 했지만, 희연이 생각하기엔 그거 외엔 자꾸만 어긋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 맞아. 치즈!”

“왜.”

희연의 부름에 모짜렐라는 크림을 타고 바로 옆으로 날아왔다.

“혹시 지도 있어? 시드론 지도 말고, 세계 지도 같은 거!”

“지도는 갑자기 왜?”

물어보면서도 모짜렐라는 착실하게 지도를 꺼내 희연에게 건네주었다. 희연은 지도를 받자마자 펼치며 차일드 롤랜드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중에 아는 나라 하나도 없어요?”

대화가 계속 어긋난다고 느낀 건 차일드 롤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각해진 얼굴로 희연이 건네준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네요.”

“네?”

“더 살펴볼 필요도 없겠어요. 애초에.”

차일드 롤랜드는 대륙의 끝자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다 만 지도잖아요, 이거.”

“…….”

“우리가 사는 대륙은 이렇게 작지 않아요. 이 지도는 절반이나 그려지지 않았고요. 어쩐지. 우리의 대화가 영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말로 잘못된 지식을 배웠나 보네요.”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배울 수 있게 해주겠다, 정착하게 도와준단 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다, 차일드 롤랜드가 장황하게 떠드는 말을 뒤로하고 희연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메르헨 호라이즌의 세계 지도 (제작자 – 탐험가 상향 기원)

: 세계 지도가 없는 불합리한 게임에 대항하기 위해 한 탐험가가 자신의 재능을 바쳐 만든 지도. 이 지도를 사용하는 자들은 자기희생적이며 재능을 아낌없이 베푼 이를 위해 매일 탐험가 상향 문의를 넣어 주어야 한다.]

지도는 유저가 만든 거였다. 잘못 만들어진 것일 리가 없었다.

“…대륙 이동설?”

희연은 멍하니 중얼거려 봤지만 스스로도 그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건 지금의 그녀로선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

고심 끝에 희연은 일단 지도를 모짜렐라에게로 돌려주었다. 차일드 롤랜드의 말에 그 역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그녀 혼자 고민한다고 나올 답이 아니었다. 희연은 빠르게 손을 털기로 했다.

지도를 두고 한 말인 만큼 이 문제는 대륙 단위의 문제였고, 어쩌면 이 세계의 숨겨진 비밀 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알기론 이런 문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기어이 풀어나갈 만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킹스메이커.

적어도 던전이 끝나기 전까진 희연은 이 문제를 신경 쓰지 말자 다짐했다. 이건 킹스메이커와 머리를 맞대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는 문제였다.

지금 고민해 봤자 그녀 혼자 머리 아플 뿐이었다.

***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손 털기로 마음먹은 만큼 희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오히려 이동하는 내내 그 문제로 신경 쓰느라 골머리를 앓은 건 얼결에 함께 이야기를 듣게 된 모짜렐라였다. 그는 중요한 정보를 들어놓고 그것을 뒤로 미루는 것을 영 못하는 눈치였다.

언덕에 도착해 잿빛 망토 노인의 앞으로 이동할 때까지 모짜렐라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기에 방패 전사 강자는 조금 불안해했다.

“저… 모짜렐라 님? 혹시 어떤 말 못 할 불만이 있으신지… 아니면 나이츠 님 때문에…?”

“?”

모짜렐라가 파티 탈주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여긴 듯했다. 지금껏 여러 일이 있었던 만큼 그의 분노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충분히 그런 오해를 하고도 남았다.

다만 모짜렐라가 뭔 소리냐며 표정만 구길 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아 방패 전사 강자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자, 자! 다들 조금만 더 서두릅시다!”

결국 방패 전사 강자가 택한 해결법은 또다시 힐러가 탈주하기 전에 던전을 클리어하기였다. 일행의 기운을 북돋우고 재촉하는 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들은 예상보다 이르게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들의 신발은 기껏 말라붙어 진흙이 떨어졌던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젖은 흙으로 얼룩덜룩해졌지만, 그들을 반겨주는 잿빛 망토의 노인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가죽신을 신고 돌아오는 이들을 반겨주었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병아리들마저 검은 털에 진흙이 묻어나 있는데 여전히 노인 홀로 깨끗해 조금 기이한 광경이기도 했다.

“어서들 오게나. 이번에도 제법 빨리들 왔어?”

노인의 말투에는 약간의 즐거움이 묻어나 있었다. 서둘러 온 그들이 반가워서라기보단 이제부터 벌어질 어떠한 일을 기대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 쪽을 확인했다. 노인의 반응 때문도 있었고, 여기에 온 이상 차일드 롤랜드 쪽에서도 어떠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그의 기억은 이곳에서 끊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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