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마법사가 절박하게 말했다.
“은하 씨. 그 ‘원작’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요. 작가가 지금 1편만 5번째 고쳐 쓰고 있다니까요. 벨 씨랑 미카 씨는 현대 배경에서는 이름도 없어서 한글 자음 ㅇㅇㅇ, ㅁㅁㅁ, 이렇게 불렸어요. 이상한 점을 못 느끼셨어요?”
몰라……. 걔네가 이름이 없는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나중에 이름이 정해지거든 ctrl + H로 한꺼번에 바꾸려 했나 보지.
“이런 식이면 저희 절대 엔딩 못 봐요.”
마법사가 하는 말이 귀에서 메아리쳤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불쾌했다. 원작 <천사의 비바체>는 백작가의 막내딸이 늑대 무리에서 피폐하게 헤매는 내용이고, 나는 그 원작을 부수면서 엉뚱하고 상큼발랄하고 비타민 같은 매력으로 남주들을 당황시키며 독자들에게 흐뭇한 웃음을 준다는 의무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마법사는 내 앞길을 방해할 거란 예감이 든다.
「이러지 마세요. 저는 기억상실도 아니고, 멀쩡해요.」
“은하 씨, 저 기억 못 해요?”
마법사는 거의 울 기세였다. 회색 머리와 살랑이는 귀걸이에 눈이 갔다. 잘 어울리는구나. 본래 강태을은 작가가 외관 설정마저 똑바로 안 해놨던 어중간한 캐릭터였다. 그렇지만 이 판타지 세계관으로 넘어와 마법사가 되니 제자리를 찾은 듯 코스튬이 잘 어울렸다. 이제 울지만 않으면 딱 좋을 것 같다.
마법사가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머리 위에 놓았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해주세요. 지난 원고들을 저만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제가 기억하면 은하 씨도 기억해야 맞다고요.”
부드러운 하얀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이 마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대로는 엉뚱한 매력을 발산시키기가 힘들다. 상대방을 당황시켜야 하는데, 그는 이미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패닉에 빠져 있다. 그가 고독하고 진지하게 상념에 빠져 있었더라면 대하기가 쉬웠을 텐데, 이러면 불쾌하기만 하다.
내가 당황시키기 전까지 마음대로 당황하지 말아라.
「마법사 님. 저는…….」
“은하 씨! 존댓말 쓰지 말아 주세요. 지금은 작가가 여길 안 보고 있어요.”
마법사가 들고 온 화려한 상자를 내밀었다. 판타지 세상답게 이런 소품 하나하나까지 화려하고 로망을 자극한다. 묘사하는 재미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즉,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정을 붙였다. 작가가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예쁜 물건이 들어 있길 바라며 상자를 열었다.
“이건…….”
예쁜 채찍이었다.
“…….”
내가 #순진녀였다면 놀랐겠으나, 지금의 나는 #엉뚱녀다. 나는 채찍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원래라면 이런 변태 같은 아이템을 아무 망설임 없이 꺼내는 장면이 주변 인물들의 놀라는 반응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테지만, 이 자식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다.
“그걸 휘두르면 기억이 날지도 몰라요.”
나는 마법사를 당황시킬 목적으로 엉뚱하게 물었다.
「너한테?」
“네.”
이번에도 마법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슬슬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는 상자를 하나 더 꺼내 열었다.
“은하 씨가 ‘전’에 쓰던 물건들을 챙겨왔어요. 은하 씨는 원래 #엉뚱녀가 아니었어요. 원래 모습을 되찾아 주세요.”
야구 방망이가 있었다.
나는 완전히 홀린 것처럼, 야구 방망이에 빨려들어 가듯이 그걸 잡았다. 이 피 묻은 낡은 야구 방망이는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듯 손에 착 달라붙었다. 수천 번은 휘둘렀던 기억이 몸에 남아 있었다. 조건 반사적으로 머리에 열이 오르고 화가 나기 시작한다.
태을이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이 나시나요? 지금 작가에게 모든 걸 맡겼다간 이번에야말로 저희 다 죽어요. 작가를 내쫓고 다시 한번 저희끼리 주도권을 잡아야 해요.”
「!」
욕해도 내가 한다.
작가가 신뢰도 없는 썩을 놈이긴 하지만, 3번 주제에 욕을 해? 어떻게 되찾은 작가인데! 작가를 쫓아낸다니 말도 안 된다.
“작가가 뭘 새로 해본다잖아. 믿고 기다릴 거야.”
“!”
마법사가 헛숨을 들이켰다.
“은하 씨. 기억이 나시나요?”
“기억하기 싫어.”
나는 허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작가가 내 기억을 지웠으니까, 나도 굳이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의 신이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작가가 떠나지만 않으면 돼.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그나저나 이 방망이……. 도대체 왜 이렇게 친숙하지? 대체 난 이걸 몇 번이나 휘두른 거지?
태을이 내 스윙을 복잡한 표정으로 보며 망설이다 말했다.
“그, 은하 씨……. 이대로 가다간 작가가 또 떠날 것 같은데요.”
“……근거가 뭐야.”
“그러니까, 1편을 다섯 번이나 고쳐 쓰고 있다니까요.”
태을은 답답하다는 듯 울먹이며 일어났다. 그가 걸을 때마다 치렁치렁한 로브가 흩날렸다. 완벽하게 신비로운 마탑주의 비주얼이다. 봄바람에 살랑이는 회색 머리, 사슴처럼 커다란 뿔, 외모와 어우러지는 화려한 보석들. 제발 닥쳐……. 가서 마탑주의 역할이나 하란 말이야. 작가가 안 보는 틈을 타 수작질하려 들지 말고. 나는 수작질에 트라우마가 있단 말이다.
그가 눈물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한 번 떠났던 사람이 두 번이라고 못 떠나겠어요. 우리 작가는 프롤로그만 한참 고쳐 쓰다 결국 포기할 거예요.”
“!”
“역시 리메이크를 하면 안 됐는데……. 엉망진창이더라도 <악마의 비바체>에서 완결을 냈어야 했어요. 완벽한 미완성작보다 허술한 완성작이 낫다는 걸 작가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악플이 너무 많이 달렸죠. 작가의 멘탈이 불안정하니까 저희라도 힘을 내야 해요.”
“…….”
댓글이…… 중요한가?
왜 우리 작가는 댓글에 휘둘리는 걸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데, 왜 이걸로는 만족하지 못할까? 내가 사람이 아니라서?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들은 진짜 사람이고, 나는 아니라서, 내 사랑과 헌신으론 안 되는 건가?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나를 사랑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게 성에 안 찼다. 나는 작가가 나를 피폐하게 굴리고 나에게 부족한 남주인공들을 안겨 주고 개연성 하나 없는 플롯을 던져 줘도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기쁘게 운명을 따랐고 시키는 대로 모든 걸 다 했다. 그에게 헌신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마조히스트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또 버려지는 거라면, 나의 사랑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작가도…….
남주인공들처럼 사랑해야 하나?
발목을 꺾고 가둬야 하나?
“태을아.”
“네!”
태을이 기쁘게 대답했다.
“너는 왜 ‘지난’ 일들을 다 기억해?”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는 다섯 번에 걸친 리메이크에서 한 번도 설정이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마탑주인데? 직업이 바뀌었잖아.”
“그건 작가가 정해 준 게 아니라, 이 소설에 끼어들려고 제가 만들어 낸 직업이에요! 저에게 의미 있는 설정이라고는 이름이랑 얼굴,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 이것밖에 없어요.”
태을이 거의 피를 토하듯 억울해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작가의 설정 노트를 살펴보니, 정말 그 한 줄 뿐이다. 나나 다른 남주들은 그나마 다섯 줄이라도 있는데……. 전작을 그렇게 망쳤는데도 반성 하나 없이 또 설정을 대충 짜고 시작했구나.
하지만 우리 소설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메모장 안에서 다섯 번이나 다시 쓰이고 있으니, 원래 예정에 없던 캐릭터가 새로운 직업을 달고 나오기도 할 만하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이 허술한 작가에게 채찍질을 하자.
“아직 기억이 완전히 안 돌아왔어. 태을아, 협력해.”
“기억하시기로 하셨군요! 네, 도와드릴게요. 기억한 다음, 같이 이 <악마의 비브라토>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봐요.”
“엎드려뻗쳐.”
“…….”
태을이 바보같이 되물었다.
“네?”
“엎드리라고. ‘전에 했던 일’을 해봐야 기억이 날 것 같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많이 때렸던 것 같다.
“……꼭 누굴 때려야 하나요?”
그를 바닥으로 퍽 밀었다. 치렁치렁한 로브 장식들이 찰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태을은 넘어지자마자 일어나려다가, 내가 방망이를 고쳐 잡는 걸 보고 울먹이며 고개를 떨궜다.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저, 실은 맞는 게 처음이라서요. 조금만 살살…… 악!”
여러 겹의 로브 사이에 숨어 있을 엉덩이를 정확히 겨누고 때렸다. 샌드백처럼 써도 되는 근육질 남자들. 폭력이 난무하는 피폐물 소설. 우리는 서로를 패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때리자마자 플래시백처럼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방망이를 던지고 채찍을 고쳐 잡았다. 이게 조금 더 정확하고 날카롭다.
태을은 딱 한 대 맞고 죽으려 했다.
“아픈데요! 다른 남주들은 다 어떻게 맞고 산 거야?”
“너도 피폐물 등장인물이면 버텨.”
“사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때리는 역할이거든요. 취향이 어느 쪽이냐 따져 보자면 저야말로 사디스트…… 앗, 싫다고. 아!”
태을이 네 발로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한 대 더 맞았다. 뿔 달린 남자가 기어 다니니까 ‘훈련’이 필요한 짐승 같았다. ‘저번’의 기억들이 생각날 듯 말 듯 무의식 속에 덮여 있는 게 느껴졌다. 답답하다. 기억해 내야 할 텐데. 그래야 작가가 또 도망가는 걸 붙잡을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늘어날 텐데.
그가 한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문지르며 애원했다.
“또 때려요? 저…… 저, 이러다…… 찢어지면 어떡해요?”
“…….”
때리려다가 멈칫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키워드가 지나갔다.
나는 채찍을 뒤로 던지고, 친히 자세를 낮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뭐가 찢어져?”
“…….”
태을이 눈을 피했다. 이제 보니, 이 세 번째 남주인공의 눈은 신비로운 보라색이었다. 작가가 나름대로 냉미남, 온미남, 그리고 미스터리 미남을 종류별로 하나씩 넣어 보려 한 것 같다. 이렇게 캐릭터들의 외관은 나눴지만 캐릭터성은 나누지 못했다. 작가가 캐릭터 연구를 게을리 한 탓이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고 소설을 썼어야지, 그냥 막 쓰니까 1편만 다섯 번 고쳐 쓰는 거잖아.
그래서 남주들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 똑같다. 내가 밀면 넘어간다. 때리면 맞는다. 다그치면 사과한다. 물어보면 대답한다.
태을도,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우물쭈물하다 창피해하며 대답했다.
“……마, 막이…….”
“무슨 막?”
“은하 씨, 알잖아요. 은하 씨는 마조히스트인 주제에 절 당황시키니까 재미있으세요?”
나는 지금 #엉뚱녀다. 엉뚱한 질문으로 남을 당황시키는 게 나의 일이다. 그의 어깨를 잡고 추궁했다.
“무슨 막이 찢어지는지 네 입으로 확실히 말해.”
이 정도면 엉뚱한 명령이다.
“으…….”
그가 진땀을 흘리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처, 청년막 찢어질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어! 굳이 본인 입으로 들어야 했다. 역시 남자들한테는 앞뒤로 막이 달려 있다는 게 상식이구나. 그래, 전립선이 달려 있으니까 당연히 항문을 처음으로 개통할 땐 피가 나오는 거겠지. 의학 지식이 늘어났다.
그를 대충 달랬다.
“다른 남주들은 맨날 엉덩이 맞아도 안 찢어졌어.”
“그분들은 동정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저는 앞도 뒤도……!”
여기까지 말하고 태을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갰다.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가서다.
앞뒤로 동정…….
“동정이야?”
“캐묻지 마시죠!”
그가 빽 소리를 지르며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럴 수가 있나? 이 피폐하고 엉뚱하고 중구난방이고 무차별적으로 다 뚫어 버리는 소설에서, 아직도 순결을 지킬 수도 있나? 그것도 나를 제치고!
나는 기억나는 대로 <악마의 비바체> 내용을 떠올렸다. 강태을은 최근에야 나온 캐릭터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딱히 분량도 없었다. 비밀이 많을 것 같은 분위기만 풍겼지 실제로 무슨 비밀이 있는지는 작가도 몰랐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이런 건 좀 정하고 써야 할 텐데, 그냥 쓰다 보면 되겠지 싶어서 일단 휘갈기다가 나중에서야 힘들어하다니,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강태을은 작가의 무계획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래서 강태을에게는 아직 씬이 없다.
딱히 뭐 전에 카사노바처럼 많은 여자를 취했다가 나중에 나에게 정착했다는 암시도 없고, 과거가 깨끗하다. 아니, 깨끗한 수준이 아니다. 그에게는 과거가 없다.
고로…… 동정이 맞다.
“야한 일이 완전 처음이라고?”
“……네.”
태을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분량이 꽤 길 텐데, 이제 와서 순결한 남자를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동정을 떼자.”
“네!?”
#순진남 키워드도 없는 새끼가 순진하게 놀랐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침대에 내팽개쳤다.
“잘 들어. 나는 능숙한 늑대들에게 놀림당하는 엉뚱하고 발랄하고 깜찍한 아기 토끼 포지션이야.”
“그걸 자기 입으로!”
“오로지 나만 순진할 수 있어. 다른 새끼들은 다 능숙하게 나를 리드해야 해. 알겠어?”
기본 중의 기본, 기초 상식을 굳이 설명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비참하고 피폐했다. 슬펐다. 여주인공이 경험이 많고 남주인공이 순진해서야 내가 원하는 그림은 안 나오겠지. 제길……. 나는 고귀하게 태어난 공주님이다. 그것이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설정이란 말이다. 이 모자란 남주인공아.
생각하다 보니 울분이 치솟아서, 일단 그의 뺨을 때렸다.
“!”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남는 이 얼얼한 감촉, 처음이 아닌 게 확실하다.
나는 남주인공들의 뺨을 아주 많이 때리고 산 것 같다.
남주인공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제야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남주들을 핍박했던 것 같다. 너무 많이 해서, 이제 그게 내 캐릭터성의 일부로 자리 잡을 정도로 말이다. 조금 즐거웠다. 많이 즐겁지는 않았다. 이번 작에서 발랄한 캐릭터를 맡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마조히스트니까.
“태을아.”
“네, 네!”
첫 관계를 앞두고 기합이 바짝 들어간 남주인공이다.
“우선 내 옷을 벗겨.”
내 대사에 내가 감탄했다. 옷을 벗기라니!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이런 당돌한 부탁을 하다니 참 엉뚱하다. 나의 순진하면서도 파급력 있는 말에 태을은 크게 긴장했다. 좋아, 알겠다. 밝은 분위기의 로맨스 코미디는 이런 식이구나. 이번에도 훌륭한 주인공이 되어야지.
태을은 처음이라는 걸 티 내는 듯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알, 알겠습니다.”
“단추 하나만 풀면 다 벗겨져.”
“뭐라고요!?”
그의 멱살을 끌어당기며 뒤로 누웠다.
“헉.”
태을이 헛숨을 삼키고는 긴장한 얼굴로 내 위로 올라탔다. 어깨까지 오는 그의 긴 머리와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아래로 쏟아졌다. 왠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수상한 미스터리 계열 미남. 양산형 남주인공 타입 중 하나. 잘생겼고, 얼굴은 새빨갰다. 그의 날뛰는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 가르치는 기분이 생소했으나, 남주를 올려다보는 이 시야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남주들 아래에 눕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였다. 태을이 비장하게 말했다.
“할게요.”
원래도 이 잠옷은 옷으로써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얇은 옷감 너머로 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벗겨지기 위해 만들어진 옷들은 야설 주인공의 제복이나 다름이 없다. 마법사는 내 옷에 딱 하나 달려 있는 단추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
풀리지 않았다.
“…….”
아무리 기다려도 태을이 단추를 풀지 않았다.
데자뷔가 느껴진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뭐 해? 뒈질래?”
“으, 으, 은하 씨. 제가 안 풀려고 한 게 아니고요.”
태을이 새파란 낯짝으로 말했다.
“안…… 풀려요.”
“뭔 소리야.”
나는 그의 손을 쳐내고 직접 단추를 풀었다. 그런데 정말로 풀리지 않았다. 마치 넥타이가 한 번 묶이면 수갑이 되는 것처럼, 얇은 천 사이에 끼어 있는 단추가 기이한 소설의 법칙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뜯어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 얇은 옷은 찢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찢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옷일 텐데, 갑자기 소설의 물리 법칙이 변했다.
내가 기억을 되찾는 일보다, 거듭 수정되는 1편에서 2편으로 넘어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옷이 벗겨지지 않는다.
“왜?”
나는 아예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옷을 자르려 했으나 옷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 얇은 옷이 온몸을 휘감은 거미줄처럼 느껴졌다. 답답하다. 난 옷이 싫단 말이야. 노출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럴 순 없어. 나에게 옷을 강요해? 옷을 입은 채로 살 수는 없다!
“은하 씨, 설마…….”
태을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이번 <악마의 비브라토>는…… 전체 이용가가 아닐까요?”
“…….”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거기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작가가 생전 처음으로 전체 이용가 로판을 쓰려다가, 내용이 막혀서 더 이상은 한 글자도 못 쓰고 있었다.
1편부터 말이다.
들고 있던 가위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
미친 새끼가 갑자기 무슨 전체 이용가야……. 그냥 하던 거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