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나는 야설 여주다.
“야설 아니면 아무것도 못 쓰는 주제에 무슨 전체 이용가를 하겠다고, 네가……!”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는 나를 태을이 말렸다.
“진정하세요. 도입부부터 막힌 걸 보니까 아마 이번에도 다시 쓸 것 같아요.”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냐?”
나는 떨어트린 가위를 주워 하늘을 향해 던지려 했다. 물론 이런다고 작가가 보고 있는 모니터가 깨질 리는 없지만 그냥 던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태을이 내 허리를 껴안아 말렸다.
“은하 씨, 진정하세요. 이런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닥쳐, 3번.”
“기억이 거의 돌아오셨나요? 이제 상담할 게…….”
“너는 벗겨져?”
마법사의 로브 소매를 가위로 잘랐다.
싹둑 잘 잘렸다.
하지만 그의 로브는 여러 겹으로 치렁치렁 늘어져 있으니, 내 옷과는 다르게 조금 자른다고 노출이 생기진 않는다. 그래서 잘린 걸지도 모른다.
태을을 침대로 밀고 올라타 본격적으로 그의 옷을 잘랐다.
“으, 아아, 은, 은하 씨.”
그는 저항하는 듯 아닌 듯 어중간하게 누워서는 자기 얼굴을 가렸다. 겁탈이 가능하지도 않을 텐데 당하는 척하는 게 짜증 났다. 이런 데서 처음인 티를 내려는 건가? 오로지 나만 순진할 수 있다. 오로지……!
“어, 어디까지 자르시게요.”
그런데 옷이 계속 잘 잘렸다.
“…….”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었을 값비싸고 아름다운 마법사의 로브가 걸레짝이 되어 갔다. 그의 하얀 어깨가 드러났는데도 옷은 계속 잘렸다. 나는 혹시 작가가 이제라도 소설 장르를 바꾼 건가 싶어 내 옷을 잘라 보았다. 내 옷은 잘리지 않았다. 태을의 옷만 잘 잘렸다.
“왜 잘려?”
“은, 은하 씨.”
“가만히 좀 있어.”
로브 자락을 찢어서, 쓸데없이 저항하는 남주인공의 손목에 감았다. 전체 이용가 소설 속에서마저도 무엇이든 손목에 감으면 그 순간 마법처럼 매듭이 묶여 혼자서는 절대 풀 수 없는 수갑이 됐다. 이 법칙은 그대로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내 옷은 왜 안 찢어져.
마법사의 로브는 단추가 어디에 달려 있는 건지 입고 벗기가 복잡해 보였다. 그냥 내 마음대로 아무 데나 자르고 찢었다. 넝마가 된 옷을 활짝 열자 강태을의 마른 상반신이 나타났다.
“은하 씨!”
태을이 벌써부터 울 기세였다.
“시끄러워. 왜 네 옷은 벗겨지고 내 옷은 안 벗겨져?”
“은하 씨. 저희 이럴 때가 아니에요. 작가가 역량이 모자란 건 확실하니까…… 으아악!”
“닥쳐. 욕해도 내가 해.”
비록 작가는 전체 이용가를 쓰겠다고 나를 백작가에 집어넣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신이다. 주인공인 나만이 작가를 욕할 수 있다. 분량도 적은 주연이 작가를 욕하니까 속에서 뭐가 자꾸 울컥 밀려 올라왔다.
“작가가 1편을 다섯 번이나 고쳐 쓸 수도 있지.”
천 쪼가리를 태을의 입에 쑤셔 넣은 후, 다른 천으로는 그의 입을 빙 둘러 묶었다. 천이 많다. 가위질 한 번 할 때마다 뭉텅이씩 나온다.
“하지만 전체 이용가를 쓸 수는 없어. 그건 내가 잘 알아.”
“읍…… 으읍.”
“작가가 쓰다가 자꾸 막혀서 포기하려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막히지 않게, 우리라도 씬을 만들어 주자. 우리가 계속 뒤 내용을 이으면 작가도 떠나지는 못하겠지.”
그나저나 전체 이용가라면서 남주인공의 옷이 계속 찢어졌다. 심지어 팔을 들어 올리자 분홍빛 유두도 선명하게 잘 보였다. 전체 이용가 작품에 유두가 나와도 되는 건가? 전체 이용가 작품을 쓰려고 하자 1편부터 막힌 작가다. 무엇을 검열하고 무엇을 내보내야 하는지 기준을 모를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아니……. 왜 내 몸만 검열하고 남주인공 몸은 검열 안 하지?
“남자 몸은 음란하지 않다는 뜻인가!?”
납작한 남자 가슴 살을 모아다가 힘주어 주물렀다. 유두를 손끝으로 누르고 살살 돌리자 곧바로 딱딱해졌다. 이런데도 검열이 안 되다니. 혹시 몰라서 다시 확인해 봤는데 여전히 내 옷은 안 벗겨졌다.
가슴을 건드리자마자 저항이 심해졌다. 손목과 입만 묶어 놓았는데도 얼굴이 새파랬다.
“뭐가 싫은데? 이 정도는 본디지 축에도 안 들거든?”
“으읍……!”
묶인 손목을 그의 머리 위로 올려다가, 뿔이랑 같이 묶었다.
“!”
태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무시했다. 작가가 이 소설에서 뭘 허용하고 뭘 허용하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당황해서 열이 오른 몸뚱이 곳곳을 더듬었다.
“만질 수도 있나? 만지는 장면이 묘사가 되나?”
모르겠다. 겨드랑이와 가슴을 마구 짓누르고 간지럽혔다. 만지면 만질수록 저항도 심했다. 태을은 고개를 마구 돌리며 거절하는 의사 표시를 내비쳤는데, 고개에 맞춰 팔도 같이 돌아갔다.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와 귀에 달린 길고 화려한 귀걸이도 같이 흔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완벽했던 마법사의 얼굴이 엉망이 됐다.
그가 아무리 몸을 비틀며 저항해 봤자, 작가의 특기가 야설인 이상 나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거다. 나는 지금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정말 전체 이용가로 하고 싶으면 이런 것도 막아야 한다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노선을 돌려 성인용으로 가자고.
내 옷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작가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데 그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나는 태을을 괴롭혔다. 바지를 잡아 내리려 했으나 이것 또한 단추가 복잡하게 달려 있어서, 가위로 대충 잘랐다.
“읍…….”
은사로 수놓은 비단 천이 서걱서걱 잘렸다. 아마 이 로브에는 마법적인 방어 기능도 있을 테지만 소용없었다. 야설 여주의 가위 앞에서는 무엇이든 속수무책이다. 부드럽게 잘렸다.
흰 허벅지가 드러났다. 아니, 왜 잘려. 내 옷은 아직도 안 잘리는데 말이다.
“어이없어. 왜 나만 검열했지? 나만 벗고 다녔던 건 아니잖아.”
“읍읍.”
태을이 뭐라 말했다. 천 쪼가리에 틀어막혀 뭐라는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대충 알 것 같다.
“나만 벗고 다녔어?”
태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힘과 권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남자들이 나처럼 연약하고 가녀린 여자에게 집착하는 내용인데, 나만 벗겨졌겠지.”
역시 작가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남주들이 맨날 날 못 벗겨서 안달 내고 그랬지?”
“…….”
태을의 표정이 묘해졌다.
“역시 너는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마저 벗겼다. 태을도 마저 난리를 쳤다. 나나 쟤나 야설 등장인물이라 그런지 체력은 넘쳐나서, 아무래도 이 무의미한 공방전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로브가 걸레짝이 되고, 마법사의 팬티만이 남았다.
“음, 팬티는 현대 배경이네…….”
태을의 마르고 길쭉한 몸에 검은색 속옷만이 남았다. 이 작가도 팬티 취향이 한결같았다. 내가 작중에서 옷을 족히 200번은 갈아입는 동안, 남주인공들은 단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남자가 패션을 챙기는 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주들은 화려한 팬티를 못 입었다.
그래, 이게 맞다. 화려한 속옷은 나만이 입을 수 있다. 감히 남주들이 나보다 눈에 띄는 속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작가가 뭘 좀 안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팬티에 가위를 댔다. 민감한 곳에 날붙이가 닿아서인지 태을이 저항을 멈추고 긴장한 눈으로 내 손을 주목했다.
천 안에 가위 날을 넣고…….
“어?”
안 잘렸다.
“너 왜 팬티는 안 잘려?”
아무리 잘라도 안 잘렸다. 검열인가?
“남주들은 고추만 검열하는데, 나는 전신이 검열된 거야?”
어이가 없어서 사납게 가위질을 했다. 태을이 겁을 먹고 힘껏 비명을 질렀다. 입 안 가득한 천에 막혔는데도 성량이 꽤 컸다.
“조용히 하라고. 진짜 안 잘려?”
안 잘렸다. 이 팬티는 무적이다. 딱 여기까지가 전체 이용가가 허락한 선인 듯하다.
나는 태을의 하얀 허벅지를 주물렀다. 마른 편이라고는 하지만 여주인 내 몸보다는 확실히 굵고 단단한 몸이었다. 근육이 선명하고, 안쪽을 부드럽게 문지르면 허리를 바르르 떤다. 마법사의 보라색 눈이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팬티 위에 손을 댔다.
“읍!”
손안에 잡히는 말랑한 살이 순식간에 힘을 받아 커지기 시작했다. 전체 이용가인데 발기도 잘 됐다. 어이가 없다. 작가는 내 옷만 꽁꽁 감싸 두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었던 것 같다. 손바닥 아래에서 쑥쑥 커진 성기가 팬티를 밀어 냈는데, 위로 튀어나오진 않았다. 그냥 팬티가 고무처럼 늘어나 거대한 성기를 감쌌다.
답답해 보인다. 역시 잘하면 팬티도 자를 수 있지 않을까? 가위를 댔다.
“으읍, 은…….”
얘는 내가 팬티에 가위만 가져다 대면 자꾸 공포에 질린다.
“설마 내가 고추를 자르겠냐?”
“…….”
태을이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
자를까?
“으읍! 읍!”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가 또다시 팔딱대기 시작했다. #엉뚱녀의 깜찍한 기행에 당황하는 남주인공의 모습이 바람직하다. 그러면서 발기도 죽지 않았는데, 내가 올라타 있으면 그 어떤 무서운 상황이 생겨도 계속 흥분할 수 있는 것 또한 남주인공들의 특징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가지고 전체 이용가 작품은 만들 수 없다.
나는 태을의 다리 사이에 주저앉은 채 팔짱을 끼웠다.
“정조대랑 다를 게 뭐야. 이러면 씬을 못 만드는데…….”
하늘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커서가 괴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작가처럼 나도 전개가 막혔다. 이 세 번째 남주인공의 동정 자지를 내가 삼켜야 기억도 돌아오고 작가도 영감을 받고 2편도 생길 것 아니야.
오랜만에 섹스 좀 해보려는데 아쉬웠다. 야설 여주가 침대에 누웠으면 보지라도 빨려야 한다. 제길…….
“읍읍.”
태을이 딱 ‘은하 씨.’ 하는 톤으로 소리를 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 것 같다.
“풀어 달라고?”
태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뿔과 연결된 손목이 같이 움직이는 게 조금 웃겼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무래도 평생 동정일 팔자인가 보다.”
“!”
그가 상처받은 눈을 했다. 정조대를 차 놓고 뭐 어쩌라고.
“읍.”
그는 끙끙대며 내 밑에서 빠져나왔다. 굴러서라도 침대 밖으로 탈출하려 한다. 백작가 막내딸이 3년 동안 누워 있던 침대는 크기도 무척 컸다. 현대 배경의 킹사이즈 침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그는 뿔 때문에 구르기가 여의치 않자 아예 애벌레처럼 침대 위를 기었다.
그런데 태을이 엉덩이를 높이 들자, 나는 거의 조건 반사처럼 그의 엉덩이를 덥석 잡았다.
“으읍!”
손에 착 감겼다. 무척 말랑거렸다.
“!”
뭔가 이 엉덩이에 단서가 있을 거란 강한 직감이 든다.
“가만히 있어 봐.”
“으읍.”
태을이 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앙탈을 부리지? 나는 팬티 위로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경쾌한 파열음이 익숙했다. 아무래도 나는 남주인공의 엉덩이도 많이 때리며 살았던 것 같다.
혹시 몰라서 팬티에 손을 걸고 내려봤다.
“…….”
팬티가 내려갔다. 뽀얗고 통통한 엉덩이가 드러났다.
태을도 엉덩이가 휑해진 걸 느끼고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몸을 마구 비틀었다. 맨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엉덩이가 탱글탱글 흔들렸다. 왜 벗겨지지? 내 옷은 안 벗겨지는데, 남주 옷은 이만큼이나 벗겨진다고?
그리고 남주인공 엉덩이는 대체 왜 탄력 있지? 재수가 없다.
방향성이 확고한 작가다. 왜 이렇게 됐는지 짐작 가는 건 있다.
“이 팬티는 고추 정조대라서 엉덩이는 안 막아 뒀구나.”
팬티는 아무리 힘줘서 내려도 일정 길이 이상으로 안 내려갔다. 고추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팬티의 의지가 느껴졌다. 천이 정확히 딱 남근에만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반쯤 장난삼아 정조대라고 부른 건데, 이 정도면 진짜 정조대가 맞아 보인다.
“작가는 내 몸이랑 남주들 고추만 검열하면 전체 이용가가 될 거라 생각했나 봐.”
태을이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보라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입이 천으로 틀어막힌 채 저런 눈빛을 하니까 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옳은 행동만 하는데도.
엉덩이를 주물거리며 말했다.
“할 수 없지. 뚫자.”
“으읍……!”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을이 발버둥 쳤다. 자꾸 읍읍거리는 대사를 읽는 것도 지겹다. 가위로 그의 손목과 입을 풀어 줬다.
태을은 입을 막은 천이 풀리자마자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은하 씨. 저…… 저, 아직 동정도 못 잃었는데, 그쪽부터라니요.”
“너도 순결이 중요해?”
“당연한……!”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한동안 입이 틀어막혔던 탓에 콜록이며 기침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게 야했다. 감히 나를 두고 먼저 힘겨워하다니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태을이 넝마가 된 옷을 끌어당겨 조금이나마 몸을 가리고 내 앞에 무릎 꿇어 정좌했다.
“저는 당연히 은하 씨에게 뭐든 다 바치려고 했어요.”
내가 작가에게 모든 걸 바치려고 한 것과 같은 각오다.
“하지만 이런 식은 싫어요.”
그가 가녀리게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미스터리한 세 번째 남주인공이 청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이 자식이 내 역할을 마음대로 뺏었다. 나만이 청순할 수 있다. 그건 내 역할이다.
“야구 방망이를 넣는 수가 있어.”
“은하 씨!”
앙탈 부리는 남주를 침대에 쓰러트렸다.
“그럼 우리가 야설 여주랑 남주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 밖으로 나가자고?”
“그런 말은 아니지만, 저,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뭐야, 야설 등장인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섹스도 할 수 있는 준비성을 갖춰야 한다. 얘가 초짜라 모르나 보다.
그리고 일단 씬에 들어가면 대충 다 느끼게 되어 있다. 나는 작가를 믿는다. 전체 이용가를 쓰겠다는 기가 막힌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의 근본은 야설 작가일 거다. 이 새로운 <악마의 비브라토 (수정_최종_진짜_진짜마지막최종)>에도 음란한 가능성이 느껴진다.
“준비 안 해도 돼. 칼로 쑤시면 다 들어가.”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태을이 침대 옆에 쓰러져 있던 다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가 왜 이렇게 많아?”
태을은 훌쩍이면서도 착실하게 설명 캐릭터의 역할을 다했다.
“원래 있던 <악마의 비바체>에서는 뭐든 원하는 물건은 허공에서 나왔잖아요. 이번 새로운 소설은 개연성을 좀 챙겨 보려는 것 같아요. 물건이 허공이 아니라 적어도 상자에서 나오게요.”
마법사가 마법 상자를 열며 설명했다. 듣고 보니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렇구나. 작가는 허공에서 물건이 나오는 것보단 상자에서 나오는 게 조금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무엇이든 나오는 만능 상자라는 점에서는 전작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상자 안에서는 페니반이 나왔는데, 나는 이딴 물건이 나올 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거 왜 챙겨 왔어?”
심지어 형광 파란색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이럴 수가. 악마에게는 검은색 악마 같은 페니반을 쓰고, 천사에게는 하얀색 페니반을 쓰더니, 마법사에게는 파란색을 쓴다. 컨셉을 지키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이런 얄팍한 술수로 남주인공들의 개성을 구분하려 해봤자 별로 구분도 안 될 텐데. 우리 소설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캐릭터성이 부족하단 말이다.
나는 정말 한 번쯤은 작가를 실제로 만나서 그를 감금한 후 나의 불평불만을 모두 쏟아 내고 싶다. 내 건의 사항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나도 작가의 페르소나, 내가 아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아는데도 이렇게 쓴단 말이야?
“왜 빛나?”
은은하게 빛나는 가짜 좆을 살펴보았다. 소다 맛이 날 것 같은 하늘색이었다. 별자리까지 새겨져 있어서 괜히 열이 받았다.
“왜 이게 화려한데?”
“평범한 물건은 못 만들겠어요. 아마 제가 마법사라는 설정이라 그런 것 같아요.”
만든 본인도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뭘 만들어도 무조건 빛나더라구요. 게다가 자꾸 별자리가 새겨지고…….”
“마법사니까 일단 빛나는 것들을 다 몰아줬구나.”
“네.”
이런 시각적인 설정으로 캐릭터성이 강화될 것 같진 않지만 이쯤 되면 노력이 가상했다.
마법사가 쓸쓸하게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챙겨 봤는데 정말 쓰게 되었네요.”
참고로 포션도 있었다. 이것도 파란색으로 빛났다. 마시면 마나가 채워질 것 같지만, 오늘은 음란한 일에 쓰일 예정이다. 사실, 우리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액체는 다 음란한 목적으로 쓸 수 있다.
“작가가 지금이라도 장르를 바꾸면 내가 너 안 뚫어도 돼.”
나는 내 옷에 딱 하나 달린 단추를 풀어 봤다.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태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정좌하고, 정갈하게 꿇은 무릎 위에 비장하게 두 손을 올렸다.
자, 첫 경험에 임하는 야설 남주인공의 소감을 들어 보자.
“은하 씨. 성관계는 결혼 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