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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죽여도 되나요-21화 (21/40)

21화

마계의 자주색 밤하늘 아래 금색 발코니에서 가련히 하늘을 바라보는 여주인공(세계관 최고 미녀).

연갈색 머리를 풍성하게 틀어 올리고 육감적인 몸매의 형태가 비치는 요정 날개 원피스를 걸친 그녀에겐 악마조차도 사로잡을 수 있는 마력이 있었다. 그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슬픔이 가득한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심장을 꺼내서라도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질 테지만, 간혹 아주 강한 남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피 끓는 가학심을 느꼈다. 이성을 잃고, 영원히 품에 가두고 싶어지는, 그런 열망을…….

이런 설정이다.

그러한 이유로 내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데, 아까 주인님 1번이 뭐라 꿍얼거리며 채우고 간 거다. 또 건방지게 은근슬쩍 잠금장치를 헐겁게 해두려 하길래 몇 번 걷어차서 재교육시켰다. 그런데 벨은 이제 나에게 맞으면 맞을수록 눈에 띄게 안심하고 편안해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피폐해지고.

개새끼들…….

아까, ‘노예 훈련’에 대해 발표했을 때, 좌중 반응은 이랬다.

‘알았다.’ (뭘 알고 알았다고 한 거지?)

‘혁신적인 결정인데.’ (왜 비꼬는 투였지?)

‘오……. 그렇군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판이한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데도 평소와 똑같은 듯한 그 평화로움과 안정감은 도대체 뭐였지? 이해도 안 가고 나 홀로 불행하기만 하다.

“난 불행해.”

독백해 봤다.

그래도 이 심란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벨이나 때려야겠다.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잘 열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복도 저 모퉁이에서 커다란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벨! 죽이기 전에 튀어나와.”

“미안하다. 차마 문까지 잠글 수는 없었다. 사람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게 있어서…….”

벨이 즉각 튀어나와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옆구리에 쟁반을 끼고 있었다. 무슨 서류 가방 같은 것도 함께다.

“뭐야?”

“크흠. 성에 갇혀 시름에 잠길 그대를 위로하려 차를 끓여 왔다.”

벨이 쭈뼛쭈뼛 수줍어하며 쟁반을 내밀었다. 눈에 익은 찻주전자다. 이것은 <악마의 비바체>에서 몇 번 나왔던 이벤트다. 이렇게 벨제뷔트는 슬픔에 잠긴 나를 위로한답시고 폭군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멋대로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가는데, 그때마다 나는 위압감과 공포를 느꼈다. 끝나면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전개에서는 그가 늘 내 기분을 고려해 나에게 걸맞은 찻잎을 고른다는 걸 깨닫고, 내가 슬슬 마음을 열까 말까 좀 더 피폐할까 말까 이런저런 가능성을 재는 중이었다. 작가만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티타임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겠지.

작가 생각에 잠시 말을 잃었다. 벨이 슬금슬금 일어나 폭군처럼 마음대로 공손하게 굴었다.

“들어가도 되겠나?”

“누구 마음대로 허락을 맡아?”

“아, 음, 그렇지. 미안하군. 허락 없이 들어가겠다.”

벨이 얼른 태도를 고쳐 내 방에 잔혹하게 침입했다. 벨제뷔트는 불의 군주답지 않게 직접 차를 내리는 소탈한 취미가 있었다. 종잡을 수 없어 두려운 악마왕은 가끔씩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소에는 위엄을 유지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지만 내 앞에선 편안하다는 그런 암시를 주면서 말이다.

게다가 성에 갇힌 가련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걸맞은 향기로운 차……. 도라지 생강차를.

“……무슨 차야.”

“그대는 늘 춥게 입고 다닌다. 차마 껴입으라고는 못 하겠으니 이거라도 마셔라.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해줘 감기 예방에 탁월하고 고혈압 예방에도 좋지. 그대 혈압은 늘 아슬아슬하니까.”

완전 똑똑했다.

“내 혈압이 올라가는 주 이유는 너 때문이야. 내가 주인님답지 못한 짓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정도면 주인님답다. 가소롭군. 가끔씩 그대가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벨은 외투를 벗어 외투 걸이에 걸어 놓고, 티 테이블 너머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잔혹한 성정과는 다르게 다리를 꼬는 자세는 더없이 우아하고 고상했다.

“자, 그래서…….”

벨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대에게 해야 하는 ‘노예 훈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뭐지?”

“내가 널 패는 거.”

“이상하군. 평소 하던 일이랑 똑같은 것 같다. 게다가 나에게 했던 ‘주인님 훈련’과도 내용이 같은 듯하고. 우리 결국 명칭만 다르지, 하는 짓은 계속 똑같은…….”

쇠고랑 찬 발로 벨제뷔트가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시작하자.”

“뭔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만…….”

벨이 황망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회초리를 꺼냈다. SM 소설에서 회초리라는 것은 다른 소설의 숨겨진 힘이나 감춰 왔던 권력, 혹은 상태창처럼 언제든 꺼낼 수 있는 물건이다. 우리 소설은 이제 어디서 도구를 꺼내는지조차 똑바로 설명하지 않았다. 요점은 지금 내 손에 넓적한 패들이 있다는 것이다.

벨은 벗기 전에 먼저 장갑 낀 손으로 멋지게 손가락을 튕겼다. 자잘한 불꽃이 허공에 튀어 오르더니, 문이 저절로 닫히고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제야 감금을 하는 거야?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이제야 감금을 한 것 말이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 더 화난다.

“벽 짚고 바지 내려.”

“미안하다. 앞으로는 똑바로 그대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무시하겠다.”

“입으로만 반성하지?”

벨은 입으로만 반성하며 재빠르게 벽에 두 손을 댔다. 꼬리가 앙큼하게 휘어져 바지 뒤쪽 꼬리 단추를 톡 풀더니 허리춤을 잡고 스르르 내려갔다. 꿀이 섞인 듯한 색깔의 통통하고 연약한 엉덩이가 옷자락 아래로 튀어나왔다.

과연, 야설 남주라 그런가 꼬리로 바지 벗는 스킬도 남다르다.

하지만 남자가 저렇게 쉽게 엉덩이를 보여 주다니……. 촉수로 뚫고 스트립쇼 몇 번 시키고 좀 때렸다고 벌써 이렇게 문란해진 건가?

“엉덩이 쉽게 보여 주네.”

“쉽지 않다!”

벨이 즉각 소리쳤다.

“여전히 수치스러워. 다만 그대가 원하니까……. 나는 충성스러워진 거지, 문란해진 것이 아니다.”

선이 강한 옆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는데, 내려간 그 짙은 눈썹에서 얼핏 희미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충성스러운 주인님이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저런 표정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 칼로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나는 이런 아픔 속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너 설마 지금 좋아?”

대놓고 물어봤다.

“그게 그대의 목적이 아니었나? 당하는 기쁨을 알려 주는 것 말이다. 나는 배웠을 뿐이다.”

주인님도 대놓고 대답했다.

“나, 나는…… 조, 좋아.”

“…….”

“…….”

주어가 빠진 고백 때문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가?”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같은 취미를 공유하려고 하는 것 말이다. 실은 노출 그 자체의 기쁨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대가 날 빠, 빤히…….”

달라붙는 검은색 옷 사이로 눈에 띄는 뽀얀 엉덩이가 씰룩였다.

“시선으로 수치심을 주려는 것 또한 관심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니, 내 시선엔 딱히 의도가 없다. 그냥 시꺼먼 옷 사이로 하얀 엉덩이가 강조되어 보여서 쳐다봤을 뿐이다.

벨도 벨 나름대로 나를 힐끔거렸다.

“그대처럼 존엄을 내려놓고 노출증에 걸리진 못하겠지만.”

항상 지나치게 솔직하다.

내 얇은 원피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옷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보단 내 몸매를 부각하기 위한 장식 정도나 될까. 요정의 날개로 만든 옷인데, 뒷면이 비친다. 반투명한 옷이다. 입은 것 같지도 않아 무척 편안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춥지 않은 건가?”

“안 추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누구도 나를 입힐 수 없다.

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벽에 이마를 댔다.

“어쨌든 그대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건 기쁘군. 오늘 과목은 체벌인가? 좋다. 어디 이 건방진 주인님 앞에서 재롱을 떨어 보거라.”

돌연 불의 군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주인공 대사를 지금 들으니까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다. 왜지? 내가 때리고 벨이 맞는데 왜 나는 불쾌하고 벨은 행복하지? 아무래도 이게 바로 진짜 체벌과 SM 플레이의 차이인 것 같다. 때리는 사람이 기분 나쁜 것이 플레이…….

“!”

어쩌면, 혹시 이게 ‘본편’에서 벨이 날 때릴 때마다 느꼈던 감정인가?

그래서 지금껏 그렇게 가학적 행위들을 거부해 왔나?

그렇구나. 바로 이게 남주인공의 감정이구나. 의무적으로 박고 때려야 하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구나.

“큭……!”

패들을 가볍게 휘둘러 그의 한쪽 엉덩이를 때렸다. 그의 엉덩이 살이 떨리며 내 마음에도 작은 파동을 남겼다. 괴롭다. 노예란 이렇게 괴로운 위치구나. 이제야 피폐물의 본질에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를 거의 단행본 2권 분량만큼 먹고서야 깨닫다니! 나는 모자란 주인공이자 모자란 노예였다.

나는 통통한 엉덩이를 향해 패들을 힘껏 휘둘렀다. 패들이 엉덩이 살이 밀려 출렁였다. 주인님의 엉덩이는 연약해서 붉은 자국이 쉽게 남았다.

“이 엉덩이가 원흉이야. 한번 뚫리고 난 뒤로 변했어.”

“큭……. 미, 안하군.”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사과한다. 저거 그냥 말버릇이다. 벨이 배 속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남자란 원래 그런 생물이지.”

엉덩이를 깠지만 목소리와 얼굴만큼은 하드보일드 영화 주인공처럼 멋지다.

“그대가 내 안에 크고 뜨거운 걸 박아 넣은 밤 이후로 나는 남자로서 완성되었다.”

“……어, 그래.”

“그대는 여자라 이런 남자들만의 세계는 잘 모르는군.”

정말 몰랐다. 여자에게 박혀야 남자가 완성되는 거였다니……. 확실히 벨은 나에게 촉수로 유린당한 이후로 어딘지 더 여유로워졌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엉덩이도 더 쉽게 까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시선도 은근히 농염해졌다.

나는 은은한 충격을 받으며 그의 통통한 엉덩이를 향해 패들을 휘둘렀다.

“아!”

평소에 패는 것보다 훨씬 약할 텐데도 벨이 묘한 소리를 냈다. 이것도 그가 좀 더 성숙해졌다는 증거일까? 그는 엉덩이를 맞음으로 인해서 더 훌륭한 주인이 되었을까?

“너, 이렇게 맞아서 더 잔인한 주인님이 될 수 있어?”

벨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대의 처지를 망각한 것인가? 은하, 지금은 그대가 교육받는 처지다. 그대 마음이 황폐해질 때까지 계속 나를 때려라.”

“!”

주인님 1번의 말이 맞다. 지금은 내가 피폐해질 시간이다. 패들을 쥔 손이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붉은 눈으로 나를, 오로지 나만을 내려다보며 터질 듯한 욕정과 집착을 숨기지 않았다. 불의 군주가 명령을 내렸다.

“더 살살 때려라.”

“그런……!”

과연, 내가 진짜 싫어할 만한 명령이었다.

“그런 건…….”

“은하, 그대의 주인이 누구지?”

“읏.”

나는 눈물을 머금고 피폐한 심정으로 살살 때렸다.

“허억……!”

벨이 괜히 엄살을 피우며 벽에 이마를 비볐다. 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은하, 알겠군. 살살 맞으니 느낌이 다르다.”

이 성실한 학생은 매번 꼬박꼬박 감상을 남겼다.

“그대가 매질하는 수준 또한 높아진 건 아닌가? 계속 맞다 보면 확실히 새로운 성벽에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군.”

흑발 사디스트 남주인공이 매 맞는 성벽에 눈을 떠서는 곤란하다. 그런 일차적 감상이 먼저 들었다. 이후로 파도처럼 슬픔과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숨 막히는 자기 연민이 내 마음을 잠식했다. 나는 사디스트 남자가 좋은데, 내 주변 남주들은 모두 개돼지 수컷 마조 새끼들이다. 이런 내가 너무 불쌍하다. 상황이 너무 끔찍하여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지금껏 ‘본편’에서 응당 느꼈어야 했던 감정이었다. 피폐란 이런 거구나. 벨이 엉덩이에 매를 맞으면서 점점 숨이 가빠지고 볼에 야릇한 홍조가 떠오르는 동안 내 마음은 메말라 가는 것, 이게 진짜 피폐였다.

하지만 피폐는 피폐고, 속에서 들끓는 이 분노의 정체는 뭘까. 벨이 엉덩이를 내밀고 다음 매질을 기대하는 것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들끓는다.

슬슬 붉게 부어오르고 있는 말랑한 엉덩이를 향해 한 번 더 경쾌하게 팔을 휘둘렀다.

“하윽……!”

확실히 신음 소리가 야릇해졌다.

평소의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고, 습기와 음욕이 서렸다. 그것을 벨도 느낀 것 같다. 벨이 곤혹스러워하며 꼬리를 파드득 떨었다.

“‘노예 훈련’이라는 거…….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것 같군.”

“닥쳐라…….”

“흥, 내가 닥치는 게 보고 싶으면 재갈을 물려라. 그걸 원하나?”

“윽.”

원하지 않는다. 재갈은 내 거다. 이 새끼가……!

재갈을 물지 않은 벨이 수줍게 소곤거렸다.

“혹시 하는 말인데, 그대는 때리는 기술만 는 게 아니라, 매질에 사랑이 실리기 시작한 건 아닌가?”

“설마! 나는 사디스트가 아니거든.”

“하.”

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길래 한 대 더 때렸다.

“아흑…….”

꼬리가 위아래로 휙휙 흔들렸다. 이놈의 꼬리는 도통 가만히 있질 못한다. 꼬리를 붙잡고 여러 번 연속으로 엉덩이에 매질했다. 벨이 맞으면서 속삭였다.

“내가 그대 취향에 맞는 더러운 수퇘지 주인님이 되고 있으니 그대도 그대 모르게 이상하게 때리고 있는 건…… 아, 하앗……!”

“이상하게 때리는 게 뭔데?”

“노예가 주인에게 말대꾸하지 말아라.”

“뭐라고……?”

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이토록 슬플 수가. 아까까지만 해도 지금 이상으로 슬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벨에게 노예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면 배울수록 슬픔은 깊어지기만 했다. 더불어 이유 모를 불쾌감도 커졌다. 노예가 된다는 건 반발심을 갖는다는 거구나. 벽에 반듯한 이마를 붙이고 꼬리치는 주인님을 죽여 버리고 싶은 이 감정이 바로 노예의 마음일까?

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 그것은…….

“은하, 하, 한 대만 더…….”

그것은 동족 혐오였다.

“아아!”

번개처럼 깨달은 진실과 함께, 마지막 매질에 벨이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불의 군주이고 이거보다 더한 가혹 행위도 많이 견뎌 왔으니 아파서 쓰러진 건 절대 아닐 테다. 엉덩이만 우습게 깐 남주인공의 숨이 끈적하고 가빴다. 그의 바지 앞섶이 한껏 불룩해져 있었다.

불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오로지 나만, 나만! 나만 돼지가 될 수 있다. 가축의 자리는 나의 것이다. 그런데 돼지가 한 마리 더 생기고 말았다니!

그러나 나는 #능력녀이기에, 공사를 헷갈려 훈련을 중단하는 일은 없었다. 독자들은 마음이 아프다고 일 처리가 흐트러지는 주인공을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쓰러져 기어가는 벨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리고, 패들을 집어 던지고, 도망치는 그를 덮쳐 머리채를 잡아 돌려 눕혔다. 커다랗게 뜨인 붉은 눈이 루비 같고 예뻤다.

“은하, 잠깐만, 뭐, 뭘 하려는…….”

“어디 가.”

발목을 잡아끌어 넘어트렸다. 그의 셔츠를 거의 뜯어내고, 이를 세워 어깨를 콱 물었다.

“아, 아아……!”

벨이 내 밑에서 할딱거리며 허우적댔다. 사냥감이 펄떡거리는 게 치아를 타고 전해졌다. 따듯하고, 생명력이 있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남자가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카펫이나 긁으며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품에 안으니 손에 가슴이 잡혔다. 잡히는 대로 힘주어 꽉 쥐었다.

“크흑.”

입 안에서 피가 튀었다.

피 볼 생각은 없었는데, 화가 나서 그만…….

어깨에 흐르는 피를 핥고 그를 돌려 눕혔다. 눈가에는 눈물이 한가득하고,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러나 새빨개진 볼과 거친 숨에는 도착적인 기쁨의 흔적이 가득했다.

입술을 핥으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쌌어?”

“은하, 표현이!”

악마왕의 좁은 골반을 감싼 검은 바지 위로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고 있었다. 손끝으로 더듬자마자 벨이 허리를 튕겼다.

“……왜?”

“그러는 그대는 왜 나를 깨물었지? 그대가 그러고도 여주인공인가?”

벨은 또 물릴까 봐 겁이 나는 건지, 나를 밀치고 슬금슬금 발로 바닥을 밀어 거리를 벌렸다. 경악스러웠다. 저 변태 새끼, 지금 사냥당하는 감각에서 오르가슴을 느낀 건가? 사냥감이 되고 싶은 거야?

속이 울렁거리고, 피가 불타는 것 같다. 뺨이라도 때려야겠다.

“너는 진짜 주인으로서 최악……!”

“잠깐!”

손목이 덥석 잡혔다. 내 얇은 손목보다 훨씬 커다란 손은 깜짝 놀랄 만큼 뜨거웠다. 벨이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지금은 그대가 노예 훈련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그대, 지금 피폐한 심정인가?”

“어…….”

피폐……한가? 적어도 깨물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피폐했는데.

“모르겠어.”

“그대를 위해 준비한 게 있다.”

벨이 비틀거리며 가져왔던 가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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