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5화 (5/40)

5화

악마성의 침실.

명실상부 <악마의 비바체>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 작중의 수많은 사건(섹스)과 갈등(섹스), 몰아치는 감정선(섹스), 스토리상의 중요한 비밀(섹스) 등등이 몰아치는 격전지에서 남주인공이 홀로 고고히 그의 호적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문을 박차고 등장한다.

침대 한가운데에서 고이 무릎을 꿇고 있던 벨이 화들짝 놀라서 꼬리를 세웠다. 불의 악마이자 악마들의 군주, 북부 악마성의 주인다운 위엄은 흔적도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편하게 앉아 있으니 과연 정말 카리스마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좀 괘씸했다. 연기도 못하는 주제에.

“……왔, 왔는……. 오셨는가.”

반말해야 할지 존댓말 해야 할지도 못 정했나 보다.

“그냥 하던 대로 해.”

벨이 새신랑처럼 볼을 수줍게 붉혔다.

“옷을 갈아입었군.”

“‘다음 편’에 입을 옷이야.”

나는 긴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차피 ‘본편’을 찍으면 1초 만에 찢어질 옷이겠으나……. 이 가슴이 파인 하늘하늘하고 긴 잠옷은 벨제뷔트가 줬다는 설정인데, 마계 귀족 여성들의 잠옷이었다. 이 우아한 실루엣이 소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주인공상이겠지. 가녀리고 기품 있고 잘 느끼는 여주인공.

“그, 그렇군.”

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흑발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뾰족한 귀 끝이 붉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유독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할 일이 할 일인지라 평소보다 훨씬 더 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벨은 악마왕이 아니라 수줍은 시골 총각 같은 걸 해야 했어.”

“그런 역할이었더라면 훨씬 행복하긴 했겠군.”

비꼰 건데 그걸 또 긍정했다. 벨에게선 알파메일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전투력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본래부터 한계가 명확한 인물을 어느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내 책임이 막중했다. 그런데 정말 벨에게 한계가 명확할까? 한계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고, 캐릭터에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벨은 지금 새하얗고 깨끗한 도화지 같은 상태다. 그간의 고생으로 약간 구겨지긴 했지만 어쨌든 하얀 도화지다. 잘 가르치기만 하면 좋은 주인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좋은 수퇘지가 되어 줄 수 있을지도.

지금부터 벨에게 맞는 즐거움을 가르쳐서 때리는 것도 잘하는 멋지고 당찬 주인님으로 길러 내야 한다.

일단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

그 작은 무게감에도 벨이 히끅 놀랐다. 1편을 찍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었다. 이렇게 쑥스러워하는 모습도 무척 오랜만에 본다.

대략 5편 이후, 벨제뷔트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도 정체를 밝혀 벨에게 손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즈음부터 사라졌던 표정이다.

……벨제뷔트는 저런 표정을 마음껏 짓고 싶은 거겠지? 괜히 성격에 맞지도 않는 사디스트 악마왕 역할이 아니라, 마음껏 순박하고…… 아방해질 수 있는 그런 역할…….

생각하다 보니 화가 난다. 오로지 나만이 아방할 수 있다.

그리고 여자가 살다 보면 남자 좀 때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벨의 어깨를 턱 잡았다.

“우리는 ‘다음 편’에 찍을 장면을 연습할 거야. 역할을 바꿔서.”

“알겠다.”

벨이 나를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은하. 사실 아직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다 이해가 안 가겠지…….

“그대가 나를 때리는 것까진 알겠어. 그런데…….”

“그런데?”

“……지금까지와 뭐가 다르지?”

음, 좋은 질문이다.

사랑을 나누는데 어떻게 채찍이 끼어들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캐릭터의 질문답다. 때리고 맞는 행위 어딘가에 사랑이 있으니 독자들이 거기에 매달린다는 것까지는 이성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감성은 다르지. 이런 건 질문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건 몸으로 알려 줄게.”

그리고 벨을 밀어 넘어트렸다. 벨이 숨이 멎을 것처럼 놀라 일단 날 밀쳤다.

“안 된다!”

‘주인님 훈련’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나온 대사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챙겨 온 촉수로 벨의 따귀를 때렸다.

“닥쳐, 가만히 있어.”

벨이 자신이 무엇으로 뺨을 맞았는지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건……?”

“‘다음 편’에 쓸 거. 다 가져오긴 힘들어서 잘라서 가져왔어.”

바로 딱 딜도 정도 크기로 잘라온 촉수의 끄트머리다.

“다음…… 다음 편에? 촉수를?”

다음 편에 촉수를 쓴다.

연재 중단 공지가 올라간 그다음 편. 벨제뷔트가 사고 친 63편 다음에 찍을 장면. 작가의 의지를 무시하고 우리끼리 만들어 낼 첫 편.

그 직전 편에서, 벨제뷔트는 유은하를 징그러운 촉수 마물의 먹잇감으로 주려다가, 촉수를 그냥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에게 잘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 전개될 내용을 지금부터 역할을 바꿔 예행연습 해본다.

그러면 당연히 촉수가 나와야 한다.

“…….”

잘랐는데도 아직 꿈틀거리는 촉수를 쳐다보는 벨의 안색이 새파랬다. 이런데도 조각처럼 잘생겼다는 점만큼은 남주인공으로서 합격이다.

“네 안에 넣을 거야.”

참고로 이 촉수는 굉장히 촉수였다.

점액질이 흐르는 물컹물컹한 녹색 물체에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나 있었고 각각의 돌기에서도 작은 촉수가 튀어나와 있었으며 그 작은 촉수에도 돌기가 나 있는 프랙탈 구조를 띠고 있었다.

벨의 멘탈도 프랙탈 구조로 산산이 부서졌다. 오로지 미관상의 이유만으로 보는 사람의 정신을 공격할 수 있는 흉기였다.

심지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자, 잠깐만.”

벨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촉수 같은 징그러운 생물은 호불호가 갈리는 소재이지만 <악마의 비바체>는 굳건했다. 호불호가 뭐고 그냥 밀어붙였다. 어떤 의미로는 뽕빨 야설의 근본을 지켜 냈다 할 수 있었다. 촉수가 나온다.

다들 촉수를 좋아한다. 벨만 빼고.

“촉수 씬을 정말로 넣을 건가? 촉수는 불태웠어. 개연성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대체 무어라고 변명하면서 넣을 생각이지?”

벨은 침대 끄트머리까지 도망쳐서는 꼬리를 엉덩이 사이로 넣었다. 덜덜 떨면서 슬쩍 베개까지 방패 삼는다. 악마왕 주제에 자존심도 없나 보다.

“잘라도 움직이는군. 징그러운 생물이야. 난 그게 싫다.”

“난 네가 싫어.”

촉수로 벨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

“!”

해산물로 따귀를 맞아 본 캐릭터가 얼마나 될까. 축축하고 물컹거리는 기묘한 물질이 잘생긴 북부 악마왕의 뺨에 아프게 착 달라붙었다가 끈적거리는 점액을 남기고 떨어졌다. 아프진 않을 거다. 그냥 따귀 정도는 일상적으로 많이 맞아 봤으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불쾌감은 어떨까.

나는 흐물흐물한 촉수로 벨을 가리켰다.

“개연성은 어떻게든 만들 거야. 일단 날 촉수 마물한테 먹이로 주고 아무 설명도 안 할 수도 있지.”

“……전개가 망할지도 모른다.”

맞은 뺨을 붙잡고 정신을 놓아 가던 벨이 퍼뜩 말했다.

“전개는 이미 망했어!”

그의 오른쪽 뺨도 촉수로 때렸다. .

“…….”

벨은 맞은 뺨을 붙들고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간 손이나 채찍, 몽둥이로 때렸을 땐 보여 주지 않던 표정이었다. 어째 이 해산물로 몇 대 더 때려 보면 흑화도 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촉수도 외부 자극을 받아 딱딱하게 부풀고 있으니까, 나는 이걸로 벨의 잘생긴 얼굴을 꾹꾹 눌렀다.

“이제 촉수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해야지. 45편 때 있었던 일을 잊었어?”

“…….”

벨이 촉수 보고 졸도했던 사건이 있었다.

실은 벨에게만 트라우마가 아니다. 나에게도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이란 게…….”

트라우마를 몸으로 느끼며 직접 싸우자는 것이다.

“…….”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긴장감이 가득한 짧은 침묵 끝에,

“싫……!”

“벗어!”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도망치려는 벨을 몸으로 붙잡고 바지를 벗기기 위해 벨트 부근을 더듬었다. 그러다 실수로 아예 그의 말캉한 고간을 만져 버렸다. 악마왕의 능력까지 써가며 도망치려던 벨은 여주인공의 의도치 않은 기습적 성추행 때문에 힘을 잃고 침대에 엎어졌다.

일단은 <악마의 비바체>도 로맨스 소설이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적극적인 신체적 접촉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 안쪽을 쓸고 물렁한 고간을 더듬자 벨이 거의 발작을 했다. 나도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촉감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아, 아니야. 안 된다. 첫날부터 촉수라니…… 너무 하드하다.”

벨이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나는 무시하고 그를 계속 덮쳤다. 엎드린 그의 등 위로 몸을 기울이니까 벨이 거의 숨을 헐떡였다. 가슴이 닿아서 그런가? 일단 남주인공이라고 여주인공의 육체에는 반응을 하는 건가? 남주인공이라고?

“남주인공 주제에 촉수를 무서워하다니.”

용서가 안 된다. 촉수를 얼굴에 들이밀자 벨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대는 피폐물 여주인공이라 뭐든 씬의 재료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터프하지만, 난 아니다. 그대는 정도를 몰라.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해 보지 않겠나.”

“벨. 무서워?”

“그래, 무섭다.”

벨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가오가 없었다.

“남주인공이 뭘 무서워하면 어떡해?”

나는 벨의 바지 벨트를 한 손으로 쓱 풀어 내리고, 단번에 바지를 내렸다.

“히익……!”

악마왕의 복잡한 정복일지라도 벗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대, 남자 옷을 왜 이렇게 잘 벗기지? 바람둥이 같다.”

“그게 할 말이야?”

뭐어…… ‘유은하’였더라면 못 했을 일이긴 하다. ‘유은하’는 수줍음이 많고 성 경험이 적어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는 일에 서투니까. 하지만 지금은 수줍은 척할 필요가 없으니까, 스스로의 봉인을 풀었다.

“잡아먹지 말아라.”

급기야 벨이 이렇게 빌었다. 필사적으로 바지를 수습하며 그가 계속 외쳤다.

“적어도 단계나 순서라는 게 있을 텐데!”

그리고 벨은 당황할수록 말이 많아진다.

“꼬리 구멍 단추는 언제 푼 거야. 나, 난 아직 그대 속옷도 풀 줄 모른다.”

벨제뷔트는 아직도 유은하의 브래지어를 풀 줄 모른다. 풀 줄 몰라야 맞다. 매번 그냥 거칠게 찢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로 당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침착하게 벨의 꼬리를 잡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불필요하게 수치심을 주는 폭력이 아니다. 이 정도는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진정하라는 의미에서다.

“가만히 있어.”

“아!”

엉덩이가 손바닥 아래에서 푸딩처럼 흔들렸다. 평생 바깥에 나올 일이 없던 남주인공의 엉덩이라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무서워하면 약해 보이니까 남주 가오 떨어지잖아. 기본 교양도 없어?”

“무, 무슨 짓을.”

내가 꼬리를 뽑아 버릴 듯 세게 당기자 그가 덩달아 허리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남주인공의 하얀 맨엉덩이가 보이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더 때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뜨끈한 살의 촉감이 황당했다. 남주인공의 몸에 부드럽고 약한 부분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벨은 악마왕의 정복을 완벽하게 갖춘 채 바지만 내린 부끄러운 복장으로, 적극적으로 매를 조르는 것처럼 몸을 비틀었다. 실제로는 아프고 수치스러워서 그런 거겠지만, 별거 아닌 행동이 음란한 쪽으로 왜곡되는 이 야설 세계관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창피해서 힘든 거지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다. 야구 방망이로 팬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육체적 고통보단 정신적 고통에 훨씬 취약해서, 벌써부터 헐떡거리며 꼬리를 마구 내저었다.

“그만해 다오. 내가 잘못했다.”

“주인님 주제에 벌써 우는소리가 나와?”

“지금은 노예 역할이잖나. 노예는 잘 울어야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흠.”

그의 꼬리를 놓아주었다. 그 틈을 타 벨이 재빨리 옷을 추슬러 통통한 하얀색 엉덩이를 숨겼다.

“그대는 터무니없는 말만 하는군. ‘주인님’이란 존재는 인간성도 없나?”

“없지. 생체 딜도 역할이니까.”

다시 벗겼다.

“이 소설은 나에게 잔인하군.”

복합적인 감상이었다.

“엉덩이에나 집중해.”

“그게 뭔 소리, 아!”

또 때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살의 감촉이 여전히 당혹스럽고 적응이 안 됐다. 옷을 입힌 채 때린 적은 많은데, 이렇게 맨살을 손바닥으로 친 적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남주인공의 겉멋을 배려해서 옷을 벗기지는 않았던 탓이다.

벨의 마름모꼴 눈매가 눈물로 왈칵 젖었다.

“각오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난 아직 뒤로 뭔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나도 널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63편이나 됐으면 나에게 적응하도록 해라.”

“왜 쓸데없는 부분에서 뻔뻔하냐고.”

그를 몸으로 제압하고, 촉수 가닥을 엉덩이에 들이밀었다. 벨은 조금 더 꾸물거리며 무의미한 저항을 했다. 어차피 뚫어야 할 것을……. 나는 벨의 하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며 달래듯이 말했다.

“따끔해.”

“주사 놓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라.”

“비슷하잖아.”

“그렇게 크고 굵고 돌기까지 나 있는 주사가 어디 있단 말이냐.”

실로 뽕빨물 캐릭터들다운 대화라고 생각한다. 벨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오들오들 떨었다. 꼬리가 자꾸 내 손을 밀어 내려 했다. 나는 그에게 크고 굵고 돌기까지 나 있는 주사를 준비도 없이 놔버릴까 하다가 관뒀다. 그렇게 해봤자 그가 노예 역할의 즐거움을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냥 벨의 옆자리에 누워서, 촉수로 그의 엉덩이를 문질렀다. 벨은 엉덩이에 닿는 생경하고 불쾌한 감촉 때문에 정신이 없는 듯했다.

나는 이 촉수와 함께 잠도 잘 수 있는데 피폐물 남주인공이란 놈이 이렇게 연약해서야 소설의 앞날이 어둡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정말 세계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촉수 가닥으로 벨의 하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벨. 너한테 주인님으로서 부족한 점이 뭐라고 생각해?”

이 못난 남주인공이 대화를 원하니 대화를 해주겠다. 벨이 살며시 대답했다.

“……나잇값을 한다는 점?”

평소 본인 역할을 뭐라고 생각했었는지 알 만했다.

한숨을 푹 쉬고, 그냥 답을 알려 줬다.

“주인님은 부끄러움을 타면 안 돼.”

그리고 그의 엉덩이를 주물거렸다.

“!”

벨도 놀랐지만, 사실 나도 속으로 무척 놀랐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말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근육질 엉덩이이니만큼 안쪽에 단단한 심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벨이 힘을 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소설의 이전 편과 다음 편 사이마다 남주인공을 주먹으로 패고 방망이로 패던 게 운동이 되어 내 악력이 세진 건지, 하여간에 황당했다.

왜 말랑하지?

남주인공의 고추라면 몰라도 엉덩이는 지금껏 다른 사람의 것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악마의 비바체>의 분량이 꽤 쌓이도록 벨제뷔트의 엉덩이는 아직 순결했다. 크고 굵고 돌기까지 나 있는 촉수로 뚫기는커녕 누군가가 주물럭대거나 하다못해 쓰다듬은 적도 없었다. 그런 곳을 내가 마구 유린했다. 좁은 골반과 작은 엉덩이를 손에 쥐고 굴려 보기도 하고, 멍과 상처가 남은 피부를 쓸어 보기도 하며 매만졌다.

벨은 눈을 질끈 감고 내 손목에 꼬리를 감았다. 꼬리 털 때문에 간지러웠다. 벨이 떨며 말했다.

“겨…… 견뎌 보겠다. 마음껏 만져도 좋아.”

어이가 없다.

“왜 네가 허락하는 것처럼 말해?”

“그, 그랬나. 말이 헛나왔군. 미안하다. 오늘 말실수가 많군. 부탁이니 마음껏 만져 다오.”

벨은 내가 엉덩이를 만지작댄다는 시련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멋진 남주인공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그래야 <악마의 비바체>가 중단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의 엉덩이에 세상의 존폐가 달려 있다.

그런 위대한 목표를 위해, 나도 있는 힘껏 손을 희생해 그의 엉덩이를 만졌다.

“그런데 좀 괘씸하네. 난 촉수를 위아래 앞뒷구멍에 두 개씩 집어넣었는데 너는 고작 이 조그만 것 하나 못 넣어서 무섭다고 징징거려?”

“그 정도였었나!? 모, 몰랐다. 그러면 도합 몇 개나 넣은 거지?”

“몰랐겠지. 내가 촉수랑 노는 동안 너는 기절해 있었으니까.”

나는 촉수를 찍 쥐어짜 손가락에 끈적한 액체를 묻힌 다음, 악마왕의 조그맣고 순결한 구멍을 단번에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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