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악마의 비브라토 (3인칭?? 진짜 최종)> 2편
이곳은 어쩌구 판타지 제국.
뿔 달린 회색 머리 마법사가 사는 마탑을 넘어, 북쪽 경계까지 한참 올라간다.
눈보라와 마수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설산에는 회색의 성이 버티고 있다. 이곳의 주인은 왕가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난 벨제뷔트 대공인데, 외롭고 고독하고 강한 그는 오늘 결혼을 했다.
신부 없이.
최근 3년간의 잠에서 막 깨어났다던 그 운 없는 영애는 노예처럼 신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벨제뷔트 대공은 눈밭을 내려다보며 그 얼굴도 모르는 신부에 대해 생각했다.
「‘괴물이라 불리는 나와 결혼하다니, 운이 없군.’」
그는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실은 아예 합방도 안 하고 남처럼 지내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는 어릴 때 무슨무슨 저주를 받아서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혹여 그 신부가 사실 성녀라면 또 모를까, 벨제뷔트 대공은 평생 외롭게 살 운명이었다.
대공은 아예 신부의 얼굴도 안 볼까 싶었다. 그러나 결혼 전에 받았던 신부의 편지, 그 정갈한 글씨체와 종이에 남아 있던 향이 그를 잡아끌었다.
벨제뷔트 대공은 마수를 토벌하는 등 험난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실로 복귀했다.
침대에는 신부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를 꼰 채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담배를 피우면서 말이다.
「…….」
벨제뷔트 대공은 드물게도 할 말을 잃었다.
신부가 너무 아름다웠다.
대공 자신도 몰랐던 그의 이상형을 빚어 놓은 듯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는 저주받고 쫓겨나긴 했어도 엄연히 왕족이며 대공이다. 그런데 저 태도는 무엇이지?
「‘당연히 나 따위와 결혼하기 싫었겠지만, 황당할 정도로 무례하군. 오히려 저 정도로 무례한 여자이니 나와 결혼한 건가?’」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평생 무릎 꿇어 본 적 없는 철혈의 북부 대공이다. 그 어떤 마수와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금 저 가녀린 여자에게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척추를 관통하는 두려움이 생소했다. 벨제뷔트를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는 갈색 눈동자에는 무언가 시선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숱한 전장을 헤쳐나온 전사. 벨제뷔트 대공은 당황하지 않은 척 목소리를 낮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대가 나의 신부인가? 생각보다 건방진 여자가 왔군.」
“눈동자가 또 갈색이네?”
대공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 문제라도 있나?」
“…….”
‘신부’는 말없이 담배만 태우면서 벨제뷔트 대공을 쳐다봤다. 눈동자가 갈색일 뿐인데 무언가 잘못한 것 같고 평가당하는 기분이었다. 대공의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사교계에서 취급을 못 받는다지만, 엄연히 대공이다. 그대는 나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하도록.」
“이리 와.”
그녀가 대충 손짓했다. 놀라우리만치 무례했다.
그런데도, 벨제뷔트 대공의 다리는 조종당하는 것처럼 삐걱삐걱 움직였다. 무언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외압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정체가 뭐지? 마족인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검을 빼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그대는…… 대체…….」
“와서 꿇어.”
그녀가 발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벨제뷔트 대공의 무릎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박혔다.
대공이 무릎을 꿇었다! 확실하다. 신부는 인간이 아니다. 평범한 귀족 영애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어떤 마족이 진짜 신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게 틀림없다.
그걸 머리로는 알았으나, 몸은 이미 그녀의 술수에 걸려들었다. 벨제뷔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지?」
“목적?”
불시에 뺨을 맞았다.
유은하가 담배를 침대에 비벼 끄며 일어났다.
“너 패려고. 너도 맞다 보면 기억이 떠오르겠지.”
벨제뷔트 대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뺨을 맞아 봤다. 그는 얼얼한 볼을 붙잡고서도 반항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조종당하는 게 분명했다. 초면인 여자에게 뺨을 맞았는데도 왜 싫다는 생각이 안 들지? 이미 최면에 걸린 것인가?
“벗어. 신랑의 의무를 다해.”
「말도, 말도 안 되는…….」
손이 착실히 움직인다.
대공의 얇은 침의가 힘없이 툭 벗겨지고, 철벽 같은 나체만이 남았다. 상체만 탈의하는 건 괜찮다. 아니면 상체는 탈의하고 바지만 살짝 내려 고추만 꺼내는 것까지만 괜찮다. 하지만 나체는 얘기가 다르다. 엉덩이를 보이다니! 둔부에 스치는 바깥 공기가 너무도 낯설고 떨린다.
왜 이런 부끄러운 짓을 스스로 하는 거지? 시선이 의식된다. 벨제뷔트는 눈을 꼬옥 감고 진땀을 흘렸다. 왠지 그녀의 눈앞에 덜렁 내놓은 성기보다는, 그녀 입장에선 보이지도 않을 엉덩이 사이 구멍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그도 남자이니 항문을 반드시 순결하게 사수해야 한다는 건 상식선에서 알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도 전립선의 쾌락을 아는 남자와는 자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거길 노리는 것 같다.
유은하는 이 침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꼬리는 없어도 몸은 기억을 하나 보네.”
「꼬리? 나는 인간이니 그런 게 없다. 나를 마족이라 오해하는 것인가?」
“어. 사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악마야.”
「헛소리다.」
유은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빨간색 물건을 꺼내 보여 주었다.
“네가 만들어서 선물한 양방향 페니반이야. 기억나?”
엄청 이상하고 흉측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대공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쩐지 기억이 날 것도 같고……. 용도는 모르겠으나 디자인만큼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만든 기억도 선물한 기억도 없지만.
「모른다.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올라와. 진짜 싫은데…….”
은하가 한숨을 쉬었다.
“……해줄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대공의 등허리에 전기가 튀는 것만 같은 쾌감이 내달렸다. 대공은 자신이 이미 어떤 흑마법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말을 안 듣고, 정신이 말을 안 듣고, 모든 것이 비상식적이다.
하지만 신부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 또한 강하게 든다. 이건 대체 무슨 암시이지? 그의 어깨에는 북부 영지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하는데.
그러나 벨제뷔트 대공은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몸으로, 개처럼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 침실의 주인은 벨제뷔트이지만 그녀가 주인인 것만 같았다. 온몸이 떨렸다. 왠지 엄청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뭘 해준다는 거지?’라 물으려 했는데, 뜬금없이 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따지자면 나는 아직 총각이다. 이번에야말로 그대에게 동정을 바칠 수 있어서 기쁘군.」
은하가 피식 웃었다. 대공은 정신이 멍해졌다. 예쁘다…….
“동정 안 가져갈 건데? 이거 안 보여?”
빨간색 페니반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벨제뷔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
은하가 혀를 찼다.
“기억이 없어서 아방방하게 구는 건 내 특권이야. 네가 할 게 아니라. 왜 이렇게 다들 내 키워드를 뺏어 가지?”
「그…… 잘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누워.”
벨제뷔트는 냉큼 두 손을 꼬옥 모으고 누웠다. 당연하다는 듯 은하가 그 위로 올라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긴장감이 그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으나, 또 동시에 정말 오랜만인 듯도 하고, 그로서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은하의 긴 손가락이 그의 턱과 뺨을 쓸고 입술을 더듬었다.
문득, 벨제뷔트는 그녀의 손가락을 앙 물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저 마수와의 오랜 싸움으로 날카로워진 야생적 충동이라 생각했으나 확신할 순 없었다. 어쩌면 그냥 오랫동안 이런 행위를 학습했다는 기분도 든다. 그는 ‘배운 대로’ 혀끝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쓸며 조심스레 빨았다. 은하가 피식 웃었다.
“옳지. 잘하네.”
칭찬을 들으니 몸이 달아오른다. 벨제뷔트는 은하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고,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혀로 문질렀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그녀를 제대로 만족시키고 있나? 눈앞에 있는 여자의 요구에 응하고,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는 것만이 지상 과제였다.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은하는 벨제뷔트의 혀를 장난치듯 몇 번 문지르다가, 타액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을 빼냈다. 은하가 웃었다.
“다리 벌려. 다 기억나게 해줄 테니까.”
「벌리…… 내가? 」
남자 쪽이 다리를 벌린다니?
「보기에 흉하지 않겠나?」
“안 흉하니까 빨리 벌려.”
은하가 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벨제뷔트는 머뭇거리면서도 무릎을 열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벨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아 다리를 벌린 채 고정시켰다. 이러면 그의 부끄러운 부분이 훤히 보인다. 신랑이 이러는 건 이상한데…….
은하의 손가락이 그의 몸 안으로 단번에 파고들었다.
「아!」
벨이 짧게 신음했다. 몸 안에 무언가 들어오니 정말로 부끄럽다. 벨은 얼굴이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수치심을 참았다. 부끄러움을 견디는 훈련이라면 이미 충분히 했는데도 아직 부족하다.
손가락이 안쪽을 헤집는 게 느껴지자, 벨은 반사적으로 은하의 목 뒤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 안 더러운 곳을 만지고 있으니 황송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여 벨은 미안하다는 말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은하. 미안하다.”
사과하니까 왠지 더 흥분됐다. 한 번 사죄하기 시작하니 말이 술술 나왔다.
“내 몸의 아……래가 다시 좁아졌다. 그대에게 괜한 수고를 들이게 하는 것 같군.”
“기억이 돌아왔어?”
“어렴풋이는……. 나와 그대가 무슨 관계였는지는 기억난다. 나는 그대의 화풀이용 채찍 맞는 노예이자 샌드백이자 정액 뽑아내는 가축이었지.”
“그런 적 없거든?”
은하가 울컥해서 페니스 벨트를 그냥 손으로 잡고 벨의 몸 안에 쑤셔 넣었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구멍이 우악스럽게 벌어지고,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강인한 북부대공의 몸이 음란한 도구로 꿰뚫렸다. 벨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피 냄새를 맡고 뿌듯한 충족감을 느꼈다.
“윽……. 은하.”
벨은 아주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은하에게 보고했다.
“나도, 이젠 아픈 게 좋다.”
“!”
“그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군.”
그러나 딱히 은하에게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 은하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새빨간 처음의 증거를 손끝으로 훔치고,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참았다. 남주인공이 ‘진짜’ 마조히스트가 되면 곤란하다. 이러면 이제 둘 다 침대에서 만족할 수 없다. 같은 마조히스트인 은하는 벨의 표정을 보고 그가 계속 고통을 원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마조히스트가 더 아프게 해달라고 하면……. 해주기 싫다.
“개새끼야, 안 아프게 할 거야.”
은하는 성녀였다. 성녀의 힘을 발휘하여 벨의 고통을 지워 버렸다. 한창 고통 안에서 아찔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벨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은하, 그냥 계속 아프게 해다오. 나도 드디어 그대와 동류가 되었는데……!”
“내가 왜 너 좋을 대로 해줘야 해?”
“그대는 그렇게도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좋은가!”
“어! 이 덜떨어진 새끼, 너 오늘 녹여서 죽여 버릴 거야. 기분 좋게 해주지.”
“싫, 아, 아아……! 아! 은, 은하, 제발, 제발 아프게……! 흐윽, 싫어……!”
이렇게…….
북부대공과의 첫날밤은 대충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아침.
짹짹짹.
심의를 지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간 듯하지만, 어쨌든 <악마의 비브라토 (3인칭?? 진짜 최종)> 은 명색이 전체 이용가이다. 여차하면 아침 짹을 할 수 있게끔 늘 참새들이 대기하고 있다. 대공은 그의 신부에게 몸을 기댄 채 아침 참새들에게 공격당하며 신방에서 나왔다. 볼이 발그레한 게 이미 수컷으로서의 기쁨을 알아 타락해 버린 꼴이었다. 도로 새빨개진 홍채와 자라난 꼬리는 덤이고.
그리고 공작저 북부 성의 밋밋한 회색 벽에 기댄 채 세상을 저주하고 있는 용이 한 마리…….
은하는 문을 나서자마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을을 만났다.
“은하 씨.”
하룻밤 사이에 수명을 잃은 듯 수척해 보였다
한숨도 안 자고 있었다는 걸 티 내는 듯한 다크서클이나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을 놓아 버린 듯한 눈깔이 문제였다. 온통 시커멓게 입은 벨보다 태을이 더 검어 보여, 벨은 아침부터 비명을 지를 뻔했다.
벨은 자기도 모르게 은하 뒤에 슬쩍 숨으며 말했다.
“그대도 이쪽 소설에 있었군. 뭐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여기서 밤을 새웠나?”
“닥쳐, 걸레 놈아.”
“뭣……?”
태을은 대뜸 벨에게 욕부터 하고, 은하의 발목을 귀신처럼 붙잡았다.
“오래 걸리셨네요. 좋으셨어요? 제가 바깥에서 혼자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 하셨는지 아세요……?”
은하는 알 바 없었다.
“몰라.”
“그럼요. 모르시겠죠. 제가 아직 말을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말을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걸요. 은하 씨, 방치당한다는 건 말이에요. 말을 못 해요……. 은하 씨와 닿고 싶어도 시도도 못 하는 거예요.”
말의 어조에 높낮이가 사라지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은하의 가느다란 발목에 그의 손이 끈적하게 얽혔다. 은하는 잘생긴 남자의 집착에서 섬뜩한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은하는 기특해했다.
태을은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그가 은근슬쩍 긴 치마를 걷고 다리를 더듬는 꼴을 보고 벨이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그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태을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소설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건 저인데 매정하시네요. 은하 씨가 절 잊은 줄 알았다고요. 혼자 있으려니까 몸도 못 움직이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고, 그때랑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금이랑 다른 게 없는 것 같고, 네? 은하 씨. 저의 고통을 알아주세요. 은하 씨가 절 봐주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이 은하 씨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하가 친히 몸을 숙이더니 덥석 태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나를?”
“은, 은하 씨를…….”
그를 평가하는 듯한 시선에 태을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어라, 분명 원망하는 말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은하가 뒷말을 재촉하듯 그의 턱을 간지럽혔다.
“계속 말해. 나를?”
“그…….”
태을은 하룻밤이나 자신을 방치한 은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 스킨십으로 마음이 스르르 풀리려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안하무인 여주인공에게 자신이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타고 방치를 싫어하는지 알려 줘야 한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은하 씨를 감금할 거예요!”
“떨어져라!”
벨이 태을을 걷어찼다.
“으응?”
은하의 다리에 묵직하게 달려 있던 용이 퍽 떨어져 나갔다. 가차 없고 잔인하면서도 정확한 발길질이었다. 그 순간 은하는 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평소에 보던 나사 빠진 평화주의자가 아닌 악마왕 벨제뷔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란 것은 은하뿐만이 아니었다. 태을은 걷어차인 옆구리를 문지르며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파요.”
아까 걸레라고 불러 놓고 양심이 없었다.
태을이 음침하게 웃었다.
“질투해요? 추하게…….”
은하도 흥미를 보였다.
“그래? 너 질투해?”
질투했다.
다른 남자가 감금하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써버렸다. 그렇게 화를 내려 했는데, 벨 또한 은하의 시선을 받자마자 마음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은하가 근처에 없으면 마음껏 시커먼 욕망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으나, 은하가 쳐다보기만 하면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유은하의 존재 자체가 주변 남자들의 사디스틱한 욕망을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은하 본인은 이 사실을 알까……. 벨은 갑자기 심각해졌다.
은하는 자신의 시선이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른 채 마냥 감격했다.
“벨이 자발적으로 남을 때리다니, 드디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 미안하군. 그래도 은하를 감금하는 건 피했으면 해. 가시밭길이다. 그대는 은하를 감당할 수 없어.”
태을이 투덜거렸다.
“서열질 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
“서열! 좋다.”
폭력적인 소설의 여주인공은 서열 나누는 걸 좋아했다. 서열 0위 은하가 그 자리에서 냉큼 순위를 정했다.
“1, 2, 3번 순서대로 해.”
“싫어요!”
“아, 그리고 태을아.”
은하가 산뜻하게 말했다.
“네가 막내라 아직 뭘 모르는구나. 방치란 건 말이야……. 몸 안에 뭘 넣은 상태로 방치가 되어야 방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네?”
“너도 ‘훈련’이 필요하겠다. 들어와.”
“네??”
이렇게 태을은 방치 플레이가 무엇인지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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