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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죽여도 되나요-26화 (26/40)

26화

차가운 밤바람이 내 노출 많은 옷을 훑었다.

나는 골목을 걷다 말고 달을 노려보며 반항적으로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자, 여기 여주인공이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그런데 남주 1, 2, 3들은 어디에 처박혀 있길래 안 튀어나오는 거야?

……물론 1번의 행방은 안다. 벨은 나를 혹사시키고 학대하며 자기가 기절할 때까지 날 괴롭히겠다더니 진짜 기절해 버렸다. 구멍이 다 헐어 끔찍하게 부은 걸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가련한 벨을 침대에 버려 두고 나오려니 그가 나보다 더 불쌍해 보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쌍함’을 뺏긴 나 자신이 불쌍하다. 이게 피폐구나.

왜 그렇게 빨리 기절한 거지? 만약 나였더라면 3박 4일쯤 섹스했더라도 지치지 않았을 거다. 나는 어느 쪽 구멍이든 헐지 않는다. 오로지 발목만이 약점이니까.

역시 벨도 결국 남자애라 나약한 면이 있었나 보다.

“…….”

이제야 진짜 피폐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벨이 그렇게 픽픽 쓰러져서야 곤란하다. ‘노예 훈련’을 계속 하다 보면 벨도 익숙해져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3번은 아까 천국 맵에서 봤다.

새하얀 나라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용에게 미카는 어딜 가고 네가 여기 있냐고 물었는데 태을이 대답은 똑바로 안 하고 의미심장한 표정만 짓길래 때렸다. 그러자 자기도 자기가 왔을 때엔 미카가 없었다고 실토했다. 다만 내가 벨과 재미를 다 보거든 이쪽으로 올 거라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나.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찾냐며 삐져 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2번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미카!”

살다 살다 내가 인간계까지 내려와서 2번을 찾는다.

“하암, 졸려. 어서 미카를 찾아야 할 텐데.”

혼자가 되자마자 입에서 설명하는 독백이 자동으로 튀어 나갔다. 이런 작위적인 혼잣말은 작가가 자주 쓰던 방법이다. 제법 탈선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남은 작가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하다.

“작가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는 우리 소설을 1위로 만들어야 해. 하지만 우리 소설엔 ‘진짜’ 피폐가 부족하니까, 내가 노예 훈련을 받아 피폐가 뭔지 배워야 한다고.”

노예 훈련이란 건방진 내가 주인님들의 말을 안 듣는다고 채찍으로 맞고 강압적 섹스를 당해 가며 교육받는 것이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래서는 즐겁고 유쾌한 로맨스 코미디물이 되지 피폐물은 못 된다. 포인트는 내가 슬픔과 우울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 슬픈 일을 하고 있었다. 남주인공들을 살살 달래 가며 만져 주고 심지어 박아 준다. 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한 일인지…….

여기까지 줄거리 요약.

나는 퇴근하고 귀가한다는 설정으로 달밤 아래를 배회하고 있다.

줄거리 요약부터 장면 전환, 작위적인 독백까지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소설다웠다. 독자들이 지금 이 장면의 나를 보았다면 납득하면서 뒤 내용을 마저 읽었겠지. 난 역시 멋진 주인공이다. 세상의 중심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지만, 사실 난 지금 충분히 #무심녀다운 상태가 아니었다.

하나도 무심하지 않고 불필요한 생각이 가득했다. 아까 전까지 벨을 따먹느라 아직도 아래가 욱신거리고, 눈만 감으면 흔들리던 그의 등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피폐했지. 끔찍했다. 그러나…….

“……정말 싫기만 했었나?”

……이게 뭔 독백이야?

“정말 싫기만 했어.”

나는 확언했다. 노예 훈련은 슬프기만 했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약간 감흥을 받긴 했지만, 많이 받은 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그를 범한 것뿐이다. 나의 본분, 피폐해지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 나는 남주들에게 상처받고 아파하라는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것이 나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 즐기지 않았다.

땀에 젖은 이마와 헐떡이던 신음 소리는 그만 생각하자. 최선을 다해 상처받는 일만 생각하자.

“난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옳아. 내가 가는 길이 맞아.”

말하고 나니까 훨씬 낫다. 역시 나는 멋지다.

“그나저나……. 1위를 하려면 진정성도 진정성인데, 아무래도 흥미로운 전개를 펼쳐야겠지.”

……그걸 내가 어떻게 펼치지?

나는 한참 고민 끝에…….

“오히려 상황이 더 좋아졌는데? 의도한 대로 되고 있어. 이제부터 반격을 시작하자.”

아무 생각도 없지만 일단 #능력녀 같은 대사를 내뱉어 봤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을 다시 읽어 보니 #능력녀라기보단 현대 판타지 주인공 같기도 했다. 적절한 독백을 하는 일은 힘들구나.

게다가 여기는 어둡고 추운 동네 뒷골목. 가로등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비추고 있긴 하지만 여러모로 독백하기엔 걸맞지 않은 장소이다. 독백은 일단 한 장소에 가만히 있으면서 해야 했다. 지금처럼 걸으면서 하면 그냥 술 취한 사람처럼 보인다. 특히 나는 계절에 맞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니 더더욱 그렇다. 귀신 같기도 하고.

나는 청승맞은 독백을 읊조리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동네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다, 딱 알맞은 장소를 발견했다.

한밤중의 놀이터.

그런데 선객이 있었다.

“흐어엉…….”

금발의 천사가 날개를 축 늘어트리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깡소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

“어엉…….”

찾았다.

초록색 술병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처울고 있다.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술병이 척 봐도 대여섯 병을 넘는다. 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지? 옛날 드라마에서 실연당한 천방지축 여주인공인가?

……그러면 저기 내 자리 아니야?

그런데 저렇게 추하게 울고 있어도 등 뒤의 은은한 후광은 꺼지지 않았다. 그게 은근히 열 받았다.

불렀다.

“뭐 하냐.”

“으악!”

미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주병을 위로 집어 던지더니 곧장 뒤돌아 달렸다. 상황 판단이 빠르다. 그런데 술에 꽤 취했던 모양인지 여행 가방에 발이 걸려 모래 위로 요란하게 넘어졌다. 날개가 크니까 넘어지는 모습도 화려해 보인다.

……여행 가방?

“가방 뭐냐. 어디 가게?”

“가까이 오지 마!”

그를 잡기 위해 추격전까지 펼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냥 걸어서 그의 옆으로 갔다. 이 새끼, 갈 데도 없는데 어디로 도망치려 했을까. 감히 우리 소설을 버리고 떠날 생각을 했던 거라면,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악마성 꼭대기에 감금할 거다.

넘어진 미카가 일어나질 않았다.

“누워서 뭐 해. 자?”

“……저리 가.”

“쪽팔려서 못 일어나?”

물론 전혀 야한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엎어져 있는 금색 뒤통수를 보니까, 자연스럽게 아까까지 벨을 엎어 놓고 박았던 일이 연상됐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어깨를 발로 흔들었다.

“일어나. 다음 편 써야지.”

“꺼져! 사람이 울고 있는데, 진짜……!”

미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람도 아니면서, 참 나. 온미남의 얼굴이 눈물과 모래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짓씹듯 선언했다.

“은하 양 밑에 못 있겠어.”

“!”

미카에게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다.

<악마의 비바체>는 엄연히 신분제가 확고한 소설이다. 지엄한 상하 관계 앞에서 저건 할 말이 아니다. 내 밑에 못 있겠다니.

“뒈질래? 네가 내 위야!”

허벅지를 걷어찼다. 날개도 밟았다.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어쩐 일인지 남자들을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관성이라도 받은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멈추기가 싫었다. 비명 소리에 맞춰 즐거운 춤이라도 추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기어서 도망치려는 미카를 잡아다 날갯죽지를 밟았다. 나와 합을 맞춘 것처럼 발 아래에서 비명이 터졌다. 미카는 어깨를 움츠리며 날 올려다봤다.

주인님 2번을 심문하자.

“미카. 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점이! 내 날개를 욕실 발 매트처럼 쓰는 점이!”

하지만 물기가 잘 닦인다.

“나야말로 물어보자. 69편은 왜 망쳤어?”

“…….”

미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내려다봤다.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려는 것뿐인데 그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주인님 2번을…… 죽여 버릴 테다.

“다 뜻이 있어서 패는 거야.”

“그게 뭔데.”

“왜 모른 척이야. 네가 나에게 ‘노예 훈련’을 시켜서 날 불쌍하고 피폐하게 만들어야지.”

“……그거 진심이었어?”

미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맞는 나보다 때리는 네가 더 불쌍하니까 네가 날 때려야 한다고?”

“어.”

“…….”

미카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국 이렇게 말하며 돌아누웠다.

“날 내버려 둬.”

“일어나.”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날개까지 단 근육질 성인 남성의 무게는 상당히 무겁다. 나처럼 가녀린 여자가 들 만한 무게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또 괜히 섹스를 8시간 동안 하거나 야구 방망이를 남주인공의 엉덩이에 수십 회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

늘어지는 미카의 팔뚝을 잡고 위로 당겼다. 미카가 내 손을 뿌리쳤다.

“놔. 나는 약하게 살다가 죽을 거야.”

“69편 망친 책임도 안 지고 그냥 죽겠다?”

“어! 도망칠 거야. 가서 죽을 거야.”

“남자는 다 조금씩은 마조란 말도 해명 안 하고?”

“그건…… 뭘 해명해? 문자 그대로야.”

“뭐라고?”

“이제 놔줘.”

미카는 나를 다시 뿌리치고, 이번엔 날개까지 펼쳤다. 음주 비행을 할 셈이었다. 미카엘이 나는 모습은 ‘본편’에도 몇 번 나오지 않는다. 운전 미숙에, 술에, 명령 거부에. 도망치게 놔둬선 안 된다.

천사가 날아서 도망치기 전에, 날개 잡고 꺾었다.

“악……!”

날개를 꺾는 감각이 짜릿했다. 이 맛에 그의 날개를 놓을 수가 없다. 미카는 등을 감싸 쥐며 쓰러졌다.

“아파. 진짜 아파.”

“엄살 부리지 마. 어차피 ‘다음 편’ 찍을 때쯤이면 낫는 거.”

“그러니까 그 ‘다음 편’을 찍기 싫다니까……!”

미카는 비틀거리다가 아픈 날개를 조심히 접으며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취기와 고통 때문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미카는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상처받은 표정으로 날 비난했다.

“내가 지금 다음 편을 찍을 수 있는 상태로 보여?”

“언제는 다음 편을 찍을 수 있는 상태였고?”

나는 언제나 다음 편을 찍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부분 남주들 때문에 내내 화가 나 있어서…….

만전의 상태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된다. 항상 컨디션이 안 좋다고 가정하고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 주인공인 나는 늘 그런 각오를 하며 살았다.

미카가 훌쩍이며 물었다.

“은하 양은 내가 싫은 거지?”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미카가 휘청이면서,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쪼그려 앉아 훌쩍였다.

“이제 내가 꼴 보기도 싫어진 거잖아.”

“왜 또 진상이야. 너희는 항상 꼴 보기 싫었으니까 새삼 더 이상 싫어질 것도 없어.”

“그런 말을!”

내가 기어이 또 남자를 울렸다. 미카가 기대 서 있던 벽에서 주룩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처량하게 무릎을 끌어안았다.

“……69편을 망친 이유는.”

자백이 시작된다.

“어.”

“나는 영원히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차라리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려 했던 거였어…….”

“음…….”

정강이를 찼다.

“아야.”

“똑바로 차근차근 설명해라. 못 알아들었으니까.”

“그, 그러니까.”

담벼락에 쪼그려 앉은 천사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로맨틱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구타당했다. 찢어진 군복 소매 사이로 멍든 팔이 보이고, 머리고 날개고 다 헝클어졌고, 상황도 엉망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장면을 황금빛으로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미카가 나직이 고백했다.

“은하 양. 사랑해.”

“…….”

“이어지고 싶었어. 그런데 은하 양이 나는 섭남이라 안 된다고 했잖아. 어떻게 해도 가능성이 없다고 그랬잖아. 이런 소설엔 출연하기 싫어. 그래서 작가가 없어져서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이 소설을 이으려 하더라.”

“……그래서 망쳤다?”

“은하 양. 나는 이 ‘쉬는 시간’이 좋아. 우리 이것만 하면 안 될까? 괴롭게 오래 살지 말고, 짧더라도 행복하게…… 응?”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미카는 다 큰 어른이 아니라 순수한 소년처럼 보였다. 1편부터 지금까지, 말 안 듣고 반항하던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다니. 어이없는 걸 넘어서 허탈하다. 고작 이딴 문제로, 이딴 걸로…….

“야.”

멱살을 잡았다.

“내가 관심 안 줘서 삐뚤어졌다고?”

“그걸 그렇게 요약하다니, 너 진짜 성격으으읍…….”

입술부터 비볐다. 눈물과 피 맛이 나는 입술이 말캉했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를 침범하고 그의 입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분명 술맛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천사의 타액에는 무언가 신비로운 효과가 있는 건지 달콤한 맛이 났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두드리고, 혀를 빨았다. 천사는 멱살이 잡힌 채 다리만 움찔거리며 피하지 못했다.

입술을 떼고 보니 미카의 표정이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했다. 뺨을 착 착 두드렸다.

“정신 차려.”

미카가 뒤늦게 눈썹에 힘을 줬다.

“……아무리 여기가 야설 세계라고 해도 그렇지, 키스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해?”

“너 왜 이렇게 유치해? 뭐 한 7편 먹은 애야?”

“……”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여기 유치한 소설 속이거든? 제목부터 <악마의 비바체>잖아!”

“나랑 이어지고 싶었다는 게 뭐야? 섹스하는 거?”

“그런 거 아니거든!”

“예쁨받는 거?”

“…….”

미카가 급격히 말이 없어졌다. 설마 진짜야? 사랑받지 못해서 삐뚤어졌다고? 피폐물 남주씩이나 되어서 그런 인간적이고 연약한 짓을 저지를 줄 몰랐다. 이번에도 나의 불찰이다. 책임지고 미카를 바로잡도록 하겠다.

멱살을 놓지 않은 채, 그를 강제로 일으켰다.

“따라와.”

배경을 바꿀 생각이다.

미카가 끌려오면서 찡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아? 너는 벨만 신경 쓰고……!”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였다. 요즘 등장인물들의 몰라도 될 일면들을 자꾸 알아 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벨만 챙겨 준 적이 없다. 때렸으면 몰라도.

“패기야 많이 팼지.”

“그게 챙겨 준다는 거야.”

“뭔 소리야?”

미카가 또 보석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윽, 결국 관심이 있으니까, 흑, 때리는 거잖아. 그래서 나도 일부러 네 성질 돋워서 맞으려 했어. 이게 잘못이야?”

남자는 다 조금씩은 마조라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인가? 관심을 받고 싶은데, 받을 수 있는 관심이 폭력뿐이니까, 결국은 폭력에서 흥분을 느끼게 되는 건가?

미카는 계속 찡얼거렸다.

“심지어 댓글들도 다 벨 군 얘기만 하고.”

“그거 다 욕이잖아…….”

댓글이 다 벨제뷔트 얘기만 하는 건 사실이다만 다 욕이다. 남주인공 욕을 하기 위해 이 소설을 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욕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욕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들만 모인 것 같다.

“그런 것들도 설마 다 관심이라고 보는 거야?”

“관심이야! 벨 군이 출연하지 않으면 댓글 수가 확 줄어드는 거 몰랐어?”

“…….”

몰랐다.

펑펑 우는 미카를 앞에 두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남주인공을 욕하는 댓글들은 모두 애정이 맞았던 것 같다. 다만 비틀린 애정이었을 뿐이지. 우리 소설의 주된 목적은 환상 제공,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니까. 벨은 훌륭하게 욕받이 역할을 하며 모든 독자들의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았던 듯하다.

막상 욕먹는 본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덤덤했다. 심지어 독자들이 자기 욕을 하다 감정이 과열된 것 같으면 그들의 상태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덧붙여 벨 다음으로 언급이 많이 되는 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여기 서브 남주인공이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다.

미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경도 안 쓰고 있었구나. 은하 양은 관심을 많이 받으니까, 나처럼 절박한 등장인물의 심정을 몰라.”

그러다 다시 우울하게 잦아들었다.

“……미안. 심한 짓을 했어.”

오, 반성도 할 줄 아네.

“이제 은하 양은 날 용서해 주지 않겠지.”

그렇다.

“후회돼…….”

“!”

이 자식, #후회남 자리를 탐내고 있는 건가?

“미움받을 각오는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괴로워. 심장이 뜯겨 나간 것 같아.”

“!!”

피폐하기까지!?

“처음부터 솔직했더라면 이런 일 없었는데……. 됐어, 이제 도망 안 칠게. 은하 양이 하라는 대로 할게.”

왜지……. 들으면 들을수록 식은땀이 흐른다. 분명 내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고 있는데,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미카가 진화하고 있다. 무슨 방향으로 진화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미카가 거의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마음대로 해.”

“야, 잠깐.”

“응?”

나는 가로등 아래 길거리에서 멈춰 뒤돌았다. 미카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순순하고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생기가 사라졌다. 이미 반쯤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속에서 스멀스멀 불쾌한 위기감이 올라온다. 왜지? 왜 조금 전까지 고된 노예 훈련을 치른 나보다 제 좋을 대로 사고나 친 섭남이 더 피폐물의 본질에 가까워진 느낌이지? 미카는 잘못을 저질렀고 후회를 했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피폐해한다.

……나보다 피폐해하는 남주는 있을 수 없다!

“미카. 너를 용서할게.”

“……응?”

“대신 벌 받아야 해.”

“어, 어, 어.”

“벌이 뭐냐면.”

“어……. 뭐든.”

“내 애완동물이 되어서 예쁨받는 거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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