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악마의 비바체> 65편
그 사악한 악마왕, 벨제뷔트가 질투를 한다니?
마음이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유은하로서는 드물게 당황스러웠다. 설마 저 무시무시한 벨제뷔트에게도 약간 귀여운 면이 있었을 줄이야. 질투한다니. 심지어 벨제뷔트는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이렇게까지 변명했다.
「질투하는 게 아니다. 건방져졌군.」
벨제뷔트가 조금 쩔쩔매는 기색이었다. 유은하는 얼떨떨하면서도 조금은 즐거운 기분으로 말했다.
「질투 안 한다니 그냥 말해도 되겠네요. 당신보다 이 마물이 훨씬 좋아요.」
순식간에 벨제뷔트의 눈빛에 사악하고 음험한 기운이 돌았다. 유은하가 그를 놀리며 쿡 찔렀다.
「질투하는 거 맞잖아요.」
「그건…….」
벨제뷔트는 할 말을 잃은 듯 당혹스럽게 멈춰 서 있다가, 갑작스레 유은하의 몸을 들어 안았다.
「좋아. 그대가 이렇게 재롱을 떤다면 혼내 주는 수밖에 없군.」
그리고 벨제뷔트는 유은하를 데리고 악마왕의 장미 정원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벗어라.」
「뭐라고요……?」
분명 아까 촉수 장면에서 유은하의 옷은 다 벗겨졌을 텐데, 글자와 글자 사이 신비한 공백 안에서 그녀의 옷이 다시 입혀진 상태였다. 아무튼 씬 앞에서 자잘한 디테일이나 설정 오류 등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장미 정원은 야외였고, 주변에 사악한 엑스트라 하인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벗으라고? 유은하는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시키다니.」
벨제뷔트가 섹시하게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대는 내 노예라는 걸 잊지 말도록.」
그래서 유은하가 수치심에 떨며 옷을 벗었다. 그녀의 나체가 드러나는 동안 벨제뷔트는 딱히 동요하지도 난처해하지도 않았고,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묘하게 질색하거나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긴 했다만, 이내 순식간에 멋진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유은하는 탈의를 약 2,000자 정도 했다.
그러다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벨제뷔트가 명백히 흥분한 기색으로 자신의 거대한 남근을 꺼낸 것이다.
고추를…… 꺼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 다, 당신……!」
「뭘 그렇게 놀라지? 그대가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이 좋군.」
유은하는 눈요깃거리가 된 것이다. 수치심에 그녀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모욕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그 무엇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느릿하고 여유롭게 바라보는 붉은 눈길에는 배부른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만족감이 가득했다.
아니면 좀 부끄러워하는 걸 수도 있고.
「‘저 남자는 어떻게, 자기 몸을 내놓고도 부끄러움 하나 없을 수가…….’」
그녀는 차마 그의 다리 사이에서 부풀어 있는 남자의 상징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수치스러움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벨제뷔트는 벨제뷔트대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우물쭈물하다가,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참겠군.」
「네? 설마…… 꺄악!」
이하 그들은 야외에서 본격적인 정사를 나누었다.
---다음 편에 계속---
<악마의 비바체> 66편
뽕빨물이니만큼 씬만큼은 끝없이 이어졌다. 소설이 방향성을 잃어서 그냥 자포자기하고 끝없이 씬만 내보내는 느낌이었지만, 이런 걸 누가 의도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연재해 같은 것일 수도. 망할 걸 뻔히 알면서 진행해야만 하는 등장인물들의 눈물 젖은 고군분투가 이 66편이라는 결과물에서 보이는 듯 아닌 듯했다.
아무튼 야외 장면은 순조롭달까, 거의 그간 65편 동안 해오던 관성으로 나아갔다. 벨제뷔트는 다른 엑스트라들도 다 볼 텐데 개의치 않고 그의 여자의 아름다움을 온 사방에 과시했다.
아무튼 계속했다. 그들은 절대 지치지 않는다.
---다음 편에 계속---
귀여운햄ㅉㅣ
<악마의 비바체> 67편
그들은 지치지 않지만 보는 사람들이 지칠 수 있으니 이쯤 하여 유은하는 적당히 지친 척을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더는 못 해요. 당신은 왜 지치지도 않죠?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옷을 벗을게요. 다시는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용서해 주세요.」
물론 벨제뷔트는 지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멋지게 이렇게 말했다.
「많이 반성한 것 같으니 이만 봐주도록 하지.」
대충 이런 마무리를 하고 나서야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고 음란한 장면이 끝났다. 유은하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악마성 지하에는 악마왕만을 위한 거대한 욕실이 있다. 등장인물들은 휴식 시간이 되면 거기를 대중목욕탕 정도로 사용한다. 대중목욕탕이라고 해봤자, 여기 살아 있는 인물이라고는 고작 네 명뿐. 사실상 내 전용이다.
왜 내 전용이냐면, 남주인공들이 나의 알몸을 보면 쓸데없이 부끄러워하면서 접근을 못 하기 때문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것도 어제까지의 이야기. 이제 벨은 부끄러움을 조금 극복했다. 그래서 내가 라운지 의자에 누워 댓글을 읽는 동안, 벨은 옆에서 얇은 가운과 속옷만 입고 내 팔을 쓱쓱 비누로 문지를 수도 있다. 무엇이든 능숙한 악마왕은 목욕 시중마저도 절도 있었다.
“은하. 또 어디를 씻겨야 하지?”
“클리토리스를…….”
“제길, 은하!”
3편이나 연속으로 쓰는 동안 벨제뷔트가 아무런 실수도 안 했다. 무난하게 진행된, 아니, 어쩌면 작가가 직접 쓴 것보다 나을지도 모를 <악마의 비바체>였다. 그래서 댓글 반응은 아주 좋다. 작가가 없어진 걸 눈치챈 독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분명 기뻐해야 할 텐데, 왜일까, 조금 심란했다.
나는 작가의 의도에 맞춰 내용을 잘 이끌고 있는 걸까?
만약 작가가 있었더라면 어떤 내용을 썼을까? 이런 식으로 우리끼리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뿐이다. 우리 앞에는 파멸만 있을 거라는, 나는 결코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숨이 막힌다.
나는 이런 복잡한 감정을 벨과 얘기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벨은 벨대로 애꿎은 스펀지를 쥐어짜며 바닥 타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결심하기 직전 같은데, 그도 고민이 많은 것 같다.
몸을 일으키자, 벨이 화들짝 놀라서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더는 못 한다! 어떻게 그대는 지치지도 않지? 이제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벗을 테니까 오늘은 더 이상 안 된다. 이제 그만 용서해 다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내가 무슨 성적인 봉사라도 시킨 것처럼 과민 반응하니까 괜히 더 화난다.
“누가 너 잡아먹는대?”
“정신적으로 이제 한계다. 오늘 너무 힘들었다.”
벨이 한숨을 쉬며 피곤해했다. 오늘 별거 안 했다. 고작 나를 정원으로 끌고 가 거기서 스트립쇼를 시킨 뒤 섹스 좀 오래 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뭐라도 더 시킬 거라 생각했는지, 벨은 목욕 가운이 걸려 있는 벽면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가 뒤돌자, 물에 젖은 얇은 가운이 등과 엉덩이 근육에 딱 달라붙어 강조된 굴곡이 보였다. 벨제뷔트는 도통 벗질 않으니 저런 뒷모습도 처음 본다. 철벽 같은 몸도 목욕탕 전체에 퍼진 수증기에 젖으니 말랑거려 보였다.
실제로도 꽤 말랑거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시종처럼 잽싸게 달려와서는 목욕 가운을 걸쳐 줬다. 나는 폭신한 자주색 목욕 가운을 익숙하게 받아 걸치며 목욕탕을 나섰다. 벨이 자기 몫의 가운을 걸치며 내 뒤를 종종 따라왔다.
“그나저나, 은하. 이번에 쓴 세 편은 어땠지?”
“댓글 반응 보면 몰라?”
“그대의 주관적인 평가가 듣고 싶다.”
“내 주관적인 평가?”
벨이 사나운 냉미남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벨제뷔트’가 얼마나 잘했는지 평가하라니, 맛집 평가 같은 건가?
“음…….”
내 어깨에 소설의 존폐가 걸렸는데,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지기는 꺼려진다. 하지만 댓글 반응도 좋고, 작가의 의도도 무사히 지킨 것 같으니, 이번 정도는 괜찮겠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나았어.”
“그런가……!”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까치발을 들고 볼에 입술을 눌렀다.
“!”
그리고 가운을 여미지도 않고 맨발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정말로 악마성 지하를 대중목욕탕처럼 이용하고 있지만 엄연히 이곳은 악마성. 내 방은 맨 꼭대기라 너무 멀고, 근처에 있는 벨제뷔트의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벨이 허둥지둥 뒤따라오며 계속 뭐라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잘했나? 이제야 감이 잡힌다. 역시 내 판단보다 그대의 판단이 훨씬 낫군. 실은, 야외 장면을 쓰면서 계속 마음이 약해질 뻔했어. 풀밭에 나뒹구는 그대에게 달려가 당장이라도 뭐라도 걸쳐 주고 싶었지. 알몸인 여자를, 그것도 그대를, 그런 꼴로 방치하기는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대의 당부 사항을 마음속에 계속 새기며 참았다. 나도 그대처럼 성벽을 일그러트려 파렴치한 행위에서만 흥분하는 이상 성욕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걸 이해한다.”
벨도 은근히 매도 잘하지 않나?
“이제 와 한참 늦었지만, 나는 드디어 학습의 기쁨을 깨달았다. 어서 다음 훈련을……. 은하, 무엇을 하나?”
창가에 기대어 쪽지를 휘갈기고 비둘기 다리에 묶어 날려 보냈다.
“누구에게 보내는 전령이지?”
“미카.”
남주인공 2번. 나올 때가 됐다.
“음.”
벨이 다른 남자의 이름을 듣고 흠칫 몸을 굳히고는, 음산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려 한 게 아니다.”
“뭐야, 뜬금없이……. 비켜. 미카 만나러 가야 해.”
그런데 벨이 내 앞에 서서는 비키지 않았다.
“뭔데?”
철벽 같은 육체를 가진 남주인공이 막아서니까 눈앞에 커다란 벽이 선 느낌이었다. 벨은 나를 험악하게 내려다보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래서 나도 속절없이 창가로 한 발 밀려났다. 벌어진 목욕 가운 사이로 남주인공의 젖은 속살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가슴이 컸다. ……거의 가슴밖에 안 보였다. 방금 씻고 와서 그런가 향기롭고 음란한 체취가 풍겼다.
왜 갑자기 나한테 가슴을 들이미는 거지? 요즘 남주인공의 미덕이라던 가슴 크기를 어필하려는 것 같진 않다. 우리 소설은 딱히 요즘 유행이랑은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벨.”
“비키지 않겠다면?”
벨이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날 침대로 밀쳤다.
“!”
그리고 범죄자를 제압하듯이 내 등 뒤에 올라타선 손목을 결박했다. 격한 움직임 때문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했던 목욕 가운이 말려 올라가 하반신에 찬 공기가 느껴졌다. 내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무게가 무거웠다.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저항할 수 있지만, 없는 걸로 치겠다. 무려 이 흑발 사디스트 남주인공이 목욕 가운만 입은 여주인공을 억지로 침대에 눕혔으니까!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얌전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경사다. 나는 헐떡이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냈구나. 목욕 가운만 입은 나를 결박해서 어쩔 셈이냐?”
“은하. 너무 신난 것 아닌가?”
그러면서 내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 압박감에 전신이 찌르르 떨렸다.
“노력이 가상…… 흐읏.”
벨은 예고도 없이 내 다리 사이를 손가락을 쓸었다.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결박으로 젖기 시작한 곳을 자극당하자 허리가 튀어 올랐다. 나는 곧장 침대에 얼굴을 박고 신음했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벨제뷔트가 기어이 성장을 끝냈다. 나는 이제 소설 바깥에서도 하극상을 당하며 매일 피폐한 삶을 보내게 될 것이다.
벨이 젖은 음부를 문지르며 착잡하게 말했다.
“암캐가 따로 없군.”
“!”
멍……!
“어디서든 묶기만 하면 이러니.”
“큭……. 내 약점을 알아 버렸구나. 자, 그래, 이게 매일 너를 패고 묶고 재떨이로 쓰던 여자의 실체야. 어디 더 해봐. ‘훈련’의 성과를 보여.”
“은하. 역시 너무 신났다.”
“마음껏 복수해 봐라.”
헐떡이는 내 얼굴 앞으로 뱀 같은 밧줄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대를 위해 준비했다.”
“!”
나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밧줄의 길이가 심상치 않았다. 본디지 전문가로서 말하건대 이것은 단순히 손목 발목을 묶는 정도가 아니고, 전신을 묶는 용도다. 방금 목욕해서 보송보송한 여주인공의 몸을 거친 밧줄로 휘감으려 하다니, 각성한 벨제뷔트는 무시무시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되는 걸까. 공포와 긴장 때문에 아래가 흠뻑 젖었다. 헉, 허억…… 나를 어떻게 묶을 생각이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그런데…….
오지 않는다.
“…….”
아무리 기다려도 날 묶을 기미가 안 보였다.
공백이 수상하게 길어진 데다 불길한 데자뷔까지 느껴진다. 나는 슬쩍 실눈을 떴다.
악마성의 주인, 마계의 적법한 권위자,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로맨티스트이자 사악한 사디스트인 벨제뷔트가…….
밧줄을 자기 몸에 휘감고 있었다.
“뭐 하냐?”
즉각 벌떡 일어났다. 생전 처음으로 셀프 본디지를 하는 벨은 손목과 몸통을 잘못 연결하는 바람에 그대로 기우뚱 침대로 쓰러졌다.
“그대의 마음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벨이 머쓱하게, 그리고 잔인하리만치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 묶으려던 게 아니었어……?”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한 적도 없다. 묶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대를 묶지?”
그랬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짐짝처럼 묶인 남주인공이 침대 위에서 꿈틀거렸다. 벨은 애처롭게 낑낑대며 잘못 묶은 밧줄을 풀려 했다.
“역시 혼자서는 안 되겠다.”
내 표정도 살폈다.
“……시기가 안 좋았던 것 같군. 그대를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내가 혼자 있을 때 해볼 테니 지금은 좀 풀어 주지 않겠나?”
“…….”
남주를 죽여도 될까?
“때리지 말…… 아니, 그대의 분이 풀린다면 나는 얼마든지 맞아도 좋다.”
벨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침대에 내버려 둔 채 벽을 향해 걸었다. 당황한 벨이 등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주먹을 말아 쥐고 악마성 석벽을 힘껏 쳤다. 벽이 깊이 파였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자, 벨이 즉각 사과했다.
“목숨만은 살려 다오.”
꽉 다문 입술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내가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대 봐.”
“나는 잘생겼다.”
“그럼 얼굴 빼고 다 패면 되겠네!”
이후로는 남주들에게 잘해 주겠다는 나의 굳은 결심이 무색해지는 잔인한 일이 일어났다. 벨은 나를 조종해 연약한 나에게 주먹질을 하게 만들었다. 그를 패는 내 마음이 더 아팠다. 피폐했다. 벨은 잘못했다고 빌면서, 내 주먹에 피가 맺힐 때가 되어서야 만족했다. 잔인한 놈이었다.
게다가 도중에 그가 스스로를 묶은 밧줄이 풀렸다. 애초부터 똑바로 매듭을 맺지 않은 탓이었다. SM물 남주인공이 할 짓이 아니었다. 매듭 사이에 다른 줄이 통과할 걸 계산하지 못하고 일단 아무렇게나 얽다 보니 풀려야 할 곳은 묶이고 묶여야 할 곳은 풀려 있는 게, 미관상 좋지 못했다.
나는 줄을 마구 당겨 나머지 매듭도 풀었다.
“이건 밧줄이라고 묶었냐?”
“스스로 묶는 건 처음이라, 아앗.”
밧줄이 때린 곳을 스치자 벨이 처량히 눈물을 흘렸다.
“가운은 왜 안 벗었어?”
그의 얇은 목욕 가운을 훌렁 벗겨 냈다. 반투명하게 다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도 옷이라고 벨이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수줍어했다. 침대에서 남자 옷을 마구 벗기려니 상당히 파렴치한이 된 기분인데, 실제로 파렴치하고 뻔뻔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건 벨 쪽이다. 그는 무려 나를 실망시켰다. 중죄다.
“다시 묶어 주마.”
“무슨, 잠, 은, 은하, 은하!”
나는 야설 여주. 발버둥 치는 남주인공을 포장하는 데 30초면 충분하다.
팔은 등 뒤로. 허벅지는 벌린 채 고정. 이 정도면 움직임을 구속하는 용도로 충분하지만, 나는 장식적인 요소를 더해 그의 배 위에 마름모 모양의 매듭을 만들었다. 그리고 괜히 신경 쓰여서 그의 가슴 위아래로 밧줄을 가로지르게 했다. 가슴이 부각되는 모양이었다. 묶으면서도 스스로 의아했다. 나는 왜 이렇게 벨제뷔트의 가슴 크기를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사색이 된 벨이 몸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은하, 당장 풀어라!”
“풀라고……?”
벨은 강제로 벌려진 채 고정된 다리를 꿈틀거리며 무려 인상을 썼다. 이 죄 많은 남주인공은 내가 기껏 묶어 줬는데 헤벌쭉하게 미소짓지 않았다.
“그 표정은 뭐냐.”
“불편하다.”
“불펴어어언?”
밧줄로 사지를 묶이면 불편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처음 깨달았다.
“게다가, 가릴 수 없어서 부끄럽고…….”
그건 당연하다. 부끄러우라고 이렇게 묶었다. 벨이 수치심을 마치 나쁘고 싫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조금 팔이 저리고…….”
“벨.”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가 벽치기 하듯이 얼굴 옆에 손을 얹었다. 내 두 팔 사이에 갇히게 된 벨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이 좋은 걸 해줬는데 표정이 왜 그래?”
“은하. 표정이 좋았으면 좋았던 대로 화냈을 거지 않나…….”
벨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벨은 나에게 혼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래서 매번 반성을 못 하고 매를 버는 걸까? 이 기묘하고 의심스러운 가설에는 증거가 있다. 벨은 나에게 혼날 때마다 야릇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볼에 물감처럼 예쁘게 번진 장미색 홍조 때문에 분위기가 묘하게 색스러웠다.
“그보다 이거, 정말, 상당히 부끄럽군. 은하, 그대에게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서로에게 해만 되는 밧줄을…… 흐악, 앗, 은하!”
벨의 속옷을 잡고 거의 뜯어내다시피 벗겼다.
“은하!”
벨이 비명을 질렀다. 머릿속 어디에선가, 미카를 불러야 하는데 뭔가 벨한테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하지 않은 생각은 곧 분노와 흥분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