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4화 (4/40)

4화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여서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더니,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마음대로 뒤 내용을 만들어 냈다. 작가인 나는 그걸 받아 적었을 뿐이다. 캐릭터들이 내 의지를 무시하고 펜 끝에서 마구 날뛰었다. 내용이 저절로 전개된다…….

많은 작가들이 그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이게 꽤 흔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벨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그것들이 단순한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동안 악마성 응접실이 조용했다. 지금껏 성격에 맞지도 않는 ‘대본’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소설의 사정 따위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도 내용을 이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벨이 침묵 끝에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제부터 작가 없이 우리가 마음대로 ‘뒤 내용’을 써도 된단 뜻인가?”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우리 마음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까까지 벌서면서 울고 화내고 슬퍼했는데 표정이 약간 밝아진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근사해졌다. 그런 외모였다. 물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장르는 못 바꿔. 작가가 정한 범위에서 못 벗어나.”

“폭력의 수위를 조금 낮추는 것도 안 되나?”

“그런 말 할 거면 제발 입 좀 다물어. 그런 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까 내가 ‘소설’을 똑바로 못 쓴 거 봤잖아.”

우리는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없고, 주어진 것들 안에서만 해결해야 한다.

“그 말인즉…….”

“장르는 그대로.”

작가가 있거나 없거나 할 일은 똑같다. 그는 비실비실하게 쓰러져 우울하게 가죽 장갑이나 매만졌다.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잔인하고 강압적인 집착 남주 벨제뷔트여야 했다.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어쨌든 이제부턴 우리 손에 달렸어. 우리가 ‘살아 움직여서’ 뒤 내용을 이어야 해. 난 이 위기가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봐.”

“그대는 낙관적이군. 계획이 있나?”

“아마도. 우리는 지금껏 성격에 맞지도 않는 소설 내용을 연기하는 데 급급해서 쉬거나 재정비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이번 휴재 기간 동안 뭔가 해볼 수 있을 거야.”

벨이 당황해서 냉큼 끼어들었다.

“은하. 휴재 기간이라니. 연재 중단이다. 세상이 망하는데 뭘 한다는 말이지.”

“죽을래? 내가 나약한 소리나 하라고 가르쳤어?”

몇 대 때렸다.

“우리가 움직이는 동안은 세상도 당장 망하지는 않아. 전부 포기하면 그때가 망하는 날이라고. 그리고 우리 소설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이 소설의 모든 단점과 미흡한 점을 전부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까진 이 소설도 나름 독자층이 있고 재미있는 내용이라며 애써 자기 위안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 소설은 말이다…….

“어차피 내용 없는 야설이니까, 지금까지 하던 것만 반복하면 돼.”

“!”

벨이 숨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하던 것.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섹스를 했다. 그 외로는 별로 한 게 없다.

이 소설은 피폐뽕빨물이고, 씬의 나열이다. 딱히 줄거리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학적인 섹스만 이어 간다면 작가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소설을 유지 시킬 수는 있으리라.

그걸 이해한 벨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절망적으로 신음했다.

“이젠 자발적으로 그대를 때려야 한다니……!”

충격적인 소설 세상의 진실이었다.

작가 없이 캐릭터끼리로도 뒤 내용을 이을 수 있다니. 심지어 이런 일이 꽤 흔하다니. 이런 자연재해 같은 사고가 우리 소설에도 닥치다니. 나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부터 깜박거리던 악마성 샹들리에가 밝아졌다. 소설 속 세상은 비유나 은유가 문자 그대로 재현되는 일이 흔하다. 사라지던 조명이 다시 나타났단 말은 곧 세상의 수명이 늘어났단 뜻이기도 했다.

빛이 돌아왔다. 활로가 열렸다. 주인공이 옳은 선택을 했다.

우리의 목표가 정해졌다.

“이해했다. 했지만, 도저히 잘할 자신이 없어…….”

벨이 남자답게 튀어나온 목젖을 꿀렁이며 침을 삼켰다.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다. 하기야, 그 전의 삶도 평탄했던 건 아니지만, 작가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절망적이니까.

선장 없이 뱃사공들만 있어서야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벨의 낮은 미성이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믿기지 않는군…….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제부턴 우리가 ‘대본’을 연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쓰기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연기하는 것도 제대로 못 했어. 그대도 잘 아는 일이지.”

“너무 못해서 작가가 도망갔잖아.”

“미…… 미안하다. 내가 잘 때렸어야 했어. 그대에겐 백 번 사죄해도 모자라.”

벨이 살짝 내 눈치를 보고 물었다.

“무릎 꿇고 손 들까?”

“됐어.”

벨은 죄책감을 없앨 만한 작은 행위도 허락받지 못해서 그런지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내가 봤을 땐, 그나마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반성과 뉘우침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은데 꽤 감정적으로 혹사를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놈. 때리면 나아지려나.

벨은 슬쩍 바닥에 놓여 있던 꼬리를 상의 안으로 숨겼다. 착잡해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대본 없이 사디스트 주인님을 연기하긴 힘들다.”

그래 보인다.

“원래 맞은 놈이 더 잘 때려야 하는데.”

“그런 야만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좀 야만적으로 굴라고.”

남주인공이 못 하는 부분을 내가 다 하고 있다. 나는 벨이 야만적이지 않은 만큼 야만적으로 악마왕의 검을 빼 들었다. 벨이 기어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었다.

“반성하겠다.”

“이게 반성하는 태도야? 나더러 건방지다고 뺨이라도 때려야 할 거 아냐,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나는 건방지게 사과하는 남주인공의 뺨을 때렸다. 벨이 맞은 곳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저…… 정말 미안하다. 그대를 어떻게 때려야 할지 모르겠어. 손이 안 올라간다. 역시 난 장르를 잘못 타고났어.”

악마성 바깥 폭풍이 더 거세지고,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행보가 지지부진하자 잠시 유예되었던 세계 멸망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사건’을 시간 내로 만들지 못하면 정말 <악마의 비바체>는 죽어 영원히 사라진다.

벨은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는지, 아니면 아파서 우울한지, 상황을 끝없이 비관했다.

“나는 처음부터 피폐물 장르와는 안 맞았다. 기왕 남주인공으로 태어날 거면, 차라리 아기환생물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다. 아기를 예뻐하기만 하면 되니까…… 아마도…….”

깜빡이던 응접실의 샹들리에가 마침내 꺼졌다. 이제 남은 빛이라고는 부서져 가는 보름달의 희미한 푸른빛뿐이었다. 벨은 어두운 응접실 한쪽에 우두커니 앉은 채, 날렵한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그냥 아기가 되고 싶다. 난 아기환생물의 주인공을 하겠다. 아기를 시켜 다오. 난 아직 7살, 아니, 벨은 아직 3살밖에 안 됐어. 벨은 아기란 말이야.”

저 용기를 보아라.

과연 남주인공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가 보인다. 내 앞에서 아기로 환생하고 싶어 하는 이 당당함. 자신의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하며 여유를 과시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그가 2편에서 보여 줬어야 했던 장면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여주인공 앞에서 고추 보여 주기 vs 아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 어느 쪽이 더 창피한지는…….

“은하. 칼은 내려놓아라. 직접 날 환생시킬 필요는 없다.”

벨제뷔트가 침착하게 날 말렸다.

아니, 나도 대충은 안다. 벨제뷔트는 63편이 될 동안 원치 않던 가학적 행위를 너무 많이 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이제 ‘유은하’를 한 대만 더 때리면 당장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것이었다.

나는 골치가 아파서 습관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벨을 지목했다.

“벨. 너는 ‘벨제뷔트’란 캐릭터를 이해해야 해.”

벨이 즉각 받아쳤다.

“그런 쓰레기는 죽어도 이해 못 한다.”

“그럼 죽어!”

나는 맨주먹으로 그를 환생시키기 위해 그의 명치부터 때렸다. 그리고 이후로 샌드백 삼았다. 이래도 상관없었다. 남주인공이 죽든 말든, 작가가 없는데 다 무슨 소용이람. 심지어 맞는 벨조차도 적극적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입은 여전히 살았다.

“그대도 딱히 ‘유은하’란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 같진 않다.”

“나는 사고 안 쳐서 상관없어.”

나는 벨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벽에 밀쳤다.

“벨.”

“!”

벽치기였다.

<악마의 비바체>처럼 고전적인 소설에서는 늘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여주인공의 두 팔 사이에 갇힌 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귀 끝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렇게 보지 마라.”

벨은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나에게 얻어맞은 주제에 말이다. 이가 갈렸다. 하지만 난 불필요하게 폭력적인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항상 이성적인 판단하에서만 때리는 어른스러운 캐릭터다. 그래서 이번엔 안 때렸다.

대신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오늘부터 너는 혹독한 주인님 훈련에 들어간다.”

“뭐라고!”

“나를 똑바로 학대하는 가학적인 주인님이 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

벨의 동공이 충격으로 커졌다.

“그게…… 뭐지……?”

벨과 63편이나 함께 한 만큼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뭐, 내가 만족할 때까지 손목이 부러지도록 채찍질을 해대는 그런 거나 생각했겠지. 표정이 구겨지고 안색이 창백해지는 걸 보니 뻔하다.

그런데 말이다…….

혹시, 혹시…… ‘그’ 중요한 사실을…… 벨이 모르는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당연히 알겠거니 어림짐작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세계 멸망 앞에서 돌이켜 짚어 보니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벨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내가 아픈 걸 즐긴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

나는 마조히스트다.

“…….”

벨의 표정이 연기로는 낼 수 없는 경악과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서로 충격을 받았다. 때려야 하는 장면마다 못 때리겠다고 하늘에 대고 징징거리기는 하지만 벨도 엄연한 야설 캐릭터.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피폐물 여주인공에게 당연히 피학적인 성향이 있으리란 생각을 정말 아예 못 했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

“지랄 마……. 꽤 즐거워.”

“세상에 맞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독자들이 이걸 왜 본다고 생각해?”

“모른다! 세상에 이상 성욕자라는 존재들이 실존할 리가 없다.”

벨이 바락바락 우겼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마음은 진실을 깨달은 듯하다. 야설 캐릭터니까. 어쩌다 마조히스트라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었을까. 어쩌다 그런…… 전체 이용가 캐릭터스러운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역시 작가가 SM물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한 채로 무작정 1편부터 쓰기 시작해서 그런 게 틀림없다.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그럴 리가 없어. 세상에 맞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맞으면 아픈 게 당연하잖나.”

“아픈데 그게 또 기분이 좋아.”

“자신을 속이지 말아라.”

“너야말로 내 말을 좀 믿어라.”

“난 그대를 때리며 행복해하는 #쓰레기남이 아니다. 그대를 아프게 하기 싫어. 이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프긴 한데, 그게 좋아.”

“그럴 리가 없다.”

“진짜라고.”

“못 믿는다. 애초에 이 소설은 SM플레이하는 내용도 아니야. 내가 그대를 납치해 억지로 취하는 게 어떻게 ‘플레이’가 된단 말이지? 사실상 그냥 강…….”

나는 급히 벨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놓고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그 단어는 금기다. 벨이 인상을 찌푸리며 은하의 손을 치웠다.

“가짜 SM소설의 남주인공이 가짜 사디스트였으니, 당연히 그대도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대만은 진짜라고?”

“너는 작가가 돈 벌려고 클리셰에 맞춰 대충 만든 캐릭터고, 나는 진심을 다해 공들여서 빚은 캐릭터니까.”

“그, 그런…… 그런가?”

“정신 차려.”

나는 벨의 양 볼을 잡았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핍박하는데 딱히 그 어느 쪽도 기뻐하지 않았다. 벨은 볼이 찌부러진 상태로 말했다.

“그대가 명령한다면 손목이 부러질 때까지 엉덩이 때리는 연습을 하겠다. 하지만, 그대의 말을 쉽게 믿을 순 없어. 난 아마 죽을 때까지 사디스트가 될 수 없다.”

“대신 마조히스트가 된다면?”

“왜?”

벨의 말투가 반 토막 났다. 처음 들어본다.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채찍으로 맞는 게 기분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면 다음부턴 채찍질할 때 기절 안 하겠지?”

“…….”

벨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학적인 행위를 못 견디는 것도 체질일 거다. 아마 지금까지 벨은 날 고통스럽게 하는 게 괴로워서 때리지 못했던 거겠지. 하지만 난 괴롭지 않다. 그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키면, 앞으로는 조금 더 수월하게 때릴 수 있을 거다.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문제지.

말로는 설득이 안 된다. 벨은 고집이 너무 세다.

사디스트가 되는 건 글렀다. 대신 마조히스트가 되어, 채찍으로 맞는 일이 기쁠 수도 있단 걸 몸으로 깨닫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훌륭한 주인님이 되기 위해선 먼저 훌륭한 수퇘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단 뜻이야.”

물론 처음 들어보는 개소리일 거다. 나도 한 5초 전까지 생각도 못 해본 말이니까. 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신반의했다.

“그……그것이 정말인가?”

이게 되네?

“네가 마조히스트란 존재를 못 믿으니까 직접 몸으로 가르쳐 줘야지, 어쩌겠어.”

“그, 그런 일이…… 가능한가?”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는 믿음직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벨의 어깨를 턱 잡았다.

“난 널 믿어. 넌 모자라지만 모자란 게 아냐. 너한테 맞는 학습 순서가 따로 있었던 것뿐이야. 먼저 맞아야 했던 거지. 게다가 넌 쓸데없이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심이 넘치잖아. 그러니까 분명 맞으면서 기뻐하는 마조 변태 돼지 새끼들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마조 변태 돼지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감을 가져.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마. 네가 날 피폐하게 만드는 멋진 미래가 보여, 벨. 너는 최고의 사디스트 #개아가남 #쓰레기남이 될 수 있을 거야.”

지금의 나는 정열이 넘치는 열혈 선생님이고 벨은 한때 일탈했던 불량 학생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 청산유수로 나왔다. 태어난 지 63편이나 됐지만 지금껏 칭찬다운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던 불쌍한 벨제뷔트. 벨은 넓은 어깨를 떨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난 항상 널 믿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알겠어. 해보겠다.”

벨제뷔트는 방금 난생처음으로 남주인공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내 말이 다 맞다. 그가 63편이나 되도록 제대로 된 남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저 멋진 주인님이 되기 위해 연습할 기회가 없던 것뿐이었다. 이제 알겠지? 나는 너에게서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매일 패고 때리고 욕하고 구박하고 무시하고 재떨이로 쓰고 의자로 썼던 건데,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게 된 벨은 울컥 눈물을 쏟아 냈다.

역시 캐릭터들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벨제뷔트는 이 기회에 주인님 수련을 받고 멋진 #개아가남 #집착남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벨은 나의 손을 꼬옥 맞잡았다.

“주인님이 되는 것과 수퇘지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군. 어리석은 나는 지금까지 노예 훈련이 주인님 훈련이 될 수도 있단 걸 몰랐다.”

남들도 몰랐다.

“때리는 게 좋다거나, 맞는 게 좋다는 기분……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 시련을 극복해 보겠다. 그대를 믿을게. 내가 철저하게 마음까지 주인님이 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수퇘지 훈련을 시켜 다오.”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나는 벨의 머리를 토닥인 후 침실 쪽을 가리켰다.

“먼저 가 있어. 난 준비할 게 있으니까.”

“알았다.”

벨이 부리나케 침실로 뛰어갔다. 수퇘지가 되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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