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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48)화 (248/251)

248화

“…….”

어쩌면 이곳에 이르기까지 만난 이들 중에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희연은 처음으로 만났던 노인이 한 말이 단순히 과장도, 두려움에서 비롯된 망상을 읊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노인은 차일드 롤랜드가 자신의 목을 검으로 내리쳤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야 노인의 모습은 아무리 다시 봐도 죽은 이라거나 하다못해 다친 흔적도 없어 보였기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차일드 롤랜드만 보더라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으로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인 역시 같은 방식으로 되살아났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소를 돌보던 남자, 그 역시도 차일드 롤랜드의 손에 의해 죽었을까?

그는 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쓰러진 채 자신을 짓밟고 행진하는 이들을 보았다고 했다.

광신도, 전쟁. 그와는 동떨어져 있던 요정의 땅. 하지만 이내 남자가 광신도라 부르던 이들은 무기를 들고 요정의 땅에 침입했다. 행진이라 했으니 말을 탔을 것이고, 설령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침입자인 그들이 남자를 살려줬을까? 전쟁이란 이름이 가져오는 파장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풀밭에 쓰러진 채 행진하는 이들을 보았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쓰러졌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침입자들이 먼저였는지 차일드 롤랜드가 먼저였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죽은 이들에겐 둘 모두 같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고 말이다.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를 힐끗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이 땅에서 사람을 죽였는지, 몇 명을 죽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함부로 생각하고 단정 지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그녀 역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지만 말이다.

어째서 누이와 형제들을 구하러 왔을 뿐인 차일드 롤랜드가 사람을 죽였고 그 역시 죽게 되었는지, 그리고 죽은 이들이 어떻게 멀쩡히 살아 그녀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았지만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사라진 밴시 노인이 알려준 요정 왕의 탑으로 가는 것. 그렇게 한다면 모든 진실은 풀릴 것이 분명했다.

희연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험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절망하는 차일드 롤랜드는 차분히 기다려주고 있었고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제 컨셉을 지키겠답시고 나름 우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짜렐라는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조금 낯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차일드 롤랜드. 그는 희연이 일행의 모습을 한 번씩 훑는 그사이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웅크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뺨은 창백했고 그새 흘린 식은땀이 피부를 더 차갑게 만들었지만 차일드 롤랜드는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차마 떨리는 손까지는 숨기지 못했으나 앳된 기색이 완전히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외양을 고려해 보았을 때, 나이치고는 무척이나 능숙하게 제 두려움을 숨겼다고 평해도 좋을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거,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네요.”

나긋나긋한 어조 역시 돌아왔다. 파란 눈동자가 물기 어려 있었다.

가족 자랑, 형제 자랑, 본인 자랑을 하느라 희연에게 말 많은 차일드 롤랜드라 평가받은 것이 무색하게도 자랑 외의 본인 이야기는 하지 않던 그였다. 정말로 토씨 하나 내뱉은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의혹과 의문이 조금 풀린 지금에서야 드디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누이가 없어지고, 형제들이 사라진 누이를 찾아 떠나며 없어지고. 남은 나를 붙잡고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를 보며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구해오겠다고 말이에요.”

“…….”

“어린 나이의 치기가 아니었고, 감히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난 정말로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고, 그만한 각오도 했죠.”

깨끗한 잠자리, 따뜻한 음식. 극진한 시중과 부드러운 옷감. 차일드 롤랜드의 생에 언제나 함께하던 것들이자 각오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던진 것들이다.

누군가는 겨우 포기한 게 그런 것들이냐 할 수 있었지만 차일드 롤랜드에게는 평생을 함께하던 것이기에 양팔을 내어준 것과 비슷했다. 쉽게 포기했다고 해서 그것들이 가볍기만 한 건 아니었다.

파란 눈동자가 물 흐르듯 보검으로 향했다.

“…우리의 각오란 그런 거였죠. 어머니는 내게 헛되이 쓰인 적도 잘못 내리쳐진 적도 없는 아버지의 검을 주었고, 나는 그 검의 무게를 생각하며 받았어요. 그리고 마법사 멀린을 찾아갔죠. 마법사는 내게 형제, 누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답니다.”

매끄러운 미소에 씁쓸한 감정이 뒤섞였다. 죄책감이었다. 내던진 것들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 감정이었다.

“‘너와 이야기 나눈 사람이 누구건 반드시 네 아버지의 검으로 그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 사랑하는 누이, 형제들을 구한 뒤 무사히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꼭 지켜야 할 규칙이라며 위대한 마법사, 진리의 현자가 답을 주었답니다.”

“그럼….”

“말하지 않았나요. 어린 나이의 치기가 아니었고, 무슨 짓이건 할 각오를 했다고. 비록 그것이 남의 목숨을 가지고 증명해야 하는 바였으나… 내게는 아주 잠시 말을 나눈 이들보다 사라진 내 가족의 안위가 더 중요했어요.”

사람을 죽인 것. 그건 차일드 롤랜드에게 있어 양다리를 내어준 것과도 같았다. 죄책감이 들러붙어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것이 무거웠다.

“살아서 요정의 나라를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돌아가는 것, 그건 내게 의무와 같았어요.”

“…….”

희연은 말을 더 얹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뭐라 한들 정황상 모든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그리고 차일드 롤랜드는 마지막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 같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만났던 검은 베일 여인 역시….

요정의 무덤이란 이름으로 시작되는 지역은 작은 초를 따라 걷던 무덤길부터였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검은 베일 여인 역시 차일드 롤랜드와 그리 다른 존재일 것 같진 않았다.

다만 그쪽은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한없이 기다리다 눈을 감게 된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고 희연은 생각했다.

“나는… 난, 요정 왕의 탑으로 갈 거예요.”

“…….”

“그곳에서 답을 찾을 거예요. 누이를, 형제들을 만나고. 요정 왕을 없애고. 이 지긋지긋한 땅에서 벗어나 어머니께 가족을 돌려드릴 거예요.”

“…….”

“…반드시.”

각오하는 이답지 않게 마지막 말은 떨림으로 끝마쳤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한다 해도 끝내 눈물 흘리기 시작하는 이를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희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흔히 울고 있는 이를 보면 손으로 다독였던 경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차일드 롤랜드는 고개를 저으며 그 손길을 피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방울방울 눈물만 흘렸다. 그마저도 안 울겠다고 다짐하듯 눈을 깜박이지 않아 고인 것만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희연은 손을 다시 내밀었다. 등을 두들기는 손을 차일드 롤랜드는 이번에는 내치지 않았으나 그에 호응하듯 더 울지도 않았다.

“미안해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왜 하는지 알 수 없는 사과였지만 희연은 그 말에 의중을 부러 물어보지는 않았다. 차일드 롤랜드는 그렇게 몇 번이나 사과를 되뇌었다.

헐떡이는 숨에 사과가 끊겼을 때는 새빨개진 눈으로 눈물이 멎을 때까지 언덕 너머 어딘가에 있을 요정 왕의 탑만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눈물을 그쳤을 때, 차일드 롤랜드는 울어서 붉어진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며 조금 웃었다. 그를 만난 이래 가장 많이 보았던 어딘가 밉살맞고 뺀질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고상한, 그런 미소였다.

“자, 이제 나를 안내해 줄래요?”

진실 따윈 모르던 시절의 차일드 롤랜드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온전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외면하기를 택했다.

***

요정의 힘이라는 건 참 알기 어려운 힘이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 역시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희연은 무의식적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요정의 무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맡아보는 청량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숲에 들어선 것도 아닌데 향만큼은 그에 못지않다는 점이 조금 놀라웠다.

희연은 발치에 걸리는 잡다한 풀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밴시 노인이 말했던 대로 정말로 파란 언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계단식으로 쌓인 언덕은 멀리서 보면 초록색의 층층이 쌓인 케이크 같기도 했다.

던전에 그리 오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속 우중충한 광경만 봐서 그런지 언덕 위로 간간이 보이는 작은 들꽃과 매끄러운 풀줄기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희연은 조심스레 풀잎 하나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줄기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안개가 낄지언정 비는 오지 않고 근처에 물줄기도 없는데 살그머니 이슬이 맺혔다.

햇살도, 물도, 땅속의 영양분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요정 덕분일 것이다.

꼬마 요정들이 간신히 숲의 겉모습을 유지했다면 요정 왕은 황폐해진 이 땅에서 유일한 푸름을 지켜냈다. 일부러 그랬다기보단 존재함으로써 그걸 가능케 만든 것 같았다.

언덕을 오르는 마땅한 길이 없긴 했으나 밴시 노인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언덕을 오르는 게 길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러면 이제 주문을….”

열려라, 문. 열려라, 문. 나를 들여보내 줘.

희연이 다소 성의 없다 평한 주문을 차일드 롤랜드가 읊었다. 그들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언덕을 세 바퀴 돌았다.

마침내, 주문에 반응하듯 숨겨진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툭 튀어나온 문은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 마법의 문도 아니었고, 흔해 빠진 나무 문 같은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이라기보단 하나의 입구에 가까웠다. 언덕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터널 입구 말이다.

“그러면… 이제 들어가도록 하죠.”

가장 앞장서 들어간 것은 차일드 롤랜드였다. 용기와 자신감이 넘쳐서 앞장서기보다는 이제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 서두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만요!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 상태 점검하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차일드 롤랜드를 필사적으로 막아낸 것은 방패 전사 강자였다.

차일드 롤랜드를 막은 상태로 다른 일행들에게 이리저리,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아 이 앞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의 의견도 일리는 있네요. 여기서 헛되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간을 주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세요.”

차일드 롤랜드는 수긍했고, 입구 바로 옆에 기대어 앉아 품 안에서 숫돌을 꺼내 들었다. 검날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 역시 만반의 준비를 다 하려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방패 전사 강자는 일행을 돌아보며 살펴야 하는 것들을 일러주었다.

“어차피 싸움 중에는 못 쓰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포션 넉넉한지 모두 확인하시고, HP도 가능한 꽉꽉 채워주세요. 스킬 쿨타임도 한 번씩 보시고, 장판용 함정 같은 거 있으시면 아군이 휘말리지 않게 미리들 알려주세요!”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파티의 협조성에 대한 이야기를… 네, 모두 할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눈물 젖은 방패 전사 강자가 홀로 외로움을 달래는 사이 희연은 스킬창을 열어 확인을 마쳤다.

아직까지는 스킬 가짓수가 많지 않았기에 확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션 역시 킹스메이커가 준 것은 물론이고 이름 없는 그분이 준 것까지 아주 넉넉하다 못해 넘치게 많았다.

총알 역시 부족하지 않음을 확인한 희연은 여유가 생겨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힐러의 눈엔 그들의 HP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

때마침 희연의 눈에 흑염의 아이의 HP가 들어왔다. 포션을 먹어 치료하기엔 아깝고 가만 내버려 두기엔 괜스레 찝찝해지는 정도로 깎여 있었다.

<치료의 빛> 한 번이면 끝날 정도였기에 희연은 총을 들었다. 그러자 내내 제 HP 관리를 방치하고 있던 흑염의 아이가 갑작스레 포션을 들더니 자신의 입에 때려 부었다.

“…?”

뭐지.

어색하게 총을 내리면서 희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흑염의 아이를 쳐다보았다.

어둠이 탐나냐는 소리 안 하는 거 보면 그녀를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참으로 타이밍이 공교로워 의심을 거두기도 애매했다.

조금 고민하던 희연은 MP 아낀 셈 치고 방금의 일은 없던 일로 하기로 결정 내렸다.

어색하게 총을 거둔 희연은 지척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점검을 마칠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접근해 온 것은 모짜렐라였다.

“점검 다 했어?”

“응? 응.”

“그럼 정하자.”

“뭐를, 아….”

폭탄 돌리기의 시간이 왔구나. 희연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탱커부터 나눌까?”

“트롤이랑 네크로맨서로 나눠.”

폭탄을 하나씩 맡자는 말에 희연은 수긍했다. 그나마 마늘쫑쫑과 방패 전사 강자는 말이 통하고 협조적인 편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러면 가위바위보로 나눌까?”

“그러던가.”

희연과 모짜렐라는 고심 끝에 가위바위보로 진 쪽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조금 방치해도 알아서 살아남는 흑염의 아이보다는 방치하는 순간 곧바로 큰일이 나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가 조금 더 난이도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희연의 패였다.

“…….”

더할 것도 없이 빠르게 나온 결과물에 희연은 입만 벙긋거렸다. 이래서 먼저 하자고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다 끝난 뒤에야 희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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