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20화 (20/40)

20화

“인사해. 강태을이다.”

합사 첫 단계, 인사를 시킨다.

“안녕하세요.”

“설마 싶었지만, 정말 깨어난 것인가?”

“시체가 아니었구나. 움직이는 거 보니까 신기하네…….”

안 싸운다. 합사에 성공했다.

태을이 지금까지 못 움직여서 힘들었고 지금 반갑고 기쁘고 어쩌고 수다스럽게 인사하는 걸 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오디오가 꽉 찬다. 인원이 고작 한 명 늘었을 뿐인데 악마성 응접실이 북적북적해진 기분이 들었다. 존재감이 큰데, 원래 우리가 3명밖에 없기도 했지만, 그에게 커다랗고 하얀 한 쌍의 뿔이 달려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저 뿔, 한번 튀어나왔더니 안 들어간단다.

아까 혹시 뿔이 팔루스의 은유라서 한 번 사정하면 가라앉는 거냐고 물어봤는데 차가운 시선만 받았다. 심지어 꼬리나 날개와는 다르게 성감대도 아니었다. 진짜 그냥 뿔이었다니, 의외다.

꼬리, 날개, 뿔……. 화려한 장식을 단 남자들이 눈앞에서 서로 인사하고 있다.

“축하한다. 작가가 없어졌는데도 새 인물이 생기다니 별일이 다 있군. 이래서 오래 연재되고 봐야 하는 건가.”

하여간에 환영하는 분위기다.

“불.”

“알았다.”

담배를 입에 물자마자 불이 붙었다. 불의 악마를 부하로 두면 이런 면이 편하다.

자, 이제 우리의 새 계획을 발표하자.

“말해.”

나 말고 3번이.

태을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헛기침을 했다.

“알겠습니다. 중대 발표가 있으니 다들 우선 자리에 앉아 주세요. 아, 떨리네요. 제가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수상 소감인가?

벨과 미카도 각각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태을을 주목했다.

근데 쟤가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태을은 69편 동안 식물인물 상태였기 때문에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남주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겁을 먹고 무슨 사고라도 치진 않을까 신경 쓰인다.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실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태을이 반지를 낀 왼손 약지를 욕하는 것처럼 내밀었다.

“결혼했습니다.”

“초면에 이 무슨 무례이지?”

“건방진 새끼가 갑자기…….”

“지금까지 잘도 저를 시체 취급하셨죠.”

겁은 안 먹었는데 합사에는 실패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군. 주인공의 숙명이 이렇다.

“다 앉아라. 이 모지리 새끼들, 싸우면 죽여 버린다. 태을아, 너는 왜 갑자기 시비를 걸어?”

“그러는 은하 씨는 왜 69편 동안 저를 방치했죠?”

“왜겠냐? 너도 앉아.”

“흥.”

태을이 불만스럽게 가까운 소파에 착석했다. 손바닥을 부딪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얘들아, 주목. 우리의 향후 행동 방향이 결정됐어. 다 따라 주리라 믿는다. 먼저, 미카.”

“왜.”

“다 벗고 꿇어.”

“왜?”

미카가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너는 항상 이런 식이지! 소설이 좌초된 데는 네 탓도 있을 텐데, 왜 우리만 벌줘?”

태을이 기적적으로 깨어나 수습하긴 했어도, 미카가 69편에서 나에게 페니반을 달고 리버스를 꾀했던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본인도 저렇게 과민 반응하는 걸 보니 내심 속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태도를 보면 안다. 미카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우고 날개로 몸도 감쌌다.

“지랄 마. 내가 무슨 마음으로 69편을 망쳤는지 좆도 모르면서. 네가 뭐라고 하든 안 들으면 그만이야.”

나는 담배나 빨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벨과 태을은 가만히 미카를 쳐다보고, 미카는 발을 탁탁 구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내 명령이 듣기 싫으면 도망가면 될 테지만, 못 가겠지. 1편부터 길들이고 세뇌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담배를 반도 안 태웠다. 미카가 항복 선언을 했다.

“은하 양. 넌, 너는……. 진짜 쓰레기 같은 여자야.”

미카는 그 자리에서 투버튼으로 된 정복 재킷의 단추를 톡톡 풀고는 뒤로 돌았다. 양쪽에 있던 남자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천사의 정복에는 등판에 날개 구멍이 뚫려 있다. 정확히는, 셔츠가 드레스처럼 등이 파여 있고, 그 위를 망토로 덮는 형태다. 망토만 끌러 내리면 곧바로 어깨가 보인다.

여주인공인 나보다 더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날개뼈에서 진짜 날개의 뿌리가 돋아나 있다. 천사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벌써부터 등 근육이 선명했다.

스트립쇼를 구경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벌써 버릇이 될 듯한 예감이 든다. 미남이 수치와 굴욕을 삼키며 하나씩 스스로 포장을 푸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작가가 멀쩡히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었을 때는 나도 신실했으니 작가의 신념에 따라 남자들을 벗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떠났으니 내 마음이다. 그러게 누가 연중하래? 게다가 반항한다는 배덕감이 살짝 짜릿하기도 하다. 이래서 남주들이 자꾸 내 말을 안 듣는 걸까?

미카는 능숙하게 손을 등 뒤로 돌려, 상의 뒤쪽 날개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천사용 재킷이 털썩 바닥에 떨어지며 은장식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벗는 건 미카인데 벨이 더 기겁해서는 소파에 흡수될 것처럼 등을 바짝 붙였다.

“은하, 꼭 이 자리에서 시켜야 하나?”

“너도 벗고 싶어?”

“아, 아니, 아니다…….”

본전도 못 건졌다.

벨은 동료가 당하는 불의에서 침울하게 눈을 돌렸다. 태을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나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고.

미카는 사소한 반항이라도 하려는 듯 군화 단추를 풀고는 저 멀리 발로 찼다. 셔츠 단추를 푸는 손길도 빨랐다. 얼른 벗고 끝내려는 기색이 보였다.

다정한 얼굴 아래 의외로 괴물 같은 근육질의 육체, 모델로서 완벽한 몸매가 샹들리에 불빛 아래 남성적 매력을 뿜어냈다. 그러나 벗고 있는 본인의 얼굴에는 소년 같은 수줍음뿐이었다.

……왜 수줍어해?

스트립쇼가 아니다. 나에게 충분히 감상할 시간을 주거나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그는 무용을 하는 듯한 우아한 동작으로 셔츠를 벗었다. 도톰하고 선명한 가슴 근육 위에 분홍빛 유두가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로 군번줄이 짤랑거렸다.

나에게 강제로 페니반을 채우고 올라타 헐떡거릴 때는 최선을 다해 요염한 표정을 지었으면서, 오늘은 아무런 음란한 마음 없이 그저 건조한 탈의가 목적인 듯 군다. 가증스럽다.

미카는 냉큼 바지를 벗고, 하얀색 팬티 밴드에 손가락을 건 채 망설였다. 자비를 구하려는 듯 파란 눈동자가 힐끔 나를 향했다.

어쩌라고, 애널도 스스로 바친 주제에. 벗어.

“…….”

금빛 음모 아래, 천사의 복숭아색 성기가 덜렁 드러났다.

하얗고 튼튼한 허벅지 사이로 툭 떨어진 살덩이는 발기하지 않아 연약하고 예민해 보였다. 이쯤 되자 미카는 목까지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주먹만 꽉 쥐었다. 눈치는 있어서 성기를 가리지 않는다. 대신 한쪽 무릎부터 차례로 바닥에 꿇고 나를 반항적으로 올려다볼 뿐이다.

천사를 무릎 꿇렸다.

“이제 만족해?”

“그럴 리가? 너는 죽여 버릴 거야. 무슨 생각으로 69편을 망쳤어?”

“…….”

놀랍게도, 미카는 팬티를 내릴 때보다 더 수치와 굴욕을 느낀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어쭈…….”

“은하! 이, 이제 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다오. 중요한 이야기이지 않나.”

보다 못한 벨이 냉큼 끼어들었다. 이 나약한 새끼. 나를 때리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동료가 험한 꼴 당하는 것도 못 본다. 악마로 태어났으면서 이게 무슨 짓이지? 애초에 벨이 제대로 된 사디스트였다면 이 모든 사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도 벗고 꿇어, 새끼야.”

“나는 왜지? 아, 아니, 알겠다. 태어나서 미안하다.”

벨도 꼼지락대며 신속하게 옷을 벗었다. 그래도 벨은 탈의 경험이 몇 번 있다. 뾰족한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벗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얀 놈들에 비하면 짙은 편인 피부색, 커다란 가슴, 날렵한 허리……. 그리고 바지와 함께 잽싸게 내려 버린 팬티 안에서 역시나 발기하지 않은 거대한 성기가 덜렁 튀어나왔다. 색이 옅고 모양이 예쁘고, 감촉마저 부드러울 걸 안다.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 것처럼 부끄러워하면서, 몸은 멈추지 않는다. 벨은 이미 나의 작품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채찍질과 주먹질, 발길질로 다듬어 낸 보석 같은…… 복종하는 노예.

아오…….

벨이 다른 건 몰라도 무릎만큼은 누구보다 잘 꿇는다.

“부디 이걸로 그대의 기분이 풀리기를 바란다.”

안 풀렸다.

그래도 남자 둘이 나란히 나체로 무릎 꿇은 모습은 괜찮다. ‘휴식 시간’에는 그냥 계속 벗고 있으라 할까?

아니, 아니지……. 그건 나의 계획과 맞지 않는다.

태을은 아까 중대 발표랍시고 약지를 내밀었을 때는 겁을 안 먹었는데, 1번과 2번의 꼬라지를 보고는 겁을 먹었다. 뿔 달린 서늘한 인상의 회색 머리 남자가 안색이 새파래졌다.

“저도…… 벗고 꿇어야 하나요?”

3번은 딱히 죄가 없으니 강제하지 않겠다.

“하고 싶으면 해.”

“네? 네에에?”

강태을, 깨어난 지 1편 만에 눈물을 보이다. 최단 기록이다.

“저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대로 결혼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요?”

명령한 적 없다. 하지만 태을은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훌쩍이며 처량하게 옷을 벗었다. 제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다니는 천사나 악마와는 다르게 용은 옷이 간소했다. 소매가 헐렁한 차이나 칼라 셔츠와 종아리가 드러나는 면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현실 파트’ 인물이기도 하니까.

태을은 울먹이면서 팔을 교차해 셔츠 밑단을 잡고 위로 걷었다. 다른 두 남자에 비하면 마른 편이다. 슬렌더한 가슴과 마른 근육이 자리한 배가 드러났다.

거기까지였다.

“아.”

태을이 벗다 말고 셔츠로 얼굴을 가린 채 멈췄다.

“뿔에 걸렸어요.”

“…….”

“도와줘요.”

발표를 시작하자.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소설은 침몰하고 있어. 나름대로 소설을 이어 보려 했지만 잘될 리가 없었지. 우리는 맡은 역할이 뭔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으니까. 미카가 사고를 치긴 했지만,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거야.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작가의 부재.”

“우아앗,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벗는 거란 말예요.”

“저러고는 있어도 태을이가 작가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어. 랭킹이야.”

나는 태을에게서 들었던 것을 무릎 꿇은 남주들에게도 말해 줬다. 생각지도 못한 관점에서의 해결책을 듣고 남주들이 심각해졌다. 그러는 동안 태을 본인은 뿔에 걸린 옷을 빼내지 못하고 버둥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벨은 처음엔 도와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이야기가 심각해지자 집중하느라고 3번을 잊고 말았다.

그것만 잊은 게 아니다. 벨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의견을 냈다.

“놀라운 이야기군……. 하지만 은하, 1위는 쉽지 않을 거다. 내가, 그…… 엉덩이를 벌린 이후로, 댓글창은 싸움판이 된 지 오래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수습하지?”

“댓글이 없는 것보단 가능성 있지.”

“그건 그렇겠군.”

벨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못해 인정했다. 미카는 날개로 몸을 가린 채 물어봤다.

“1위를 어떻게 해?”

“정석적인 방법은,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자극적으로 하는 거겠지.”

“……우린 이미 채찍이 나오는 SM 야설인데? 여기서 뭘 더 자극적으로 해?”

타당한 지적이다.

“소재가 자극적이라고 다가 아니지. 우리는 소재를 제대로 못 활용했어. 그리고 날개 치워라.”

미카가 분해하며 고간을 가리고 있던 날개를 치웠다. 덩달아 옆에 있던 벨도 자신이 나체라는 사실을 상기해 내고, 새삼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수줍어했다. 버둥거리던 태을은 기어이 셔츠를 찢고 나서야 해방되어 바지를 입은 채 미카 옆자리로 기어왔다.

“은하 씨는 좋은 생각이 있으세요?”

“어.”

나는 남주들을 내려다봤다.

1번, 2번, 3번이 나란히 무릎 꿇고 내 말을 기다리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어쩐지 그들에게 있지도 않은 개 목걸이가 보이는 듯했다. 바닥에 꿇는 게 저렇게나 자연스럽고 어울린다. 이들은 피폐물 남주로서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겠지. 이런 면모 때문에 우리 남주들은 제대로 사디스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한텐 주인님 자질이 없어.”

“드디어 알아주는군.”

벨의 허벅지를 밟았다. 한심한 악마가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몸을 숙여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한테도 노예 자질이 없는 것 같아.”

“그걸 이제 알았어……?”

미카한테는 고환을 발로 차줬다. 별로 세게 차지도 않았는데 미카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전 아무 말도 안 할게요.”

태을은 두 손을 자기 입을 막았다.

“남주들한테만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당연히 주인공인 내가 가장 큰 문제였어. 교육받아야 할 건 너희가 아니라 나였던 거야.”

“…….”

“대답들 안 하냐?”

“새삼 무슨 말을, 컥…….”

나는 미카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혀를 빼내고 그 위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미카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거의 눈이 뒤집어졌다. 날개가 파들파들 떨리고, 생리적인 현상인지 뭔지 성기가 힘을 받아 일어섰다.

불 꺼진 담배를 집어 던지고 미카의 뺨을 쳤다.

“이것 봐. 내가! 노예 훈련을 받아야 해. 내가 문제였어.”

미카는 저항 하나 없이 뺨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성기 끝에 물이 맺혀 있다. 목숨의 위협 앞에서 번식 본능이 고개를 드는, 뭐 그런 거라 생각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슬프고 비통했다.

“내가 노예 체질이 아니라니.”

벨과 눈이 마주쳤다.

“…….”

“…….”

벨을 걷어찼다.

“큭, 나는 아무 말도, 앗……!”

걷어찼다고 또 힘없이 쓰러지는 게 짜증 난다. 나는 나뒹구는 벨의 꼬리를 밟고 발끝으로 살살 문질러 카펫에 비볐다.

벨이 허리를 휘며 다급히 내 발목을 잡았다.

“아, 아, 아프다, 은하. 꼬리는 예민하다고……!”

그러나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벨은 몸을 둥글게 만 채 카펫을 긁으면서 허리를 떨었다. 건드리지도 않은 성기가 바짝 서서 움찔거리더니 요도구에서 애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착잡했다.

“너네 때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 줄 알아?”

채찍을 꺼내 남주들의 엉덩이에 휘갈겼다. 도망치는 남주들의 등과 엉덩이, 허벅지에 빨간 줄이 사정없이 그어졌다. 그러나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내가 가장 피폐하단 말이다.

“나는 너희한테 맞을 때 하나도 안 슬퍼. 내 몸은 마조암캐니까. 맞으면 기쁘다고. 반대로 너희를 때릴 때 제일 슬퍼, 이 씨발 놈들아! 너희가 바닥을 구르고 짖고 맞고 재떨이, 샌드백, 의자로 쓰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아냐고, 개새끼들아.”

피폐했다. 진실로 피폐했다. 나는 기어가는 미카의 날개를 잡고 위로 치솟는 그의 엉덩이 사이를 겨냥해 채찍을 휘둘렀다.

“아흑……!”

미카가 카펫에 얼굴을 박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냈다.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천사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설마 느껴?”

“…….”

미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를 쳐다봤는데, 파란색 눈동자 안에서 음욕의 빛이 보였다.

“언제부터?”

“원래 남자들은 다 약간씩은 마조야.”

“헛소리하지 마, 진짜.”

역시 마음이 아프다.

벨이 내 발치로 기어 왔다.

“은하, 화풀이가 하고 싶으면 해라. 하지만 뭐랄까, 그대는 가끔 때리는 방법이 조금 묘해질 때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걸 사랑이 담긴 매라서 느낌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그대의 본래 기질이 발휘된 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드는군.”

“내 본래 기질이 뭔데.”

벨이 대답은 않고 눈알만 굴리길래 때렸다.

신의 계시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하게 떠올랐다.

“너희한테 주인님 훈련 같은 걸 시켜서 될 일이 아니야. 내가 제대로 된 피폐물 여주가 되어야 해. 나는 오늘부터 노예 훈련을 받아서 피폐해질 거야. 작가가 원하는 진정한 노예의 마음가짐을 갖출 거라고. 알겠어, 주인님들?”

주인님 1번은 우는 중, 2번은 숨만 쉬는 중, 3번은 겁먹고 구석에서 떠는 중이다.

내가 진정으로 피폐해지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너희가 내 채찍에 맞아서 행복해할 때마다 내가 불행해져.”

채찍을 불끈 쥐었다.

“너희를 패서 마조 돼지 새끼로 조교할 거야. 그게 나한테 필요한 노예 훈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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