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침대 위에서는 옷이 잘 찢어진다는 야설의 물리 법칙이 벨에게도 적용되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음란하게 벌어진 채 고정된 벨의 다리 사이로 그의 비밀스러운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커다랗게 늘어진 성기, 부드럽고 따듯한 회음부, 그리고 답지 않게 옅은 빛깔의 은밀한 구멍.
무방비 상태의, 내가 아무렇게나 괴롭힐 수 있는, 남주인공의 가장 예민한 살덩어리.
근데 발기를 안 했다.
“이게 왜 안 서 있냐?”
“서겠나!”
벨이 버럭 화냈다.
나는 벨의 말캉한 음경과 음낭을 동시에 쥐고 추궁했다. 손에 힘을 주자 안 그래도 말랑했던 성기가 거의 쪼그라들었다. 벨이 겁을 먹은 것이다. 이 흑발의 남주인공은 나를 화나게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게 분명했다.
“묶이는 것의 즐거움을 왜 몰라? 묶는 즐거움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게 뭐야?”
“은하. 보통은 둘 다 모른다.”
그러나 벨은 입술을 씹더니, 조금 분한 듯이 상황을 인정했다.
“나는 적어도 한 쪽이라도 이해해야겠지. 그대의 지도에 따라 묶이는 즐거움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
“아니, 묶는 즐거움을 이해해.”
“그대도 이해하지 못한 걸 나에게 이해하라 강요할 순 없다.”
뭔가 이상하다. 수치스러운 자세로 알몸으로 묶인 건 벨인데, 내가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벨은 점점 더 주인님다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진정한 주인님의 배포란, M자 개각 자세로 묶인 채로도 자신감과 자아를 잃지 않고 상대를 분명하게 쳐다보며 요구 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아닐까?
리버스를 너무 하다 보니 무엇이 리버스고 무엇이 아닌 건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개념은 너무 파고들어서는 안 되고 그저 적당히 느낌으로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금기를 건드린 걸까.
우리는 리버스인 듯 아닌 듯 오묘한 대치 상태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세워.”
“…….”
벨이 먼저 꼬리를 말고 시선을 깔았다. 표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꼬리가 말렸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 안쪽으로 흐물거리는 검은 꼬리가 착 감겼다. 내가 그의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자, 벨은 부끄러운 곳을 관찰당한다고 생각했는지 꼬리를 더욱 세게 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못…… 세운다. 부끄러워서 안 되겠다, 은하.”
일부러 귀여운 척하려고 꼬리치는 건 아니겠지?
이해가 안 간다. 부끄럽다는 건…… 좋은 거잖아. 게다가 벨은 이제 막 노출을 시작한 터라 그의 앞에는 무궁무진한 부끄러움의 가능성이 한가득하다. 이미 어지간한 노출에는 감흥이 없는 나와는 처지가 다르다. 금광이 있는데 왜 캐지 않지? 이래서 벨과는 대의를 도모하기가 힘들다는 거다.
그러나 썩어도 남주인공. 여주인공의 손길에는 강제로 세울 수밖에 없다.
“좀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해라.”
벨이 날 의심스럽게 올려다보며 일단 입을 열었다.
“……고맙, 큭!”
진심이 하나도 안 담긴 무성의한 감사 인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냥 손을 아래로 내려 말랑한 성기를 살살 문질렀다. 벨이 곧장 이를 악물며 몸을 움츠렸다. 손안의 성기가 움찔 떨렸다.
아마 그는 불가항력적 흥분을 느끼겠지. 몸이 강제로 젖거나 열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한 번도 타의로 흥분해 본 적이 없다. 늘 나의 의지로 흥분했다.
“윽…… 흐윽, 이런, 이런 거…….”
벨은 착실하게 발기하면서 연신 다리를 움찔거렸다. 단단한 밧줄은 철벽 같은 남자의 몸뚱아리도 확실하게 구속해, 다리를 벌린 채 완벽히 고정시켰다. 그는 움직일 자유를 잃었다. 점차 벨의 숨이 빨라지고 끈적해졌다. 보고 있으니 질투가 치솟았다. 묶여서 좋겠다!
“재미 좀 보겠다?”
“좋을 리가 없다, 은하!”
뭐라고? 누구는 못 묶여서 힘든데, 묶인 주제에 좋지도 않다고?
벨이 끙끙대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가 좋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불편한 데다가, 분하기까지 해.”
원망스러운 붉은 눈빛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묶였는데 왜 분한지 이해가 안 간다. 왜 벨이 굴욕감을 느끼는 것 같지? 나는 오히려 묶이지 못해서 굴욕감을 느꼈는데. 항상.
우리는 서로에게 굴욕을 주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싫으면 날 묶든가?”
벨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건 이미 많이 했지. 아무 소용 없었고.”
“나한테는 소용 있었어. 나한테는!”
주인공으로서의 본능이 자극됐다. 밧줄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모르는 괘씸한 남자에게 사이다를 먹이고 싶다. 그가 풀리고 나면 다시 묶어 달라고 후회하고 애원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지금이 바로 고구마 구간이구나. 속에서 불이 들끓었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았다. 일단 아까 많이 때린 데다가, 이제는 때려 봤자 역효과다. 나는 오히려 더욱 다정하게 그를 애무했다. 손가락을 살 기둥에 얽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쓸었다. 벨은 강제적인 쾌락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비틀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섹시했다.
희미하게 차오르는 흥분 속에서 어렴풋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훈련’이 시작된 거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벨이 밧줄의 즐거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더 중요하다. 벨제뷔트를 언제 어디서든 내 취향대로 묶어 주는 본디지 마스터로 만들어야 한다. 생체 딜도를 DIY로 커스텀해서 이 허접한 야설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묶이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다면, 묶인 채 즐거운 일을 잔뜩 당해 몸에 조건반사적 쾌락을 각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은……!”
목덜미가 물리자 벨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나를 밀어 낼 수 없으니 아무 데나 물고 빨아도 돼서 편하긴 했다. 벨의 뜨거운 피부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내 몸에서 남자들을 미치게 하는 향이 나는 것처럼, 남주들의 몸에서도 여주인공을 홀리는 체취가 나는 걸지도 몰랐다. 그의 체향을 흠뻑 빨아들이며 긴 목에 입술을 댔다. 벨이 흐느꼈다.
“윽, 흐윽, 이렇, 게, 받기만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닥쳐. 나도 주기만 하는 건 익숙하지 않거든?”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나는 쓸모없는 남주인공이라서 그대의 벌을 더 받아야 해.”
……설마 벌 받는 걸 즐기는 건 아니겠지?
불룩 튀어나온 목젖을 물고 빨아들이다가, 쓸데없이 크기만 한 대흉근을 덥석 잡았다.
“아!”
밧줄로 가슴 위아래가 묶이니 살이 눌려서 왠지 평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손안에 꽉 차고도 모자라 손가락 사이로 살이 튀어나왔다.
시야가 온통 색스러운 빛깔이다.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남자의 낮은 신음 소리와 외설적인 숨소리가 쏟아지고, 내가 파고 들어간 탄탄한 다리 사이로 음경이 벌떡 서서는 내 배를 찔렀다.
아, 제길……. 애매하게 야릇한 분위기 때문에 조금 미칠 것 같았다. 묶이고 싶다. 벨이 부러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유두를 잡고 살살 잡아당겼다. 벨의 굵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모범생답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착실히 집중해서 수업 내용을 따라잡았다.
“은하. 물건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그게 좋은 거야.”
“그런가? 하지만 은하,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 물건이었다. 새삼 물건 된 느낌에 기분 나빠 하는 것도…….”
철학적 논제로 빠지기 전에 그의 음경을 움켜쥐었다.
“흑!”
분하다. 정말 벨의 말대로 그는 항상 물건이었다. 나도 항상 물건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동경과 질투를 담아 그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벨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반사적으로 이를 깨물려다가, 급히 입술을 벌리고 조심조심 혀를 얽었다. 뜨거운 혀가 순종적으로 내 손가락 사이를 할짝거렸다. 그는 묶인 상태로도 내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손가락 피부가 빨리는 느낌이 짜릿했다. 거칠게 뽑아낸 젖은 손으로 그의 음경을 문질렀다. 벨이 더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꼴, 그대에게 보기 좋지는 않겠지…….”
“잘 아네. 안 좋아.”
평소처럼 대답하다가, 문득 내 목적은 이게 아님을 깨달았다.
“아니, 보기 좋아. 예뻐. 야해.”
“그대, 말이 너무 쉽게 바뀐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벨이 쓸데없는 생각 못 하게 냉큼 굴러다니는 로션 통을 집었다. 그걸 보고 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건방진 놈.
“설마 싫어?”
“좋든 싫든 내 몸은 그대 소유다. 원하는 대로 해다오.”
“그럼 싫은 티를 내지 마.”
“그대를 속일 수는 없다.”
왜 이런 데서 정직하지? 벨이 질색하는 만큼 더더욱 그의 몸에 로션을 흠뻑 끼얹었다. 말이 로션이지 사실은 아름다운 유리병에 담긴 투명색 포션이다. 그 어떤 위대한 군주도 천박한 몸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액체다.
그러나 정신만은 물건 따위로 꺾을 수 없다. 그것만큼은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한다. 주인공의 무거운 짐이다.
묶였는데 박히지 않는 건 이 세상의 윤리적 가치관에 비추어 보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엉덩이에도 로션을 부었다. 수치스러운 자세로 묶인 데다가 온몸에 음란한 액체를 묻히게 되어도 벨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눈을 찡그리고,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각오는 되어 있다.”
“새삼…… 언제는 각오 안 했다고…….”
“선언이 중요한 거다, 은하.”
나는 내친김에 검은색 눈가리개까지 꺼내서 그의 눈을 가렸다.
“!”
로션과 눈가리개가 어디서 났냐 하면, 그냥 허공에서 나왔다. 야설에서 도구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으니 설명은 생략한다. 진짜 중요한 건, 벨이 눈이 가려지자마자 긴장해서 몸을 굳히고 입술을 닫았다는 점이다. 먼 곳에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는 악마왕이지만 침대 위 눈가리개 앞에서 그는 무력해진다. 불시에 한쪽 유두를 꼬집었다.
“으, 흑!”
“너, 가슴으로 느끼지?”
“…….”
무언의 긍정이었다.
“왜 여기로 느껴?”
말하고 보니, 정말 이상하다.
“왜 가슴으로 느껴?”
애초에 유두가 왜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캐의 유두는 생략되는 게 규칙 아니야?
조금 분한 마음에 그의 양쪽 유두를 마구 꼬집고 비볐다. 벨이 움찔움찔 허리를 비틀었다. 느끼는 게 분명하다.
“은, 은하! 그런 걸 물어 봤자, 헉, 나라고 뭐라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내가 눈가리개를 쓰는 입장일 땐 몰랐는데, 씌우고 보니, 빨간 눈동자를 못 보는 게 아쉬웠다. 분명 저 눈가리개 안에서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고 있겠지. 나한테 가슴을 괴롭힘당하면서 말이다.
역시 괘씸하다. 미끌미끌한 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흐, 아앗……!”
눈가리개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한다. 울퉁불퉁한 복근의 촉감이 좋았다. 나는 배꼽을 찌르는 그의 음경을 무시하고, 아까부터 벌름대고 있는 애널에 손가락을 푹 쑤셔 넣었다.
“큭……!”
벨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 멀리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다 벗은 채 번들번들한 알몸을 묶어 놓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음란한 것 같다. 여기가 야설인데도 그런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강인한 악마왕이…… 아니, 사실 실제로 그는 악마왕도 아니지. 얼굴만 사납게 생긴 고분고분한 미남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적이면, 이런 꼴로도 별다른 불평 없이 얌전히 다리를 벌리는지.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거의 습관적으로 벨을 매도했다.
“몇 번 쑤셔 줬다고 벌써 뒤로 느껴.”
“아니, 벌써 느끼는 건 아니다. 그렇게 문란하지 않아.”
벨이 허겁지겁 변명했다. 잘 느끼면 문란해 보일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안 느끼면 안 느끼는 대로 괘씸했다.
“내가 만져 주는데 안 느껴?”
“그, 그건.”
벨이 입술을 씹으며 망설였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난처한 질문 때문에 곤란해하는 모습이 청초한 히로인 같았다. 다만 로맨스물 히로인이 아니고 능욕물 히로인 같았다.
능욕물 히로인…… 내 자리인데?
벨이 느끼면 느낄수록 분해서, 나는 그의 꼬리를 잡고 마구 로션을 발라 댔다.
“흑, 으윽……! 은하, 은하!”
꼬리가 즉각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털이 풍성하게 달린 부드러운 끝부분이 내 손목을 탁탁 쳤다.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닌 듯, 벨은 때려서 미안하다는 듯이 때린 자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은하. 꼬리는, 꼬리는 안 된다.”
“어느 쪽 꼬리?”
“은하!”
맨날 꼬리 건드릴 때마다 기겁하는 게 수상하다. 이제 보니 꼬리가 성기랑 비슷할 정도로 민감한 듯하다. 나는 수음하듯이 그의 꼬리 뿌리 부분을 빠르게 훑었다. 동시에, 그의 구멍에 쑤셔 박고 있던 손가락을 2개로 늘렸다.
전립선은 건드리지도 않고 거의 그를 장난감 취급하듯이 안쪽을 후볐다. 손가락에 꽉 감기는 살의 감촉이 말캉거리고 뜨거웠다. 벨은 싫어했다.
“은, 은하. 싫다.”
역시 싫어하는 것만큼은 잘한다.
불의 악마가 위기에 처하자, 밧줄 곳곳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밧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야설의 법칙에 따라 무언가 클라이맥스를 보아야만 끊어질 것이다.
“그래. 잘하고 있어. 계속 싫다고 해.”
“그런 게 아니라 진실로 싫다! 은하, 적어도 그대 눈, 눈을 볼 수 있게…….”
눈가리개가 싫은 건가? 그게 왜 싫지? 벨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
나는 고민했지만, 결국 눈물 젖은 눈가리개를 풀어 주었다. 시야에 빛이 들어오자마자 벨은 흠뻑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글썽거렸다.
“은하, 키스를…….”
“바라는 게 많아.”
나는 키스 대신, 그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아아……!”
벨은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질렀다. 내 밑에 내리깔린 몸이 흠칫흠칫 굳었다. 내 배를 찌르고 있던 성기에서 왈칵 뜨거운 씨물이 뿜어져 나왔다. 밧줄에 묶인 상태로도 자극당하면 절정에 달하는 몸이 조금 사랑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사정에 뒤이어, 그의 몸을 묶던 밧줄 매듭이 불에 타 끊어졌다. 벨은 자유로운 몸이 되자마자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팔다리로 나를 구속하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나를 구속하는 몸에 잔 경련이 일었다.
“흑, 은하…….”
그는 어리광을 부리듯 부드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내 목덜미에 비볐다. 아직도 내 배를 무언가 크고 딱딱한 게 짓누르고 있고, 배는 자꾸만 젖어 들었다. 이 절륜한 남자가 아직도 사정하고 있었다. 성기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뭐 뒤를 제대로 뚫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 예민하구나.”
품에 안겨있던 벨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대 한정이다. 원래는 이렇지 않아.
“‘원래’ 같은 소리 하네. 나 말고 누구한테 안기겠다고.”
“나에게는 그대밖에 없지만 그대에겐 다른 남자도 있다는 게 치사하군.”
“왜냐면 나는 멋지니까…….”
벨이 토라졌다.
“은하. 후희를 즐길 때만이라도 나밖에 없다고 말해 주면 안 되나?”
후희를 즐기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밧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
“그대가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면서 묶는 거라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맞다. 벨에게 묶이는 즐거움을 알려 주려고 시작한 거였지.
어느샌가 본 목적을 잊고 벨을 괴롭히는 데에만 열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내가 본분을 저버리다니. 나는 조금 충격받은 채로, 마치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벨은 단단히 토라진 듯,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대, 이런 걸 또 할 건가?”
“어.”
“잘 버텼다고 칭찬해 다오.”
조금 묶어 놓고 괴롭혔다고 완전히 애가 다 됐다. 확실히 고생하긴 했지. 원래라면 묶여선 안 될 악마왕이, 작가의 부족한 캐릭터 설정 능력 때문에, 가학적인 취미를 갖지 못해 고생하는 꼴이.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같은 피해를 공유하는 동지다. 나는 이례적으로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래, 잘했어.”
“흑…….”
날카로운 콧날이 가슴팍을 짓누르더니, 또 옷이 젖기 시작했다.
“왜 또 울어.”
“매일 이렇게 안아 준다면 매일 묶여도 좋다.”
“…….”
이렇게까지 애정 결핍이야?
나는 좀 얼떨떨하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지. 성욕이나 분노가 아니면 대체 이 감정은 뭐지?
혹시 이 감정은…….
“……자신감인가?”
“은하?”
“‘다음 편’을 잘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
말을 해놓고 보니 정말로 자신감이 차올랐다. 벨은 이제 묶이는 즐거움을 대충 이해한 것 같다. 한 단계 발전했다. 그러니 이제부턴 묶이는 장면도 무리 없이 쓸 수 있다.
‘훈련’을 마치고 본편에 적용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발전한다. 이런 식으로라면, 작가가 있었을 때처럼 순탄하게 연재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벨, 우린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 거야.”
“그……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다. 나도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딱히 벨에게 사랑한다 한 적이 없지만, 어쨌든 벨도 덩달아 신나서는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언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나도 그렇다.”
“68편을 찍으러 가자!”
“따르지……!”
우리는 호기롭게 <악마의 비바체> 68편을 쓰러 갔고,
폭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