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또 아침.
짹짹짹.
제국의 수도, 사치의 결정체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황성. 이곳의 주인 무슨무슨 황제는 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다. 그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자는 황제의 젊은 아들, 황태자 미카엘이다. 그는 사실 사생아 출신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 끝에 형제자매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 겉으로는 웃고 다녀도 사실 그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살인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뿐이다. 한편으로 이 잔혹한 황태자에게는 어머니에 관한 안타깝고 가슴 저미는 과거사도 있었다. 한 30편 즈음에 남주 시점으로 풀릴 만한 내용으로…….
그런 황태자 미카엘에게 북부의 벨제뷔트 대공이 알현을 신청했다.
미카엘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알현 신청을 수락했으나, 속으로는 냉정하게 계산을 돌렸다.
「‘벨제뷔트 대공이 무슨 일로? 영지에서 평생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결혼식 때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결혼 상대마저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그저 그런 병약한 영애…….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게다가 동쪽의 마탑주 태을까지 같이 오겠다는 거다.
「‘무슨 일이지? 혹시 내 정체를 들킨 건가? 그건 아니겠지……. 그러면 마수 문제? 아니면, 혹시 결혼 상대에 관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있었다.
황태자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굉장한 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돌처럼 굳었다. 그 여자는 응접실 상석에 앉아서는 이제 막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참이었다. 대공이 그녀에게 정중히 담뱃불을 진상했다. 그녀의 반대편 어깨에는 마탑주가 이마를 기대고 애완견처럼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누구지?
이상한 점은 대공과 마탑주가 부하나 애완동물처럼 구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사람의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앞에서 왜인지 미카엘은 알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미카엘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못 하고 서두를 이렇게 뗐다.
「……뭐지?」
우선은 그들의 무례를 지적해야 할 테지만, 미카엘은 이 미녀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불쑥 그녀의 정체부터 추리했다.
「대공비입니까?」
충직한 기사처럼 있던 대공이 버럭 화냈다.
“이분은 나의 주인님이시다.”
미녀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황태자는 놀라서 대공을 바라보았는데, 굳건한 눈동자가 붉은 색이었다.
눈동자 색이 변했다.
이것은 흑마법의 흔적이다. 미카엘은 순식간에 모든 정황을 눈치채고 상비하던 호신용 단도를 꺼냈다.
「마족의 술수에 걸렸구나! 대공, 마탑주, 정신 차리십시오!. 두 분은 흑마법에 당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더러운 마족, 뭘 바라고 왕성에 침입했지?」
갑작스레 나온 날붙이에도 그 여자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좀 피곤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소름 끼치리만치 아름다운 얼굴에는 권태 외엔 별다른 감정이 안 보였다.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어쩔까…….”
「…….」
그 한숨 섞인 한 마디로 미카엘은 소름이 쭈뼛 솟고 숨이 막혔다. 형제들을 살해하고 아버지에게 몰래 독을 먹일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진 않았다. 저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틀어쥐고 있다. 이미 시선이 마주칠 때부터 그는 끝났던 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느낌이었다.
「‘보통 마족이 아니야. 분명 고위 악마가 틀림없어. 혼자서는 절대 싸울 수 없다.’」
그는 문득 이 방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시종들이나 기사들이 모두 사라졌단 걸 눈치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실 수준급 검사인 그의 감각을 한계까지 곤두세워 보아도, 이 응접실에 모인 4명 이외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드넓은 황궁이 어느새 텅텅 비어 버린 것이다.
「‘어느새? 이미 다 죽은 건가? 이럴 수가, 제국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단도를 쥔 황태자의 손에 진땀이 배어 나오고, 이제 미카엘은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문득 미카엘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그녀가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숨 쉬어.”
「!」
그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조차 그제야 눈치챘다.
그녀 옆의 두 사람은 이미 그녀의 부하가 되고 만 건가? 미카엘은 아군을 찾는 심정으로 대공을 찾았다.
「대공, 당신 이미 흑마법에 침식당한 건가요?」
벨제뷔트 대공은 태연하게 홍차를 들면서, 등 뒤의 꼬리를 빼꼼 빼내 과시하듯 흔들었다. 붉은 눈, 까만 꼬리, 변명의 여지도 없는 마족이다. 나라의 북부 전선을 홀로 책임지고 있는 대공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미카엘은 머릿속으로 제국 지도를 그리고, 그중 대공이 책임지던 영토를 지웠다. 이미 그곳은 끝났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마탑주도……?」
“말 걸지 마세요. 저 3위라 기분 안 좋아요.”
태을은 그녀를 더 세게 안으며 새침데기처럼 대꾸했다. 마탑주마저 타락했다. 지혜의 상징이던 동부의 마탑주가 마치 정신 연령이 7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징징거렸다.
“히잉……. 은하 씨는 너무해.”
미카엘은 머릿속 지도에서 동쪽 영토도 지웠다. 제국의 병력 대부분이 이 두 사람에게 의지하는 실정인데, 이미 끝났다. 이 나라는 이제 마족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미카엘은 포기하지 않고 단도를 겨누었다. 질 게 뻔한 싸움이지만, 그는 황태자다. 나라를 포기할 수 없다.
「설령 그 둘을 꾀어냈다 해도 나는 넘어가지 않아. 나는 이 나라의 최후 방어선이니까.」
“미카.”
「!」
이름이 불리자마자 미카는 마치 황태자라는 지위가 부정당한 듯한 공포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자신의 진정한 힘을 각성하고 말았다. 상급 기사였던 황태자는 사실 진짜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이다. 그의 의복을 찢고, 등 뒤에서 커다랗고 성스러운 날개가 나타났다.
이것이 그의 본모습이다. 혼혈 천족. 사실 그의 어머니가 정체를 숨긴 천족이었는데, 뭐 어쩌구저쩌구 해서 그도 정체를 숨겨야만 했던 뭐 그런 남주스러운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모습을 내보였는데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성스러운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은하가 조금 감명을 받았다.
“날개 꺼낼 때까지 패려 했는데, 날개가 이미 있어?”
「너에게 굴복하지 않아.」
미카엘은 단도를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오.”
「최소한 저들처럼 되지는 않게……!」
‘저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하는 여전히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문득 미카엘은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늘 여유롭고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모습이 어딜 보아도 폭군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 체질……. 헉, 황태자가 이런 생각을.
이미 홀리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미카엘은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결해야……!
“할 수 있어?”
그녀가 물었다.
할…… 수 없다. 그런 과감한 일을 할 수 있었더라면, 진작에 그녀의 아래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
“벨, 태을. 팔 한쪽씩 잡아.”
그녀의 명령에 두 남자가 충실한 심복처럼 황태자를 제압했다. 황태자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그를 도와줄 엑스트라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은하는 붙잡힌 황태자를 보며 의미심장한 대사를 흘렸다.
“부럽다…….”
정말 수상했다.
“해볼까.”
「무, 뭘 하려는 거야? 이거 놔!」
은하는 품 안에서…… 연갈색 고양이 귀 머리띠를 꺼냈다.
아무런 마법적인 기능 없이 그저 귀엽게 보이라고 만들어진 평범한 머리띠!
반항하던 미카엘도 고양이 귀를 본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그건, 설마…… 씌우려는 건 아니겠지?」
“시발…….”
황태자는 다시 격렬히 반항하기 시작했다. 늘 홀로 외로웠던 그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그의 두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들은 이미 설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 그저 그녀의 하수인이었고,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누구를 의지하지? 패배와 외로움이 확정된 섭남은 누구한테 가야만 하냐고.
은하가 고양이 귀 머리띠를 들고 가까이 다가온다…….
「오지 마. 안 돼.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야! 나한테 그런 깜찍한 머리띠를, 안 돼, 안……!」
씌웠다.
「냐앙……!」
황태자가 은하의 발치에 무릎 꿇으며 쓰러졌다.
은하가 한숨 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억은 나? 꼬리도 달아 줘?”
이 사악한 마족 여자는 귀뿐만 아니라 꼬리까지 갖고 왔다. 미카엘은 고양이 꼬리 부분에 달린 굵은 구슬들을 보는 순간 아랫배에 피가 몰리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겪어 본 적 없는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저걸로 혹독하게 당했던 것 같다. 기껏 꼬리를 달아 주고는 자꾸 뺏어 가던 미운 주인님에 대한 기억이…….
「나, 나는…….」
은하가 떨떠름하게 제안했다.
“꼬리 달아 줄 테니까 바지 벗고 엎드려.”
“여기서!? 여기 응접실이거든?”
“언제는 야외 플레이 안 했다고. 미카, 너 부끄러움 타?”
“은하 양.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원할 때 남자들을 괴롭히는 건 여전하구나.”
“너 고양이 귀 쓰고 기억이 돌아온 거야?”
당연하다. 고양이 귀에는 그 정도의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카는 저 안하무인 주인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 속에서 뭐가 울컥 올라와서, 은하 손 안에 있는 꼬리를 낚아챘다.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억울한 게 많다. 아주 많다.
“안 달아 줄 거잖아. 나 혼자 달고 말지.”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혼자 응접실 바깥으로 나갔다.
“주인님 미워!”
황태자가 도망갔다.
셋만 덩그러니 남아 황당하게 응접실 문짝만 바라봤다. 태을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실패한 건가요?”
“너 방금 미카가 뭐라고 하면서 나갔는지 못 들었어?”
“들었어요. 그런데 은하 씨는 그냥 아무 상관없는 남자한테서도 주인님 호칭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최면 거는 것처럼요.”
“이 새끼가.”
용 뿔을 손잡이처럼 잡고 때리려 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은하는 조금 심란한 심정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남주들을 맨날 때리고 위에 군림하다 보니 어느샌가 이런 위치가 당연해진 듯하다.
아니, 역시 괘씸하다. 은하는 용 뿔을 손잡이처럼 잡고 그의 명치를 때렸다.
“아악.”
벨은 초조하게 응접실 문을 보며 말했다.
“은하, 명령만 내리면 잡아 오겠다.”
이 말은 은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미카를 위한 것이기도,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미카가 은하에게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은하의 심기가 나빠질 것이며, 그에게 가할 체벌의 강도도 늘어난다. 그리고 은하가 자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벨과 미카는 연대 책임 비슷한 것을 지고 있다. 그녀가 누군가 한쪽을 때리면, 다른 쪽을 때리는 강도도 덩달아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맞는 쪽만 긴장하고 초조해한다. 때리는 쪽은 느긋하다.
“기다려 봐. 이미 벌써 반쯤은 고양이가 됐으니까, 곧 오겠지.”
그러고 보니 은하가 자연스레 미카를 고양이 취급하고 있다.
“은하.”
“뭐.”
“왜 나에게는 강아지 귀를 달아 주지 않는 거지? 나도 머리띠가 어울린다.”
“으응?”
그는 자신의 턱 밑에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고는 토라졌다. 남주인공이 감히 귀여운 짓을 해? 은하가 혼란에 빠진 사이, 태을도 냉큼 끼어들었다.
“저는 돼지 귀 머리띠여도 괜찮아요. 꼬리도 좋고.”
서열 1위는 3위가 0위에게 애교를 부리니까 갑자기 꼴 보기 싫어져서 점잖게 그를 제지했다.
“그대는 뿔이 있으니까 머리띠 들어갈 자리가 없다.”
“무슨 상관이에요. 뿔도 있고 귀도 있을 수도 있지. 벨 씨는 이미 꼬리가 있으니까 여유롭잖아요. 귀는 왜 탐내요?”
“나야말로 악마인데 뿔이 없다. 은하가 뿔을 좋아하던가?”
“아까 손잡이처럼 썼죠.”
“그건, 부럽군……. 뿔도 달아야겠다.”
“너무 욕심이 많으신 거 아니에요? 꼬리가 있는데 귀도 달고 뿔도 달겠다고요?”
“뭐가 문제지?”
가만히 놔두면 만담이 끝이 없다. 깜찍한 귀도 꼬리도 뿔도 날개도 없는 은하는 들으면 들을수록 심란해졌다. 그런 귀여운 디자인 요소를 누구보다 갖고 싶었던 건 은하다. 아무것도 없는 인물을 옆에 두고 하나씩 가진 새끼들이 귀를 더 달아야 하니 마니…….
“너네 다 닥쳐라. 머리띠가 있으면 나한테 달아야 한다는 생각 못 해? 나도, 동물 귀, 달고 싶다고!”
“!”
“!”
진짜 생각 못 해본 듯 악마와 용이 충격받았다. 은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채찍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고양이 귀를 쓴 천사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은하 양. 혼자서는 꼬리…… 못 달겠어…….”
“…….”
타락천사스핑스크고양이가 저기 있다.
쟤 버릴까?
은하의 표정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태을이 벌떡 일어났다.
“은하 씨. 사실 남주들이 다 필요하진 않아요. 필요한 만큼만 챙겨 가시죠. 여기서 한 명 늘어봤자 은하 씨가 불행해지기만 할 거예요.”
“!”
불행…….
피폐물 출신 주인공은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천사 포섭해 올 테니까 기다려.”
“은하 씨!”
응접실 문을 벌컥 열었더니 복도에서 황태자가 부끄러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옷은 화려해서 머리띠랑 색깔도 안 맞고……. 싸구려 소품을 쓰고 은하를 기다리는 꼴을 보자니 느낌이 묘했다. 미카엘이 조신하게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말했다.
“은하 양. 우리 너무 많이 돌아왔어.”
“어.”
“이제 내 주인님 해줄 거야?”
하기 싫다…….
그러나 이 네 명 중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면, 그건 은하다. 은하는 서서히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폐물은 글러 먹은 것 같다고. 피폐하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나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진실이 될 것만 같다.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수가 적어지고 무표정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남주들은 점점 그녀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키워 가는 것도 모른 채.
요컨대, 무표정이 잘 어울렸던 거다.
미카엘은 수줍게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황태자의 침실이 호텔 방처럼 되었다. 그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 눈치를 보며 무릎을 곱게 모았다가, 고양이 귀를 만지작대며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황태자라서 이런 바보 같은 고양이 귀 안 어울릴 게 뻔한데, 타깃을 잘못 골랐어. 네가 아무리 나를 귀여워한다고 해도 내가 네발로 기어 다니면서 고양이 흉내를 낼 줄 알아? 이 마족! 네 수작엔 안 넘어가. 설령 네가 나한테 꼬리를 달고 궁디팡팡을 해준다고 해도.”
“속 터지니까 입 다물고 울음소리나 내라.”
“야옹……!”
은하는 미카의 입에 꼬리를 물린 채 그의 의복을 벗겼다. 종잇장처럼 잘 벗겨졌다. 여기는 침대 위인데 또 남주인공만 벗고 여주인공이 벗지 못한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들어 올렸다.
은하가 벗으려는 줄 알고, 미카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은하 양! 나 섹스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여전히 벗겨지지 않는다. 치마조차 들리지 않았다. 절대 그녀의 속옷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드러났다. 왜냐면 여주인공의 몸은 조금만 벗어도 야하니까. 반면, 남주인공은 고추 빼고는 딱히 야하지 않으니 마음껏 벗길 수 있다.
작가가 이런 식이니 <악마의 비바체>가 망한 것이다.
그리고 뭐? ‘섹스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이게 남주인공 입에서 나올 말인가?
“바지 벗고 엎드려.”
“!”
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대사였다. 그러나 그만큼 주인님다운 대사이기도 했다. 애완동물을 잘 다룰 것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미카는 조금 흥분하고 말았다.
반면 은하는 심란하기만 했다.
‘내가 벗겨져도 모자랄 판에, 벗기고 있다니.’
주인공의 삶이 이렇게 불행하다.
불행…….
“…….”
……불행한가?
은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의외로 별로 안 불행하다.
남주인공을 벗기는데 안 불행하다니, 피폐물 출신 주인공으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난다. 어쩌면 불행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역치가 높아진 거다. 더 큰 불행이 필요하다.
은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불행해질 때까지 천사를 가열 차게 농락해 줬다. 몇 시간 후에는 황태자가 황성 복도에서 네발로 기어 다니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불행하지 못했다.
이렇게 남주들이 모두 모였다.
은하는 조금 참담한 심정으로 선언했다.
“얘들아, 돌아가자.”
<악마의 비바체>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엉망진창이나마 마지막 편을 쓸 것이다. 그렇게 작가를 1편 지옥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유를 손에 넣을 것이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