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벨은 딱히 악마왕 벨제뷔트가 되진 않았다. 그냥 분위기 좀 잡고 사악한 말투로 때려 달라고 한 것뿐이다. 평소랑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나도 평소랑 크게 다를 바 없이 벨을 때리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대, 남주인공 몸에 피멍 들게 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안 보이는 데 때리잖아. 자세 똑바로.”
“얼굴 빼고 다 때린다는 소리- 크헉.”
평소랑 다르지 않았다.
“윽, 조금만- 헉.”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런다고 내가 죽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진 벨이 헛소리하는 것도 평소랑 똑같았다.
“하.”
그 후 몽둥이를 던지고 담배를 물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연속해서 격정적인 섹스를 해야 하는 만큼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이런 나조차도 벨제뷔트에 비해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다. 늘 내가 먼저 뻗는다. 소파에 몸을 던지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주인공답게 독백도 했다.
“여주인공 노릇도 쉽지 않네.”
그래도 운동하니까 개운하긴 하다. 음란하지 않은 운동일 뿐이다.
나보다 훨씬 튼튼한 벨이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꿍얼거렸다.
“이상하군. 아프지만 아프지 않다.”
“무슨 뜻이야.”
“분명 예전에는 그대에게 맞을 때마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뜻이다. 불쾌하긴 해. 하지만 그냥 지나가다 재수 없게 껌 밟은 정도로 느껴진다. 이것도 일종의 주인님 훈련인가? 그대를 얕보는 훈련?”
확실히 나를 꼬나보는 붉은 눈빛이 무척 불손했다. 아무리 폭력으로 다스리려 해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는 건 남주로서 좋은 소양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벨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다. 나를 껌 취급하다니?
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맞아도 불안하고 안 맞아도 불안할까……. 그대의 매질이 미적지근했던 건 아닌가? 실망이군, 은하.”
확실히 맞고 나니까 남주답게 건방져지긴 했다.
“더 때리면 완벽한 벨제뷔트가 되어 줄까?”
“아니, 충분히 때렸다. 더 맞긴 싫어.”
벨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맞고 싶은 건지 맞기 싫은 건지 입장을 확실히 정해 줬으면 한다. 폭력에 익숙해진 주제에 전혀 주눅 들지 않으니까 저런 혼종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뭐라 하려다가, 더 이상 때릴 힘이 없어 그냥 푹신한 응접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저기 봐.”
창문 밖을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벨이 표정을 굳혔다.
노을 지는 하늘과 붉게 물든 땅이 만나는 수평선이 글자로 산산이 부서져 와해되고 있었다. 지긋이 응시하면 거기 뭐라 쓰여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¹º§??º°? ??´?.¡ ¸??? ³ª°?¼?¸?¿¡ ¾Æ??? ……
글자가 깨져 있다.
우리 세계와 바깥 세계를 이어 주는 메모장 파일마저 문제가 생겼겠지. 알기 쉬운 세계 멸망이다.
64편을 만들어 잠깐 벌어 둔 귀중한 휴식 시간이 슬슬 다 되어 간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러는 와중에, 남주인공은 아직도 내 발목을 꺾는 일을 망설인다.
“부족한 사디스트를 데리고 ‘다음 편’을 어떻게 계속 쓰지?”
벨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대에게 계속 주인님 훈련을 받다 보면 나도 나아질 수 있을 거다. 날 포기하지 말아라.”
“그럼 내 발목 꺾어 볼래?”
꽤 산뜻하게 제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벨은 가만히 내 가느다란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훈련을 계속 받는 편이 낫겠군. 그냥 더 때려 다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아까는 때리지 말라면서. 이랬다 저랬다야.
벨은 아직 엉덩이가 아픈지 의자에 앉지는 못했다. 대신 진지한 얼굴로 악마성 응접실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64편이나 되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무슨 마음으로 이 소설을 보는지 이제야 조금 감이 잡히는군.”
64편이면 단행본 2권 정도 되는 분량이다. 이제야…….
“촉수에게 희롱당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니, 몰랐어. 나는 그게 끔찍한 고문이라고 믿었다. 그대가 아니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납득할 수 없었지. 징그럽고 축축하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좀 그런가 보다 해라. 좋은 거 맞다니까.”
“의심해서 미안하다. 지금까진 그대를 촉수에게 던지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져서 방송 사고를 냈지만, 앞으로는 아닐 거라 약속한다.”
“그래.”
벨이 꼭 칭찬해 달란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앞으로 촉수 안 꺼내겠다고 선언한 주제에.”
“…….”
잘생긴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사고를 수습하는 게 쉽지 않겠군.”
“내 발목 꺾으라고.”
“아직 훈련이 필요하다니까.”
벨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찍어야 할 장면들을 생각하니 앞날이 깜깜하다. 촉수는 그렇다 치고 다른 끔찍한 것들을 즐긴다니 납득하기 어려워. 물론, 머리로는 알겠지만, 내 죄책감까지는…….”
“꼭 몸이 고생해야 믿지?”
그런데 이제 촉수는 괜찮다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주인님 훈련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담뱃재를 그냥 바닥에다 털며 돌아다니는 벨을 눈으로 좇았다.
“근데 엊그제 촉수가 꽤 좋았나 봐?”
뒤돌아서 있던 벨이 우뚝 멈추더니, 나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말했다.
“좋……긴 했지만, 촉수가 좋았던 게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갑자기 부끄러워한다.
꼬리가 괜히 허공에서 휙휙 흔들리는 걸 보니까 그렇다. 흑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뾰족한 귀 끝도 붉었다. <악마의 비바체>에서 격정적인 장면이 들어간 편을 찍고 나면 벨은 늘 저랬다. 내가 쟤한테 촉수 박았던 게 그 정도였나. 섹스를 하긴 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꼭 그, 그걸 내 입으로 들어야 성에 차겠나.”
“왜, 사랑의 매가 부족해?”
“!”
벨이 휙 고개를 돌렸다. 크게 당황한 듯 얼굴이 벌겠다.
“그, 그, 그게 다음 ‘주인님 훈련’ 내용인가? 이제는 매 맞는 즐거움을 알려 주려고?”
오, 드디어 벨이 ‘사랑의 매’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역시 촉수 박길 잘했다. 벨은 몸으로 직접 겪지 않으면 이해를 해주지 않는단 말야.
우리 소설의 남주인공 1번이 저런 성격이라는 걸 1편부터 알았더라면, 64편이나 돌아오지도 않았을 텐데.
벨은 횡설수설 빠르게 말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이미 그대가 날 많이 때렸어. 이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씌우는 건 힘들 것 같다.”
“맞는 게 싫기는 했구나.”
“당연하다. 대체 누가 맞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이 자식이…….
그런데 벨이 발을 괜히 바닥에다 비비면서 우물쭈물했다.
“모처럼 첫 훈련이 성과를 거뒀으니까, 그, 계속…… 즐거운 것만 하면서 천천히 ‘다음 편’을 만들어 가는 건 어떤가.”
“촉수 또 박아 달라고?”
“꼭 그런, 그런 뜻은 아니고. 그건 이미 극복하지 않았나. 어쨌든 그대가…… 크흠, 날 귀여워하는 방향으로…….”
그러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게, 지금이라면 저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을 내가 받아 줄 거란 계산을 한 것 같다.
뭔가 착각한 것 같다. 나는 벨을 귀여워할 생각이 없다. 벨이 겪어야 할 건 애완동물의 입장이 아니라 노예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은 예쁨받지만, 노예는 아니다. 노예는…….
노예는 피폐한 척하면서 예쁨받는다.
“…….”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랬다. 우리 소설은 노예와 애완동물에 유의미한 구분이 없다. 실제로 당하는 일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거야, 주인공인 내가 노예 입장이니까, 호칭만 노예지 사실상 애완동물처럼 사랑받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소설의 목적이다.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 포인트 때문에 이 소설을 챙겨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벨제뷔트에게 내 입장을 체험시켜 주려면, 그를 귀여워하기는 해야 한다.
<악마의 비바체>는 벨제뷔트라는 잘생긴 생체 딜도가 청순가련한 노예의 성적인 만족과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 그 한 몸 불살라 모든 것을 바치는 내용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다.
하지만 이 갈 곳 없는 분노는 어디다 해소해야 할까.
왜 벌써 노예로서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거지? 배알이 꼴린다. 벨제뷔트가 슬슬 내 자리를 탐내기 시작하는 건가? 그렇게 놔둘 수 없다. 진정한 노예는 나다. 감히 주인님 주제에…….
내 표정이 이상한지 벨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사랑을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나에게 체험하는 것이 목표니까.”
……목표가 언제부터 그렇게 말랑해졌지?
“난 각오가 되어 있다. 무엇을 시키든 받아들이겠어.”
“내 발목 꺾으라니까?”
“후, 훈련이니까, 따지자면 그대가 내 발목을 꺾어야 하지.”
벨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애석하게도 그의 말이 사실이다.
“발목이 꺾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아프겠지……. 어떻게 이게 사랑이 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하지만 그대라면 가르쳐 줄 수 있겠지.”
꺾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벨의 정강이를 한 번 걷어찼다.
“악.”
돌 차는 것 같았다. 꺾이기는 내 발목이 꺾이겠다. 왜 이렇게 튼튼하지? 내가 이래서 이 악마왕을 때릴 땐 야구 방망이까지 챙기는 것이다.
됐다. 어차피 꺾을 생각도 없었다. 오늘은 다른 것을 시킬 것이다.
혹독한 주인님 수련, 그 두 번째.
“벨. 시작하자.”
“!”
“장갑 벗어.”
이번 ‘훈련’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 흑발 남주인공은 내 의도를 알아듣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을 때릴 건가. 줄 그어지겠군.”
“때리려는 거 아니니까 장갑 벗어.”
“……알았다.”
벨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긋이 바라보다가, 순순히 한쪽 장갑 끄트머리를 이로 물어 당겼다.
참고로 우리 세계에서 장갑은 무조건 저렇게 벗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이 장갑의 존재 목적임이 틀림없다. 어차피 이 반장갑은 손을 보호하지도 뭘 하지도 못하고 그냥 섹시하기만 할 뿐이다.
벨은 벗어 둔 검은색 한쪽 장갑을 잘 접어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애완견에게 그러듯이 명령했다.
“손.”
하지만 벨제뷔트에겐 모욕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는 우아하고 화려하게 허리를 숙이고, 정중히 내 손을 잡았다. 언뜻 보면 폭풍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춤이라도 한 곡 신청하는 모양새다.
내 손바닥 위에 악마왕의 거친 손이 슬쩍 올라왔다.
자잘한 흉터가 많고 피부가 거칠다. 그리고 불의 악마왕답게 내 손보다 훨씬 뜨거웠다. 손가락의 마디가 도드라진 게 과연 야설 남주의 손다웠다. 이 손으로 내 몸을 주물럭대면 기분이 좋다. ‘본편’을 촬영할 때 외엔 나한테 손도 안 대려 해서 그렇지.
나는 그의 손을 쓰다듬으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남주인공의 손은 사실상 내 자위 도구에 다름이 없는데, 특히 이 손가락 마디의 요철이 그렇다. 손가락 두 개쯤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내벽을 비비면 이게 스쳐서…….
“크흠.”
벨이 헛기침을 했다.
“조금 민망한데, 무엇을 할 생각인지 말해 다오.”
벌써 민망해한다. 그래, 이게 문제다.
“벨. 너 장갑 벗는 게 부끄럽지?”
“당연하다. 아무래도 남자가 일반적으로 내놓고 다니는 부위는 아니니까.”
벨이 즉답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게 야한 부분을 반장갑으로 장식하고 다니는 게 더 부끄럽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스트립쇼를 한다.”
“!”
벨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명령이겠지.
장갑 하나를 벗어도 거기에 음란한 의미를 부여하던 야설 남주인공이다. 다 벗으라니. 그것도 여기서 다 벗으라니. <악마의 비바체>에서 본 묘사를 참고하건대, 아마도 수치심이 정신을 지배할 것이다. 숨도 못 쉬게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벌써 폐부가 조이고 머리는 아찔해지겠지. 뻔하다.
벨은 물론 납득하지 못하고 항의했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왜 벗어야 하지? 촉수 훈련은 취지를 이해했었지만 이건 아니다. 그대, 34편을 기억하겠지. 그대에겐 스트립쇼를 시키고, 나는 와인을 마시면서 그걸 구경하는 장면.”
“그랬지.”
그런 장면이 있었다. 즐거웠다.
벨이 이어 말했다.
“그때도 물론…… 그대의 나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쉬웠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수치심 때문이었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34편은 아무 문제 없이 끝났으니까. 그대는 조금 원시인이나 야만인스러운 면이 있어서 의복을 거추장스러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욕을 해?
“게다가 자주 그대의 옷을 찢어발기는 장면이 있는데, 매번 아무 문제 없었다. 나는 그대가 자연인 상태를 즐기는 걸 잘 알아. 존중하고 싶다. 그래서 그대가 굳이 내 옷을 벗겨서, 나신으로 있는 게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 상태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벨이 저렇게 길게 얘기하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처음 벨에게 채찍을 쥐여 주었을 때도 벨은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대본인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었다.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인을 참았다.
“우선, 벨. 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말해라. 듣겠다.”
벨이 소파에 털썩 앉아 팔짱을 끼웠다. 별로 귀담아들으려는 자세는 아닌데, 신경질 내는 상사 같은 느낌이 악마왕다워서 내버려 두었다.
“스트립쇼 장면은 또 안 나올 거야. 이미 한 번 나왔으니까 식상하거든. 그걸 위해 너더러 벗으라고 한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냥 네가 부끄러움이 많은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야.”
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자기 한쪽 손에 장갑이 없다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모르겠군. 내가 노출을 꺼리는 게 무엇이 문제지? 어차피 작가는 63편 동안 나를 벗기지 않았다. 그대도 다르지 않을 테고. 지금까지 노출이라고 해봤자, 상의를 탈의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니, 너 자지는 꺼내야 하잖아.”
“…….”
벨은 말문이 막힌 것 같다.
그는 갑자기 슬쩍 일어나서, 창가로 가 창밖을 확인했다. 여전히 절찬리 멸망 중이다. 폭풍은 부서진 세상의 파편들을 집어삼키며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잘린 나무, 부서진 건물의 잔해, 엑스트라 같은 평범한 것도 있었지만 글자 조각 같은 위험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벨의 꼬리가 아래로 내려간 채 느릿하게 좌우로 왕복했다.
나는 잠자코 벨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벨이 마침내 말했다.
“다음 편에선 불 끄고 잘까.”
“지랄 말고 벗어.”
나는 벨의 꼬리를 낚아채 콱 잡아당기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방심하고 있던 벨이 휘청이며 내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차마 세게 쥐지는 못하고, 그저 끝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마구 도리질을 칠 뿐이다.
“그대, 그대, 은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좀 다오.”
“시간 같은 소리 하네.”
“스트립쇼라는 게 이렇게 겁탈당하듯이 벗겨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네가 하도 빼니까 그렇지. 세상에 노출을 부끄러워하는 주인님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벨의 단추를 뜯기 위해 옷을 더듬었다. 필연적으로 단단한 가슴에도 손이 닿았다. 평소 만질 일이 없던 남주인공의 몸을 마구 더듬는 게 꽤 재미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벨이 남주답지 않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었다.
“네 고추 훌륭하니까 당당하게 무기처럼 들이밀라고.”
“무기가 아니다. 소중하고 민감한 부분이다.”
“흑발 사디스트 남주인공이 그딴 소리 할래?”
“그대야말로, 청순가련하고 눈물 많은 여주인공이 왜 남주인공을 겁탈하려 하지?”
“나는 방송 사고 안 내잖아!”
옷을 벗을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는 기세로 반항하는 남주인공이다. 용납할 수 없는 언행이다. 우리 소설이 남주인공을 능욕하는 가벼운 야설이라면 모를까, 여주인공을 굴리는 피폐물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