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악마의 비브라토 (수정)> 1편
낯선 천장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중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이사님이 있고…… 중략…… 나는 화도 냈고 부끄러워도 했다. 이사님의 엉덩이를 잡지는 않았다. 이사님은 자신에게 계약 연애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며 계약서를 두고 갔다. 주말 동안 잘 생각해 보라고.
그래서 주말 동안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잘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계약 연애.
그렇게 잘나고 성격 좋은 이사님과 가짜로나마 연애를 해볼 수 있다니.
나는 설레서 정신없이 걷다가, 횡단보도로 차가 달려드는 걸 못 봤다.
차에 치였다.
1편에 교통사고를 당할 거면 도입부부터 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상하게 나는 이사님이랑 저런 일 다 겪고 계약 연애까지 제안받고 나서야 치였다. 타이밍도 어중간하고 뜬금없었다. 어쨌든 트럭에 치였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가벼운 부상인 것 같은데도 나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거기서 만난 의사가 의외의 인물이었다.
「ㅁㅁㅁ?」
눈부신 금발이 아름다운, 보육원 동기 ㅁㅁㅁ이다. 금발과 천사처럼 예쁜 얼굴이 여전해서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ㅁㅁㅁ도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은하 양?」
보육원에서 만난 사이이기에 나를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도 나를 한 번에 알아봤다. 갑자기 ㅁㅁㅁ의 눈에서 보석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은하, 양…….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우리는 잠시 눈물의 재회를 했다. 나는 미카…….
아니, ㅁㅁㅁ에게 내가 제안받은 계약 연애에 대해 설명했다.
「계약 연애?」
그러자 ㅁㅁㅁ이 표정을 굳혔다. 평소에는 후광이 보일 정도로 성스러운 얼굴이지만 표정을 굳히니 순간 타락한 천사처럼 섬뜩했다. 나는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ㅁㅁ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 양. 그거 하지 마.」
「왜? 이사님이 월급도 올려준다고 했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은하 양은 당분간 병실에서 못 나가. 다리를 다쳤잖아.」
「나 다리는 멀쩡……. 아악!」
미카엘이 내 발목을 꺾었다. 나는 드디어 발목이 꺾인다는 통렬한 환희…… 아니, 아니다. 고통에 소리를 질렀지만, 여기는 병실이고 상대는 의사였다. ㅁㅁㅁ이 내 팔뚝에 주사를 놓자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의학을 잘 모르지만 의학이 이런 식으로 판타지 마법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그래도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건 안 나오는 거였다.
내 발목을 꺾어 놓고, ㅁㅁㅁ은 내 위에 올라탔다. 하얀 의사 가운이 이불처럼 우리를 덮었다. 천사 같던 ㅁㅁㅁ이 이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순식간에 피폐해졌다.
피폐함이 익숙하다.
너무…… 지나치게 익숙하다.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ㅁㅁㅁ이 내 위에 올라탄 채로 나를 비웃었다.
「은하 양은 내가 허락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왜…… 이런 짓을.」
약물 때문에 목소리가 잠겨서 나왔다.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미카가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위로 두었다. 손바닥 너머로 콩닥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느껴져? 나는 은하 양을 20년 전부터 짝사랑하고 있었어.」
「그, 그렇게나.」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고백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나는 20년을 들여 짝사랑을 할 만한 여자였다. 그런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ㅁㅁㅁ이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하는 만큼 만져 봐. 아니, 만져야 해. 은하 양은 이렇게 강제로 당하는 걸 좋아하니까.」
「싫어……!」
「은하 양이 충분히 만져야 풀어 줄 거야.」
「윽…….」
나는 너무 싫었지만, 강제로 명령을 들으니 흥분됐다.
아니, 흥분되지 않았다. 어쩌면 흥분됐을 수도. 하여간에 의사가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는 수밖에.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하늘색 셔츠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옷감 너머로 남자의 단단한 몸통이 느껴졌다. 피부의 뜨거운 온기가 끔찍했다. 배에서는 복근의 요철이 느껴졌고 허리는 가느다랬다. 가슴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말랑하고 도톰했다.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더듬자 곧 조그마한 유두가 딱딱하게 튀어나왔다. 거기를 손톱으로 긁었다.
「흑, 아앗…….」
ㅁㅁㅁ이 엉덩이를 내 골반에 비비며 신음했다. 거기에 비벼 봤자 나에게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을 텐데 이상한 놈이었다. 나는 손을 그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넣었다.
「잠, 잠깐. 나 겨드랑이에는 좀…… 트라우마가…….」
「무슨 트라우마?」
「모, 모, 모르겠어. 그만 만져. 오줌 쌀 것 같단 말이야.」
나는 ㅁㅁㅁ의 셔츠를 잡아 뜯고 보드라운 겨드랑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끝에 유독 말랑하고 여린 살이 닿았다. 은밀하게 가려져 있던 그 부분을 찌르고 괴롭히고 손가락으로 잡아 벌렸다. ㅁㅁㅁ이 허리를 비틀며 괴로워했다.
「윽, 은하 양!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위험하다니까아…….」
기시감이 든다. 이런 일을 전에도 겪었던 것 같다. 조금 더 하면 기억이 날 것 같다.
「내 앞에서 오줌 싸.」
「은하 양!」
미카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거, 반대 아니야!?」
「…….」
……그러게?
---다음 편에 계속---
<악마의 비브라토 (수정_최종)> 1편
낯선 천장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소독약 냄새가 알싸했다. 하얀 천장, 하얀 옷, 그리고 내 손에 이어져 있는 링거를 보아하니 여기는 병원인 듯싶다. 입원한 것 같다.
어쩌다 입원하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정신이 드나?」
돌아보니, 검은 양복을 빼입은 악마처럼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나는 힘겹게 물었다.
「누구세요……?」
「!」
그가 손에 힘을 줬다.
「은하. 내가 누군지 모르나?」
지배자 같은 박력이 느껴져 나는 조금 겁을 먹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다. 짙은 흑발, 우수에 찬 눈동자, 눈이 부실 만큼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은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듯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
그가 나를 다그쳤다.
「그대의 이름은 기억이 나나?」
「방금 당신이 은하라고…….」
그제야 알았다. 내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설마.」
그가 안타깝게 내 손을 들고 볼에 가져다 댔다. 손에 닿는 온기가 불처럼 뜨거웠다. 그가 말했다.
「기억을 잃었어도 상관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다.」
「당신은 대체…….」
「내 이름은 ㅇㅇㅇ. 그대의 연인이다.」
「!」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나의 연인이라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하늘에서 남자 친구가 뚝 떨어지다니……. 이렇게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ㅇㅇㅇ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문제가 없으면 얼른 집으로 데려가고 싶군.」
「저희가 동거하는 중인가요?」
「그래. 의사를 부르도록 하지.」
「이미 왔어.」
문가에서 하얀 가운을 걸친 금발 미남이 나타났다. 그가 차트를 들고 척척 걸어와서 당연하다는 듯 침대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가운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ㅁㅁㅁ.
천사처럼 아름다운 온미남이 말했다.
「방금 들었는데, 기억을 잃었다면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오갈 만한 말투가 아니다. 특히, 환자에게 보낼 눈빛이 아니다. 그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정도의 애정과 따스함이 엿보였다. 나와 이 의사가 원래 알던 사이란 건 알겠지만 이건 이상했다. 바로 옆에 연인이 있는데, 당황스러웠다.
「저와 무슨 사이시죠?」
「정말이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ㅁㅁㅁ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은하 양과 연인 사이야.」
「네……?」
깜짝 놀라 ㅇㅇㅇ을 돌아봤다. 그의 차가운 얼굴은 미동도 없이 평온했다. 나는 다시 ㅁㅁㅁ을 돌아봤다. 그의 따듯한 얼굴도 평온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제가…… 바람을 피웠다는 뜻인가요?」
「아니다, 은하.」
검은 냉미남이 짧게 설명했다.
「합의다.」
「네……?」
「ㅇㅇㅇ군은 늘 설명이 부족해. 은하 양은 이제 막 깨어났잖아.」
금색 온미남 쪽이 ㅇㅇㅇ에게 부드럽게 핀잔 줬다.
「은하 양. 둘 중 누구랑 사귀겠냐고 우리가 은하 양을 두고 싸웠는데, 은하 양이 둘 다랑 사귀겠다고 해서, 사귀게 되었어.」
「…….」
이것도 딱히 친절한 설명은 아닌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하늘에서 남자친구가 두 명이나 떨어지다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소설 같았다.
「믿기지 않아요. 어떻게 3명이서 사귈 수 있어요?」
「그러게……. 나도 은하 양이 날 이렇게 만들기 전까진 믿기지 않았어.」
ㅇㅇㅇ이 나와 은근하게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천천히 기억해 보면 되겠지. 그대가 남자 둘을 어떻게 부리고 살았는지 말이야.」
「뭐, 뭣, 뭐라구욧……!」
이후로 가벼운 검사를 했는데 별 이상은 없어서, 몇 시간 후 나는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병원 로비에서 좀 이상한 일이 있었다. 환자 한 명이 나를 보고 「은하 씨!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저희 잠깐 얘기 좀…….」 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가, 주변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 때 ㅇㅇㅇ과 ㅁㅁㅁ이 기사처럼 나를 지켜 줬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집은 내 예상보다 훨씬 넓었고, 과연 살림살이는 3명분이었다. 나는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서 물었다.
「그런데 3명이서 살면 혹시……. 그, 잠은 어디서…….」
ㅇㅇㅇ이 팔짱을 끼우고 벽에 기대며 즉답했다.
「아니, 쓰리썸은 안 한다.」
「제, 제가 그걸 물은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안 한다. 이상하군.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은데…….」
ㅇㅇㅇ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한편 ㅁㅁㅁ은 오자마자 부지런히 걸레로 바닥을 쓸며……. 앗, 벌써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 미카가 저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ㅁㅁㅁ이 설명했다.
「그런 건 아니고. 은하 양이 그냥 날마다 한 명을 간택하는 형식이었어.」
여전히 딱히 친절한 설명이 아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굴에 피가 몰렸다.
「제가 정말 그랬다고요? 저를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나는 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실수로 넘어져서 책장에 있던 상자를 엎었다. 그 안에서 채찍이 하나 튀어나왔다. 마치 나에게는 언제든 채찍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아니면 세상이 나에게 채찍을 쥐여 주고 싶어 항상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순진하게 놀랐다.
「이게 뭐죠? 서, 설마…… 여러분이 맨날 맞고 살았나요?」
「그랬지.」
「그랬어.」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
그리고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ㅇㅇㅇ이 재빨리 정정했다.
「아니, 아니다. 채찍은 내가 휘둘렀지. 그대는 마조히스트였어. 채찍 맞는 걸 좋아했다.」
「앗, 그러고 보니 그건 맞아요.」
그 부분 만큼은 선명히 기억났다. 나는 확고부동한 마조히스트다.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나는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 성욕자임이 틀림없었다. 이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가슴이 벅차오른 나는, 채찍을 잡고 그들에게 휘둘렀다.
「그럼 좋은 말 할 때 나를 똑바로 때리란 말야, 이 무능한 버러지 놈들아.」
채찍이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벨과 미카의 등과 엉덩이를 마구 때렸다. 그들의 무릎이 반사적으로 땅에 닿았다. 울면서 옷을 벗고 채찍을 맞는 남자들의 모습이 고난을 겪는 성인들처럼 성스러운 동시에 또 말도 못 하게 음란했다. 화가 치솟았다. 나는 이 분노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밤새도록 그들을 괴롭혔다.
---다음 편에 계속---
<악마의 비브라토 (수정_최종_진짜)> 1편
낯선 천장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많이 마셨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 일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랬다. 나는 ㅇㅇㅇ과 섹스했다. 지금도 내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ㅇㅇㅇ의 근육질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윽…….」
그가 숙취에 전 채 끙끙대며 일어났다. 방금 깼는데도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특히 강박적인 자기 관리가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매, 커다란 가슴, 선명한 복근, 그리고 그 아래로 굵은 허벅지와 거대한 성기가 말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잠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는지 기겁을 하며 이불로 몸을 가렸다.
「유 이사님.」
우리는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ㅇㅇㅇ이 몸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잡아당기면 자연히 나의 알몸이 드러나게 된다. ㅇㅇㅇ이 어정쩡하게 나에게 다시 이불을 돌려주려 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몸을 가리는 게 싫다. 나는 그를 밀어 내며 피식 웃었다.
「ㅇㅇㅇ. 말단 사원 주제에 어제는 잘도 나를 유혹했겠다.」
「제, 제, 제가 말입니까?」
그가 찡그리며 머리를 짚었다.
「기억이 안 나? 어제 네가 먼저 달려든 거?」
「윽…….」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이다.
「나만 선명히 기억하는 거라면 억울한데.」
「아, 아닙니다. 그런……. 사, 사실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만, 아마……. 아마 제가 잘못한 게 맞을 겁니다.」
「아마?」
「제가 잘못했습니다.」
벨이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박고 사과했다. 사과에 각이 잡혀 있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ㅇㅇㅇ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수줍게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제가, 유 이사님에게, 평소부터 마음이 있어서…….」
「허어.」
그건 좀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이 순진하고 악마 같은 남자는 나 또한 불필요하게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걸 알까 모르겠다. 이 아방한 남자 말단 사원을 보고 있으면, 재벌가의 권력다툼에서 억울하게 밀려난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역시, 그에게 제안해 볼까.
「ㅇㅇㅇ.」
「네.」
이름을 부르자 그가 칼같이 대답했다. 나는 그를 놀리듯이 능글맞게 웃었다.
「나는 어제 우리가 꽤 속궁합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
ㅇㅇㅇ이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사실 내가 좀 곤란한 상황이거든. 가짜로 연인 행세할 사람을 찾고 있어.」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ㅇㅇㅇ 사원. 여기 사인해. 너는 나랑 계약 연애를 해야 해.」
그때 내 핸드폰이 울리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은하씨 저랑얘기좀해요 벌써네번째예요 저희큰일난것같아요]
스팸이군…….
「바쁘니까 빨리 해.」
「앗, 네, 네. 멍멍. 개가 되겠습니다.」
ㅇㅇㅇ이 허겁지겁 종이에 사인했다. 고민도 안 하고, 웃기는 놈이다.
---다음 편에 계속---
<악마의 비브라토 (수정_최종_진짜_진짜마지막최종)> 1편
낯선 천장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중세풍 방이었다. 저 너머의 문이 열리더니 엑스트라 한 명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트리며 놀랐다.
「3년 동안 잠들어 있던 백작가의 병약한 막내 아가씨가 깨어나셨어요!」
엑스트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복도를 내달렸다. 설명 고맙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엄청난 여자가 서 있었다. 앗! 이 아름다운 외모. 가슴까지 오는 베이지색 생머리. 미쳐 버린 몸매. 보는 사람의 정신을 놓게 하는 아찔한 매력. 이 완벽한 여자는 누구지!
바로 나다.
그냥 평소의 나인데?
각설하고, 뭐 이런저런 뻔한 일들과 함께, 나는 <천사의 비바체>라는 피폐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심지어 원작 여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원작 여주는 답답하고 불행하게 살았다.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상, 원작 남주들에게 사이다를 먹이며 멋진 삶을 살아 주겠다.
……아니, 그럴 예정 없다니까?
「…….」
가끔씩 느껴지는 이 위화감은 뭘까?
「아가씨! 마법사님을 데려왔어요.」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백작가 막내 아가씨를 위해 엑스트라들이 주연을 데려왔다. 문이 열리고, 엑스트라들 사이로 키가 큰, 뿔이 눈에 띄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마법사가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엑스트라들을 물렸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싱긋 웃었다.
「은하 씨. 겨우 만났네요.」
마법사는 내 손을 잡고는, 만면에 가득하던 수상한 미소를 거짓말처럼 싹 지웠다. 잡고 있는 손이 시체처럼 차가웠다. 태을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초조하게 말했다.
“어떡하죠? 저희, 2편으로 절대 못 넘어갈 거예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