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33화 (33/40)

33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구를 멸망시키면.”

나는 야구 방망이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천사의 검을 고쳐 쥐었다. 죽여 버릴 것이다. 죽이는 게 낫다. 남주인공들의 목숨을 쓸데없이 더 늘렸다간 소설이나 더 망칠 게 뻔하다.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작가님. 이 개새끼야……. 저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당신을 배신하려 합니다. 제가 원고에 삭제 부호를 갈기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이 캐릭터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태을이 하늘을 쳐다보며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된 것 같은데요?”

“그게 네 유언이냐?”

“1위요. 됐어요.”

“…….”

뭐가 돼?

우리 모두는 잠시 다 같이 하늘을 쳐다봤다.

나는 모니터 너머를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미숙했다. 79편 너머, 그 나머지 여백을 보려면 집중을 해야 했다. 오늘의 랭킹……. 투데이 베스트, 전체 장르 부문.

1위, <악마의 비바체>.

“…….”

다시 보아도 1위다.

“!”

그런데 그때,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동시에 경보 같은 위화감을 느꼈고, 나는 환희와 경악, 그리고 놀라움에 압도되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당연히 구름 뜬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그 너머에, 하늘의 저 끝, <악마의 비바체>의 ‘천장’에, 좌우 반전되어 쓰이는 글자도 보였다.

저곳은 작품의 표면. 작가가 써 내리는 글자가 보이는 곳. 아마도 작가에게는 모니터이고, 우리들에게는 ‘바깥’과 연결되는 창문.

설마, 설마…….

“설마.”

나는 글자를 읽었다.

<악마의 비바체>에 새롭게 쓰인 문장들은 이러했다.

[리메이크 공지]

1위 감사합니다!!!! 메인에 떠 있는거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요!!! 이게 9연참의 힘?ㅋㅋ 힘낸 보람이 있네요!

이렇게 허접한 소설이 1위를ㅠㅠㅠㅠ 다 독자님들 덕분이에요ㅠㅠㅠ

그런데!

최근 편에서 독자님들이 따끔하게 지적하신 것들을 열심히 읽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ㅠ 초보고 이게 첫작이라서 방향을 잃은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똑바로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저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악마의 비바체는 새롭게 재단장해서! 비축분을 쌓고 돌아올게요!

그럼 다들 사랑합니다♡ 금방 올게요!

***

지구가 멸망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최고였다.

나는 검은 공간에서 유영하며 작가의 새 공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 그리운 느낌. 신의 냄새. 보고 싶던 필체. 한 글자 한 글자가 환상적이었다. 드디어 나는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최대한 높이 올라가 공지에 달라붙었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손을 위로 뻗자 모니터의 차가운 유리 벽이 느껴졌다. 아마 작가나 독자 입장에서 이 공지를 본다면, 글자 너머에서 내가 화면을 더듬고 있는 게 보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특히나 그럴 거다.

나는 딱히 모니터 너머의 세상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굳이 보고 싶냐 아니냐를 따진다면 보고 싶긴 하지만, 간절하진 않았다. 나는 이 글자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으로도 족하다.

나의 신이 돌아왔다.

나는 완전해졌다.

검은 공간에 몸을 맡기고 해파리처럼 흐늘흐늘 내려갔다. 지구가 망했으니 여기는 우주인가 싶지만, 사실은 우주도 아니다. 그냥 배경이 사라진 거다.

내려다보니, 대강 바닥이라 정해 둔 곳에 남주인공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 셋이 내려오는 나를 쳐다봤다.

잘생겼다.

“너희 진짜 잘생겼구나.”

새삼 그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직전까지만 해도 죽이고 싶은 증오스러운 존재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나같이 거장의 예술품처럼 고귀해 보였다. 내가 이런 애들을 어떻게 죽일 생각을 했을까. 그냥 외모 묘사만 해도 즐거울 텐데 말이다.

“얘들아, 사랑해.”

한 명 한 명 가까운 순서대로 얼굴을 붙잡고 키스했다.

“읍……!”

기습 키스 당한 벨이 버둥거렸다. 이어서 키스당한 다른 놈들도 대충 비슷한 반응이었다. 키스가 이렇게 황홀한 거였는지도 몰랐다. 그랬구나. 나는 이런 행운을 가까이 두고도, 고작 전개가 마음대로 안 된다고 화를 내면서 스스로의 행복을 저버리고 있었구나. 사실 행복은 가까이에 있었는데 말이다.

“은하. 정신 좀 차려라. 완전히 맛이 가버렸군.”

“내버려 둬. 작가가 돌아왔잖아.”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배경 속이지만 나에게 따사로운 빛무리가 내려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아기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교회의 종이 울리는 듯하다. 새 공지 사항은 나에게 있어 한 편의 시였다. 신이 남긴 글자이니,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도 당연하다.

행복하다.

“뭐어, 그대가 만족한다면 나도 상관없다.”

“다 잘 해결된 건가?”

미카가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지구가 멸망한 거지, 마계가 멸망한 건 아닐 텐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 갑자기 배경이 생겼다. 우리는 다 같이 악마성 응접실로 떨어졌다. 샹들리에 아래로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가구들이 가득하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는 황홀한 밤하늘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축제를 열기에 딱 좋은 곳이다.

배경이 생기자마자, 나는 장식용으로 늘어서 있던 와인병들을 쓸어 담았다.

“얘들아, 한 잔씩 하자.”

“그래. 그대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

남주인공들은 다들 고귀한 신분이지만 사실 소소한 집안일 정도는 스스로 하면서 산다. 다들 내 지시에 맞춰 척척 자리를 준비했다. 우리는 곧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잔을 부딪쳤다.

“흐흐.”

원샷했다.

이렇게 기쁜 날인데 벨은 어두운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봤다.

“뭐 읽어? 공지?”

“아니……. 79편 댓글. 좀 걱정된다.”

대놓고 리버스도 하고 이상한 발언도 하고 지구도 멸망시킨 79편. 나도 벨을 따라 댓글을 읽어봤다.

[관리자인공지능] 작가님 지구가 멸망하면 어떡해요ㅠㅠ 1편때부터 따라오던 팬인데 이번편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초심을 잃으셔서 안타까워요

[오렌지주스] ㅋㅋㅋㅋㅋㅋ작가 미쳤음?

[독자2ㅇㅇ29] 너무 무리하셨어요 ㅠ_ㅠ 혹시 아프신건 아니죠? 작가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휴재해도 기다릴수있어요~~^^

[해피아기돼지] 잘 보고 갑니다.

[칠다수] 저도 조심스럽게 윗댓들에 동의... 쉬셔야 하실것같아요. ㅠㅠ.. 악마의비바체 다른데서는 맨날 유치하고 개연성없다고 욕먹어도 저한테는 항상 이 소설이 최고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푹 쉬다 오세요ㅠㅠ

[1123124] 투베떠서 본건데요 작가님이 진짜 상업이 목표라면 냉정하게 말해서 이걸로는 한참 부족해요. 특히 이번편은 갑자기 캐릭터 붕괴되는 수준이 심각하네요. 조금 심하게 말해서 리버스같음. 오래 보고있던 독자들 말대로 휴재하면서 멘탈 좀 챙기고 다시 읽어보세요

[댓글 197개 더 보기]

“반응 좋은데?”

“은하. 진심인가?”

“됐으니까 마셔, 마셔. 술 따라.”

잔을 내밀자 조용히 있던 태을이 재빠르게 술을 따라 줬다. 샴페인이 꿀처럼 달았다. 작가가 돌아왔는데 등장인물인 우리가 댓글을 볼 필요가 있나? 나는 작가가 돌아오게 만든 일등 공신, 태을에게 공을 돌렸다.

“잘했어.”

뿔을 피해 회색 머리카락만 쓰다듬었다. 그가 헤실헤실 웃었다. 웃을 때마다 눈이 실눈이 되니까 괜히 수상해 보이는 거잖아.

“은하 씨. 1등 하긴 했지만 댓글이 저래서야…….”

웃긴 웃는데 어딘가 걱정스러운 기색이다. 대체 뭘 걱정하는 거지? 그냥 기뻐하면 되는걸.

나의 남주인공들은 행복을 거머쥘 줄 모르는 모지리들이지만 그래도 사랑스럽다.

미카가 술은 안 마시고 팔짱을 끼우고 물었다.

“소설을 망치려 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악마의 비바체>가 어떻게 1등이 된 거야? 우리 소설은 재미가 없잖아.”

“연속으로 많이 올리면 랭킹에 유리하거든요. 운도 좋았겠지만요.”

“아하. 은하 양이 나를 쥐어짜 내면서 9편이나 썼던 게 도움이 됐구나…….”

“은하.”

벨이 두 명으로 보인다.

“이런, 벌써 취했나? 안 된다. 이건 대답하고 취해.”

“뭔데.”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미카에게 고양이 귀를 달아 줬나?”

내 어깨를 단단히 잡은 커다란 손이 뜨거웠다. 미카가 이죽거렸다.

“벨 군. 질투하는 느낌이 어때?”

“질투가 아니다. 그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남주인공인 내가 모르는 건 이상할 뿐이지.”

“나는 서브 남주라서 몰라도 괜찮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래, 차라리 그대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군. 고양이 귀는 뭐였지? 심지어 색깔도 안 맞았다. 은하의 머리 색이었지.”

남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로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하물며 술이라곤 한 방울도 입에 안 댄 미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미카의 얼굴이 벌겠다. 신기했다.

“벨 군이 알아서 뭐 하게?”

“제길, 뭔가 있었던 건 확실하군. 은하! 나는 강아지가 좋다. 도베르만 정도면 제법 잘 어울리지 않나? 나를 그렇게 짖게 해놓고 지금껏 강아지 귀 하나 안 씌워 주고, 주인님의 미덕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다.”

태을도 거들었다.

“저도 걱정되네요. 이렇게 악플을 많이 받은 상태로 리메이크를 해도 괜찮을까요? 저희가 굳이 79편 댓글을 확인하는 바람에, 작가의 멘탈이 안 좋아져 리메이크가 망할 거라는 복선을 깐 걸지도 몰라요. 그런데 리메이크되면 우리는 다 어떻게 되는 걸까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테이블을 쾅 쳤다.

“얘들아! 오늘 같은 날에도 싸워야겠어? 다 닥치고 술이나 마셔. 경사 아니냐?”

나는 한 명씩 어깨를 붙들고 직접 주둥이에 술을 꽂아 줬다. 이런 기쁜 날에 죽상이나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들을 나만큼 취하게 만들려면 얼마나 들이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병째로 들고 설치다가 남주들의 몸에 술을 다 쏟았다. 좀 쏟아도 괜찮은 날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네 안 마실 거면 술을 윗입이 아니라 아랫입으로 마시게 할 거야.”

이게 내가 그나마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대사였다.

이후로는 내가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야설 여주. 술에 취하면 무적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남주인공을 유혹하는 기술에 통달해 있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남주들을 당황시키고 유혹하고 성적으로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은하, 제길,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진상이군. 나를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해서, 흑, 허억…… 아, 흑, 재미있나? 제길, 그대가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아, 안 돼……. 멍, 멍멍…….”

원래 #무심녀가 한번 취하면 갑자기 애교를 부리는 등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행동으로 남주들을 설레게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은, 은, 은하 양. 나 힘들어. 작가가 돌아온 건 나도 기뻐! 기쁜데! 은하 양! 거긴 안 돼, 그건 안 돼. 이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것만큼은 싫어. 잘, 잘못했어요. 싫…… 아…… 아앙…….”

“저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구경만 해도 되죠? ……아니라고요? 저, 저, 저도 해야 돼요?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래……. 분명 술에 취한 나도 사랑스러웠겠지. 어지러운 시야, 흐릿한 기억, 메아리치는 남주들의 비명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렸다. 구체적으로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얘들아. 내가 주인공으로서 지금까지 너희를 똑바로 이끌지 못해서 미안해. 흑…… 흐윽. 맨날 나한테 맞느라 많이 아팠지. 역시 내가 제일 잘못한 거 같아. 나 진짜 많이 반성했거든. 지금부터라도 너희를 아프게 때리지 않고 기분 좋게 때릴게. 약속할게.”

“은하. 안 해도 된다. 그리고 그 약속 아까도 했다.”

“내가 아가리 닥치라고 했지. 나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거야. 다들 나를 도와줄 거라 믿어. 와서 바지 벗고 똑바로 엎드려. ……근데 너희 옷이 다 어디 갔어? 드디어 옷이란 게 쓸데없는 문화란 걸 알아준 거야? 나 감동이야……. 그런데 나는 왜 옷을 입고 있어?”

진짜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기억난다. 악마성이 서서히 철거되고, 남주들이 하나둘씩 온갖 액체로 젖은 채 사라지며, 나의 존재가 새로운 소설로 빨려 들어갈 때. <악마의 비바체>가 새롭게 거듭날 때 나는 작가에게 기도를 올렸다.

작가님, 나의 신이시여.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악마의 비바체>는 진짜 재미가 없었습니다.

부디 새롭게 쓰시는 리메이크 작품은 첫 문장부터 독자들을 확 끄는 재미있는 소설이 되길 바라요.

***

이렇게 나는 기억을 잃고 다른 캐릭터가 되어 새로이 태어난다.

***

<악마의 비브라토> 1편

낯선 천장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중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푹신한 침대에 있는 걸 보면 집에는 잘 도착했나 보다.

……내 침대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나는 알몸이었고, 여기는 모텔 방이었다.

「으음…….」

옆에서 나는 낮은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불 위로 살짝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이불을 잡고 걷었다. 제발 아는 사람이 아니어라. 아니, 모르는 사람이어도 문제이긴 한데, 아무튼 아니어라.

그 사람은 바로…….

「ㅇ 이사님!?」

초고속 승진으로 30대에 이사 자리에 오른 악마처럼 유능하고 잘생긴 남자. ㅇㅇㅇ 이사님이었던 것이다.

내 비명 소리에 ㅇ 이사도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제길…….」

「가,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는 이불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한 이불을 덮고 있던 ㅇ 이사의 알몸이 드러났다. 강박적인 자기 관리가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매, 커다란 가슴, 선명한 복근, 그리고 그 아래로 굵은 허벅지와…… 으아악!

「아침부터 시끄럽군. 유은하 사원.」

ㅇ 이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붉은 눈이…….

……갈색 눈이.

갈색 눈이 나를 죽일 듯이 쏘아봤다.

ㅇ 이사님 눈동자가 원래 갈색이었던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죠?」

나는 ㅇ 이사님의 거대한 그것에서 가까스로 눈을 돌리고는 허겁지겁 물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 밑에 마구잡이로 늘어서 있는 나와 이사님의 옷, 속옷! 그리고 허리의 통증. 이사님 어깨와 목의 붉은 자국들. 결정적으로, 우리한테서 나는 묘한 냄새.

모든 것이 내가 어젯밤에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명확히 암시하고 있었지만, 제발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나를 비웃듯, ㅇ 이사는 날 향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기억이 안 나나?」

재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전, 전혀요.」

「그래? 아쉽군. 어젯밤에 그대가 먼저 달려들었는데 말이지.」

「!」

나를 놀리는 게 분명하다.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화르륵 뜨거워졌다.

「그럴 리가요!」

「나만 선명히 기억하는 거라면 억울한데.」

「꺄악!」

ㅇ 이사님이 내 손목을 잡아 끌고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알몸으로 내 위에 올라탔다.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훅 다가오니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ㅇ 이사님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말, 말 안 해주셔도 돼요…….」

「그대가 과음해서, 나를 거꾸로 매달고 채찍질을…….」

「…….」

잠시 벨제뷔트의…….

……아니, ㅇ 이사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또 멋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과음해서, 날 유혹했지. 그대, 지금 별로 놀라지도 않는 걸 보니, 평소부터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지?」

「네엣!? 그, 그, 그럴 리가요!?」

「말단 사원 주제에 나를 넘보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더 어이없는 건 그 유혹에 넘어간 나지만 말이야…….」

ㅇ 이사님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피식 웃고는 물러났다. 나는 부끄러웠는데, 조금 생각해 보니 화가 났다.

「잠깐만요.」

나는 씻으러 일어나려는 ㅇ 이사님의 꼬리를 붙잡았다.

…….

아니, ㅇ 이사님에게는 꼬리가 없다. 왜 꼬리가 있다고 생각했지?

당연히 꼬리는 없었고, 나는 대신 그의 엉덩이 한쪽을 붙잡았다.

「힉!」

ㅇ 이사님이 엉덩이 근육을 움찔거리며 놀랐다. 손가락을 밀어 내는 듯한 탄력과 부드러운 피부 결에 나도 덩달아 놀라서 불에 덴 듯 잽싸게 손을 뗐다. 미친 거 아니야? 이사님의 엉덩이를 만지다니. 그것도 맨 엉덩이를!

오른손에 엉덩이 감촉이 남았다. 민망해서 애매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제, 제가 어제 이사님께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취한 저를 모텔로 데려온 이사님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흠, 그래. 어제 그대가 얼마나 나에게 무자비하게 박아 댔는지…….」

「…….」

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사님이 대사를 다시 썼다.

「어제 우리 속궁합이 얼마나 좋았는지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ㅇ 이사님이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앉아, 태연하게 물었다.

「실은 내가 지금 곤란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유은하 사원. 나와 계약 연애를 해보지 않겠나?」

계약 연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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