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32화 (32/40)

32화

그런데, 진동기를 몸 안에 넣은 채로 야외 산책하는 플레이를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위험한 플레이인 건 확실한데 이상하게도 그 수많은 소설 속에서 그 누구도 들키지 않았다. 잘 느끼는 음란한 캐릭터에게 진동기를 넣었음에도 왜인지 성공률이 100%에 육박한다. ‘나’는 그게 가끔 의아했다. 어디선가는 실패하지 않았을까? 실패했는데도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숨긴 건 아닐까?

바로 지금, 여기서, 야외 진동 원격 플레이가 실패했다.

「흐윽, 앗, 윽…….」

절정도 길었다. 미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헐떡이며 입을 틀어막았지만, 야설의 물리 법칙상 신음 소리라는 것은 반드시 손 틈으로 새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미카는 독자들에게 다 들리게 신음했다. 다른 신음과 착각할 여지가 없을 만큼 명확하게 음란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고간에서 새어 나오는 거품 섞인 정액이 너무 결정적이었다. 미카는 무릎 꿇고 다리를 벌린 채로 사정했다.

그다음 힘이 빠져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사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상황을 숨길 수도 없다.

「…….」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소설에 수상한 공백이 생겼다.

지금만큼은 공백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만.

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동기가 저기 있던 거였군.”

그래, 무슨 말을 더 하겠냐.

「흑…….」

미카가 고개를 숙이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점입가경이다. 미카가 우는 것도 독자들이 다 볼 거다. 심지어 처음도 아니다. 나는 언젠가 벨이 대형 사고를 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복병은 미카였던 모양이다. 이번이 두 번째……. 이번에는 요행으로 빠져나갈 길이 없다. 79편 한복판에서 대놓고 미카엘이 항문에 품은 진동기 때문에 쓰러져 사정했다.

이번에야말로 미카가 <악마의 비바체>를 망쳤다.

태을이 불량배처럼 쭈그려 앉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요. 언제 넣었어요?」

약 올리냐?

「너……!」

미카는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개만 들었다.

“너, 일부러 소설을 망치려고 끼어든 거지?”

“오해예요. 설마 미카 씨가 그런 걸 착용하고 뻔뻔하게 ‘본편’을 찍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소설을 망치려 했던 건 미카 씨한테나 전적이 있는 짓인데, 미카 씨야말로 일부러 다들 보는 앞에서 이러는 거 아녜요?”

태을이 조곤조곤 반박했다. 이미 지금 상황 자체만으로도 미카에게는 충격적인데, 악의 섞인 조롱 조의 말을 들으니까 미카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태을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은하 씨가 잘해 보려고 하는데 결국.”

벨이 나에게 물었다.

“은하. 혹시 이것도 그대의 계획 중 일부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속 터지는 소리 하지 마…….”

“아, 알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에서 올라오는 온갖 감정들을 가라앉혔다. 주먹은 한참 전부터 떨리고 있었다. 너네 벌써 포기했어? 왜 ‘본편’ 도중에 정신 놓고 잡담해?

이 새끼들, 설마 지금도 ‘본편’이 진행 중이란 걸 까먹은 건가?

나는 이를 악물고 미카에게 다가가 ‘대사’를 쳤다.

「미카엘 님! 부상을 입으셨군요!」

이미 대사 한두 개로 수습할 수 있는 영역을 넘은 것 같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겠다. 혹시 또 모르지, 기적이 다시 일어나서, 장르 이탈 없이 79편이 무사히 마무리될지도.

소설은 계속된다.

유은하는 미카엘에게 그렇게 사정없이 당했는데도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미카엘은 이제 그녀에게는 완전히 미움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스스럼없이 어깨에 온기가 닿자 깜짝 놀랐다. 어쩌면 이리도 다정한 여자일까?

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은하. 수습하려면 장르를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닥쳐…….

벨제뷔트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큼. 그런 몸으로 은하를 지키겠다니, 우습기 짝이 없군. 천사들은 타락할 때마다 신의 분노를 입어 온몸에 상처가 난다지?」

「!」

이번에도 꽤 작위적인 대사이지만 아무튼 벨이 장단을 맞췄다. 잘했어! 우리들이 거의 매편 순발력과 임기응변을 단련했던 것은 바로 이날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미카에게 속삭였다.

“망치지 마. 말 맞춰. 이번에도 망치면 깃털 다 뽑고 죽여 버릴 거야.”

“이미 망친 것 같은데……?”

“닥치고 따라. 울지도 말고.”

미카의 허리를 툭 쳤다. 그 안에선 아직도 진동기가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미카가 허벅지를 움찔거리더니, 힘겹게 대사를 읊었다.

「은하 양이 날 상처 입힌 거나 마찬가지네.」

뼈가 있는 대사였다. 미카는 허겁지겁 날개로 눈물을 닦았다. 부끄러워서 우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수치심에 눈물 흘리는 건 오로지 나에게만 허락된 행동이다. 그걸 남주가 넘보다니, 괘씸했다.

흑막 이미지로 주가를 올려놓고 꼴사납게 창피해서 울다니, 이제 미카엘이란 캐릭터는 끝났다. 그 어떤 독자도 미카엘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카엘은 창피해서 운 게 아니다. 나 때문에 감동해서 운 거다.

「미카엘 님, 왜 우세요……?」

나는, 아니, ‘유은하’는 얼떨떨하게 미카엘의 눈물을 손가락을 훔쳐 냈다. 그 따스한 온기에 미카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순진한 여자는 그렇게 학대당했는데도 따듯한 마음을 베풀다니,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의 마음속에 갈라져 있던 균열이 따스한 온기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아, 이런 여자이니 저 악마도, 용도, 이 여자를 죽을 정도로 원하고 또 탐하는 거겠지.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 미카엘이 음험한 마음을 먹고 말했다.

“은하 양. 애쓰는구나…….”

“닥치라고.”

뒤에서 태을이 중얼거렸다.

“주인공에게 위기는 필연적이죠. 어쩌면 이건 은하 씨가 원하던 ‘자극적인 전개’를 할 기회일지도 몰라요.”

미카의 바지에서 거품이 새는데 퍽이나 위로가 된다. 나를 돕고 싶으면 한 발 떨어져서 분석할 게 아니라 이 상황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수습을 도와야 한다. 저 새끼는 처음부터 수상했다. 목적이 뭐지? 정말 나를 돕는 건가? 돕는 건데 소통 방식에서 차이가 나서 내가 괜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태을이 여전히 불량배 같은 자세로 벨에게 슬쩍 말했다.

“벨 씨. 장르가 전환되는 거야말로 가장 자극적인 전개가 아닐까요?”

“!”

벨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아니야. 넘어가지 마!

“화, 확실히. 일리가 있다.”

나는 독자들 몰래 벨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장르를 바꿨다간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벨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지를 기세다. 정신이 아찔했다.

까먹고 있었는데, 벨은 원래 내 명령을 안 들었다!

“은하. 79편이나 진행됐으면 슬슬 작품 분위기가 조금 바뀔 때도 됐다.”

“하지 말라고.”

“그대가 납득할 만한 선에서 조금만 바꿔 보겠다.”

“납득 안 할 거고, 이번에야말로 너 죽여 버릴 거야.”

벨제뷔트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는 발걸음에서부터 지배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 발밑으로 수많은 인간들을 짓밟는 느낌이 있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분위기, 오로지 제왕에게만 허락된 카리스마가 그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했다.

벨제뷔트는 소름이 끼칠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다시피 유은하는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여자다. 고작 너 따위가 은하를 감당할 수 있겠나?」

미카엘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몸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날개로 몸을 감쌌다. 특히 고간을 집중적으로 가렸다. 상처 입은 야생 동물이 남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유은하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다친 천사도, 외로운 악마도, 행복해졌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보며 싱글싱글 웃는 전 팀장님이 신경 쓰였다. 유은하는 생각했다.

「‘나는 어느 남자를 선택해야 하는 걸까?’」

유은하도 평범한 여자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단 꿈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비록 지금은 차갑고 냉정하지만 사실은 정이 많고 다정한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꼭 누군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녀에겐 피폐한 운명밖에 없는 걸까?

미카엘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흐, 흐흐……. 은하 양은, 아읏……. 네 곁에선 불행해.」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엄청나게 다친 게 분명했다. 타천사가 된 영향으로, 지금도 괴로운 진동이 대천사의 허리 아래를 집중적으로 지져 대고 있겠지. 유은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뒤로 물러났다. 악마와 천사가 싸운다면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유은하는 무력하고 힘이 없다. 누군가 지켜 줘야만 했다.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벨제뷔트가 단호히 말했다.

「네놈은 은하를 감당할 만한 각오가 부족해. 나는 은하가…….」

그가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나’는 벨과 눈을 마주쳤다. 정상적인 대사를 말해. 아니면 죽여 버리겠어. 너는 내 명령만 따르는 개인 걸 잊지 마. 그런 메시지를 눈으로 전달했다.

「……나를 개 취급해도 상관없다.」

야!!

「헛, 이런 말을 하려던 게…….」

벨의 당황한 표정을 보아하니 말실수였던 것 같다. 저런 말이 실수로 나올 만큼 내가 그를 험하게 다뤘던가?

맹세코 아니다. 나는 정말 필요한 만큼만 때렸다.

벨이 얼른 수습했다.

「은하는 나의 노예지만 정신 차려 보니 내가 노예의 감정 하나하나에 과민 반응하고 있더군. 대체 어느새 주종 관계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만, 이 내가 사랑에 흔들리는 게 썩 나쁜…… 음…… 뭐……. 음……. 대충 알아들었나? 하여튼 간에 나는 은하의 개가 되었다.」

수습 실패했다. 애드립만으로 커버하기에는 너무 지나친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왜 진작 벨을 죽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저 새끼는 처음에 마조히스트의 존재를 납득하지 못했을 때부터 낌새가 보였다. 피폐물에 대한 감이 부족하다. 작가 새끼야! 제발 돌아와 주세요. 와서 벨의 두개골 안에다 신의 펜촉을 넣고 휘저어 주세요. 그렇게 쓸 만한 남자로 만들어 주세요. 벨에게는 잔인함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남주인공은 작가일지도 모른다.

미카엘이 이죽거렸다.

「너는 은하 양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니까 그래. 나는 은하 양에게 사랑받으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어.」

「네놈이 요령이 부족한 것뿐이다.」

「처음부터 불합리한 싸움이었어. 너는 은하 양이 좋아하는 흑발에다가 분위기도 차갑고 가슴도 크고 추운 데서 살잖아.」

「가……. 그게 무슨 상관이지?」

벨제뷔트가 화들짝 놀라서 팔로 조신하게 가슴을 가렸다. 흑발과 차가운 분위기, 사는 지역의 기후 같은 건 전부 무시하고 말이다. 미쳐 버리겠다. 벨제뷔트는 얼굴이 벌게져서 얼떨결에 미카엘을 공격했다.

「더 이상 듣고 있어 줄 수가 없군. 그대가…… 헉, 크흠. 네놈이 괜한 열등감을 가진 게 아닌가? 은하의 관심을 바랐다면 유치하게 굴 게 아니라 그냥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남주의…… 남자의 미덕을 보여라.」

「벨……제뷔트 군은 헌신적인 게 아니야.」

조용히 미카를 쳐다봤다. 너도 제발 정상적인 대사를 해라. 제발.

미카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어깨를 움찔 떨더니, 마저 대사를 읊었다.

「무, 물론, 악마왕이니까, 헌신적일 수가 없겠지. 너는 오만하게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오만하게 다른 여자들을 취하다가 갑자기 은하 양한테 꽂히는 게 말이 돼? 너는 원래부터 걸레였던 거야.」

야! 그게 대사냐?

「무어라!」

이후로는 둘 다 막 나갔다.

「너는 은하 양이 처음이 아니란 설정…… 음, 실수. 너는 은하 양이 처음이 아니잖아. 반면 나는 은하 양이 처음이야. 동정이랑 뒷동정을 둘 다 은하 양으로 뗐어.」

벨이 허겁지겁 변명했다.

「아니, 아니다. 어떻게 남자의 순결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 나도, 뒤쪽 순결은 은하에게 잃었다. 따지자면, 순결이라면, 나도, 그러니까.」

「네가 먼저 유혹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아방하게 채찍질할 때부터 알아봤어.」

「아, 아방, 아방이라니. 대체 내가 언제……!」

「지금 그런 면이!」

남주인공 둘이서 이러고 싸우는 동안 내가 손 놓고 구경만 한 건 아니다. 나는 79편으로 송출되는 묘사들을 단속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캐릭터도 그런 것 같다. 저 새끼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중간에서 작가처럼 손을 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묘사를 단속하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가 당황해서 허둥지둥했던 걸 인정한다. 나야말로 아방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련 속에서 주인공은 빛난다.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이젠 정말 질렸어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은하. 그대처럼 음란한 여자가 수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잘됐어. 나는 어차피 선택되지도 않을 거였는데, 은하 양 덕분에 다 같이 명예롭게 탈락할 수 있어서.」

「너네 다 안 닥쳐?」

「은하 씨.」

태을이 내 어깨를 짚었다.

「저는 채찍질 잘해요.」

「…….」

채찍질…….

태을이 쐐기를 박듯 다시 말했다.

「진짜 잘해요.」

「!」

남주인공 3번이 지금껏 나에게 채찍질을 한 적이 있었나?

없다. 하지만 시키기 전까지는 모른다. 당연한 거 아니야? 주인공의 삶은 도전의 연속. 위험에 뛰어드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유은하’로서 대사를 쳤다.

「……천사도 악마도 이젠 다 싫어요! 저는 이쪽 세계에서 팀장님과 함께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살아갈 거예요. 결혼도 할 거고요.」

미카가 뒷목을 잡았다.

「일부러 그랬지! 은하 양! 저거 여우야!」

벨마저 심각하게 턱을 짚었다.

「아하. 경쟁자들이 알아서 탈락하게 유도하고 자기는 점수를 따는 전략……. 처음부터 수상했다, 네놈은.」

「그래, 벨 군도 잘 아네? 이렇게 잘 알면서 왜 내가 억울해하는 건 이해를 못 해?」

「글쎄다. 다 오해라니까요…….」

「은하. 때려 주기만 하면 다 좋은가? 나랑은 지금까지 몸만 보고 만났나?」

「벨 군이 그런 말 할 정도로 잘 때리진 않았을걸.」

“‘대사’ 똑바로 안 해?”

64편부터 79편까지, 작가 없이 17편이나 썼다. 창조신의 가이드라인 없이 오래 버텼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계가 온 걸까? 우리들은 무너질 운명이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이대로 죽기 싫다.

뭔가, 뭔가 대사를……. 남주인공 셋이 나를 두고 싸운다면 내가 해야 할 행동이 뭐지?

「저는…… 도망칠 거예요. 알아서 싸우든지 말든지, 이제 저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일단 <악마의 비바체>는 군상극이 아니다. 등장인물이 3인 이상 나오면 장면이 급격하게 단조로워지기 시작한다. 소설이 버거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수를 쪼개 놓자.

「저는 집에 갈 거예요. 쫓아오지 마세요!」

나는 작품의 표면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묘사가 어디까지 됐지? 우리들의 추악한 짓을 독자들이 얼마나 봤지? 배심원들 앞에 선 죄인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독자들을 배신하는 것 자체는 엄밀히 말해 나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장르를 이탈하는 건 얘기가 다르다. 나는 피폐물인 <악마의 비바체>를 지키기로 결심했는데!

결심이란 건 깨지기 위한 장치일까? 절대 어겨선 안 되는 규칙이 나왔다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반드시 그걸 어길 수밖에 없을까? 그게 내 운명일까? 피폐했다. 슬펐다. 마음이 메말라 가고, 나는 정신적으로 구르고 또 굴렀다. 말을 듣지 않는 남주들, 작품의 의도와 반대로 가는 나.

애초에 ‘주인님 훈련’을 하는 것 말고 나에게 무슨 선택지가 있었지? 예정된 파멸이었다. 나는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는 78편을 읽어 봤다. 역시나 엉망진창이다. 나에게 퇴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절망에 빠져 있는 나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은하.」

벨제뷔트였다. 충동적으로 말이 나왔다.

「벨. 죽어.」

「…….」

벨제뷔트의 손이 슬며시 떨어졌다. 어느새 왔는지 미카가 내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소설이 망하는구나.」

「벨. 미카를 죽이고 너도 죽어.」

벨이 손을 떨기 시작했다. 태을이 나를 안쓰러워했다.

「이런……. 저도 소설을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요.」

「너는 내가 죽일 거야.」

나는 미카엘의 검을 뺏어다가 태을에게 휘둘렀다. 벨이 달려들었다.

「은하,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천사와 악마의 검이 부딪쳤고, 커다란 폭발이 생겼다.

그렇게 지구는 멸망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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