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아, 눈 떴네요? 아닌가?”
“지금… 뭐 먹인 거….”
어깨를 으쓱인 차일드 롤랜드는 다른 일행들의 입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을 쑤셔 넣었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요정의 가루를 먹고 자란 풀은 신기하게도 그와 반대되는 힘을 갖게 된다고요. 이게 그 풀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먹어도 죽지는 않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뭐가 괜찮다는 거지…?
괜찮은 건 하나도 없었지만 희연은 제 앞에 들이밀어 지는 풀을 억지로나마 삼킬 수밖에 없었다. 던전 진행을 위해서라도 차일드 롤랜드가 잘못된 것을 줄 리 없다 믿어서였다.
과연, 그 믿음에 응답하듯 늘어지기만 하던 몸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연의 표정도 깨어나기 시작한 이들의 표정도 썩 좋지는 못했다.
“잠이 깼다면 삼킬 필요까지는 없어요.”
희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으적으적 씹고 있던 풀을 뱉어버렸다. 맛이 꼭 어릴 때나 먹던 가루약과 흡사해 입안에 넣는 것만 해도 상당히 고역이었다.
풀의 효과라기보단 그저 맛없어서 잠이 깬 것 같긴 했지만 희연은 결과만 보기로 했다. 어쨌든 모두를 잠에서 깨우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아무래도, 요정 왕은 우리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이런 잡스러운 함정까지 설치해놓다니…. 이 앞에 남은 길 역시 그리 순탄하진 않을 것 같네요. 본격적으로 나아가기 전에, 당신들은 정말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남들이 괴로워하건 말건 자신이 할 말만큼은 똑 부러지게 끝낸 차일드 롤랜드가 차례차례 일행을 훑어보았다. 분위기상 모두가 그렇다, 하고 답하고 길을 나설 차례였다.
그러나 실질적 파티장 방패 전사 강자가 그 분위기를 깨트렸다. 그들이 해야 할 준비가 많았던 것이다.
“아, 잠깐만요. 여기서부터 모두 도핑 돌려주세요. 가능한 이동 속도 증가 위주로 해주시고, 쿨타임 감소랑 마법, 물리 방어 쪽도 챙겨주세요.”
“…도핑?”
당황스러운 건 희연뿐인지 모두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약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상황엔 상당히 적절하지 않은 정갈한 음식을 하나둘 꺼내 들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작은 등불도 꺼내 주위를 밝혔다.
먼지와 요정의 가루가 폴폴 날리는 것 정도야 실제로 입에 들어가는 게 아니니 감수할 수 있다 쳐도,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호화로워 보이는 음식을 꺼내 먹는 모습들이 익숙해 보인다는 점에서 희연은 상당히 기이하다는 감상을 받았다.
차일드 롤랜드는 갑작스레 피크닉 분위기를 내는 이방인들을 이해 못 하겠다는 눈빛으로 볼지언정 침묵하며 기다려주고 있었다.
희연의 감상 역시 그와 비슷했지만, 파티원들이 괜히 저러는 게 아닐 것이라 믿으며 일단은 인벤토리를 열어 음식에 해당하는 것들을 확인했다.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스커레이드에서 갖고 나온 케이크를 손에만 들고 있는 희연의 모습에 바로 옆에서 돌돌 만 파스타를 씹던 모짜렐라가 입을 열었다.
“도핑은….”
“그게 뭔지는 나도 알아.”
“네가?”
모짜렐라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얼굴을 했기에 희연은 그가 들고 있던 포크를 손수 입속에 넣어줌으로써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주었다.
존성대명에게 납치되기 전, 뉴비세스 메이커와 양떼목장 길드원들이 한데 모여 온갖 버프를 두르는 것을 보았기에 희연도 도핑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 그들이 사용한 것은 약물 위주였지 이런 음식 같은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방패 전사 강자가 요구한 이동 속도와 쿨타임 감소, 방어력을 높여주는 효과를 지닌 케이크를 입속에 밀어 넣으며 희연은 생각했다.
필요한 과정인 건 알겠지만 참 분위기 깬다고 말이다.
“준비는 끝났을까요?”
“넵! 갑시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자, 가벼운 식사 시간이 끝나자 차일드 롤랜드는 다시 가벼운 웃음을 걸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꺼내놓은 등불이 길을 밝혀주어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등불의 효용성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점차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방이 환하게 빛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황혼녘 땅거미 진 아래 있는 정도로만 밝아졌다. 그쯤 되어서는 들고 있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기에 등불을 꺼냈던 이들은 그것을 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적어도 앞을 못 봐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희연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창문도 촛불도 없는 이곳에서 은은히 비추어진 빛이 어디서 난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걸음을 내디딜 때 나는 발걸음 소리가 둔탁하고, 짧게 퍼져 나갈 때부터 예상하긴 했으나 시야가 확보된 지금, 그들이 나아가는 길의 벽, 바닥, 천장 모두 가릴 것 없이 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더 와닿았다.
오래된 곳 특유의 분위기가 흘렀으나 바닥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누군가 다듬은 돌을 하나하나 끼워 맞춘 수준은 아니었으나 명백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꾸며지지 않은 길이 마냥 투박하다고 하기엔 천장을 둘러싼 아치 장식이 유려했다. 투명한 암석으로 만들어져 은과 나무, 반짝이며 빛나는 이름 모를 돌로 덮인 아치는 이곳이 평범한 길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아치 아래, 바로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방패 전사 강자가 물었다.
“혹시 요정 가루 파밍하실 분 있나요?”
“?”
그가 가리킨 방향은 아치를 장식하는 빛나는 이름 모를 돌이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입자가 자글자글 모인 것이 꼭 물 먹인 모래가 뭉친 것 같은 꼴이었다. 물론 그 색은 진주처럼 희고 고왔지만 말이다.
그것이 요정의 가루가 뭉쳐진 것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은 희연은 잠시 고민하다 나름 기념이다 싶어 그중 하나를 챙겨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 외에는 따로 가루를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자 그럼, 후우….”
심호흡을 내뱉은 방패 전사 강자는 마지막으로 희연과 모짜렐라를 안쓰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본 뒤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방패를 들지 않은 손은 트롤 임페리얼 나이츠를 잡았다.
“갑시다!”
선두가 달려나가면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역시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것이 흑염의 아이라면, 그 당연한 수순이 당연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흑염의 아이는 협조적이었다. 그녀는 애원도 부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 전사 강자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뛰었다.
그 모습에 이건 무조건 따라붙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고 깨달은 희연과 모짜렐라 역시 그 뒤를 바짝 붙어 뛰기 시작했다.
“뭔데요!”
“말 못 해요!”
물론 모짜렐라는 왜 뛰냐 물었고, 마리아에게 위협당한 방패 전사 강자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희연은 제 앞에서 함께 뛰는 차일드 롤랜드를 힐끗 쳐다보다 어깨를 짓누르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놀란 것도 잠시, 그녀의 몸은 반사적으로 저항을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야…!”
남들이 보기엔 잘 뛰다가 거하게 넘어지는 것이고, 희연의 입장에선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악령이가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는 과정이었다.
콰득…!
“…와?”
이번에도 악령이는 옳았다. 희연은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제 바로 뒤에서 튀어나온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Lv. 70 <약화된 스펙터>]
새까만 그것은 꼭 그림자로 된 액체를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유지하는 형태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 위에 툭 튀어나온 세모난 모양새는 갯과 동물의 귀와 흡사했고 새하얗고 뾰족한 이빨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보기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그 눈.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은 스펙터라는 이름의 몬스터를 무척이나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희연을 노렸던 것이 분명한 스펙터는 빈 허공을 와작와작 씹으며 천장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몸놀림이 날래다기보단 물처럼 유유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몬스터를 보며 희연은 더듬더듬 총을 잡았으나 타이밍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그녀의 적은 도망간 뒤였다.
그러나 희연은 이미 사라진 스펙터 하나 때문에 총을 든 게 아니었다. 이제 하나가 나왔다는 건 지금부터 시작일 수도 있단 뜻이었다.
“공격… 을….”
“다들 숙여요!”
그러나 미처 조준하기도 전에 몸이 낮추어졌다. 희연은 제 몸을 누르는 손길에 반항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제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어디서부터 날아온 것인지 모를 화살 비가 날아갔다. 그나마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도하기엔 너무 일렀다. 본격적인 함정 이벤트는 이제 시작이었다.
“일어나서 왼쪽! 다음 오른쪽! 뛰어요, 점프! 오른쪽에 튀어나오는 난간 위로! 천장에 난 고리 잡고 버텨요!”
파티란 비고에 당당히 적어 내린 완숙이란 말, 방패 전사 강자는 지금 이 순간 그 자신감의 원천을 보여주었다.
땅이 갈라지고 천장에서 칼날이 쏟아져 내리고, 바닥에 독극물이 흘러 난간을 밟고 뛰어야 하는 상황은 희연이 생각한 험난한 여정 중에 없던 것들이었다.
방패 전사 강자의 명령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희연은, 정말 자신도 이럴 줄 몰랐으나 처음으로 마리아의 마음에 공감했다.
마할라틴 숲에서 료한의 함정을 격파하며 그녀가 보여준 분노는 합당한 것이었다. 끝 모르고 쏟아지는 함정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
“여기로!”
처음에는 모짜렐라가 그녀를 붙잡고 뛰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마늘쫑쫑이 희연과 모짜렐라를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희연은 간신히 지시를 따르고 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이들의 손길을 따라 뛰면서 가끔 힐을 요구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쪽으로 스킬을 난사했다.
상대가 스킬을 맞았는지 아닌지도 볼 틈이 없었다. 못 맞았으면 그건 그냥 그 사람 운이 나쁜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세세하게 살필 틈도,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저 구르라면 구르는 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눈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스펙터도 상대해야 합니다! 모짜렐라 님 버프!”
그리고 그건 노련한 힐러인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 민첩 모두 부족한 그는 특히나 몸을 써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적응 못 하고 더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민첩 스텟이라도 조금 있는 희연과 달리 모짜렐라는 그마저도 없었기에 달리는 내내 뒤처지지 않는 것도 신경 써야 했다.
“<검의 노래>!”
그 와중에 버프까지 걸어야 했으니 그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개하세요>! <회개하세요>! 회, 회… 회개애애에에…!”
거의 화내듯 스킬을 쓴다는 점에서 희연의 상태도 모짜렐라와 그리 다를 것이 없긴 했다.
분명 스펙터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희연은 갑작스러운 공격과 무시무시한 외관으로 인해 아주 조금은 겁을 먹었었다.
그러나 그것도 계속 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공포는 분노 앞에 맥없이 쓰러져 내렸다.
이제 희연에게 있어 스펙터는 안 그래도 온갖 함정 때문에 머리 아픈데 자꾸 여기저기서 나타나 깔짝이고 사라지는 또 하나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이…!”
게다가 스펙터는 잡기도 힘든 것이, 그것들은 어둑한 배경을 잘도 써먹었으며 공격당한다 싶으면 야비하게도 벽, 바닥 틈새 사이로 도망가 버렸다.
그나마 통로가 넓어 스펙터들이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면 좀 나았을 것을, 스펙터가 몸을 길게 내빼면 곧바로 벽에서 벽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이 안에선 희연의 백발백중의 능력도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
기껏 맞췄더니 끝자락이 흩어지기만 할 뿐 본체는 틈새로 숨는 것을 몇 번이나 봤으니 점차 희연도 약이 바짝 올랐다.
그 와중에 스펙터는 가장 먼저 힐러를 노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힐러는 걸어 다니는 어그로였기 때문이다.
결국 희연은 함정을 피하고, 적절한 발판을 밟아 이동하면서 스펙터를 견제하고, 던전의 특성상 딜러의 역할도 맡으면서 본업인 힐러 일도 해야 했단 뜻이다.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희연은 모짜렐라가 삐약 소리로 랩을 한다 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성가신….”
그나마 다행인 건 새롭게 합류한 근접 딜러, 검사 차일드 롤랜드가 꽤나 잘 싸워줬다는 것이다.
몸놀림이 날랜 차일드 롤랜드와 마늘쫑쫑은 좁은 통로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스펙터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벽, 천장 등 발이 닿기만 하면 그것을 길 삼을 능력이 있는 근접 직업군은 저들을 향해 날아오는 함정만 유의하며 스펙터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힘과 민첩 스텟, 그 외 신체 관련 패시브 스킬이 있는 것을 고려해 봐도 묘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부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