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너를…….
“이상하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
조금 단어를 순화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벨제뷔트 안심시킨다고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나는 피폐물 여주인공이니까 벨이 내 비위를 맞춰야지, 내가 벨의 비위를 맞춰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물리 법칙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벨제뷔트가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랬군.”
갑자기 입꼬리를 올린다. 왜 저래?
“그대, 생각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군. 그대가 애정 표현에 서툰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 의외인걸.”
심지어 볼을 붉히며 수줍어하기까지 했다. 내 대답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뭔 소리야? 바보 같다니까.”
“그게 바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
이런, 생각해 보니 벨제뷔트의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과 바보 같다는 말은 이음동의어다. 로맨스의 문법이 그렇다……!
이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여주인공으로서 한참 멀었다. 통렬하게 반성한다. 우리 소설은 야설이지만 일단 구색을 갖춘답시고 로맨스인 척은 하고 있었단 말이다.
내 말실수……인지 뭔지로 기분이 좋아진 벨은, 냅다 꼬리를 붕붕 흔들며 발끝으로 카펫을 후볐다.
“그런데 은하, 신발까지 전부 벗어야 하나?”
“음…….”
경우에 따라 신발이나 양말은 벗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만, 오늘은 첫 스트립쇼니까 정석대로 가자.
“다 벗어.”
“그대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 모든 걸 파악하고 싶은 것인가?”
왜 웃어?
“사랑은 모르겠는데 파악은 해야 할 거 아냐.”
“알았다, 참.”
벨제뷔트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짜증 나. 뭘 오해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 사랑 비슷한 것이 그의 수치심을 극복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벨이 의자 하나를 끌어다 털썩 앉아서는, 가슴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며 몸을 숙여 부츠를 벗으려 한 것이다.
그가 몸을 아래로 숙이자 커다란 대흉근이 새로운 각도로 보여, 깊은 가슴골이 강조되었다. 나는 남자가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선정적인 장면을 마주하고 충격에 빠졌다. 남자의 가슴골 같은 게 상식적으로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다.
터질 것 같은 팔뚝과 봉긋한 곡선 아래에, 삐죽 튀어나온 남자의 유두는 왜 또 분홍색이지? 순간 머리가 멈추고 말았다. 분홍색이란 오로지 나에게만 허락된 색깔이 아니던가? 작가가 나를 배신했나?
그리고 나도 크다. 여주인공으로서 내 몸에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남주인공의 실체를 보니, 작가가 나에게만 완벽한 몸매를 내려 준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큰 가슴을 좋아했던 것 같다.
“너…… 크기가…….”
“!”
벨이 황급히 한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래 봤자 이미 봤다. 폭력적일 정도로 너른 대흉근과 앙증맞게 삐죽 튀어나온 분홍색 유두까지.
“나, 남자 가슴을 보아서 무엇 하지?”
“그러게…….”
진짜 그러게.
“너야말로. 봐서 쓸 일도 없는데 너는 왜 가려?”
“내 가슴에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대다. 본래 나는 맨손도 부끄러운 남자니까 이 정도는 가릴 만하지. 그대는 늘 그렇듯이 조금의 이해심도 없군.”
뭔데 화를 내?
“옷 벗는 데도 한 세월이네. 이래서 세계 멸망은 막을 수 있겠어?”
“시간은 있다. ‘훈련’을 하는 동안은 사실상 제한 시간이 없는 것과도 다름없지.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세상의 멸망이 유예된다고 했던 건 그대다.”
나는 창밖을 힐끔 바라봤다. 폭풍조차 벨제뷔트의 가슴을 구경하려는 듯 기세가 잠잠했다. ……얄밉지만 남주인공의 말이 맞다.
벨제뷔트가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
“아니, 화내서 미안하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데…… 면목이 없군.”
“그러면 팔 치워.”
“그런데 스트립쇼를 할 때는 좀 부끄러워하는 것도 미덕이 아니던가?”
“…….”
오늘 짜증 나게 맞는 말 많이 한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흥.”
불의 군주께서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더니 마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상체를 살짝 가린 채 부츠를 벗는 것이다.
소설은 이미지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작가가 복잡하고 화려하면서도 실용성은 떨어지는 옷을 마구 입혀 놨다. 우리의 남주인공은 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그게 길어서 허벅지 위쪽까지 조이는 구조였다. 작가가 두루뭉술한 의상 디자인을 떠올리며 게임 코스튬을 참조했던 걸 안다. 저 사이 하이 부츠는 오로지 미관만을 목적으로 디자인되었기에, 실제로 신고 벗는 데는 5분씩 걸린다.
심지어 의자도 필요하다. 스타킹 벗듯이 벗어야 한다.
벨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 슬쩍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고 부츠 끝부분을 잡았다. 여기서도 장갑을 벗을 때와 같이 특수한 물리 법칙이 적용됐다. 무조건 관능적으로 보이게끔 다리를 들어 올려 가며 벗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이 신발을 벗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야설 세계 속에 사는 야설 캐릭터. 평범하고 재미없게 옷을 벗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내가 저런 식으로 스타킹을 벗을 땐 몰랐는데, 시선이 고간으로 쏠리는 구조구나.
“…….”
기민한 악마왕은 내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눈치챈 듯 부츠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순식간에 빨개졌다. 조각처럼 잘생겼는데도 자꾸 저런 푼수 같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니 벨제뷔트를 상대론 도저히 진지해질 수가 없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의 시선이 수없이 훑고 간 곳. 검은색 바지에 감춰진 저 불룩한 실루엣은 순결하지 않다. 남주인공의 다리 사이는 이미 더럽혀졌다. 여러모로.
“너, 너무 빤히…… 아니, 그대 마음 가는 대로 해다오.”
벨이 웅얼거리고는, 각선미가 눈에 띄는 다리를 따라 양쪽 부츠를 쓱 벗었다. 신발 아래 맨발이 드러났다. 남주인공의 맨발 같은 건 이런 비상시가 아니면 결코 볼 일이 없었을 텐데, 기분이 이상하다.
“시, 신발도 벗었다.”
보고는 째깍째깍 잘한다.
“조금만 쉬고 싶다.”
뭐라는 거야?
“계속해. 내가 ‘유은하’처럼 한꺼번에 다 벗기는 짓을 안 한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아닌 게 아니고 당장 64편에서도 ‘유은하’의 옷은 순식간에 다 찢어졌다. 그럴 거면 대체 왜 입는지 모를 수준이다.
“아니면…… 같이 벗을까?”
한 번 더 제안해 봤는데, 벨이 정색했다.
“은하, 옷이 불편한가?”
“어.”
“그대가 착의를 불편해하는 만큼 나도 탈의가 불편하다. 서로 불편해지려면 그대는 계속 입고 있는 게 이치에 맞아. 그대가 나를 남주인공으로 만드는 만큼 나도 나름대로 그대를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짐승에 가깝지.”
벨은 자신의 말에 자신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납득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되어 이 불안불안한 소설을 이끄는 것은 어지간한 이성과 노련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작가를 도와 소설 장르를 바로잡아 왔는데.
이렇게 배신당할 줄은 몰랐지만.
생각하니까 속이 쓰리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하기나 해.”
“평소라면 그대가 벌써 매를 들었어야 하는데…… 오늘 많이 참는군. 이것도 그대의 애정 표현인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벨은 정말로 마음대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꼬리를 붕붕 저으면서, 왼쪽 발뒤꿈치와 오른쪽 발가락을 축으로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일어났다. 동작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운 점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대가 나를 이끌어 주는 게 좋다. 명령받는 게 편한 체질인 것 같아.”
“남주가 할 말이야……?”
“어쨌든 사실이 그렇다.”
남주인공의 핏줄이 불거진 손이 벨트로 내려갔다. 벨제뷔트가 머뭇거렸다.
“바지는 어느 쪽을 보고 벗어야 하지……?”
장갑이나 사이 하이 부츠와는 달리 바지는 딱히 정해진 탈의법이 없다. 다만 셔츠는 속옷 직전에 벗어야 하기에 지금은 바지를 벗어야만 한다는 엄격한 순서가 있을 뿐이다. 벨이 난처하게 말했다.
“앞을 보고 벗어도 이상하고, 뒤를 보고 벗어도 이상하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부끄러움을 이기기 위한 수련이니까 네가 더 부끄러워하는 쪽을 보고 벗어야지.”
“고통스럽군. 그대가 말하는 현실은 늘 잔인해.”
“어쩌겠어……. 우리 세상은 피폐물이잖아.”
벨이 피폐해했다.
“알겠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고작 바지 하나만 입은 채 조각상처럼.
잘생겼다.
나는 스트립쇼 본연의 음란한 목적에서 살짝 비껴 나가, 정물이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듯이 그를 훑어봤다.
그의 육체는 ‘문자 그대로’ 신의 작품이다. 살아 숨 쉬는 예술이며, 시선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빼앗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막상 그 몸의 주인은 지금 머릿속으로 그의 자지와 엉덩이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하고 귀한가에 대해 열렬히 계산하고 있을 게 뻔하다. 그딴 생각을 해도 표정이 멋있어서 다행이다. 겉모습에만 집중해도 된다. 높은 콧날부터 강인한 대흉근과 예술적으로 좁아지는 골반까지 내려가는 곡선에 미학이 있었다.
완벽하게 남주인공다운 몸매에 시선이 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도 벨은 내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움찔움찔 팔로 몸을 가리려 하다, 휙 뒤돌고 말았다.
“뒤돌아서 벗는 게 나을 것 같군.”
“그쪽이 더 부끄러워서 그런 거 맞지?”
“……어느 쪽이든 부끄럽다. 그리고 어차피 앞이든 뒤든 그대에게 검사당해야 할 게 뻔하잖나.”
눈앞에서 요망한 꼬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벨이 숨을 크게 들이키고, 떨리는 호흡을 내쉬며 셔츠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눈물이 나나 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벗어.”
아담한 엉덩이를 쿡 찔렀다. 벨이 기겁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 아니, 알았다. 다만 폭력적인 일은 삼가 주길 바란다. 스스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나는 괜찮은 학생이야. 그대가 조금만 더 좋은 선생이 되어 준다면 잘 따라갈 자신이 있다.”
눈 돌아서 패지 말라는 뜻이다.
늘 생각하는 건데 내 파트너는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벨은 꿍얼거리면서 상체를 돌려 꼬리 쪽 단추를 풀었다. 허리를 비트는 그 가볍고 우아한 동작 덕분에 몸매가 새롭게 강조되어 관능미가 물씬 풍겼다.
벨은 벨트를 풀어 성격 나쁜 남주처럼 바닥에 휙 던졌다. 저 벨트는 나를 때렸을 때 두어 번 사용되던 물건이라, 보고 있으면 흐뭇한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이어 그는 꼬리 위쪽 단추와, 앞쪽 단추를 툭툭 풀었다.
서서 바지를 벗는다면 상체를 숙여야만 한다. 그리고 상체를 숙이면 자연히 엉덩이가 들려 강조된다. 성실한 남주인공은 정말로 더 수치스러운 자세를 택했다. 검은색 사각팬티에 가려진 봉긋한 엉덩이를 보여 주는 것.
<악마의 비바체> 내에서 벨제뷔트의 팬티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늘 이렇게 진부하면서도 고전적인 팬티를 고집했다. 작가가 팬티를 꾸미는 건 남자답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자 꼬리를 닮은 악마의 꼬리가 엉덩이를 가리려 부질없는 노력을 했다. 벨은 딱 봐도 부끄러워서 기절하기 직전으로, 이럴 때마다 적반하장 삼아 나에게 화를 냈다.
“정말 다른 남주들도 이런 훈련을 거쳐서 세상에 나오는 건가!?”
“다른 남주들이 너 같지 않다는 건 알아.”
“말이 심하군.”
이상한 데서 삐지는 악마왕의 몸매를 훑어봤다. 휑해진 다리가 어색한가 보다. 건강해 보이는 피부색으로 잘 빠진 긴 다리는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야하기보단 강해 보이는데, 남성적인 각선미가 강조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뾰족한 귀도 선이 굵은 목도 붉었다.
“온몸에 부끄럽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 봐라.”
부끄러울 때마다 화내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소설 사정은 모르지. 너처럼 덜떨어진 남주만 따로 뒤늦게나마 훈련하는 걸지도.”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단 말인가?”
“어.”
“흥. 그대가 뭐라고 하든 이번에야말로 울고 말겠어.”
그러면서 벨이 위협적으로 울먹거렸다. 아직 스트립쇼의 최대 난관, 속옷이 남았는데, 벨이 채찍 대신 당근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오늘치 당근은 이미 다 뿌렸다. 나는 더 타협할 생각이 없다.
“벗어.”
“그대는 나에게 쓸모있는 부분이라고는 얼굴과 몸뿐인 것처럼 말하는군.”
“그럼 아니야?”
벨이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며 팬티를 벗었다. 보석 같은 눈물을 카펫에 뚝뚝 떨구면서 그의 가장 큰 재산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거의 흉기 수준에 가까운 물건이 덜렁 튀어나왔다. 매번 놀랄 정도로 야만스럽게 생겼다.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귀엽다고 할 수 있는 깜찍한 꼬리가, 빠른 속도로 허벅지 안으로 들어오더니 어떻게든 성기를 가리려 배배 꼬였다. 그래 봤자 꼬리가 굵은 것도 아니니 부질없는 노력이다. 오히려 야릇한 부위를 강조하는 효과만 났다.
불의 악마왕이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내 앞에서 쭈뼛쭈뼛 몸을 가렸다.
시야 한가득 그의 맨살이라 내심 당황스러웠다. 남자의 나체에 익숙하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가가 도통 벨을 벗기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그를 싹 벗기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일은 태어나서 오늘 처음 해본다.
“이제 만족하나?”
벨이 손목으로 빠르게 눈물을 문질러 훔치고 작게 꿍얼거렸다.
“나에게서 볼 만한 부분만 취했으니 그대는 아주 만족스럽겠군.”
비꼬는 말투였는데 건조한 사실 서술이라 별 효과는 없었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담배를 들이마셨다. 다 벗겨 놨는데 설마 ‘본편’ 중에서조차 어지간히 보기 어렵던 아랫도리가 아니라 맨날 보던 얼굴로 눈이 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왜 벗겨 놓았는데 얼굴이 더 강조되는 거지?
“열중쉬어.”
“!”
몸을 너무 가리고 있다.
“그대는 사람도 아니다.”
이번에도 역시 건조한 사실 서술이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끙끙대며 고간을 가리던 벨제뷔트는 어지러워하며 두 손을 뒤로 물렸다. 손에 가려져 있을 때도 존재감이 대단하던 것이 허공에 드러났다. 벨제뷔트는 거의 선 채로 기절했고, 꼬리는 요란하게 요동치더니 허벅지 안쪽에 꽉 감겼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뭘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원.
“확실히 남주인공의 몸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던 건 사실이긴 해.”
거대한 성기에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흑, 나를 모욕하지 말아라.”
벨이 성질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아랫도리는 내 눈길만으로도 반응했다. 작가가 나에게 구강성교 같은 건 시킨 적이 없으나, 본디 남주인공은 아무 때나 항상 임전 태세인 법. 눈앞에서 커다란 살덩이가 위협적으로 부풀었다. 이 뜨겁고 맥박치는 살 기둥은 페로몬 같은 걸 뿜어내는 듯 음란한 냄새를 풍겼다.
아무리 착한 척해도 결국 야설 캐릭터라 이거지. 괘씸하다. 거기다 담뱃재를 털었다.
“헛, 윽……!”
벨이 비틀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불의 악마 주제에 담뱃재가 뜨거운지 복근이 한순간 선명해졌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는데, 위에서 웬 물방울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벨이 아직도 울음을 못 멈췄다.
“내 몸은 재떨이가 아니다.”
뒷짐 지고 있는 바람에 눈물을 닦진 못했다. 그는 그냥 붉은 뺨을 눈물로 후드득 적시면서 나를 원망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와 골반, 근육으로 꽉 찬 몸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64편이 되도록 벨의 저런 표정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너무 빤히 보지 말아라.”
“벗으니까 즐겁지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반쯤 고개를 든 남근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성기가 우스꽝스럽게 흔들리자 벨이 비틀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가 멀어지자 이제는 그의 근사한 나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옷이 그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이지만 이렇게 실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벗겨 놓으니 이건 이거대로 어울리고 야했다. 밤마다 ‘유은하’를 핍박하는 잔인하고 끔찍한 악마가 저렇게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서 있다니.
“자세한 소감을 말해 봐.”
“읍……. 부끄러움에 타 죽을 것 같다. 그대는 어떻게 이런 걸 즐기지? 나는 사랑만 있으면 우리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했어……?”
“이런 꼴이지만 나도 로맨스 남주인공이다. 뭐가 이상하지?”
일단 자기가 맡은 역할이 #개아가남인 건 자각을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로맨틱한 생각을 무시하고 명령했다.
“이제 자위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