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남의 몸을 만지고 싶다고?
그렇게 수고스러운 노동이 하고 싶다고? 완전히 미쳤다. 다른 이의 몸을 만지는 건 헌신적인 노동이고 봉사이며 자신에게 이득 될 게 없는 전혀 없는 시간 낭비다. 만져지는 것만이 의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제뷔트의 몸은 약간, 아주 조금, 만지고 싶었다. 나에게 허락된 능동적 애무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뭐랄까, 약간 쓰다듬는 정도. 그나마도 만지다가 남주인공의 진득한 시선을 의식하고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는 정도?
그러고 보니, 남의 몸을 하루 종일 만진다는 지루한 짓을 남주인공들은 어떻게 그렇게 거뜬히 해내지? 아무리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너 좀 헌신적인 성격 아니야?”
실로 69편 만의 질문이었다.
“치, 칭찬 고맙군. 새삼, 갑자기…….”
벨이 허리를 꼬며 부끄러워했다. 칭찬한 게 아니다. 왜 그러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항상 처맞는데도 맨날 졸래졸래 따라다니고.”
조금쯤은 모욕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벨은 전혀 모욕당하지 않았다.
“벗겨 놓고 칭찬하다니, 그대의 새로운 훈련 방식인가? 내 호감을 사려는 의도라면 성공했다고 해주겠다. 노예 주제에 여우같이 구는 걸 잘하는군.”
갑자기 벨제뷔트 같은 대사 하니까 화난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의 몸에는 전혀 부끄러워할 구석이 없었다. 전신이 촘촘히 근육으로 짜여 있어, 다 벗어도 전혀 나체 같지 않고 그리스 조각상 같기만 했다. 내가 저런 몸을 가졌다면 맨날 벗고 다녔을 텐데 이상하다.
물론 난 지금도 벗고 다닌다. 난 멋지니까…….
그러나 벨은 이번에도 무척 수줍음을 타며 벌써부터 근사한 몸을 가리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벗은 옷들을 잘 접어 옆에 두었다.
“아무래도 난 헌신적인 성격이 맞는 것 같다.”
벨이 문득 자신을 인정했다.
“혹시 이게 마조히스트라는 건가?”
“!”
진짜 세상에서 제일 안 반가운 의문이다.
벨은 무릎걸음으로 다시 가까이 다가와서 충성심이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대가 언젠가 나는 마조 변태 돼지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했었지. 내 가능성을 믿는다고. 그게 이런 뜻이었군. 그대는 내 안의 노예근성을 알아본 거였어.”
알아본 적 없다. 그냥 당장 달래야 해서 아무 말이나 했던 거다. 하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벨제뷔트에게는 항상 노예근성이 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헌신적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여주인공의 육체에 홀려 그녀의 몸을 3시간 동안 애무하다가 7시간 동안 박을 수 있는 능력 말이다.
헉……. 피폐물 남주인공들은 사실 모두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 걸까?
“잠깐, 리버스 때문에 또 헷갈려.”
또 뭐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었는데, 그 손에 하필 또 목줄이 들려 있었다. 더욱 심란해졌다.
반대로 벨제뷔트는 감정이 정리되어 후련한 듯했다. 그는 열망을 띤 깨끗하고 순수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살며시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강아지들이 종종 그러듯이.
“실은 그대의 폭정에 헌신할 때 조금 쾌감이 느껴지긴 한다. 돌이켜 보면 1편부터 그랬던 것 같군.”
“!”
그것이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피학성애다!
“그대를 올려다볼 때 가장 마음이 편해.”
“포지션 겹치니까 기분 나쁘네…….”
담배 물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즉각 불이 붙었다. 벨은 자기가 손가락을 튕겨 놓고도 뭘 했는지 의식도 못 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그대는 주인님 자리가 가장 잘 어울려.”
거의 사랑 고백을 하듯 수줍은 어조였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게 무슨 말이야…….
팔을 들어 보였다.
“이 가녀린 팔로 채찍을 휘두르는 게 어울린다고? 지나가는 개도 웃어.”
“은하, 지금은 내가 개다만……. 그리고 그대는 채찍 잘 휘두른다.”
벨은 안 웃었다. 어이가 없다. 나는 채찍 대신 개 목걸이를 흔들며 그의 엉덩이를 퍽 걷어찼다.
“기어가기나 해.”
“아, 아, 알았다.”
벨이 약간 슬프고 분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기기 시작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의 방은 도그 플레이에 최적화된 방으로, 바닥 전체에 푹신한 융단이 빼곡히 깔려 있다. 여주인공을 감금하는 곳이다. 당연히 아름답다. 이곳에서 기어간다면 그 어떤 천박한 개라도 어느 정도 유서 있는 품종 개로 보일 수 있을 정도다. 벨제뷔트 정도 되면 돼지우리에서 굴러다녀도 빛이 날 텐데, 아름다운 장소에서 이러기까지 하니 별로 천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입을 닫고 어설프게 기어갔다. 동작이 삐거덕거려도 멋졌다. 근육으로 완벽하게 짜인 몸이 유연하게 움직여 엎드리는 모습이 고양잇과 대형 동물을 연상시켰다. 진짜 꼬리까지 있으니 더더욱.
“…….”
한밤중의 성 꼭대기는 조용했다. 수치심에 가빠진 숨소리, 무릎이 카펫의 털을 스치는 소리, 나와 연결된 기다린 쇠사슬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곡선을 그리며 살랑이는 꼬리 아래, 도드라진 엉덩이가 발걸음에 맞춰 씰룩거렸다.
엉덩이엔 아직 매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 붉은 흔적은 내 것이어야 했다.
방이 상당히 넓었으나 벨이 그리는 원은 작았다. 저 정직하고 고지식한 남자가 요령을 부리는 건 아닐 테고, 그저 수치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 행위를 빨리 끝내려 한 거겠지. 나로서는 네발로 기어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내던지는 꼴이 이해도 안 가고 어리석어 보였다. 그렇게 싫으면 나 줘. 나더러 기어가게 하란 말이야.
신이시여……. 왜 이런 시련을.
“얼, 얼마나 더 기어야 하나?”
“닥치고 더 가.”
“알았다.”
꼬리가 소심하게 움직여 엉덩이 사이를 가리려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요란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사나운 등 근육과 얼핏 나비 모양이 두드러지는 엉덩이 근육을 두고 자꾸 꼬리에 시선이 쏠렸다.
사자의 꼬리를 닮았으나 광택 하나 없이 검고 끄트머리가 풍성한 꼬리가 이리저리 꼬이고 휘었다.
부럽다.
저렇게 귀여운 걸 왜 나한테는 안 달아 줬지? 물론 나는 청순함과 단정함의 상징 같은 존재이니 내 몸에 과한 장식이 달려선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남주인공한테!
질투심에 휩싸여 꼬리를 덥석 잡았다.
“역시 그만두고 싶…… 아!”
굵고 튼튼했다. 역시 여기에도 뼈가 있는 것 같다. 내가 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누르며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벨은 기어가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는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울상이 된 표정을 보니 발정 나서 이러는 건 아니고 그냥 꼬리 잡히는 게 무서운 듯하다.
“흑, 은하, 너무, 수치스럽다. 나는 장난감이 아니야.”
그 대사 내 거다.
괴롭다…….
지금까지의 괴로움은 괴로움도 아니었다. 진정으로 괴롭다는 감정을 정말 태어나서 처음 배우고 있다. 꼬리를 힘주어 문지르자 즉각 반응이 돌아왔다.
“거기는, 흐윽, 살살 해달라고 몇 번을 말했는, 데도……!”
바보라도 알겠다. 과하게 좋아한다. 벨은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꼬리를 구부려 끄트머리로 내 손목을 간지럽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손목에 꼬리를 칭칭 감았다. 이제 그만 만지라는 무언의 항의와, 손을 맞잡을 수 없으니 이거라도 잡겠다는 애정 표시를 동시에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략하는 건 꼬리의 뿌리 부근이라, 별 소용은 없었다.
여기가 제일 약하다. 엉덩이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 거기를 손가락을 섬세하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피부와 매끈매끈한 꼬리 사이의 감촉이 신기했다.
엉덩이가 자꾸 움직인다.
“가만히 좀 있어.”
“하, 하지만.”
왜 벨에게 항문이 달려 있는 걸까. 단단한 엉덩이 사이, 걸음에 맞춰 슬쩍슬쩍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는 분홍빛 섬세한 구멍이 왜 달려 있는 걸까. 차라리 없으면 좋으련만 있으니까 뚫게 된다. 원망스럽다.
기왕 슬퍼지는 거, 나는 아예 그의 뒷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꼬리를 엄지로 문지르며 그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에서 근육이 흠칫 떨렸다.
“큭, 은하. 이러면 기어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내 등에 담뱃재 털지 말아라.”
또 묘하게 헌신적인 대사를 하는 게, 지금까지 시켰던 그 어떤 역할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 잔혹한 불의 군주가 개 목걸이 찬 채 엎드려서 우는 게 어울려선 안 된다.
막상 나는 ‘본편’에서 개 역할 할 때 벨제뷔트가 너무 아연실색해서 뭘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는데 화가 난다. 엉덩이를 덥석 잡고 주물렀다.
“흐으, 아! 맞은 자리를!”
“가만히 있어. 너는 너무 말이 많아. 안 그래도 심란한데…….”
살이 뜨끈뜨끈하고 부드럽다. 맞은 자리가 살짝 부어올라 있다. 땀으로 살짝 젖어 손에 착 달라붙는 감촉이 괜찮았다.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양쪽 엉덩이를 잡고 둥글게 돌리자 말랑한 듯하면서도 확실히 근육질인 게 느껴졌다.
그 사이 뻐끔거리는 야설 남주의 애널이 핑크빛이었다.
노골적으로 만지니까, 벨이 카펫에 얼굴을 박았다.
“부끄럽다.”
당연히 부끄러워해야지. 살덩어리 사이 숨어 있는 구멍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게 문제란 말이지. 독자들 앞에 한 번 보였던, 더러워진 구멍.
엄지로 쓸어 올렸더니 뜬금없이 꼬리가 수직으로 솟았다.
“히이이이.”
무슨 주인님이 이렇게 경박해.
“그, 그대는…… 지금까지 이런 수치와 굴욕을 겪으면서…….”
또 뭐라 지껄이기 시작한다. 낮은 미성이 형편없이 떨렸다.
“짖으라고 했을 텐데.”
“……머, 멍.”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짖어도 된다.
“아!”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단단했다. 오늘 남주인공 많이 만진다.
근육이 고루 발달해 나무토막 같은 허벅지는 거의 종마의 그것에 가까웠다. 수컷으로서 완벽한 육체가 내 앞에 엎드려서는 천박한 꼴로 꼬리나 흔든다.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보기 좋게 올라붙은 둥그런 고환은 또 어떻고.
“아흑! 거, 거기는.”
……부드럽다.
“왜 부드럽지?”
“은하, 거길 꼭 만져야 하나?”
“주인님 주제에 네가 선택권이 있을 거라 생각해? 얌전히 다리 벌려.”
“거기는 정말 내키지 않는데…….”
벨이 꿍얼거리며 다리를 좀 더 벌렸다. 손안에 들어차는 부드럽고 말랑한 음낭은 주물거리기에 좋았다. 만지작거릴수록 구멍이 움찔거리고 꼬리가 현란하게 흔들리는 것도 조금…… 아주 약간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남의 몸을 만진다는 봉사 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철저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과정, 노예 훈련이다. 피폐함이란 무엇인가 학습하기 위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스스로 나서 하는 것이다.
“은하.”
“닥쳐.”
“……멍.”
근육이 올라붙은 하얀 엉덩이와, 꼬리를 구부려 가리려고 해봤자 훤히 보이는 분홍색 조그만 구멍. 그 아래 예민한 공백, 그리고 모양이 예쁜 고환과 살벌하게 발기한 음경이 이어진 모양새는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남주인공이 보여선 안 될 모습이었다. 교양 있는 흑발 남주라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비도덕적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몰아쉬는 숨소리 속에는 오직 수치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기대와 열망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는, 나와 동족이다.
“원, 원한다면, 내 안에 뭔가 넣으면서 희롱해도 좋다. 이미 그대가 개통한 몸이니까.”
타락하고 말았다…….
“닥치라고 했지.”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아. 불시에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마저 기어.”
“흑, 알겠다.”
나는 먼저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벨이 헉헉대며 네발로 가까이 다가왔다. 기어오는 얼굴이 날카롭고 섬세하고 야릇했다. 알몸에 붉은 개 목걸이, 젖은 등판, 가쁜 호흡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하얀 피부에 돋아난 까만색 꼬리가 뻣뻣하게 굳다가, 항의하듯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다 하트 모양으로 휘어졌다. 하트 모야아앙??
“일부러 그러는 거야?”
“무, 무엇이 말인가?”
겁먹은 얼굴을 보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럼 꼬리가…… 저절로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거야?
뭐지? 야설 등장인물이란 걸 티 내나?
별로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내 발치에 쓰러지는 벨의 몸이 땀투성이였다.
“기어이 한 바퀴를 돌게 하는군.”
“고마워해.”
“무엇에 대해? 하나도 고맙지 않다.”
이 잡종 개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날 째려본다. 배은망덕한 새끼. 기어가게 해줬는데도 감사하다는 말이 안 나오다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이족 보행 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사족 보행을 좋아한다. 이 금 같은 기회를 양보해 주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책망하는 시선뿐이다.
노예 훈련이고 뭐고 이젠 못 참는다.
“당장 일어나. 개 목걸이 나한테 채워. 진정한 사족 보행이 뭔지 보여 주마.”
바닥에 엎드리려는데, 벨이 재빠르게 날 침대로 밀쳤다.
“하지 마라. 나만 네발로 기겠다.”
“너는 끝까지 나를 방해하고……! 비켜, 내가 개 할 거야!”
“그대, 피폐해지려던 게 아니었나?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군.”
“!”
그 말이 맞다. 나는 지금 가련하고 불쌍하고 아름답고 피폐하다.
분하다…….
“날 때리는 게 너무 힘들면 쉬었다 하는 수도 있다. 아니, 좀 쉬었으면 좋겠군. 쉬면 안 되나? 제발 쉬었으면 좋겠다. 쉬어라, 명령이다.”
“계속할 거야.”
벨을 옆으로 굴렸다.
“자, 개가 된 소감을 말해. 최대한 내가 싫어할 만한 내용으로.”
“나는 이제 그대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기뻐할수록 그대가 싫어한다는 건 알겠다만.”
“말이나 해.”
벨은 침대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마구 쏟아 냈다.
“힘들었다. 그대의 시선이 내 온몸에 꽂힌다고 생각하니 기절할 것 같았어. 하지만 의외로 굴욕적이지는 않았다. 평소랑 지금이랑 받는 취급이 별 차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솔직히 말하자면, 왜 이제 와서야 내게 이런 짓을 시키는지 의아할 정도다. 진작 했어도 괜찮았지 않나? 그대는 누구 때릴 때 가장 빛난다.”
“윽…….”
심장이 너무 괴로워서 요정 날개 옷을 부여잡았다. 벨이 걱정은 하면서도 황당해했다.
“도대체 내 말 어디에 그대가 괴로워할 만한 요소가 있는 거지? 난 정말 피폐물이 뭔지도 모르겠고 마조히스트가 뭘 원하는지 이해도 안 간다.”
이 눈치 없는 새끼.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고서도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다른 의미로 벨은 피폐물 남주가 될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다.
“여기 누워.”
“으, 응? 그, 그대 다리에 누우라고?”
“잔말 말고 누워, 죽여 버리기 전에.”
“알, 알았다.”
벨이 황송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땀에 젖어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피부에 스치더니, 허벅지에 사람 머리통의 무게가 얹혔다. 주인님 1번은 무릎베개를 어떻게 베야 할지 몰라 몸을 애매하게 구부리고 불편하게 누웠는데, 이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심호흡도 필요했다.
“……잘했어. 수고했어.”
윽, 말을 내뱉자마자 전신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괴로워. 상심해서 죽을 것만 같아. 이렇게 잔인한 일을 나 자신에게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피폐물 여주인공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괴로울 필요는 없잖아. 싫어, 싫다고.
벨은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헷갈리는 것 같다.
“저…… 은하, 힘들면 칭찬 안 해도 된다.”
“닥쳐…….”
나는 멈추지 않고, 그의 날카로운 턱 밑을 간지럽히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벨이 확실히 좋아했다. 눈가가 움찔 떨리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잘생긴 얼굴에 홍조가 물감 번지듯 예쁘게 번졌다. 표정이 흐물흐물 풀리고 다리를 움찔거리는데 보고 있자니 고통스러웠다. 이 남자가 개새끼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런데 이 피폐함……. 어쩌면 중독성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새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정한 마조히스트, 마조가 되라고 태어난 미녀의 탈을 쓴 암캐가 아니던가. 남자들을 예뻐한다는 고난과 고행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왜인지 벨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왜 처웃어?”
“아니, 좋아서……. 그대가 쓰다듬어 주면 자꾸 웃음이 난다. 은하,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