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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47)화 (247/251)

247화

그러나 차일드 롤랜드의 얼굴에는 잔잔한 평화만이 흘렀다. 그는 뜻 모를 미소만 짓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기억난 것 같은 사람 같지도 않았고, 제 기억이 끊긴 마지막 장소에 이제 막 도달한 사람 같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의뭉스러운 모습에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를 차일드 롤랜드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가져다 달라고 하셨던 게 이거 맞나요?”

희연은 인벤토리에서 마르지 않아 축축하기까지 한 옷을 꺼내 들었다. 호숫가에서는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물비린내와 더불어 또 다른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잊지 않고 챙겨주었구먼. 혹여나 잊고 올까 싶어 마음을 졸였는데 참 다행이야.”

잿빛 망토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희연의 손에서 빨랫감을 거두어갔다. 부러 젖은 옷을 활짝 펴서 보여주는 것이 흥건한 핏자국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아 희연은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리저리 옷을 둘러보던 노인은 그것을 곱게 접어 바구니에 넣었다. 낮춘 몸을 다시 일으키며 허리를 두어 번 콩콩 두들겼지만 그런 것치곤 노인은 굉장히 정정해 보였다.

제 볼일은 모두 다 끝냈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여긴 것인지 노인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차일드 롤랜드에게 몸을 틀었다.

“내게 물을 것이 많아 보이는데, 어찌 그리 조용히 있는지 모를 일이군 젊은이.”

“…….”

“나는 아는 것은 답해줄 것이고 모르는 것은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울 것이라네. 의심은 끝이 없는 법이라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도 없는 법이지. 용기를 내보시게나 젊은이.”

듣기에 따라 차일드 롤랜드를 겁쟁이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비단 희연만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차일드 롤랜드의 웃는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차일드 롤랜드는 말이 좀 많았고, 그 덕에 희연은 그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애가 넘쳤고 자존감도 드높았으며 그에 따라 자신감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여태껏 웃는 낯 뒤로 노인을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차일드 롤랜드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면 아직은 앳된 그의 외양에 어울리는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 말하시니 용기를 조금 내보도록 할까요? 물론 당신에게 내 물음을 답해줄 지혜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내 생 절반도 못 산 젊은이보다는야 아는 게 많지 않게나. 어디 한번 질문해보시게나.”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차일드 롤랜드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은 검 위로 올라갔다.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요정 나라 왕의 어둠의 탑, 어디에 있나요?”

“어둠의 탑이라… 요정 왕의 탑에 어둠이란 수식을 붙이는 건 자네들밖에 없지.”

“쓸데없는 이야기네요. 난 그런 사족은 물어본 적이 없답니다.”

날 선 말투에 잿빛 망토의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인의 손은 언덕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제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파란 언덕이 나타날 것이네.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계단식으로 된 둥근 언덕이지. 그게 바로 요정 왕의 탑이야. 언덕을 해의 반대 방향으로 세 번 돌고, 한 번씩 돌 때마다 주문을 외우게나.”

“…….”

“‘열려라, 문. 열려라, 문. 나를 들여보내 줘’, 세 번을 그리 말하면 문이 열릴 것이고 자네들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걸세.”

주문을 알아내기 위해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야 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희연은 의외로 순순히 들려주는 답에 다행이라 생각하는 한편, 주문이 조금 성의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전에 킹스메이커가 농장에서 써먹은 주문 같은 거였다면 물론 곤란하기야 했겠지만 주문이라기에 조금 더 멋있는 걸 기대했던 그녀로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저 자존심 강해 보이는 차일드 롤랜드가 조금은 유치해 보이는 주문을 외칠 거란 생각에 아주 약간,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어찌 됐건, 드디어 이번 던전의 메인이자 최종 관문이라 볼 수 있는 요정 왕의 탑에 갈 방도가 생겼다.

다른 길로 샐 것도 없이 곧바로 갈 것이니 희연은 확실하지 않아 밀어두었던 고민을 슬슬 꺼내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차일드 롤랜드의 검이 장식이 아닌 이상 그 역시 전투와 관련해 무언가 활약을 할 것이고, 그렇다는 얘기는 그녀와 모짜렐라 둘 중 하나는 검사인 그를 전담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근접이 둘이니 깔끔하게 하나씩 맡는 게 좋으려나?

이제는 전투를 앞두고 우와 새로운 곳이다, 가 아닌 나름 힐러다운 생각을 하게 된 희연은 누가누가 힐러의 분노를 유발하는 폭탄일까 가늠해 보았다.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 흑염의 아이 이 둘은 이미 확정이었고 차일드 롤랜드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하는 상대였다.

“음….”

짧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며 느낀 점을 고려해 본 끝에 희연은 그의 협조성을 앞에 두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결론지었다. 끔찍할 정도라는 소리였다.

이 셋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나 고심하느라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가 움직이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

실상 거칠게 뽑혀 나온 검의 금속음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기에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고 봐야 하는 게 옳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희연은 무어라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외쳤다. 목소리에서부터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희연과 달리 잿빛 망토의 노인은 홀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을 따라 노인의 몸이 흔들렸고, 그런 노인의 목을 겨눈 검 끝이 위태롭게 살갗 위를 오갔다. 차일드 롤랜드가 자랑스레 들고 다니던 보검이었다.

무방비한 약자를 위협하는 사람답지 않게 차일드 롤랜드는 무척이나 담담하고 건조한 어투로 말을 뱉었다.

“당신에겐 유감은 없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에요. 부디 바라건대 당신의 삶에 절반도 못 산 젊은이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기를.”

차일드 롤랜드는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검을 노인에게로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그의 검격은 노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제지당했다.

“불가하네.”

말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말로 설명 못 할 미지의 힘이라도 담긴 것처럼 무정한 손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노인은 두려움 따위 모른다는 듯 손을 들어 차일드 롤랜드의 검을 밀어냈다. 날 쪽에 손을 올려 밀었으나, 주름진 손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네에겐 이미 죽은 자를 한 번 더 죽이는 재주가 없지 않나.”

죽음을 논하는 자답지 않게 잿빛 망토의 노인은 지금껏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생기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자신의 표정이 차일드 롤랜드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과 그리 다를 것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의문, 의아함,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한 옅은 짜증.

차일드 롤랜드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 모든 감정을 내보였다.

미소로 숨기던 앳된 나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내 웃는 낯만 본 입장에선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얼굴이기도 했다.

검을 들이밀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차일드 롤랜드는 일그러진 얼굴로 제 의문을 풀고자 하였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거지.”

노인은 놀릴 생각도 뜸을 들일 생각도 없다는 듯 질문에 곧바로 답을 돌려주었다. 문제는 그 단편적인 답만으로 풀리기엔 그를 둘러싼 의혹이 짙었다.

차일드 롤랜드는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볼 뜻이 생겼는지 검을 완전히 거두었다.

총이라도 휘둘러서 차일드 롤랜드를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희연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색하게 들고 있던 총을 늘어트렸다.

노인은 그 모습들이 재밌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조금 벅차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고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노인이었으나, 생기 넘치는 눈만 본다면 누구도 노인이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할 나이라고 생각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젊은이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나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기대하며 눈물을 흘리는 중이라던 말 말일세.”

잿빛 망토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차일드 롤랜드를 돌아보았다.

“눈물은 나의 의무이지. 차일드 롤랜드. 자네는 어린 만큼 만용을 부리지만 패악은 부리지 않지. 자네는 나름 덕망이 있으며 위용 있는 자이고 말이야. 그러니 나는 자네를 위해 울어줄 의무가 있어.”

“설마, 당신….”

“하지만. 말했듯 자네는 죽은 이를 한 번 더 죽이는 재주가 없어.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지. 그러니 그대 가는 걸음에 눈물 흘려주고 싶다 한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단 뜻이지.”

차일드 롤랜드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희연은 여전히 노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터라 차일드 롤랜드의 반응을 연신 살피며 힌트라도 얻어보려 애써야 했다.

그러나 마늘쫑쫑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귀엣말로 일러주었기에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헛소리를 하는군요. 당신의 말은 꼭 내가… 내가 이미….”

창백해지기 시작한 차일드 롤랜드의 얼굴은 마치 호숫가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파리해졌다. 생기 넘치는 색이 빠진 뺨이 차가워 보였다.

“진실은 잔혹하고, 가끔은 악의적인 편이지. 마지막까지 자네를 지켜본 이로서 감히 충고하건대, 자네와 함께하게 된 이들에게 검을 들이밂으로써 괜한 시험을 하지 말게나.”

“…….”

“그것만이 자네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가는 길일 테니 말이야. 다만 그 자유는 기만일 테지. 자네를 속박하는 족쇄는 여전할 거고. 안타까운 일이야. 자네는 아직 더 살아도 좋을 만큼 나름 훌륭한 젊은이였는데. 잘못된 한 번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왜 이다지도 참담한지.”

노인은 마치 아주 높은 신분을 가진 이에게 인사하듯 망토 자락을 잡고 몸을 굽혔다. 거둬진 망토 아래 드러난 가죽신이 여전히 깨끗해 계속 그것을 신경 쓰던 희연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아…?”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희연의 시선이 닿자마자 가죽신은 깨끗하다 못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을 발이 보였다는 뜻이 아니었다. 희연은 신에서 눈을 떼고 노인의 모습 전체를 눈에 담았다.

노인을 이루는 모든 색이 사라지고 있었다. 희었던 머리는 반투명해 보일 지경이었고, 기이할지언정 지혜롭게 빛났던 두 눈에 담긴 눈동자는 사라졌다.

온몸이 희고 투명하며 눈동자는 없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몸. 희연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이들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밴시.”

요정의 무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상대했던 몬스터였으므로.

여태껏 대화하던 상대가, 심지어 그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던 이가 몬스터였다는 사실에 희연은 제법 당황했고 무의식적으로 총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희연의 손은 차일드 롤랜드에 의해 제지당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이제는 밴시가 된 노인을 가장 먼저 적대했던 그가 제지했다는 점에서 희연은 놀랐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차일드 롤랜드가 제지한다는 건 던전의 진행 과정상 여기서 밴시가 된 노인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노인이 그들을 공격할 리도 없었다.

희연은 손에서 힘을 풀었고, 차일드 롤랜드 역시 검을 꽉 움켜쥐기만 할 뿐 겁에 질린 얼굴로 노인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밴시가 된 몸을 따르듯 노인의 말은 소리로 전달되지 않았다.

부디 내가 눈물을 흘려줄 수 있기를-

바로 옆에서 들리는 한기 같은 말귀에 희연은 귀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사이 노인은 여타 다른 밴시들이 그랬듯 한없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더니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다.

“내가….”

어찌 됐건 다음으로 갈 길을 알려주었으니 밴시 노인이 없어져도 괜찮은 건가 고민하던 희연은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의 차일드 롤랜드의 목소리였다.

“내가….”

절망에 빠진 듯 손을 들어 얼굴을 마구 문지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젓더니 무언가를 부정하듯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희연을 포함한 일행을 돌아보았다.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나요? 손이 아니라도 좋아요. 나를 만져보세요. 내게 온기가 있는지 확인해봐요. 지금도 내 귓가를 울리는 이 심장의 고동 소리가 나의 착각이 아니라 진실이 맞다 확인을 해줄 수 있다면…!”

점차 언성이 높아지며 흥분하던 차일드 롤랜드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럴 리가 없어… 농간이야, 거짓이야…. 나를 절망케 해 포기하게 하려는 속된 계략이야….”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를 바라보며 차분히, 최대한 자신이 이해한 바를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노인은 밴시였다. 그들이 상대했던 밴시. 울음을 흘리는 요정과 언데드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몬스터.

그리고 그 밴시 노인과 차일드 롤랜드의 말을 기반으로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은 하나밖에 없었다.

차일드 롤랜드는 이미 죽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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