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제 손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희연과 달리 모짜렐라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의 승리를 기뻐했다.
“좋아…?”
“아니, 별로.”
하지만 희연의 물음에는 발뺌하며 아닌 척 시침을 뗐다. 그러나 이제 희연은 알았다. 모짜렐라는 겉으로 티 안 내려 노력하면서 속으로 승리를 만끽하는 타입이라는 걸 말이다.
희연은 너라도 기뻐해서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모짜렐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녀의 생각대로 속으로만 기쁨을 표출하던 모짜렐라는 도중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희연과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좋아하다 말고 왜 그러나 싶어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정말로, 정말 싫단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네크로맨서 맡아.”
“어? 진짜? 근데 내가 졌는데 갑자기 왜?”
희연은 모짜렐라의 갑작스러운 결정이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그렇게나 좋아해 놓고 대체 왜 스스로 더한 폭탄을 안고 가겠다며 자처하는 것인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모짜렐라는 죽은 눈으로 희연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너한테 쟤를 맡긴다고 하니까 갑자기 불안해졌어.”
“…….”
역시 모짜렐라가 이곳에서 믿는 대상은 스스로밖에 없었나 보다.
희연은 모짜렐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실력에 조금 회의감이 들었지만,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조금 기뻐졌다.
“후후… 어둠이 넘쳐흐르는 기분이군.”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흑염의 아이를 보곤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치료는 잘 받아먹던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쪽은 치료해 주려면 설득하든 붙잡든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미 받아들인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희연은 모짜렐라가 그러하듯 악으로 깡으로 해보자 결심했다.
실상 두 폭탄을 나누고 나니 다른 파티원을 나누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기에 두 힐러는 토론이라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각자의 몫을 나눠 가졌다.
희연은 방패 전사 강자와 흑염의 아이. 모짜렐라는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와 마늘쫑쫑. 유일한 문제라고 할 법한 건 차일드 롤랜드 정도였다.
실력도 스타일도 협조성도 모르는 새로운 조원을 누구에게 배정해야 하나가 그들의 유일한 고민이었다.
“…역시 내가 맡을게.”
“너 치료 안 하고 공격 위주로 갈 거잖아.”
“아… 닐걸? 아니야! 애초에 내가 치료 못 하고 공격만 하고 있던 거 다 마리아 때문…!”
“나 불렀니?”
“아뇨… 설마요….”
열심히 의견을 어필하던 희연은 제 이름이 들리자마자 난입한 마리아에 의해 다시 기세가 수그러졌다. 조금 놀랐다.
“거짓말을 하네? 내 이름 나오는 걸 들었는데. 내 착각이라고?”
“착각이에요.”
“그래. 그렇다 치자.”
마리아는 웬일로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그에 놀란 희연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모짜렐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너희는 뭐 때문에 얘기가 끝나지 않는 거야? 보스전 앞두고 빠릿빠릿하게 행동해도 모자랄 판에 뭐가 문젠데?”
“그게….”
희연은 마리아의 인성은 의심해도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여, 별 고민 없이 현재 그들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자신이 있다고 하기엔 조금 그랬지만 마리아가 그녀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자신이 배려받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방패 전사 강자는 경험자였기에, 흑염의 아이는 스스로의 컨셉을 위해서라도 실력을 키웠기에 힐러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크게 손이 가지 않는 대상이었다.
반면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는 그냥 난이도가 높았고, 거기에 더해 마늘쫑쫑은 근접 직업이었기에 모짜렐라는 꽤나 바빠질 예정이었다.
이 상황에 검사 즉, 근접 직업인 차일드 롤랜드는 당연히 희연이 맡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모짜렐라는 미숙한 힐러는 셋 이상 맡지 말아라, 하는 게 의견이었고 말이다.
서로 배려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훈훈한 모습이나 이야기를 다 들은 마리아는 뭐 그딴 걸 고민이랍시고 내놓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희연은 상담받을 대상을 잘못 짚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일은 마리아가 아니라 이세인을 불러야 했었다.
마리아는 희연과 모짜렐라의 고민을 우습게 여기다 못해 조금 경멸까지 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으나 기꺼이 옳은 답을 내놓기는 했다.
“오리가 맡자.”
“하지만…!”
반박하려 드는 모짜렐라를 손을 들어서 막은 마리아는 답지 않게 이유도 알려주었다.
“절절한 우정인지 파티 터지기 싫은 힐러의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독박 쓰지 마렴 치즈.”
“맞아! 맞아!”
“호구처럼 다 끌어안고 가겠다고 네가 나서면 널 가르친 내 마음이….”
슬프다? 미어지다?
“분노로 차오르거든.”
“아….”
옆에서 마리아의 말이 옳다 호응하던 희연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서서 경청만 했다.
“내가 너를 잘못 가르친 건 아닐까 후회하지 않게 하렴. 들어가고 나면 지금 정한 게 의미나 있을까 싶어지긴 할 테지만 말이야.”
“?”
말을 마친 마리아는 더 볼일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희연과 모짜렐라는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가만있다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네가 맡아.”
“그래….”
어쨌든 평화롭게 배분이 끝났다.
“응?”
한숨 돌릴 겸 주위를 둘러보던 희연은 차일드 롤랜드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작달막한 크기가 참 익숙했다. 그제야 그녀는 평소보다 어깨가 가벼운 것을 깨달았다.
희연이 모짜렐라와 그들만의 치열한 논쟁을 하는 동안 심심해진 악령이가 넬을 끌고 바로 코앞으로 나들이를 나간 것이다.
심각한 얼굴로 손질이 끝난 검을 붙잡고 있는 차일드 롤랜드의 존재가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악령이는 참 해맑게 그 옆에서 입구의 돌벽에다가 풀을 으깨 만든 풀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넬은 눈치를 보는 모양이긴 했지만 악령이를 혼자 두고 자리를 뜰 수가 없어 주위를 맴도는 모양이었다.
가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희연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그들 쪽으로 이동했다.
“악령아, 그러지 마. 이리 와….”
“나 말고도 낙서 많이 했어!”
낙서한 것을 가지고 뭐라 하는 줄 알았는지 악령이는 화들짝 놀라며 제 죄를 무마하려 했다. 악령이의 말에 희연의 시선은 자연스레 돌벽으로 움직였다.
확실히, 돌벽에는 정말로 낙서가 많긴 했다. 유혹에 약한 악령이가 냉큼 달려가 나도 해야지 할 만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낙서가 좀…?
“…?”
유심히 낙서를 바라보던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낙서가 어디서 좀 많이 보던 유형들이었다.
여기 왔다 감, ㅇㅇ♥ㅁㅁ, 010…
일단, 절대 이곳 NPC들이 새긴 것 같진 않았다. 범인은 무조건 유저들이었다. 이런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 듯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랗게 그린 해골 도트 그림과 그 아래 문구였다.
‘당신은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경고문인가?”
마지막 것은 범인이 유저인지 NPC인지 조금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던전의 끝을 앞두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문구를 다시 읽으며 희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마리아가 다가와 말을 툭 내뱉었다.
“너 이거 몰라?”
“네? 네에….”
“쯧, 이래서 머글은.”
“…?”
아레나 얘기 듣고 헤맬 때 보인 반응과 비슷한 모습에 희연은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알아야 하는 거예요?”
“아니.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그냥, 알면 각오하고 들어가는 거고 모르면… 맞아야지.”
“…?”
“헤딩팟의 재미란다 오리야. 즐기렴.”
마리아는 즐기라고 했지만 희연은 무척이나 불길해졌다.
“자, 잠깐만요….”
희연은 애처로이 마리아를 불렀지만 그녀는 부름을 무시하고 곧바로 방패 전사 강자에게로 갈 뿐이었다.
“들어가죠? 시간 그만 끌고?”
“어, 아직 설명을….”
“사람은 위기 앞에서 성장하는 법이라. 쟤네 시야 훈련하게 말하지 말고 들어가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아, 물론 강요는 아니고 그냥 내 바람?”
방패 전사 강자는 희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음을 어필하는 모습이었다.
“모두… 들어갑시다.”
조금만 더 버티면 좋았을 텐데!
부랴부랴 던전의 마지막 관문에 관해 검색을 하던 희연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모짜렐라 쪽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 검색하는 것을 실패했는지 영 낯이 좋지 못했다.
다만 짐작 가능한 것은 마리아가 거론한 시야 훈련이란 단어였다. 이 앞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두 눈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일 터였다.
“준비가 끝났다면 이만 들어갈 볼까요?”
지금이라도 선두에 선 차일드 롤랜드를 탱커들의 뒤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하며 희연은 입구에 발을 들였다.
그래도 밝은 곳에 있었다고, 막상 어둑한 길로 들어서자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연신 눈을 깜박였다.
언덕의 입구는 그리 신비로울 것이 없었기에 희연은 그 안 역시 바깥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선 장소가 지금까지 있던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서늘하고 끈적이는 안개 속 같던 기후가 바뀌었다. 단순히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기에 생기는 차이가 아니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훈훈한 열기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과 함께 살랑살랑 뺨을 간질였다. 안개와 습기에 눅눅하게 젖어든 옷이 말랐고, 서늘한 기온에 따라 조금 차갑게 식었던 몸도 따듯해졌다.
사방이 막혀서일까, 아니면 몸이 따뜻해져서일까. 희연이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엣츄-!”
“!”
나른하게 늘어지던 몸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희연은 자신이 걸으면서 졸았다는 점에 놀라며 제 뺨을 손으로 꾹 눌렀다. 정신을 차린 것도 잠깐, 그녀는 다시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자신만 이런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 희연은 뒤늦게 정신이라도 차린 자신과 달리 아예 눈을 감고 있는 모짜렐라와 언제 쓰러진 건지 모르겠지만 졸음에 저항도 안 하고 드러누워 자고 있는 다른 일행들을 발견했다.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있는 건 차일드 롤랜드와 마리아, 이세인 정도였다.
후자의 두 사람은 규격 외라 그렇다 치고, 차일드 롤랜드만 멀쩡한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정해진 스토리인 듯했다. 희연은 졸음에 저항하는 것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실 걷는다고 생각한 과정마저 제자리걸음이나 다를 게 없었기에 앉든 서 있든 다를 게 없었다. 겸사겸사 그녀는 모짜렐라도 함께 주저앉혔다.
“이런.”
희연의 예상대로 홀로 멀쩡히 나아가던 차일드 롤랜드는 뒤따르는 걸음 소리가 사라지자 뒤를 돌아보았고, 전멸한 파티를 보게 되었다.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은 보자 싶어 희연은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차일드 롤랜드는 마리아와 이세인을 지나쳐 다른 일행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여겨서일까, 그의 낯은 웃지 않았다. 고민하듯 손이 검 위를 오갔다. 하지만 끝내 그는 검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주위를 살피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희연은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에 고개를 기울였다.
단순히 돌바닥의 거친 표면이라고 하기엔 손 밑을 굴러다니는 감촉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모래라고 하기엔 입자가 그보다 더 작고 고왔다.
[<요정의 가루> : 요정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로 과도하게 흡입할 시 환상을 보게 되거나 깊은 꿈속에 빠지게 된다.]
손에 묻어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가루를 확인한 희연은 자꾸 감기는 시야로 가루의 출처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몸은 힘겹다고 판단한 것인지 더한 수마가 몰려들었다.
흐릿하게나마 들리는 차일드 롤랜드의 목소리만이 희연이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저항하지 말고 입을 벌려봐요. 자, 착하죠. 씹어요.”
“…?”
그러나 소리만 듣고 모른 척하기엔 차일드 롤랜드의 발언이 심상치 않았다.
희연은 애써 눈을 떴고, 돌벽 틈에 자라난 식물을 뽑아다가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의 입속으로 쑤셔 넣는 차일드 롤랜드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