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69편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아직 ‘유은하의 집’ 배경 안이다. 눈앞에 싱글싱글 웃는 ‘남편’이란 존재를 두고 대치 상태에 있다.
앞치마를 두른 회색 머리의 키 큰 남자.
서늘한 분위기의 미남이 우리 집에 녹아들어서는 따듯한 아침밥을 내놓고 있었다.
“드세요.”
“너 누구야.”
“아잇, 신혼에 그런 농담은 상처받아요. 제가 누군지 아시면서.”
그는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왼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약지에 반지가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왼손도 확인했다. 역시나, 본 적도 없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없다. 반지를 얼른 빼내어 식탁에 내려놓았다.
“네 이름은 알지. 근데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악마의 비바체>의 주인공 ‘유은하’는 결혼한 적이 없다. 혹여나 결혼을 했더라도 그 상대가 벨제뷔트도 미카엘도 아닌 저 자일리는 없다.
게다가 애초에, 이 남자가 ‘자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처음 본다.
“너 언제부터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었어?”
“하하.”
강태을은 식탁에 나뒹구는 반지를 흘낏 쳐다봤다.
“언제라고 생각해요?”
질문에 질문으로…….
<악마의 비바체>의 3번째 남주인공, 강태을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그는 원래 작가의 설정 노트에 없었다는 말부터 해야 한다. 그는 급조된 캐릭터다.
제대로 설정도 플롯도 없는 이 소설 속에서도 강태을이 가장 근본이 없다. 나는 나고, 벨은 흑발 남주고, 미카는 금발 섭남인데, 이 구도에서 네 번째 인물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렇지만 작가가 허둥지둥 분량 채우다 얼떨결에 새 인물을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인형 같은 세 번째 남주. 작가가 정해 준 대사만 읊고, 정해 준 행동만 하고, 집필이 끝나면 실 끊긴 인형처럼 툭 쓰러지는 영혼 없는 육체.
그는 우리처럼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다.
아니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내 남편을 자처하는 저런 남자는 모른다.
강태을은 짐짓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정말, 미카 씨가 사고 친 걸 수습해 줬더니. 이렇게 적대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대뜸 결혼한 건 사고가 아니고?”
“이것도 뭐, 꿈이었다고 하죠. ‘다음 편’에는 악마성으로 돌아가든가 해요.”
그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으로 뵙겠습니다. 은하 씨의 3번, 강태을이에요.”
너무 수상하다.
태을은 아쉬워하는 눈치로 내 손을 가져다가 왼손 약지에 입 맞췄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결혼한 건 좀 장난 좀 쳐봤달까……. 다른 분들이 69편 동안 은하 씨와 눈 마주치고 얘기하는 동안 저는 창고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조금 욕심내 봤어요. 아무리 제가 인형 같아도 그렇지, 엄연히 숨을 쉬고 있는데 한 번은 의자에 앉혀 주지도 않고 그냥 바닥에 15편이나 방치시킨 적도 있었죠. 추웠어요. 잊지 않아요.”
“너 계속 의식이 있었구나.”
“그럼요. 엑스트라들은 필요할 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왜 저는 사라지지 않고 이 ‘쉬는 시간’까지 남아 있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죠. 제가 팔다리는 못 움직여도 계속 깨어 있었다는 걸…….”
역시, ‘본편’과 성격이 다르다.
작가는 남캐 유형은 두 개 밖에 못 만든다. 흑발남, 그리고 금발남. 이게 다다. 그래서 그 둘을 섞어 놓아 회색 머리 남주를 만들었더니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캐릭터가 되었다. 그는 ‘유은하’의 직장 상사일 때는 까칠하다가, 사석에서는 갑자기 다정해지는 등 이중인격 같은 면모를 보였다. 그게 또 우연찮게 수상하고 미스터리한 매력이 된 모양이지만은…….
실제로는 수다쟁이였다.
내가 궁금한 건 그의 실제 성격이나 나에 대한 그의 원망 같은 게 아니라, 왜 이렇게 후반부가 되어서야 깨어났냐는 점이다.
태을은 부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눈을 빛냈다.
“궁금한 게 많죠? 다른 남주들 오기 전에 얘기해 드릴게요.”
“너……. 나한테만 할 얘기가 있어서 일부러 배경을 바꾼 거야?”
“그런 것도 있고. 그냥 은하 씨와 단둘이 있고 싶었어요. 저도 남주인공이잖아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양쪽 관자놀이에다 손가락 뿔을 만들어 보였다.
“뿔 꺼낼까요?”
강태을은 용이다.
회색 머리, 파란 눈, 대놓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의도한 색 배치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악마와 천사가 나오는 소설이니 작가가 세 번째 남주인공도 그냥 인간으로 남겨 두긴 싫었나 보다. 사실 그는 전생에 나와 결혼을 약속했다던가…… 그런 과거가 있는 동양풍 용이다. 그러니 뿔을 꺼낼 수도 있다만 자세한 설정은 아무도 모른다. 작가가 두루뭉술하게만 정해 놓고 매번 자세한 내용은 얼버무렸다. 애초에, 주인공이 꿈에서 깨어나는 ‘현실 파트’ 분량이 적기도 하고.
흐릿한 설정이어도 강태을 본인에게는 소중하겠지. 게다가 여주인공 앞에서 대뜸 자신의 커다랗고 단단한 뿔부터 꺼내려는 저 태도…… 과연 겉모습만 보면 멀끔해 보여도 우리 소설의 남주인공다운 태도다.
수상하긴 해도 망해 가는 소설의 목숨줄을 조금이나마 이어 준 건 사실이고,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겠다. 나는 맞은편 식탁 의자에 앉았다.
“됐어. 설명이나 해.”
모든 걸 말이다.
“우와, 드디어 은하 씨에게 명령을 들어 보네요…….”
태을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설레했다. 69편 만에 깨어나니 별게 다 신나는 것 같다.
그는 첫 운을 이렇게 뗐다.
“리버스 해버리셨죠.”
담배가 피우고 싶다.
뭘 어떻게 눈치챘는지 태을이 냉큼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내 입에 물리고는 라이터도 꺼냈다. 표정만 보면 마치 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던 사람 같다. 불이 호달달 떨리길래 라이터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힉…….”
손을 잡으니까 태을이 몸을 떨었다. 설마 싶은데…….
“발기했어?”
“아, 아, 예. 조금 흘렸어요.”
뭘?
“은하 씨와 무슨 스킨십 하는 게 처음이라……. 아무튼, 크흠, 얘기를 계속하자면. 은하 씨.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요. 정확히는, 은하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읽고 있었어요.”
“어떻게?”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어두운 곳에 물건처럼 방치당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곱씹다 생긴 능력이 아닐까요? 물론 은하 씨는 미안해하지도 않으시겠지만요.”
이 새끼가 나중에 나한테 반기를 들지 않도록 미리 잡아 둬야겠다.
“계속해.”
“…….”
갑자기 태을이 볼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왜 또 이래?
“신경 쓰지 마세요. 은하 씨랑 눈 마주치는 것도 사실상 처음이라 몸이 좀 과민 반응하는 것 같네요. 하여간에……. 은하 씨. 은하 씨가 남주들을 벌주거나 교육하거나 그러는 것도 좋지만, 저희들이 작가 없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연재를 계속하고 완결도 내야 하잖아요.”
윽……. 나는 태을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 수 있게 된 원인에 대해 듣고 싶었던 건데, 그거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 말을 할 수 있으니까 훨씬 좋네요. 계속 말하고 싶었어요. 반쯤 외부자인 제 눈으로 보면, 이 소설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내부자의 눈으로 봐도 문제가 많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나는 담배를 꼬나문 채 식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조용히 경청했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신나서 주절거리는 회색 머리 미남을 구경하면서 말이다.
“먼저 그 ‘주인님 훈련’이라는 것 말인데요.”
“어.”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해 봐.”
그가 심호흡을 한번 했다.
“주인님을 훈련시킨다는 게 뭔 소리예요, 그게……?”
“…….”
황당해하는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군.
태을이 울컥해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잖아요! 진짜 이상해요. 왜 벨 씨도 그걸 덥석 알았다고 하는 거죠? 벨 씨를 마조히스트로 만들어서 때리는 죄책감을 더는 훈련? 효과 없거든요.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마조히스트를 둘로 늘릴 뿐이잖아요. 그러니까 벨 씨가 ‘본편’에서 노출하다 선을 넘은 거죠.”
“오……. 잘 씨불이는데. 그럼 벨한테 뭘 해야 했는지 안다 이거지?”
“네! 당연하죠. 게다가.”
그는 두 번째 문제점도 지적했다.
“미카 씨가 왜 삐뚤어졌는지 모르죠?”
“…….”
모른다. 이유가 따로 있었나?
“자,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모르겠는데?”
“은하 씨가 문제예요.”
“!”
태을이 나를 척 삿대질했다.
“은하 씨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예요.”
“아하.”
때렸다.
“윽……. 아파……. 이게 명치를 맞는 고통이구나. 확실히 방치당하는 고통과는 느낌이 다르네요. 진짜 아프다…….”
태을은 배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기어 다녔다. 바닥에서 벌레처럼 끙끙대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이 새로운 남주인공도 내 밑에 있을 때가 가장 자연스러웠다. 본연의 캐릭터를 표현한 것 같달까, 억지로 만든 캐릭터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캐릭터다운 모습이었다. 살아 있긴 하지만…….
남주들이 모두 카리스마가 없다. 그렇다고 청순여주인 나에게 카리스마가 있을 리도 없다. 이 소설에선 누구도 카리스마가 없다. 작가는 캐릭터에게 카리스마를 불어넣는 방법을 모르나 보다.
생각하다 보니, 진짜 문제점이 뭔지 알아냈다.
“문제는 내가 아니지. 작가지.”
“예…….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세상의 존속 가능성과 우리의 창조주에 대해서.”
태을이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은하 씨. 그냥 말할게요. 은하 씨의 능력으로는 이 소설을 완결 낼 수 없어요.”
한 대 더 때릴까?
“아직 안 해봤으니 모르지.”
“하지만 은하 씨, 엔딩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했잖아요. 예를 들어, 누구와 결혼하실 거예요?”
“그건…….”
아마도 벨이다.
하지만 또 모르지, 결혼이 엔딩이란 법은 없으니까. 작가가 딱히 엔딩을 정해 두지 않았다. 우리 세계의 근간, 신의 설정 노트에는 내가 누군가의 아기를 임신한 뒤 도망가리라는 예정도 있었는데, 그런 에피소드를 언제쯤 시작할지, 어떻게 전개할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태을이 야릇하게 웃었다.
“하렘 엔딩도, 저는 나쁘지 않은데. 한 자리 끼워 주시겠어요?”
“본론이나 말해.”
“저야 방치만 안 당한다면 뭔들…….”
“말하라고.”
신경질을 냈다. 태을은 얼굴에 담배 연기가 닿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담배 연기가 싫은가 싶었는데, 얼굴이 수상하리만치 붉었다. 이 소설은 착각물이 아니므로, 나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서 ‘그렇게 화났나?’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좀 믿을 수 없었을 뿐이다.
“너 왜 담배 연기로 흥분해?”
태을이 창피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좀 봐주세요. 저는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요. 은하 씨랑 단둘이 대화하고 있는 이 상황부터가 설레는데…….”
그런 캐릭터치고는, 등장하자마자 나와의 결혼부터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 깊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계속 설명했다.
“아무튼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은하 씨의 능력에는 상한선이 있어요. 작가도 못 한 연재와 완결을 한낱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오히려 은하 씨가 뭔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으로 빠지기만 했죠.”
역시 때릴까? 하지만 눈만 마주쳐도 흥분하는데, 때리다 보면 저 자식이 갑자기 마조히스트로 각성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나는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설명을 들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에요.”
태을이 나직하게 말했다.
“작가를 불러오는 것.”
“!”
그가 미소를 되찾았다.
“저는 작가를 다시 불러올 방법을 알고 있어요.”
폭탄 같은 말이었다…….
일순, 사고가 정지되고……. 작가를?
“작가를.”
“네. 작가를요.”
작가를……. 정말로?
아니, 너무 수상하다.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말도 안 돼. 작가는 이미 이 소설에 정이 떨어졌어.”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어했다. 나는 안다. 말미에는 작가가 <악마의 비바체>라는 소설에서 고통과 절망만을 느꼈음을.
하지만…….
주인공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를 되찾으려는 시도는커녕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작가의 가장 큰 페르소나인 내가 그랬다면 거기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쉽게 포기하는 성격, 두 권 넘게 쓰면서 소소하게 인기를 얻었더라도 도저히 답이 안 보이니 영원히 폐기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작가에겐 결단력이 있었다.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하지만 강태을은 작가의 페르소나가 옅다. 69편이나 되어서야 깨어난 걸 보면, 아마도 우리 중에서 가장 옅을 것이다. 나는 상상도 못 했던 방법을 꺼낼 수 있던 건 그런 이유에서일 거라 생각한다.
“엔딩을 낼 줄 몰라서 그냥 무기한 연재 중단 선언을 해버린 작가가 어떻게 돌아와……?”
묻는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단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제가 물건처럼 보관당하면서 뭘 했겠어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읽는 것뿐이었어요. <악마의 비바체>를 계속, 계속……. 그러다 보니 우리 소설 바깥의 상황이 점점 보이고, 작가의 성향도 발견한 거죠.”
“그게 뭔데?”
“소설 등장인물의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작가의 패턴이요.”
태을이 한 손가락을 들었다.
“제 가설은 이걸 토대로 말하는 거예요. 의외로 쉬운 추론이에요. 우리 작가님은, 반응 연재를 했다는 거죠.”
“반응 연재?”
“네. 댓글이 많이 달릴수록 다음 편을 빨리 가져왔어요.”
“그거랑 작가를 불러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태을이 한번 헛기침을 했다.
“당연히 상관이 있죠. 자, 우리 소설을 일일 랭킹 1위에 띄워, 연재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노출되도록 만들어요.”
나는 상상도 못 했던 해결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작가는 자기 전 습관적으로 연재 사이트에 들르거든요. 그때, 1위에서 빛나는 <악마의 비바체>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돌아올 수 있게요.”
“…….”
1위……. 연재 사이트, 자기 전 습관, 랭킹……. 이런 개념들의 뜻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연결 지을 생각을 못 했다. 나에게 있어 작가의 이미지는 세상을 창조한, 구름 위의 막연한 존재였을 뿐이다. 컴퓨터로 연재 사이트에 접속해 원고를 업로드하는 신의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과연,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1위만 한다면 작가는 돌아올 거예요. 가능성은 충분해요. 작가는 연재를 중단했지만, <악마의 비바체>에 미련이 남았거든요.”
“주인공인 나는 그런 거 몰랐어. 우리 소설에 미련이 남았는지 어떻게 알아? 증거라도 있어?”
“네, 있죠. 저를 봐요.”
태을이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깨어났잖아요.”
“!”
“작가가 연재 중단 이후에도 제 캐릭터를 고쳐 보려고 했으니까요. 덕분에 깨어났죠. 설정 노트의 새로운 페이지에서 생명을 얻었어요.”
“그런, 그런 일이…….”
그리고 나는 오래 침묵했다.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니며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를 이렇게 매정하게 버려 놓고서, 사실은 미련이 남아 있었다니.
이제 보니, <악마의 비바체>는 재미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재 중단 선언을 취소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
우리의 허접한 소설이 다른 쟁쟁한 소설들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서야 한다. 분명 어렵고 힘들 것이다. 불가능에 가깝겠지.
그렇지만…….
“저 잘했나요?”
“…….”
태을은 의자에 얌전히 앉은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충동적으로 그의 회색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잘했어.”
“헤헤…… 아…… 윽…….”
태을이 웃다 말고 다시 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의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무시했다. 그의 등허리가 수상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도 못 본 척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앗, 그, 그만…… 나올 것 같아요.”
근데 이 말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뭐가?”
“부끄러워서 그걸 어떻게 말해요! 혹시 이것도 은하 씨의 조교, 뭐 그런 건가요? 뭐가 나올지 제 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건가요?”
“시발, 좀…….”
“아, 안 돼. 나와 버렷……! 앗……!”
태을의 양쪽 관자놀이에서, 사슴 뿔처럼 생긴 용 뿔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 아아…….”
떨떠름하게 내려다보는 내 눈길에, 태을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의 고간에서 바지를 뚫고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새어 나왔다. 그는 아랫도리보단 얼굴을 가리는 걸 택했다.
“창피해. 은하 씨 앞에서 뿔이 나오고 말았어……. 이제 나 어떡해…….”
“…….”
피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