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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죽여도 되나요-11화 (11/40)

11화

가벼운 무력 다툼 끝에 벨이 스스로 벗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흐아앙…….”

“울지 마. 일어서.”

몸을 둥글게 말고 소리 내서 우는 남주인공을 걷어찼다. 울면서도 한쪽 맨손을 품 안에 감싸 가리는 게, 갈 길이 정말 멀었다. 이 자식은 본인이 침대 위에서 나에게 남근을 과시할 때마다 고장 나는 바람에 지금껏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벨은 훌쩍훌쩍 울면서 헛소리를 했다.

“악취미도 정도가 심하군. 훈련 강도가 너무 세다.”

“그럼 진작에 잘했어야지.”

부끄러움이 많은 주인님이라니?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다. 주인님으로서의 체면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비바체>에서 벨제뷔트가 알몸이 될 일은 없겠지만, 장갑만 벗어도 우물쭈물해서야 곤란하다. 수치심을 이겨 내라, 내 파트너. 전부 벗도록 해라.

하지만 벨은 털 달린 소매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싫다. 남주인공 역할 따위 잘하고 싶지 않다.”

그 뒤통수조차 잘생겨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주답게 멋있게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석에 처박혀서 찌질하게 우는데 미관상으로 하나도 추하지 않았다. 그저 아우라만으로도 멋진 분위기를 낼 줄 아는 남자였다. 발목을 꺾을 줄 몰라서 그렇지.

하지만 여주인공 된 몸으로서, 불의 악마왕이 한심하게 우는 모습을 두고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에겐 벨의 근성을 고치고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벨의 어깨를 문질렀다. 달래 보자.

“정 부끄러우면 같이 벗을까?”

벨이 울음을 뚝 그치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은 루비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문명을 내려놓자는 건가?”

그게 왜 그렇게 돼?

“그냥 벗고 나면 해방감도 느껴지고 좋을 거라고. 다시는 옷을 입는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걸.”

“바로 그게 문명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그대처럼 되고 싶지 않다.”

“죽을래?”

넓은 등짝을 한 대 퍽 때렸는데 내 손만 아팠다.

벨은 털 달린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미안하다. 그대는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는데……. 나는 그대가 겪는 일의 극히 일부만 겪어도 이렇게나 힘들고 괴롭군. 내가 이렇게 그대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반성하겠다.”

“뭘 반성해. 자꾸 훈련 목적이랑 반대로 가지 마라. 힘들고 괴롭지 않다고 몇 번을 말해. 즐겁다니까. 너도 이 즐거움을 느껴 보라고.”

“그대가 나에게 딱히 좋은 제안을 한 적이 없어서, 반어법처럼 들린다. 혹시 그대는 그간 ‘본편’에서 당한 수모를 나에게 갚으려는 건 아닌가?”

“수모가 아니었다니까……?”

주먹이 떨린다. 가치관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 벨은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새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장갑을 벗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한 번 더 훔쳤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대의 뜻은 알겠다. 내가 그대처럼 야만인이 되는 건 힘들겠지만, 남주인공에게 필요한 만큼 수치심을 극복해 보겠다.”

한마디가 길었다. 하지만 벨이 남은 한쪽의 장갑도 덤덤히 물어 벗길래, 나도 별말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벨은 의외로 밝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꽤 침착하게 화려한 외투를 벗어, 정중하게 외투 걸이에 걸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몸짓에는 어떤 상스러운 목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꼬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다. 긴장한 게 확실하다. 표정에선 티가 안 나는 걸 보니 마음을 크게 먹었구나.

벨이 그 훌륭한 아랫도리를 나에게 무기처럼 들이밀며 파렴치한 짓을 강요할 수 있도록 나도 협조했다. 나는 완연히 구경꾼의 자세로, 소파에 몸을 묻고 편하게 다리를 꼬았다. 담배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악마왕이 숨을 들이마시며 우아하게 손을 젓자 담뱃불이 붙었다. 매너가 좋았다.

벨제뷔트는 나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비장하게 선언했다.

“시작하겠다.”

우리가 참고할 장면은 <악마의 비바체> 34편. ‘유은하’가 ‘벨제뷔트’ 앞에서 수치에 떨며 스스로 옷을 모두 벗는 장면.

거기서 ‘유은하’는 가련하게 떨며 하이힐 하나만 남기고 나신이 된다. 계속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유은하’에게 ‘벨제뷔트’가 주제를 파악하라며 잔인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 장면을 찍을 때 벨은 시선이 좀 많이 흔들리긴 했어도 별 사고는 안 쳤다.

본인이 벗을 때마다 사고를 쳐서 그렇지.

지금도, 화려한 장식이 달린 재킷 단추를 만지고 머뭇거린다.

“그대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시간을 벌려는 건 아닐 거다. 내 파트너는 고지식해서 그런 얕은수는 안 쓴다. 정말 할 말이 있는 걸 테니, 나는 일단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려 주었다.

“‘본편’을 연기할 때 음흉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는가?”

“아, 그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훑어 대는 독자들의 끈적한 시선 말이구나. 단번에 이해했다. 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것 같다.

“하긴, 나보다는 너한테 시선이 더 많이 쏠리겠네.”

“특히 내가 벗……었을 때, 모든 독자들이 내, 그, 특정…… 부위를 주목한다. 그게 너무 힘들다.”

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작게 한숨 쉬었다. 나는 수백 명의 시선이 허공에 떠올라 전부 벨의 고추만 쳐다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사실 남주인공의 아랫도리야말로 우리 소설의 알파이자 오메가, 가장 귀한 보물일 터이니 다들 그걸 주목하는 게 이상하진 않다.

어쩐지. 나보다 받는 시선이 많았구나. 벨이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긴 하다. 여주인공을 훑어보는 남주인공을 훑어보는 독자들을 훑어보는 작가 때문에 이 모든 사달이 난 건가? 그리고 내가 작가를 훑어보면 우로보로스 같은 원이 완성된다.

하지만 나는 작가 말고 남주인공을 훑어보아, 관계의 화살표를 뒤집을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복장도 뒤집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 봐, 당신의 창조물들이 리버스를 하고 있어. 당신이 떠나서 말이야. 그러게 누가 연재를 그만두래?

또한, 벨도 그 시선들을 견딜 의무가 있다.

“견뎌.”

“그대는 항상 매정하군.”

벨이 잠깐 나를 원망하듯 쏘아보더니, 재킷의 투버튼을 우아하게 톡톡 풀었다. 머리카락도 옷도 꼬리도 전부 검은 남자가 체념하듯 스스로 옷을 벗는 모습에는 어떤 비장미까지 서려 있었다. 본래 악마왕의 의복은 시종들이 갈아입혀 준다는 설정이지만 스스로 탈의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금색 장식이 잔뜩 달린 짧은 재킷이 어깨 너머로 넘어갔다. 벨은 벗은 재킷도 외투 걸이에 걸려고 했다.

“그냥 바닥에 떨궈.”

“뭐? 왜지?”

“스트립쇼는 원래 그러는 거라서.”

세상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칙이 참 많았다.

벨은 조금 망설이다가, 내 말대로 그냥 재킷을 소심하게 살짝 떨어트렸다.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복잡한 디자인의 재킷이 카펫에 툭 떨어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게 어떤 음란한 짓의 신호탄 같았다.

아직 셔츠와 조끼가 남아 있는데도 부끄러운지 벨의 꼬리가 허벅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매끈한 꼬리 끝 부드러운 술이 습관적으로 허벅지 뒤쪽을 쓱쓱 간지럽혔다. 본인은 자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속하겠다.”

딱히 노출이랄 것도 없는데 벨이 비장하게 말했다. 계속 안 하면 어쩔 거야.

“그대를 믿고 벗겠어. 부끄러움을 극복하면 나도 제대로 된 남주인공이 될 수 있겠지.”

“할 수 있어. 이것만 해내면 다른 건 쉬워질 거야.”

대충 다독여 줬다. 그러고 보니 쟤한테 촉수 넣을 때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을 모방한 존재. 인간과 비슷한 고난을 겪는다. 이것만 끝내면 인생이 필 줄 알았지만 비슷한 짓을 평생 해야만 하는 숙명이 우리를 기다린다.

외모만큼은 대리석 조각처럼 서늘하고 차가운 벨제뷔트는 어울리지 않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끼 단추를 풀었다. 체념한 듯 입술을 꼭 깨문 입술은 아마 평소보다 훨씬 더 뜨거울 게 분명했다. 본래는 늘 눈동자 속에 끝 모를 불을 품고 있는, 살아 있는 검 같은 사내인데 ‘본편’만 끝나면 검은커녕 조끼 벗는 것도 내 눈치를 보며 망설이는 말랑말랑이가 되고 만다.

벨은 조끼의 금 단추를 쥐고 숨만 쉬다가, 슬쩍 몸을 돌려 등을 보여 줬다. 앞을 보여 주나 등을 보여 주나 거기서 거기일 텐데 노력이 가상하다. 엄밀히 따져 말해 지금 그가 드러낸 맨피부라고는 얼굴과 손뿐이지만, 그는 벌써부터 우는소리를 냈다.

“옷이 얇아져서 긴장된다.”

“벌써부터 긴장하면 어떡해. 아직 아무것도 안 벗었거든.”

“아니, 충분히 벗었어.”

그는 조끼를 곱게 잘 접어서 어딘가에 내려놓으려다가, 내 명령이 뒤늦게 생각난 듯 어설프게 바닥에 떨궜다. 이제 셔츠 차림이다.

악마왕의 크고 거친 손이 그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본편’에서 그대와 정사를 나눌 때 항상 이 차림이었지.”

사실이다. 작가는 침대 위에서조차 벨제뷔트를 좀체 벗기질 않았으니까. 벨이 뜨끈하게 익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사실상 이게 내 속옷 차림이다.”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계속 벗어.”

“어찌 이리도 잔인하지? 그대는 이런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건가?”

궁지에 몰린 벨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담배나 빨아들였다. 내가 벨제뷔트에게 채찍 대신 당근도 조금 주기로 마음먹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벨제뷔트는 이미 오늘치 당근을 다 먹어 버렸다.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

그래서 내 책망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벨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상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벗고 있긴 해도, 이 ‘훈련’은 그대와 함께하는 음란한 짓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뭐…… 그렇겠지?”

스트립쇼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역시 그랬나…….”

분홍색 홍조가 물감처럼 퍼지는 하얀 목덜미에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어깨가 저렇게 넓은데도 뒷모습이 처량했다. 벨제뷔트는 뒤돈 채 셔츠 맨 위 단추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셔츠를 벗는 정도로 긴장하는 게 나로서는 놀랍다.

그래도 지금은 ‘본편’을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니니, 독자들의 시선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힘드려나? 곤란한 상황에서 흘린 식은땀으로 조금씩 젖어 가는 흰 셔츠를 입고 있는 편이 더 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프로니까, 프로의 안목으로 따져 보아 말이다.

“벗어도 난처하고, 입어도 난처하군.”

과연 내 파트너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는 단추를 두 개 풀고, 혼절이라도 할 것처럼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까만색 꼬리가 내 눈앞에서 힘없이 원을 그렸다.

“나, 나는…… 잘하고 있는 건가?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음란하진 않은가? 그대가 요청한다면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노력해 보겠다.”

노력의 방향이 이상하다.

“수치심을 극복하는 훈련인데 무슨 말이야. 더 수치스러운 방향으로 가야지.”

“지금도 충분히 수치스럽다. 쇄골을 드러내다니…….”

뒤돌아 있어서 내 눈엔 쇄골이 안 보인다.

“보여 주고 그런 말을 하지 그래?”

“그대가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야.”

벨제뷔트가 조금 신경질을 냈다. 꼬리가 덩달아 파닥파닥 흔들려 담배 연기를 흩트리는 바람에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사나운 등 근육이 잠들어 있는 등판이나 잘 빠진 엉덩이를 두고 귀여운 꼬리에 눈길이 가다니 야설 주인공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꼬리 끝을 툭툭 쳤다.

“이건 가만히 두고.”

“……터……치 금지다.”

“뭐야……?”

내가 어이없어하는 틈을 타 벨제뷔트가 휙 뒤돌아서, 눈을 질끈 감고 단추를 빠르게 풀었다. 흰 셔츠 사이로 남주인공의 진귀한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절대 볼 일 없을 색깔. 열기를 품어 살짝 선홍빛이 감도는 살구색 피부가, 근육의 요철을 따라 올록볼록한 그림자를 그렸다.

손끝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벨은 멈추지 않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완벽한 몸매였다. 조각한 것 같다기보단, 실제로 조각한 게 맞지만. 오로지 여자의 눈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잘 빠진 상반신이 샹들리에 빛 아래 실체를 드러냈다.

조각품 같은 형태지만 무기물 같은 느낌은 없다. 눈으로만 봐도, 이게 뜨거운 체온을 가진 악마왕의 몸이란 게 느껴졌다. 남주인공의 살 냄새, 긴장해서 배어 나온 희미한 땀 냄새 사이로 벨제뷔트의 피 냄새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얼핏 말랑말랑해 보이나 실제로 만져 보면 딱딱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자, 벨이 셔츠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 번에 하나만 해라.”

“뭔…….”

“그대는 단계라는 걸 몰라. 보통은 어려운 일을 시키고자 할 땐 쉬운 일부터 적응하게 만든다. 은하. 지금 옷을 벗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겁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더 이상 하면 망가져.”

진지하게 자기가 망가질 거란 얘기를 하는 남주인공이 기가 찼다. 망가지는 건 피폐물 여주인공의 특권이거든? 오로지 나만이 망가질 수 있다. 내 자리를 탐내다니 용서가 안 된다.

보통 때라면 벌써 야구 방망이를 들었겠지만, 나는 창밖을 힐끗 보고 마음을 다스렸다.

“……비상시니까 참아 주는 줄 알아.”

저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는 <악마의 비바체>의 비명 소리와 다름이 없다. 그래, 지금은 다 같이 혼란스러운 시기다. 얼마나 사태가 막막하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리버스를 할까.

벨이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인내심을 보이다니, 그대도 발전이란 걸 하는군.”

“너는 내가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입장을 확실히 해라.”

“무섭지만 믿을 만한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벨이 산뜻하게 셔츠를 벗어 툭 떨궜다. 벌써 스트립쇼에 적응한 건지 옷을 떨어트리는 폼이 그럴싸했다. 그러고는 뒤돌아 미학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등을 보여 주며 수줍어했다.

“이렇게까지 벗어 본 적은 처음이다.”

“소감은?”

“내…… 모습을 자각하고 싶지 않아.”

안 그래도 목덜미에 붉은 기가 있었다. 넓은 어깨, 좁은 허리와 골반, 그 사이를 채우는 울퉁불퉁한 등 근육은 과연 그가 폭력의 정점에 선 불의 군주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단단하고 강인한 몸이다. 표면을 쓸어 보면 손끝이 아플 정도로 뜨거울 것을 안다.

……만지지 말라고?

초조하게 담배나 태웠다. 만지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기는 하다.

벨제뷔트가 불처럼 달아오른 눈으로 날 힐끔 돌아봤다.

“그대는…… 내 외관만큼은 좋아하는 것 같다.”

부정하지 않겠다. 사실이다.

“그래.”

“하는 짓은 형편없어도 껍데기는 봐줄 만하다는 뜻인가?”

“잘 아네.”

뭐야, 내 파트너가 이렇게 똑똑할 줄 몰랐다.

그런데 그의 붉은색 눈에 습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대는 나랑 그 짓 하려고 만나나?”

음……. 응?

“그럼…… 아니야?”

“정말인가! 부정하는 척이라도 해다오, 은하.”

“부정을 왜 해?”

지금껏 벨을 수없이 상처 주었는데, 어째서인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벨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시선의 의미를 읽을 수 없었다.

“너 우리가 야설 캐릭터인걸 까먹은 거야……?”

“우리 소설 카테고리는 일단 ‘로맨스’란에 들어가 있다.”

“그거야 구실이고. ‘야설’ 카테고리가 따로 있지는 않으니까 할 수 없이 그리로 들어간 거지.”

“아니다. 로맨스가 있으니까 로맨스 카테고리로 들어간 거다. 은하, 주인공인 주제에 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줄은 미처 몰랐군.”

벨제뷔트가 투덜거렸다.

“은하, 모르는 것 같으니 그냥 말하겠다. 날 사랑해 다오.”

“…….”

거의, 작가의 연재 중단 선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사…….”

내 파트너의 정신이 연약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을 갈구할 정도였다니? 남주인공의 태생적 한계인가? #무심녀와 대비되는 #사랑꾼 남주의 조합이냔 말이다.

벨이 등을 돌린 채 물었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

우리 스트립쇼 중인 거 아니었어?

부드러운 감정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저 음란함이 목적인 행위를 하는 게 아니었냐고. 우리는 애정 행위를 하려던 적이 없다.

벨제뷔트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한심한 남주 미달 캐릭터…….

“…….”

대놓고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남주 파업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젖혔다. 악마성 응접실의 아름다운 샹들리에 너머, 우리 세상의 하늘을 꿰뚫어 보았다. 거기 작가가 남기고 간 마지막 연재 중단 공지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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