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샴페인을 터트렸다.
“댓글 반응이 좋아.”
벨에게도 친히 한 잔 따라 줬다. 벨이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내 얼굴과 하늘에 뜬 댓글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싸움이 났는데?”
표정이 황망했다.
“아주 좋아.”
“은하, 지금 독자들이 서로 인신공격을 하고 있어.”
“작가 없이도 할 수 있었어.”
“댓글이 이렇게 많이 달린 건 처음 본다.”
“그러니까.”
“이건 반응이 좋은…… 게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중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승리의 잔을 마셨다. 술이 이렇게 달콤할 수가. 해냈다. 성공했다. 세상의 멸망을 유예했다. ‘등장인물이 알아서 움직였다’는 현상을 기어이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제 작가는 필요 없어.”
연재 중지를 하든 말든! 바깥에서 몰아치는 폭풍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기세가 줄었다. 나는 테라스를 열고 밖에 나가 하늘을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필요 없다고!”
그러다 왈칵 눈물이 났다.
“아니야, 필요해. 왜 날 두고 먼저 가는데, 완결 내기로 약속했잖아. 흐어엉…….”
난간에 기대 쓰러졌다. 벨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내 어깨를 잡았다.
“그, 그대. 취한 거 같아. 작가는…… 완전히 떠난 게 아니다.”
벨의 붉은 눈동자가 흐린 하늘을 비췄다.
“작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거야.”
“내 눈앞에 없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64편 다 물러도 좋으니까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그대…… 너무 많이 취했군…….”
벨이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댓글이 계속 달렸다. 내용이야 어쨌든 댓글이 많이 달린다. 작가가 못 한 일을 내가 해냈다는 증거다. 나는 신을 넘어섰다.
벨이 나를 토닥이며 달랬다.
“으음, 그대는 알코올 증기만 들이마셔도 취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군. 말렸어야 했는데.”
우리의 죽음은 약간이나마 뒤로 미뤄졌다. 아직 이 불합리한 세상을 상대로 완전한 성공을 이룬 건 아니다. 그러나 첫발을 뗐다. 그것도 무척 성공적으로 뗐다. 자축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잔을 비웠다.
알코올이 올라오니까 머리가 팽팽 돌고 폭풍 속에서도 열이 올라왔다. 나는 더워서 옷을 훌렁훌렁 벗으며 빈 잔을 내밀고 명령했다.
“술 따라.”
그는 황급히 내 몸에서 눈을 돌렸다.
“안 된다. 옷은 입어.”
“뭐? 감히 이 여주인공한테 술에 취했는데 옷을 벗지 말라는 거야?”
벨의 멱살을 잡고 주정을 부렸다.
“너야말로 똑바로 안 봐? 즐기듯이 위아래로 훑어봐야 하잖아. 여근 과시 한 번 더 해줘?”
그런데 화가 화를 부른다고, 멱살을 잡고 보니 64편에서의 벨의 끔찍한 짓이 떠올랐다.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
“촉수는 왜 만지작댔어?”
“그, 그건.”
벨이 대놓고 당황하며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런다고 떨어질 내가 아니다. 여주인공은 알코올이 들어가면 거머리나 촉수처럼 남주인공에게 붙을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 생긴다. 나는 그를 바닥에 밀어 덮쳤다. 벨은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적극적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또 사과했다.
“미안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제 촉수가 무섭지는 않지만…….”
촉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리버스까지 감행했다. 64편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끝냈어야 했다. 확실히 이번에 벨은 촉수를 무서워하진 않았다. 이제 촉수 장면에 한해서는, 가학적 행위를 못 해서 방송 사고를 낼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다른 종류의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렸지만.
“왜 그랬냐?”
왜 촉수를 오랫동안 만지작대며 정신을 놓아 버렸을까? 그 장면에서 벨제뷔트는 ‘유은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소유욕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렇지만 벨은 그 징그러운 초록색 놈들의 우둘투둘한 돌기에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어제 촉수에서 쾌감을 느꼈는지 불쾌감을 느꼈는지, 어쨌든 간에.
“나, 나는…… 어제…….”
벨이 나를 올려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줍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그대에게 불경했다.”
“뭐?”
무슨 말이야?
“은하, 차라리 날 때려라. 그쪽이 더 익숙해서 편하다.”
벨이 갑자기 고통과 증오를 요청했다. 역시 맞고 살아서 그런가 안 맞으면 불안한가 보다. 나는 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말 나온 김에, 중간에 채찍질은 왜 또 빼먹었어.”
때릴 생각은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허구한 날 패는 바람에 벨이 더 소심해진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벨이 왜 두 명이지? 어느새 그가 나를 소파에 눕히고 있었다.
벨이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취했는데도 그런 건 어물쩍 넘어가 주지 않는군.”
어디선가 내 눈앞에 붉은 액체를 담은 화려하고 작은 유리병이 나타났다.
“포션이다. 마셔라.”
우리는 판타지 세계관에 산다.
“치워. 술 가져와.”
테이블을 발로 차 뒤엎었다. 포션이 깨지고 벨이 가련하게 쓰러졌다. 빈 술병으로 그를 가리켰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알아. 채찍질도 못 하는 남주는 필요 없어!”
“그대는 술만 들어가면!”
벨이 침착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잔인하고 사악한 남주인공이라면 응당 술에 취한 가련한 미녀를 보고 음험하게 웃어야 하는 법이다. 아니면 내가 벗는 걸 보고 살짝 당황해서 의외의 귀여운 일면을 보여 주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벨의 눈빛은…… 뭐지? 폭력적인 가장을 대하는 눈빛?
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채찍 장면은 나오는 게 더 이상해. 질투하는 장면으로 돌렸으니 결과적으로 괜찮지 않나.”
“…….”
듣고 보니 그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건 그래. 잘했어.”
날카롭게 잘생긴 악마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대는 설득이 쉬운 건지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너야말로 내 말을 잘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모르겠어.”
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우리는 어쩌면…… 입체적 캐릭터……가 아닐까?”
뭐?
“웃어? 세계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와?”
벨을 때렸다. 지금 당장 다음 편을 써야 하는데 얘는 쓸데없이 신분이 상승한다고 좋아하고 있다. 이렇게 뭐가 중요한지 파악을 못 하니까 자꾸 본편에서 사고를 치고 결과적으로 작가까지 쫓아낸 것이다.
“제발 채찍질이나 제대로 하자. 우리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으면 안 돼. 작가가 그런 건 설정 안 했어.”
“그러니까 이제 채찍은 필요 없다고…… 게다가 지금은 작가가 없다. 지금이라면 더 복잡한 캐릭터로 발전할 수 있어.”
“기본도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응용이야. 속 터지는 소리 할 거면 그냥 말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명치를 주먹으로 때렸다.
“근데 왜 촉수를 그렇게 오래 만졌냐고.”
취해서 어지러워도 할 말은 해야겠다. 왜 그런 사고를 쳤나. 나는 벨의 턱을 잡고 치켜올렸다. 벨이 진땀을 흘리며 나와 눈을 맞췄다.
“그, 그건…… 할 말이 없다. 때린 곳을 또 때리진 말아 다오.”
벨이 날아오는 두 번째 주먹을 막았다. 당연히 벨제뷔트는 남주인공이니 내 공격 따윈 쉽게 막을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손 치워.”
“…….”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로맨스 소설 캐릭터다. 나는 방금 때린 곳을 또 때렸다. 그런데 내가 때렸지만 벨이 진짜로 맞아서 짜증이 났다.
“맞고 사는 피폐물 남주인공이 어딨어.”
벨은 정신이 아득해졌는지 눈을 감았다.
“그대, 평소보다 훨씬 진상…….”
“뭐?”
“아, 아니, 미안하다. 그대를 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맨날 입으로만 노력하지.”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읍!?”
“과묵해져라.”
“…….”
그의 빨간 눈이 ‘벨제뷔트라고 딱히 과묵한 캐릭터는 아닌데…….’ 하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무시하고 그를 껴안는 베개 삼아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취한 게 맞는 것 같다.
이런 세계관 속 알코올은 그냥 알코올이 아니다. 일종의 미약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독제는 없고, 야한 일을 해야만 깰 수 있다. 그 전까지 이 열기와 어지럼증은 가시지 않는다.
지금은 ‘이전 편’와 ‘다음 편’ 사이, 쉬는 시간이지만, 우리 세계는 이런 순간에도 건전한 전개를 허락하지 않았다. 작가는 떠났어도 신의 잔재가 이렇게나 강하게 남아 있다. 아마 지금 내가 알코올을 거부하고 건전하거나 미지근한 행동을 했다간 세상이 우리에게 항의하듯이 요란하게 무너질 거다. 그런 감이 들었다.
우리의 행동이 곧 세계의 수명이다. 우리가 행동을 멈추면 세계도 멸망한다. 지금이 설령 <악마의 비바체> 본편이 아니더라도, 나는 강박적으로, 계속해서 지면을 채우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지러워.”
그의 길고 하얀 목에 코를 묻자 강한 남자의 체취가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주인공의 체취다.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너는 부족하고 한심하고 유약하고 쓰레기 같은 남자야.”
편안해지니까 솔직한 본심이 새어 나왔다.
“이 쓰레기야.”
“미, 미, 미안하다…….”
벨이 명백히 상처받은 표정으로 어설프게 내 등에 손을 올렸다. 물론 이런다고 썩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비록 우리끼리 어떻게든 64편을 만들기는 했어도 이건 독립이 아니다. 고아가 된 것에 가깝다. 나는 문득 이 피폐한 로맨스 소설을 찍으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별로 의지가 안 되는 벨제뷔트가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 했다.
“무엇을 해야 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말해 다오. 일일이 말하게 하는 것도 남주인공의 미덕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말은 잘 듣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내가 꼭 뭘 시켜야 해? 왜 내가 명령해? 네가 나한테 명령해.”
“그대가 주인공이잖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
서로 당하는 쪽이 되고 싶어서 치열하게 기싸움한다.
나는 벨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안 하잖아. 왜 맨날 입만 살았지? 죽을래?”
나는 벨의 뺨을 때리려다, 문득 그의 보석 같은 얼굴이 눈에 띄어 손을 멈췄다.
“남주인공이 이렇게 생겼는데 왜 작가가 떠났을까.”
납득이 안 간다. 적어도 피지컬은 된다. 외관만큼은 공들여서 창작한 게 분명하다.
벨이 떨떠름하게 내 손을 쓰다듬었다.
“뭐어, 우리는 글자니까 실제로 어떻게 생기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대는 술을 깰 생각이 없군.”
“몸도 좋은데.”
빨리 깰 거면 뭐 하러 술을 마실까. 세계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주정 좀 부려도 괜찮은 거 아냐? 나는 눈에 띄는 살덩어리를 덥석 잡았다. 셔츠와 조끼로 꽁꽁 감싼 남주인공의 글자로 된 흉부였다. 만져 보니 생각보다 봉긋했다.
“한번 벗겨 보지도 않고 떠나다니.”
<악마의 비바체>의 최신 편까지 벨제뷔트는 벗지 않는다. 64편으로 끝내기엔 이 소설에는 아직 써먹을 만한 컨텐츠가 많았다.
말로만 뭐든 하겠다고 하는 벨제뷔트와는 달리 나는 정말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맞았고, 묶였고, 촉수도 한꺼번에 여러 개나 먹었고, 전개가 어떻게 되든 의심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따랐다. 모두 신을 위해서였다.
피조물들만 남겨 두고 이렇게 무정하게 가버리다니. 사실은 말 잘 듣는 남주나, 폭군 사디스트 남주, 줄줄이 달리는 댓글, 떨어지지 않는 순위,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그냥 대본을 따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우울한 생각에 깊이 빠질수록 왜일까 자꾸 남주인공의 몸을 주무르게 되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만져 본 건 처음이라 그런지 자꾸 손이 갔다. 이거 뭐지. 왜 이렇게 크지. ……젖 나오나?
아기환생물의 재능은 벨이 아니라 나에게 더 있었나?
벨은 혼자 뭘 궁리하는 것 같더니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읏, 큭…… 은하. 혹시 원, 원한다면 때……려도 좋다. 적어도 기분 전환은 될 테니까.”
“언제는 내가 네 허락받고 때렸던 것처럼 말한다.”
작가는 이미 떠났는데 남주인공을 때리고 교정해 봤자 어디다 쓴단 말인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한시름 돌리고 나니 다 부질없는 것 같다.
“됐어. 왜 매를 자처해.”
“하, 하지만…… 그대는 날 때릴 때 가장 생기가 돌아.”
“…….”
부정하고 싶다.
“차라리 정말 장르를 바꾸는 건 어떤가? 역할을 바꾸자. 그대는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세상이 멸망하려는데 뭐든 해봐야 하지 않겠나.”
“이제 와서 장르는 못 바꿔. 우리한테 익숙한 대로 해.”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
“네가 농담도 할 줄 아네.”
“농담이 아니다. 그대는 이미 훌륭한 사디스트야. 그대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하다.”
“…….”
“내, 내가 또 뭔가 잘못된 말을 했나?”
내 눈치 보는 것 말고 딱히 할 게 없는 벨이 또 알아서 눈치를 봤다.
“항상 그대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은데, 부족한…… 몸이라서 미안하다. 그…….”
벨은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대다 물었다.
“……꿇을까? 날 때리겠나?”
술이 확 깼다. 재능은 벨한테 더 있다. 매를 부르는 재능이…….
흡사 비 맞은 강아지가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폭군 같지 않다. 말을 들을 거면 그냥 시키는 대로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그냥 내 말을 무시하고 제대로 폭군처럼 하든가, 어중간하니까 자꾸 화가 났다. 벨제뷔트는 입만 다물면 완벽한 흑발 남주가 되는데 왜 자꾸 입을 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매번 내 눈치만 보지 말고 당당하게 뭘 좀 해봐. 폭군처럼.”
사소한 화풀이를 했다. 그가 비굴하게 굴면 화가 나는 이유가, 작가가 이런 소심한 남자 캐릭터를 싫어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무능한 그를 싫어해서인지 구별이 안 됐다. 어제 ‘훈련’을 했을 때는 분명 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게 즐거웠는데 오늘은 벨이 눈치를 보니까 불쾌하다.
어디까지가 창조신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내 고유의 마음인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어제 대놓고 리버스 행위를 했을 때의 해방감이 그리웠다.
벨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민했다.
“폭군처럼……. ‘벨제뷔트’처럼 행동하란 말인가?”
“그래.”
“음.”
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명령을 내리지.”
어? 진짜?
“그대는 나의 요구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설령 그게 그대를 괴롭게 할지라도 말이야.”
돌연, 예고도 없이, 공기가 얼어붙었다.
벨제뷔트가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늘 자책과 후회, 그리고 약간의 체념에 젖어 있던 그의 붉은 눈에 어둡고 위험한 이채가 돌았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지배자적인 면모에 놀라 몸을 굳혔다.
어, 어라. 이럴 수 있었어?
지금까지 치명적인 방송 사고만 내던 그 벨이 아니었다. 지금은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벨이 불의 악마왕 벨제뷔트로 변했다. 오만하고 강인하며 다른 모든 이들을 벌레처럼 깔아 보는 이 소설의 알파메일. 선망과 욕망의 대상. 모든 것을 쥔 자.
할 수 있었잖아……. 나는 희열에 차서 그를 올려다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유은하’가 깨어난 것 같았다.
벨이 나른하게 내 연갈색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대가 긴장한 모습도 다 보는군. 왜, 무섭나?”
“…….”
제법…… 제법이잖아. 꽤 하잖아? 잘하잖아?
작가가 도망쳤다는 이 위기 상황에서 드디어 남주인공이 각성을 한 건가?
기쁘다. 희망이 보인다. 괜히 벨제뷔트가 남주인공인 게 아니었던 것이다.
벨제뷔트는 핏빛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진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난 그대가 뭐라고 하든 무릎 꿇고 빌고 말겠어.”
완전 멋있었다.
이 사악한 폭군이 무릎을 꿇고자 하면 꿇고 마는 것이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악마가 무릎을 꿇는 모습을 그들은 무력하게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구경꾼들이 그 어떤 끔찍한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어떤 처절한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벨제뷔트가 무릎을 꿇고 빌고 싶다면 그는 끝끝내 무릎을 꿇고 빌고 말았다.
벨제뷔트가 사악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은하. 날 때리고 기분 풀어라. 이건 명령이다.”
아까 했던 말이지만 뉘앙스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말에는 사람을 따르게 하는 강압적인 힘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홀린 듯이 야구 방망이를 찾고 말았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