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니까 벨이 말했다.
“은하. 건강 나빠진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벨은 담배도 안 피운 주제에 안색이 핼쑥했다. 사실 이거 피운다고 내 건강이 나빠지진 않는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캐릭터니까.
그러니까 소설 연재가 중단되면 우리도 따라 죽는다.
“건강…….”
나는 피우던 담배를 창밖으로 그냥 던졌다.
소재를 잘못 선택한 작가가 울면서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
안 된단 말이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도망가?”
나는 뜬금없이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뒤에서 벨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심란하기는 나나 쟤나 비슷할 거다.
내 목소리는 하늘까지 닿지 못한다. 캐릭터니까 당연하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 몰아치는 폭풍과 바람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혔다. 나는 그래도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장본도 낼 거라며!”
캐릭터들의 목숨이 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작가를 들들 볶아 뒤 내용을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캐릭터들에겐 ‘바깥 세계’에 영향을 끼칠 방법이 없었다. 절규하는 것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을까?
“63편이나 썼으면 계속 더 써볼 만하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벨이 암울하게 대답했다.
“아마 최대한 많이 쓴 게 63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너 지금 작가 편드는 거야?”
“그냥 상황을 이해해 보려 하는 것뿐이다.”
“무릎 꿇고 손 들어.”
벨이 즉각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철벽같은 흑발의 악마왕이 쭈그러졌다. 저 미덥지 못한 모습. 화려한 불의 군주의 복장을 갖춰 입고 하는 짓이라곤 소설 전개에 소심한 반항하는 것뿐이고. 결국 대형 사고를 쳐 시무룩하게 벌이나 선다. 한 소설의 남주인공이라기엔 지나치게 자격 미달이었다.
연재 중단 공지에 확연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캐릭터들(특히 벨제뷔트ㅜ)이 제 의도대로 안 움직여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친절한 작가가 누구 때문인지 대놓고 써줬다.
“너 때문이잖아!”
나는 벌서던 벨을 걷어찼다. 그가 나뒹구는 모습이 쓰레기처럼 보였다.
“네가 기어이 세상을 멸망시켰구나.”
그리고 역시 벨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왜 사과해? 너한텐 좋은 거잖아. 남주 하기 싫어했는데 잘됐지?”
“억측은 삼가해 줬으면 좋겠군. 남주인공 역할이 버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세상이 멸망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가 남주인공 역할을 버거워하는 것 또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벨은 ‘유은하’를 때려야 할 상황에서 때리지 않고, 발목도 제대로 꺾지 않았고, 촉수 마물에게 나를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도 망설였다. 묶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심지어 벗길 땐 부끄러워했으며 계속 나에게 뭐라도 입혀 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벨제뷔트가 이 피폐물 소설을 어떻게든 덜 피폐하게 만들려고 아등바등 노력한 덕분에 작가가 떠났다.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하고 다 죽게 생긴 원인은 대체로 벨제뷔트의 탓이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그렇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대본’을 완벽히 수행했느냐 하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들 조금씩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났고, 설정에 구멍을 냈고, 캐릭터성과 실제 성격을 일치시키지 않았다.
나에게는 노예가 되고자 하는 진정성이 없었다. 그런데 진정성은 다들 없었다……. 아마 근본적인 소설의 설계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가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연재를 중단시켰다. 아마도.
신이 떠나서,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너 때문이잖아.”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해서, 난 그냥 벨을 촛대로 퍽퍽 팼다. 악마성 전체가 폭풍에 휩싸인 이때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벨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창문 바깥으로는 들리지도 않았다. <악마의 비바체>의 비명 소리에 묻혔다. 문틈 사이사이로 휘몰아치는 섬뜩한 바람 소리에.
“세상이 멸망하고 있어.”
악마성 응접실의 조명까지 깜빡거렸다. 벨이 훌쩍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재 중단 공지를 띄우자마자 이렇게 되다니……. 작가에게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안 남은 모양이지.”
“네가 원인이라니까……?”
“세상만큼 나도 한계였을 뿐이다. 무슨 심정으로 포기하는지 알 것 같군.”
벨도 이미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이었다.
“…….”
나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뻑뻑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페르소나. 나는 창조신의 의욕과 희망, 애정을 물려받았으며, 벨은 창조신의 슬픔과 좌절을 물려받았다. 벨이 가학적인 일이 하기 싫어서 전개를 멋대로 망친 건 정해진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가학적인 장면을 쓰기 싫었던 것이다.
가학적인 장면을 싫어하면서 왜 피폐물 소설을 선택했을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기본적인 데부터 문제가 있었어.”
나는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이 세계는 정말 기본적인 데서 문제가 있었다. 우리의 역할과 실제 성격이 일치하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1편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작가의 진정성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무시무시하고 강한 남자 주인공이 가녀린 여자 주인공을 핍박하고 피폐하게 굴리는 그런 전개를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듯한 느낌이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악마의 비바체>는 그저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소재를 안일하게 대충 끌어다 썼다.
기승전결, 캐릭터 설정조차 똑바로 안 짜고 시작했다.
그런 소설이라서 다들 실제 성격과 역할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했던 것이다.
끝까지 연재가 됐더라면 그게 더 신기했을 거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했어야 했다. 하지만 바빴다. 실제 성격과 역할 차이에 적응하고, 자극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찼다. 미래까지는 상상도 못 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곱씹을수록 화가 치솟는다. 역시 벨제뷔트가 가장 괘씸하다.
“나는 이 상황 인정 못 해. 소설을 살리고 말 거야.”
“어떻게?”
“좀 닥쳐. 목소리도 듣기 싫어.”
나는 벨의 배를 걷어찼다. 작가에게 없던 진정성이 내 발길질에는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샌드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놈들도 패야 직성이 풀리겠다.
“나머지 새끼들 다 어디 갔어.”
<악마의 비바체>의 주연은 총 4명이고, 지금 여기엔 나와 벨밖에 없다.
벨이 뭔가 설명하려다 관뒀다.
그냥 또 걷어찼다.
“내가 질문하면 대답은 해라. 남주 2번 어딨어.”
“저기 있다.”
벨은 명치를 부여잡고, 폭풍밖에 보이지 않는 창밖을 가리키며 붉은 눈을 빛냈다.
“그대의 시력으론 안 보이겠지만 저기서 세상이 망해서 꼴 좋다고 소리 지르면서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다.”
“미친 새끼……. 3번은.”
“평소처럼 호숫가에 멍하니 앉아 있다만, 그자는 딱히 뭔가를 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나. 그보다 멀쩡히 살아 있는 캐릭터를 번호로 부르지 말았으면 하는군. 존중해 다오.”
“무릎 꿇고 손 들어, 1번.”
“은하!”
정권 지르기로 벨의 명치를 때렸다. 전신을 아름다운 흑색 정복으로 싸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실은 악마왕의 몸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매일 맞고 사는 그는 뭐라 더 반항해 보려다, 시무룩하게 구석으로 가서 다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1번의 오만한 루비색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차올랐다.
이럴 순 없다. 단순한 일회성 화풀이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악마성 응접실을 서성이며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난 죽기 싫어.”
아니, 세상이 완전히 멸망한다고 해도 아마도 난 곧바로 죽진 않을 거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음의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나만큼은 쉽게 죽지 않는다.
남주인공들은 쉽게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이란 것은 단 한 명이라도 기억한다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나, 혹은 <악마의 비바체>를 인상 깊게 읽은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소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주인공인 유은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이 멸망한 세상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산송장처럼 기다릴 것이다.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죽지 않을 거야.”
나는 소설의 희망, 주도자, 불꽃, 중심,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자, 그리고 작가에게 한때 충만했었던 의욕과 애정 그 자체. 주인공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신이 세상의 미래를 없애겠다 선언했어도 나는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
뒤 내용. 신이 만들지 못하면, 내가 만들어 보겠다.
“나한테는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고 본인조차도 모르지만 사실은 천재 로맨스 소설가’라는 설정이 있었어.”
슬픔에 젖어 있던 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랬지.”
<악마의 비바체>의 내용 중에 그런 게 있다. 아무래도 전개를 살펴보자면 ‘유은하’는 그 재능을 꽃피워 잘나가는 유명한 작가가 되고, ‘유은하’를 찼던 전 남친은 그 사실을 알고 뼈저리게 후회하는 장면이 나올 테지만, 아직 그런 장면은 없다.
벨은 내가 하려던 걸 눈치챈 듯하다.
“설마, 그대가 작가 대신…….”
“시도는 해봐야지.”
작가를 대신한다는 말은 즉, 이런 뜻이다.
“그대는 신이 될 생각인가?”
등 뒤에서 벨이 어안이 벙벙한 듯 황당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악마성의 응접실’ 배경 속 책꽂이를 가리켰다. 벨이 후다닥 달려가 책꽂이에 꽂힌 책을 아무거나 꺼내 대령했다.
이 책들은 모두 멋진 라틴어로 의미 모를 제목이 쓰여 있지만 사실 소품이기에 내용이 없다. 펼쳐보면 빈 종이다. 나는 그 빈 종이 위에, ‘벨제뷔트’가 서류 업무를 처리할 때 쓰는 멋진 깃펜으로, 신중하게 뒤 내용, ‘대본’을 써 내려갔다.
깃펜은 멈추지 않았다.
그간의 모든 복선, 뒤 내용에 대한 암시, 독자들이 기대하는 전개, 그리고 작가가 스프링 노트에 휘갈겨 놨던 여러 숨은 설정들이 모두 천재의 펜 끝에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뽑혔다. 가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작가는 필요 없었다. 작가보다 뛰어난 캐릭터가 살아 움직여서, 제대로 된 ‘다음 편’을, 그리고 누구나 눈물을 흘릴 법한 결말을 책 안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나에겐 천재라는 설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천재였다. 나에게 이런 설정이나마 남겨 줘서 고맙다. 「유은하는 천재적인 소설을 썼다.」
그렇게 나는 책을 완성하고, 덮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벨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 이제…… 산 건가?”
“이제 내가 쓴 내용대로만 움직이면 문제없을 거야.”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슥 닦고,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없었다.
내가 땀 흘려서 쓴 모든 문장들이 다 사라졌다. 그냥 빈 종이에 딱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유은하는 천재적인 소설을 썼다.」
“…….”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팔락팔락 넘겨 봤다.
전부 텅 비어 있었고 여전히 그 한 문장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방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채워 넣지 않았나?”
“그랬었다.”
“그런데 왜 비어 있지?”
그렇게 말한 직후, 이유를 깨달았다. 아…… 작가 이 개자식이.
내가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소설을 쓴다고 해도 구체적인 내용이 나올 수 없었다. 능력에 상한선이 있다. 나는 작가보다 더 뛰어난 소설은 못 쓴다. 작가들이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천재 캐릭터는 이런 식으로 얍삽하게 묘사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실 이 설정을 작가가 제대로 기억하는지도 의문이다. 까먹었을 수 있다. 아마추어 소설이란 말이다.
나는 비어 있는 책을 뒤로 던지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이거지.”
벨은 한 박자 늦게 진상을 깨달았다.
“아, 그, 그렇군. 작가가 뒤 내용을 못 쓰는데, 작가의 피조물인 우리가 뒤 내용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군. 어쩐지 그대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책 내용을 다 채우더라니.”
“괜히 더 화나니까 설명하지 마라.”
“미, 미안하다. ……그대가 책을 쓰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우리한테 시간 같은 게 어디 있어. 그냥 「하룻밤이 지났다.」라고 한 줄만 쓰여 있어도 정말 하룻밤이 지나는걸.”
“그러면…… 고작해야 1,300자 정도밖에 안 지났겠군.”
벨이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쟤는 자꾸 의자 놔두고 바닥에 앉는 버릇이 있다.
“이제 끝이군.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
더 이상 방법이 없게 만든 장본인이 저런 소리 하니까 화가 난다.
“힘 빠지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일단 멸망을 미룰 수 있어.”
“의미 있는 일이란 게 뭐지?”
이곳은 소설 속 세계. 사건을 이어 가야 하는 곳. 비록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 부분이 아닐지언정, 그 토대, 플롯, ‘이전 편’과 ‘다음 편’ 사이 쉬는 시간도 소설의 법칙대로 엄격히 흘러간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면, 시간은 흐른다.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장면’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건을 일으켜야 했다. 예를 들어,
“엎드려 뻗쳐. 죽여 버리게.”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살해하는 정도는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이다.
“시……싫다.”
남주인공이 반발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제 둘이 싸우면 된다.
“그대, 이런 건 화풀이일 뿐이야.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나아지는 건 없어. 남주인공은 죽일 수 없다는 거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장르를 바꾸면 죽일 수 있겠지. 이제 작가도 없는데 안 될 게 뭐 있어.”
“장르를 바꿀 거면 차라리 피폐물 말고 행복한 장면만 이어지는 달달물 같은 건 안 되겠나?”
그런 거 하려다가 소설을 말아먹었다는 자각이 있는 건가?
“난 별로 달달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악마왕의 검을 빼내 아래로 휘둘렀다. 그래 봤자 이걸로 뭘 벨 수는 없다. 애초에 소품용 칼이고, <악마의 비바체> 내에선 제대로 된 전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벨제뷔트는 칼을 휘둘렀다.」 정도뿐이라서 보고 배울 만한 검법이 없다. 그래서 그냥…… 둔기처럼 쓰기로 했다.
나는 칼을 그냥 도끼 휘두르듯이 무식하게 휘둘러서 바닥에 꽂았다.
바닥을 굴러서 가까스로 피한 벨은 꼬리를 허벅지에 감은 채 헐떡였다. 안색이 새파랬다.
“정말 죽일 셈인가?”
정말 죽일 셈이다. 연재가 중단됐는데 소설 바깥에서 남주인공이 죽어 봤자 뭐 어쩌란 말이야. 어차피 ‘다음 편’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며, 어차피 우리도 곧 모든 독자들에게서 잊힐 게 뻔하니까.
다 끝났다. 피의 작별 인사만이 남았다. 미친 것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벨. 칼 들어. 뭐라도 들어. 날 공격해. 한 번이라도 진심을 다해 날 좀 때려 봐. 넌 사디스트잖아.”
“…….”
벨이 괴롭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널 죽이려고 드는 상황이라면 날 공격할 수 있을까? 정말 할 수 있을까? 이 여주인공의 가녀리고 창백한 허벅지에 채찍 자국을 내고 발목을 꺾고 무자비하게 범할 수 있을까?
그러나 멸망 앞에서 솔직해지기로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벨은 한숨을 쉬고, 두 팔을 벌리며 바닥에 털썩 누웠다.
“그래, 이젠 싫다. 이렇게 불행하게 살 바에야 그냥 소설 연재가 중단되고 그대가 날 죽이는 편이 낫겠군.”
“그게 유언이야?”
벨이 한숨을 쉬고 중얼거렸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그대가 폭력적일 때 행복한 것처럼, 나는 폭력적일 때 불행해. 내가 똑바로 못 하면 그대까지 죽게 될 걸 알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이렇게 태어났으니, 한계가 명확하단 말이다. 피폐물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소설은 멸망까지 엉망진창이다. 제대로 잡히지 않은 캐릭터, 존재하지 않는 플롯, 무한히 이어지기만 하는 데다 신조차도 딱히 좋지 않고, 장점이라고는 그의 잔학무도한 채찍질뿐인데 거기에마저 작가의 진정성이 없다. 우리는 지쳤다. 작가의 피곤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우리끼리 뒤 내용을 이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은하, 아프지 않게 단칼에 끝내 다오. 아픈 건…… 많이 겪어 봤으니까…….”
“…….”
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그런데…….
죽이지 않았다.
“…….”
아무리 기다려도 사형수의 칼날이 오지 않았겠지.
공백이 수상하게 길어지자 벨은 슬쩍 실눈을 떴다. 나는 아예 검을 잡지도 않은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까 벨이 뭐라 길게 유언을 남길 때, 문득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은하?”
“나 방금 해결책을 찾은 것 같아.”
스스로도 얼떨떨하다. 나는 벨에게 말했다.
“너 혹시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여서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