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유은하란 이름의 여자에겐 적당히 불쌍하고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그녀는 똥차였던 남자친구에게 비참하게 차여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사경 속에서 기절할 만큼 잘생긴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유은하를 보고 대뜸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말랐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군.”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뭐, 상관없어. 이제부터 넌 내 노예다.”
라고 선언하고 뜬금없이 키스를 했다. 그리고 이어 섹스도 했다. 이게 그녀의 첫 경험이었다.
유은하는 병원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그 남자는 매일 밤 그녀의 꿈속에 나와 그녀를 먹어 치웠다. 알고 보니 그는 꿈을 매개로 찾아온 마계의 왕, 벨제뷔트란 이름의 악마였고, ‘유은하’는 사실 악마들을 미치게 하는 향기로운 먹잇감이었던 것. 물론 여기서 ‘먹어 치웠다’는 말은 강압적인 섹스를 의미한다. 그녀는 사디스트 악마와 무한히 섹스를 하게 된다. 언제까지 하냐면, 스토리를 질질 끌며 영원히. 영원히……. 이 웹소설로 충분한 돈을 벌 때까지 계속.
소재를 잘못 고른 작가가 울면서 이제 그만 쓰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 계속해야만 한다. 유은하는 사디스트 악마에게 계속 몸도 마음도 길들여진다. 그러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때가 된다면 악마와 결혼하는 등 적당한 엔딩을 맞이하겠즤…….
나다.
내 얘기다.
나는 <악마의 비바체>란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이 소설은 어둡고 피폐하고 조금 유치한 분위기의 SM 뽕빨물이다. ‘유은하’는 구른다. 구르라고 태어났다. 섹스도 체력이 받쳐 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매일 5시간 이상의 섹스를 하는 소설의 여주인공답게 체력도 정력도 무한하고 누구도 나를 해할 수 없다.
다만 나에게도 약점은 있다.
바로 발목이다.
발목만큼은 꺾일 수 있었다. 오로지 남주인공만이 나의 신화적인 약점을 간파해, <악마의 비바체> 35편 즈음 내 발목을 꺾어 감금을 시도하고 또 마구 섹스한 적이 있다.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갈 거다. 우리 세계는 이런 소설이다.
참고로 내가 답답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이유로 누군가 내 몸에 빙의해서 사이다를 먹이진 않는다. 그럴 예정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 암울한 미래를 납득할 수 없으니 운명을 거스르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답답하고 불행하게 살 것이다. 자의적으로 그렇게 정했다. 물론 불만은 많았다만, 암울한 미래가 올 거라 불만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암울한 미래가 똑바로 오지 않아서 불만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악마의 비바체> 63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보여 주겠다.
<악마의 비바체> 63편
「아무리 때리셔 봤자 소용없어요.」
유은하는 알몸으로 묶인 채 채찍질을 기다렸다.
그녀의 앞에서 세련되고 멋진 정복을 갖춰 입은 악마 남주인공, 벨제뷔트가 마편 끄트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그 모습부터가 포르노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반쯤 뒤로 넘기고, 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음험한 애욕이 서려 있었다.
벨제뷔트는 낮은 미성으로 으르렁댔다.
「자, 어서 영원히 나의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싫어요.」
유은하는 애처롭게 고개를 돌렸다. 가슴께를 간지럽히는 긴 연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고갯짓에 맞춰 폭포처럼 흔들렸다. 그녀의 관능적인 몸짓을 내려다보는 남주인공의 얼굴에 초조함과 흥분이 서렸다.
「미치겠군. 왜 말을 안 듣지?」
뒤이어 날카로운 채찍질이 올 것이다. 벨제뷔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적인 남자이고, 이것이 <악마의 비바체>란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며 단점이었다. 좋아하는 독자는 엄청나게 좋아한다. 유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그런데…….
오지 않는다.
“…….”
아무리 기다려도 채찍질이 오지 않는다.
공백이 수상하게 길어지자, 유은하는…… 아니, ‘나’는 슬쩍 실눈을 떴다.
악마성의 주인, 마계의 적법한 권위자,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로맨티스트이자 사악한 사디스트인 벨제뷔트가 마편 손잡이를 잡은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 때리고 뭐 해.
난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고, 소설 독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뒈질래?”
또 시작이다.
“뭐 해? 얼른 때려.”
그러자 벨도 소설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때리고 싶지 않다.”
“어이구.”
“더 이상은 한계다.”
나도 역시 소설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혀를 찼다. 벨은 겁을 먹고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고고한 남주인공답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남주인공’은 그만하고 싶다. 나, 난……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해. 괴롭히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내가 맞는 게 훨씬 나아.”
황당한 소리를 하는 남주인공의 눈썹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조차도 그림처럼 잘생기고 아름다웠다. 만약 <악마의 비바체>의 장르가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채찍질을 안 하고 넘어갔어도 괜찮았을 법했다.
하지만 장르 규칙이란 엄격하고, 아무리 잘생겨도 전개가 똑바로 나가지 않으면 남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고 만다. 다들 벨제뷔트가 채찍질하는 거 보고 싶어서 이 소설을 읽는 거란 말이다. 나는 초조하게 벨을 다그쳤다.
“‘이번 편’ 끝나고 말해.”
“나도 소설을 망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른 ‘역할’이라면 잘할 수 있어. 그렇지만……!”
“얼른 때려.”
“…….”
벨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고 채찍을 휘둘렀다. 짝! 경쾌한 소리, 잠깐 63편이 산으로 갈 뻔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올바른 소리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동시에 내 하얀 허벅지에 새빨간 줄이 그어졌다. 이 채찍 자국은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러나 반면 벨의 잘생긴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역시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부터 일이 틀어진다. 벨이 채찍을 뒤로 던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벨제뷔트’로서 대사를 쳤다.
「채찍질은 하지 않겠다.」
「뭐라고요……?」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그만 평소처럼 반말을 쓸 뻔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벨제뷔트는…… 아니, 벨은, 마음대로 뒤 내용을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대의 음탕한 표정을 보니까 알겠군. 맞는 게 좋은 거지? 이런 일을 즐기니까 일부러 날 더 부추기는 게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대사다. 벨제뷔트는 ‘유은하’의 턱을 붙잡고 이마를 맞대 으르렁댔다. 분노와 음욕과 초조함이 뒤섞인 악마왕의 눈빛이 ‘유은하’의 마음을 간지럽히거나 뭐 그랬을 거다. 대충 그러한 애드립을 이어 갔다. 벨은 내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멋대로 뒤 내용을 이었다.
「건방지군. 나를 네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니까 좋았나? 아주 우스웠겠어, 내가 그대 마음대로 놀아나는 게.」
「그게 무슨…….」
「닥쳐라.」
벨제뷔트는 위협적으로 ‘유은하’의 말을 끊었다. ‘대본’에 적힌 대사들이 아닌데도 제법 그럴싸한 남주인공답게 굴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본래 그가 그녀를 채찍으로 마구 때리는 장면이고, 이후 벨제뷔트가 이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파트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감정선의 빌드 업을 위해 꼭 필요한 씬이다. 그런 중차대한 장면을 그냥 하기 싫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략해?
죽여 버릴 테다.
하지만 아직은 촬영 중. 벨제뷔트가 앞머리를 근사하게 쓸어 올리고 말했다.
「채찍으론 널 길들일 순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앞으로 채찍질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
나는 청초하게 놀란 연기를 하면서 타들어 가는 속에 이를 갈았다. 대사를 저렇게 쳐버리면 더 이상은 채찍질 장면이 나올 수 없다. ‘벨제뷔트’는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캐릭터이며, 또 그게 그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편’에서까지 채찍질 똑바로 안 하면 더 이상의 용서는 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 독자들의 눈을 피해 벨을 지긋이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예 ‘유은하’의 눈을 커다랗고 남자다운 손으로 덥석 가려 버리더니 입술을 맞댔다. 당황해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악마왕의 뜨겁게 달아오른 혀가 파고 들어왔다.
「읏…… 으읍…….」
<악마의 비바체>에선 남주인공이 기습적으로 키스하면 여주인공은 반드시 일단 반항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벨제뷔트가 유은하를 겁박하고 어르고 달래며 그녀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니 당연히 반항해야 개연성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벨의 어깨를 밀어 낸 것은 딱히 연기가 아니었다. 꽤 진심이었다. 나는 발버둥 쳤지만 벨제뷔트가 밀어붙였고, 우리는 몸을 겹치며 침대에 쓰러졌다.
나는 사실, 내심, 실로 오랜만에 실감하는 남주인공의 철벽같은 덩치와 단단한 몸 때문에 조금 놀랐다. 여주인공의 늘씬한 몸이 틈 없이 내리눌렸다. 황홀한 키스가 퍼부어졌다. <악마의 비바체>도 일단은 로맨스 소설이라고 벨은 키스를 굉장히 잘했다. 부드러운 혀가 진득하게 얽히고, 그가 크고 섬세한 혀로 입천장을 살살 긁자 등허리가 다 오싹해졌을 정도다.
하지만 용서가 안 된다. 벨제뷔트가 마음대로 채찍질 장면을 키스 씬으로 대체했다.
사디스트 남주인공 역할 하기 싫다고 또 폭력적인 장면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심지어, 손목에 감겨 있던 밧줄까지 툭 풀렸다.
「!」
이 식충이가 오늘 작정하고 촬영에 임한 게 틀림없었다. 솔직히 그가 이렇게까지 반항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허를 찔렸다. 나는 뒤늦게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그를 밀어 내려 했으나, 벨이 냉큼 내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내리눌렀다. 가는 두 손목이 남주인공의 커다란 손에 쏙 들어갔다.
좀 아팠다. 무식하게 힘으로 누르니까 저항하기가 힘들었다. ‘유은하’는 저항하지 못하는 캐릭터기도 했다. 여전히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이다. 섣부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섣부른 행동은 지금 벨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소설은 하드 피폐물인데, 지금 소프트 피폐물이 되고 있다.
소설을 책임지는 주인공으로서 장르 이탈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규칙과 이성에 대한 문제뿐만은 아니다. 내 안에서 원초적인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
키스하다 눈이 마주치자, 벨은 흠칫 어깨를 떨고는 슬쩍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내 몸을 옭아맸다. 여기서 나의 구속을 풀었다간 무슨 후폭풍이 올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벨제뷔트는 신중하게 ‘유은하’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거기엔 아까 벨제뷔트의 채찍질이 만든 상처가 두어 개 남아 있었는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벨이 사고를 한 번 더 친다.
벨제뷔트는 악마왕의 권능을 발휘해, 손끝에 마력을 모아 상처를 살살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개…….」
……인정하겠다. 나도 약간 실수를 했다.
벨의 명치를 무릎으로 걷어차는 정도는 애드립으로 무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컥…….”
깔끔하게 들어간 타격기였다. 벨은 순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불의 악마이자 마계의 군주, 마족들의 지배자로 돌아와, 몸을 일으키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제법 앙큼한 짓을 하는군.」
명치를 때렸는데 입에서 피가 날 리가 없다.
나는 그의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지, 혀를 깨물지 않았다. 하지만 벨이 저러는 걸로 보아선 일단 작중 내에서 ‘유은하’는 그랬던 걸로 치려는 것 같았다. 벨이 직접 날카로운 송곳니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낸 것이다.
괜찮은 임기응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악마의 비바체>의 여주인공으로서는 남주인공을 걷어차는 것보단 입술을 깨무는 게 더 어울린다. 나는 얼른 허벅지에 흐르는 피를 입가에 묻혀, 벨제뷔트의 입술을 깨문 척했다. 대본을 벗어난 <악마의 비바체>는 두 주인공의 순발력으로 어찌어찌 그럴싸하게 진행되었다.
벨제뷔트는 ‘유은하’의 얼굴에 달라붙은 연갈색 머리카락을 걷어 주며 입꼬리 한쪽을 비죽 올렸다.
「풀어 주고 치료도 해줬는데 너무하는 거 아닌가.」
얼굴이 그림 같았다. 흑발이 잘 어울리는 사납고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벨제뷔트는 필요한 만큼 섹시했고 카리스마도 있었다.
이미 망한 전개이지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가냘프게 숨을 내쉬며 다리를 모았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조금 본심이 섞인 질문이었다. 아마 벨도 눈치챘을 거라 생각한다. 자꾸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입으로는 착실하게 남주인공스러운 대사를 출력했다.
「그대를 길들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것뿐이야.」
다행히도 독자들에게 들릴 만큼 크게 떨리진 않았다.
「그대를 아무리 핍박해 봤자 영원히 내 노예가 되진 않을 것 같아서.」
「핍박이란 건 알고 계셨군요.」
벨제뷔트는 맹수 앞 토끼를 대하는 것처럼 ‘유은하’를 한껏 조롱했다.
「너무 그렇게 쏘아보지 마. 그대가 날 노려보면 꽤 무섭거든.」
진심이 꽤 묻어나는 대사였다. 벨제뷔트가 이어 말했다.
「앞으로 폭력은 일절 쓰지 않고, 그대에게 앞으로 잘해 줄 생각이다.」
「뭐라고요?」
안 돼…… 장르가 이탈한다……. 소프트 피폐물도 아니고 그냥 달달물로 가려는 생각이다.
「어차피 시간문제다. 나에게 부족한 건 없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악마왕인데, 잠깐 변덕을 부려 본 걸로 불만이 많군.」
‘유은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만큼 벨제뷔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헐벗은 그녀와, 마계의 정복을 갖춰 입은 악마왕의 자태가 지나치게 대비되었다.
「아니면 지금까지 하던 대로 그대를 노예처럼 다루기를 원하나?」
얼른 받아쳤다.
「차라리 그러시죠.」
이 부분도 상당히 진심이 담겼다.
「뭘 하든 소용없어요. 절 놓아주세요. 당신이 아무리 저에게 잘해 줘 봤자 미카엘 님만 못해요.」
질투하는 반응으로 받아치란 뜻이다.
「호오, 그 천사 나부랭이를 말하나?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꺼내다니 꽤 용기 있는데.」
잘 받아쳤다. 한쪽 눈썹도 꿈틀거렸다.
「그래요! 당신보다 다른 남자가 더 나아요. 세상 그 어느 남자를 데려와도 당신보다 나을 거예요.」
더 화내란 뜻이다.
「유은하…… 죽고 싶은가 보군.」
이번에도 잘 받아쳤다.
「당신은 최악이에요. 미카엘 님은 당신처럼 징그러운 마물을 꺼내지도 않는다고요.」
채찍질 다음 장면인 촉수 능욕 장면으로 넘어가란 뜻이다.
「…….」
받아치지 못했다.
알아듣긴 알아들었다. 하지만 벨은 굳어 버린 것처럼 나를 위협하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채찍질을 못 하겠으면 촉수 마물이라도 똑바로 소환해야 한다. 나는 벨을 쏘아보며 눈빛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똑바로 남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해라.
벨의 붉은색 동공이 마구 떨렸다. 아까 채찍을 뒤로 던질 때보다 더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는 독자들 몰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하드 피폐물로 돌아가자.
「……그대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은 건가? 좋다.」
벨제뷔트가 손짓하자 바닥에서 촉수 마물이 소환되었다. ‘유은하’의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더 창백하게 질렸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고, 속으로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
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했다.
설마 채찍질 장면을 생략한 걸로도 모자라……?
「그대가 마물을 무서워하니 치워 주지. 그대의 형편없고, 어이없고, 가소로운 요구에 한번 어울려 주도록 하겠다.」
벨제뷔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새까만 지옥의 불이 촉수 마물을 감쌌다. 촉수 마물은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기어이 촉수 장면까지 건너뛰었다.
벨제뷔트는, 벨은 은하를 향해 말했다.
「이제 만족하나?」
그리고…… 암전.
---다음 편에 계속---
이제 내가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63편이나 됐다. 단행본 기준으로 세면 2권이나 된 셈이다. 이제 철이 들고, 어른스럽게 전개를 따르고, 사춘기 같은 반항은 졸업할 때가 됐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겪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댓글은…….
다행히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상한 점을 눈치챈 독자는 없는 것 같다. 다음 편을 기대하거나 남주인공을 욕하는 댓글뿐이다.
아슬아슬하지만, 아직은 바로잡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냐면,
“대가리 박아.”
이렇게 바로잡는다. 벨이 빛보다 빠르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