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40화 (본편 완결) (40/40)

40화

<악마의 비바체> 80편

지구가 멸망하고 모든 생물의 육체가 소멸한 이후.

유은하는 죽었다.

죽고 영혼만이 남았다.

그러나 본래부터 악마와 천사가 탐냈던 영혼은 쉬이 사후 세계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그 자리에 남았다. 마지막 편에서나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실은 그녀는 요정 세계에서 태어난 공주였다. 실수로 인간 세계에서 길과 기억을 잃었지만, 영혼만 남아 자유로워지자 본래의 신분을 되찾은 것이다. 잘 찾아보면 지난 편에 복선이 있었다고 소설은 뻔뻔하게 우겼다.

어쨌든 유은하는 신이 되었다. 벨제뷔트가 신이 된 유은하를 향해 말했다.

「그대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어. 그대는 내 것이다.」

이 사악한 악마는 영혼만 남은 유은하여도 집어삼키려 했다. 유은하가 신비롭게 말했다.

「이제 소용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제 것이에요.」

그렇게 도리어 그녀에게 잡아먹혔다. 이어서 유은하는 미카엘과 강태을도 잡아먹었다. 이 과정이 아름다운 묘사로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유은하는 사악한 괴물이 되어 그런 짓을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슬프고 피폐한 심정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녀는 생전과 똑같은 인격을, 아니, 생전보다 더더욱 고귀하고 성스러운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

신이 된 유은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았다. 그녀는 망가진 지구를 애틋하게 내려다보며 결심했다.

「저는 지구를 되살리겠어요.」

그러자 마찬가지로 영혼만 남아 버린 벨제뷔트가 화들짝 놀랐다.

「제정신인가? 이미 쪼개진 행성을 되살리려면 ‘인과율’을 지불해야 할 텐데?」

어려운 오타쿠 용어가 나왔다. 말하는 본인들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럴싸한 세상의 구성 원리에 대한 짤막한 설명도 나왔다. 마지막 편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유은하는 대사 한 마디로 이상의 상황을 대충 정리했다.

「제가 고통받아서 지구를 구할 수 있다면…….」

그냥 하던 거 하겠다는 소리였다.

79편 동안 연재되던 내용과 별다를 게 없을 텐데도 남주인공들은 반발했다. 이제 #후회남이 된 그들은 더 이상 유은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그녀의 의지는 강력했다.

유은하는 남주인공들에게 개 목걸이를 채웠다.

「더 이상 저를 두고 싸우실 필요 없어요. 이제 여러분이 제 노예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채찍을 쥐여 줬다.

「절 때리세요.」

설령 악마, 천사, 그리고 용이라 할지라도, 신이 된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순 없었다. 유은하는 그녀 자신의 슬픔을 에너지로 쓰기 위해 고행을 자처했다. 물론 여기서 ‘고행을 자처했다’는 말은 강압적인 섹스를 의미한다. 그녀는 사디스트 악마와 흑화한 천사, 그리고 뭐 하는 캐릭터인지 끝까지 모르겠는 용과 무한히 섹스를 하게 된다.

언제까지 하냐면, 영원히……. 그냥 영원히. 계속.

노예가 된 남주인공들이 울면서 이제 그만 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 계속해야만 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신계, 아름다운 유은하의 유리 궁전, 그곳에서, 개 목걸이를 찬 남주인공들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때렸다. 그렇게 그녀가 충분한 고통을 받아 이 슬픔을 동력 삼아 어찌어찌 지구는 복구됐다. 사람들이 살아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었는지도 몰랐다.

평화로운 지구, 웹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 그 너머 신계, 유은하의 유리 궁전에서는 오늘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악마의 비바체, 완(完)---

‘유은하의 유리 궁전’, 야외 테라스.

우리가 쓴 79편 아래에서, 기억을 되찾은 등장인물들이 다 모여 샴페인을 터트렸다. 나는 흐뭇하고 뿌듯한 심정으로 마지막 편을 읽으며 감상평을 남겼다. 우리의 작품은…….

“너무 갔어.”

너무 갔다.

미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불평부터 터트렸다.

“마지막 문단에 가서 갑자기 메타 소설처럼 됐잖아. 난 메타 소설 싫어.”

그가 개 목걸이 사슬을 짤랑거리며 투덜거렸다. 이 천사는 마지막까지 불평이 많다. 나는 라운지 의자에 기댄 채로 대답했다.

“알 바야. 지구가 멸망했는데.”

과한 부분을 따지자면 지구가 멸망했을 때부터 과했다. 샴페인이나 마셨다. 작가가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더 달았다.

“이제 자유야.”

나는 ‘유은하의 유리 궁전’ 야외 테라스에서 선언했다.

“끝났어.”

끝났다!

우리의 과업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다른 남주인공들도 샴페인은 뒷전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거나 나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벨은 계속해서 마지막 편을 읽으며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끝난 건가?”

“그래.”

나는 우리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이제 할 일이 없어.”

“…….”

이후로는 정적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정적이었다.

행동을 하지 않으니, 서술될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시간 개념이 무의미한 소설 속에서는 몇 날 며칠이고 그냥 이 유리 궁전의 응접실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완결이 났으니, 이제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소설이 조각나지도 않을 거다. 우리 세상은 안정을 찾았다.

“…….”

숨이 막히는 침묵과 고통이 서서히 내 목을 졸랐다.

“…….”

캐릭터는 오로지 행동할 때만 존재한다. 이제는 쓸 게 없다. 소름 끼치는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우리들은 이대로 이 소설의 배경과 함께 평화로운 세상의 일부로 박제될 것이다.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가 없었다.

뭔가……. 뭔가 해야 한다.

나는 샴페인이 가득한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안 돼!”

“헉.”

나와 마찬가지로 굳어 있던 남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소설이 굴러간다.

벨이 몸을 감싸고 덜덜 떨었다.

“지나친 자유는 때론 공포가 되기도 하는군.”

“무서웠어…….”

천사가 날개를 후들후들 떨며 주저앉았다. 용도 식은땀을 훔쳤다.

나도 한마디 했다.

“나는 수동적인 캐릭터라 자유랑은 안 맞아.”

“…….”

남주들이 아까처럼 공포에 질렸다.

대답도 안 했다.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 놈도 없었다. 저 새끼들에게는 정적보다 내 발언이 더 두려운 것 같다.

나라고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아무것도 안 배운 건 아니다. 나는 남주들을 쥐어패는 대신, 다정하게 그들을 타일렀다.

“얘들아. 무조건 내 말이 맞다고 해야지. 완결 났다고 군기 빠졌어?”

그나마 가장 용감한 벨이 내 눈치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은하, 그대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대도 사실 알고 있지 않은가.”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라고?

“은하 씨는 수동적이죠!”

태을이 치고 들어왔다. 미카도 재빨리 태을에게 동조했다.

“은하 양은 자세히 보면 수동적이지.”

이렇게 되면 벨의 편이 없다. 벨은 남주 2번, 3번을 보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간신배 노릇 한다고 진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벨. 손바닥 대.”

벨만 때리면 되겠다. 누군가를 때리고 있으면, 다시 아까처럼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멈추지도 않을 거고.

태을이 안심한 듯 소파에 등을 털썩 기댔다.

“그나저나 무서웠어요. 아무것도 못 하고 인형처럼 수납당하던 시절에도 언젠가 출연할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것도 없네요. 이래서 캐릭터들이 재활용에 지원하나 봐요.”

“그러게.”

…….

“캐릭터를 재활용한다고?”

“어……. 모르셨어요?”

오히려 태을이 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수상쩍은 이 뿔 달린 용이 완결 이후에도 제 역할을 다 했다. 또 혼자만 무슨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저희 다른 소설로 갈 수도 있어요.”

“…….”

태을이 그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메모지 수십만 장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랬다. 팔랑거리는 종이들이 나비 떼 같았다. 나는 이 종이 떼의 정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차기작들이구나.”

다른 작가의 차기작 메모들이, 컴퓨터에 휘갈긴 것이든, 핸드폰에 대충 써둔 것이든, 머릿속에만 있던 것이든, 모두 종이 낙서의 형태로 구현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가 리메이크 당했을 때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캐릭터로 행동했던 것처럼, 그런 환생의 가능성이 열렸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들은 다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기억을 지우고 다른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이 되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캐릭터가 될 수 있다. 그것도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될 수 있다.

나는 얼떨떨하게 팔랑거리는 종이 하나를 주웠다. 탄생 직전의 소설 줄거리였다.

“트럭에 치인 고등학생이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 모험을 한다……. 뭐야, 언제 적 유행이야?”

유리 궁전이 순식간에 메모지로 뒤덮였다. 손바닥만 한 메모지도 이렇게 많으면 자연재해처럼 보였다. 종이에 뒤덮여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소설의 신비한 힘을 빌려 바닥에 떨어진 메모지들은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이 세상 모든 작가들의 차기작이 전부 여기 있었다.

“이게 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다른 소설들이야?”

태을이 신나서 이런저런 소설 메모들을 살펴봤다.

“앗, 천사랑 악마가 사랑에 빠지는 BL 소설이 있어요.”

“…….”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용을 째려봤다. 태을은 그들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쓰고 천진난만하게 다른 메모들을 읽었다.

“식인하는 인외 연쇄 살인마가 인간 킬러를 길들인다? 이건 이상하네요. 여기는 가지 말죠.”

미카는 바닥을 살피며 돌아다니다 한 작품을 골랐다.

“헉, 은하 양! 이 작품은 메인 남주인공이 금발이야! 나 여기로 갈래.”

벨도 메모 몇 개를 한꺼번에 읽었다.

“게임 관리자가 플레이어를 100년 동안 기다리다 살인 인공지능이 된다. 가짜 로맨티스트가 사이비 교주가 된다. 촉수 열매가 된다……. 세상의 모든 차기작들이 다 있어서 그런지, 이상한 게 꽤 많군. 이런 소설을 고르는 캐릭터가 있나?”

“그쪽에 있는 건 다 그런 것 같아요. 이쪽에 있는 것 중에 골라 보세요.”

태을이 정신없이 메모 사이를 돌아다니며 말했다. 벨이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 중에 아무거나 하나 고르면 그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건가?”

“나는 무조건 금발 남주가 나오는 걸로.”

남주들이 환생할 소설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돌연 벨이 눈을 부릅뜨고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메모 하나를 낚아챘다.

“아기로 환생해서 사랑받는다……?”

“!”

예전에 벨이 이런 데서 태어났어야 했다고 징징거렸던 장르다.

그가 얼떨떨하게 손을 떨었다.

“아기가…… 될 수 있는 건가?”

잔인한 악마왕에게 아기 환생의 가능성이 열렸다.

미카가 냉큼 끼어들어 같이 읽었다.

“헉, 엄청 이름값 높은 작가인가 봐. 여기로 가면 무조건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벨이 그 소설 메모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

진짜로 아기가 될 생각인가 보다.

나는 메모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메모 한 장이 마치 나를 알아본 듯 팔랑거리며 나에게 날아왔기 때문이다.

“피폐물.”

피폐와 새드엔딩으로 유명한 현대 로맨스 작가가 준비하는 차기작 메모였다.

여주인공이 결혼과 이혼과 임신 문제로 이래저래 피폐하게 구른다는 내용이었다. 고작 메모일 뿐인데 <악마의 비바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문학적 향취가 느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환생하면 원껏 피폐해질 수 있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악마의 비바체>가 어쭙잖게 내보인 가짜 피폐함이 아닌, 제대로 된 고통이 내 목을 조를 수 있을 거다.

나는 이 소설로 가야만 한다.

“…….”

메모를 안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메모를 놓아주었다.

메모지는 나비처럼 팔랑이며 날아가 수많은 메모지의 태풍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벨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대에게 딱인 것 같은데, 성에 안 차는가 보군. 그대는 어디로 갈 건가?”

개 목걸이를 찬 모습이 충직해 보였다.

나는 <악마의 비바체>의 주인공으로서 마지막 일을 했다.

벨제뷔트의 개 목걸이를 풀어 줬다.

“!”

미카와 태을의 목걸이도 풀어 줬다.

“얘들아. 지금까지 미안했다. 가고 싶은 데로 가.”

결정은 이미 내렸다.

“나는 남을 테니까.”

“…….”

미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을은 들고 있던 메모 뭉치를 우수수 쏟았다. 벨은 아예 손을 떨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싸해졌다.

“……농담?”

미카는 개 목걸이를 쥔 채 떠보듯 물었다. 내가 언제 농담을 한 적이 있었나? 나는 대답 없이 미카를 쳐다봤다. 미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태을이 들고 있던 메모 뭉치를 우수수 쏟자, 벨이 퍼뜩 물었다.

“왜지?”

이 새끼들은 마지막까지 사사건건 내 의견에 토를 달아.

“여기가 좋으니까 남아. 뭐가 불만이야?”

“이해가 안 간다. 좋을 이유가 없어.”

“또 주인공 말을 안 믿고…….”

“은하…….”

벨이 내 말을 끊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여주인공을 굴리는 ‘진짜’ 피폐물은 적성에 안 맞을 것 같나……?”

닥쳐라…….

“차라리 그대가 주인님이 될 수 있는 소설로 가는 건 어떤가?”

“피폐물 출신인 내가?”

“잘할 거다.”

벨이 단언했다. 그렇겠지. 난 잘하겠지.

아마 <악마의 비바체>보다 훨씬 더 잘할 거다. 피폐물 출신이란 점이 내 안에서 흔적도 안 남을 정도로 말이다.

안 갈 거다.

피폐물 주인공으로 남을 거다. 비록 내 삶에 선택지는 없었을지언정 나는 매 순간 진실되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나는 명실상부 자랑스러운 피폐물 주인공이다. 다른 장르로 넘어가는 건 암캐 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벨이 기어이 말했다.

“그대, 주인님 역할 맡으면 날아다닐 것 같다.”

이 새끼는 항상 내 속을 박박 긁어 매를 벌고야 만다.

“어디서 건방지게 노예한테 대들어.”

“그러니까 그런 말이 이상하다는, 악!”

“마지막까지 내가 널 패야 하냐? 왜 이렇게 기어오를까? 응?”

벨을 구석으로 몰아 발로 차는데, 그의 바지춤이 크게 부푼 걸 보자마자 다리가 굳어 버렸다. 벨이 급히 윗옷을 끌어다 고간을 가리며 허겁지겁 변명했다.

“어쩔 수 없어. 조건 반사다.”

“…….”

맞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때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이따위다. 나는 몸을 돌렸다. 2번과 3번, 그리고 몸을 추스리는 1번이 나를 주목했다.

“벨. 미카. 태을아.”

한 번씩 호명하며 얼굴들을 확인했다.

웃어, 새끼들아. 왜 표정들이 그따위야. 누구 죽어?

죽긴 하겠지만.

“같이 소설을 연재해서 영광이었어. 앞으로 나 없이 행복하게 살아. 이제 다 꺼져.”

나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려 ‘유은하의 유리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방으로 갈 거다. 가서, 침대에 눕고, 작가가 남긴 완결 후기를 읽다가, 그렇게 영원히 이 소설에 박제될 것이다. 죽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만, 이 죽음은 특별하다. 내가 선택한 죽음이니까.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아 오랜만에 담배를 꺼냈다. 이게 내 마지막 담배겠지.

생전 처음으로 직접 불을 붙이려는데, 담배 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

뭐지? 내가 신이 되었다는 설정이니까, 이제 담뱃불도 자동으로 붙나?

문이 터지듯 요란하게 열렸다.

“은하.”

분노한 벨제뷔트가 내 방에 벌컥 침입했다. 나는 깜짝 놀라 담배를 떨어트렸다.

“벨? 왜 아기가 되지 않고…….”

그가 내 턱을 잡고 격렬히 키스했다.

“읍……!”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주인공의 키스였다. 뜨거운 혀가 침범해 내 입 안 구석구석을 유린했다. 다리에 절로 힘이 풀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벨의 무거운 무게에 밀려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벨이 나와 이마를 맞대고 으르렁댔다.

“그대는 내 노예인데, 감히 나와 헤어지겠다고?”

“!”

그리고 그는 품에서 개 목걸이를 꺼내, 스스로 자기 목에 채웠다. 그다음 나에게 손잡이를 강요했다.

“명령이다. 쥐어라.”

“아니, 이 개새끼가……. 왜 남았어?”

“컥.”

그의 명치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벨이 재빠르게 무릎 꿇고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표정과 말투만 남주인공이지 자세는 그렇지 않았다.

“왜 아직도 악마왕 노릇이야?”

“그대는 내 이런 모습을 좋아하니까 한 번 해봤다.”

전직 악마왕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기가 막혀서…….

“아기는 포기했어?”

“흥. 환생해 봤자 거기엔 그대가 없으니 의미가 없다. 난 그대에게서 아기 취급을 받고 싶은 거야.”

벨이 잘난 척하며 말했다. 어조만 오만하고 내용은 그렇지 않은 저 묘한 화법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한 걸까? 사디스트 남주들은 맞다 보면 다 저렇게 되나? 이상한 방향으로 오만해졌다.

“아기 취급 안 해줄 건데?”

벨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모르는 일이지.”

“뭘 몰라. 개소리 말고 환생하러 가. 여기 남을 이유도 없잖아.”

“그대야말로 여기 남을 이유가 없다.”

아니, 나는 이유가 있다.

벨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팔짱을 끼웠다.

“나는 그대의 행보를 따라가겠다. 이유를 찾지 마라.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지?”

“…….”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혹시 벨은 진짜 로맨티스트일까?

그리고 아까부터 열렬히 창문을 두드리는 천사도 있었다.

창문을 열자 그가 끙끙대며 기어 들어왔다.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은하 양! 왜 여기 바깥에선 창문이 안 열려?”

“왜 문으로 안 들어오고?”

미카가 잠시 벨을 흘겨봤다. 벨은 모른 척했다.

아무튼 미카는 남주의 멋이라고는 전혀 없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개 목걸이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이제부터는 나를 메인 남주인공이랑 똑같이 대한다고 약속해 줘.”

“……내가 왜?”

“은하 양은 바보야!”

미카가 빽 소리를 지르고는, 씩씩대며 스스로 목줄을 채웠다. 팔짱을 끼우며 고개를 핏 돌리기까지 했다.

“딱히 널 위해서 남은 건 아니야.”

미카에게 저런 컨셉이 있는 걸 마지막 편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라서, 당연히, 태을도 슬쩍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들어와도 되나요?”

“너는 진짜 왜 남는데? 수상하게 웃지 마.”

“저는 원래 수상한 캐릭터인데 수상한 짓을 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 아니다.

“아니, 왜 남냐고. 왜 완결 났는데도 수상하게 굴어? 나가.”

쫓아내려 했는데, 태을이 울고불고 드러누워서는 떼를 썼다.

“싫어요! 깨어난 지 몇 화나 됐다고 흩어져요. 은하 씨랑 원 없이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요. 다른 소설 가서 모르는 인물들 만나려고 깨어난 게 아니야!”

태을은 이미 아기로 환생한 듯하다.

이렇게 개 목걸이를 찬 세 마리의 짐승 새끼들이 모였다. 다시 볼 거라 생각지도 못한 새끼들이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너네 뭐야? 왜 남은 거야?”

“흥.”

남주들은 도도하게 앉아 있거나, 토라지거나, 훌쩍거리거나 했다. 개중 아무도 대답은 안 했다.

“소설은 끝났어. 마지막 편 설정대로라면 너희 전부 평생 내 노예로 살아야 해. 알고는 있어?”

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새삼……. 언제는 노예가 아니었다고. 그대는 보기보다 머리가 나쁘군.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보아라.”

“너는 개가 하고 싶은 거야, 주인님이 하고 싶은 거야. 구석 가서 무릎 꿇고 손 들어.”

벨이 주섬주섬 구석 가서 무릎 꿇고 손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래, 새끼들아. 남아라, 남아.”

그러자 미카가 중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전부 할 일이 없어서 이대로 죽는 거야?”

“…….”

다 같이 주인공의 곁에서 순장되는 엔딩인가?

“은하 씨.”

태을이 울음을 멈추고 종종걸음으로 슬쩍 내 옆에 앉았다.

“그냥 저희끼리 새 소설을 쓰는 건 어때요?”

“!”

이 미친 짓을 또 하라고?

“그렇게 보지 마세요. 원래 쉬고 있으면 신작이 쓰고 싶어진다잖아요.”

“그건 작가 얘기고, 나는 주인공이잖아.”

“에이, 은하 씨한테도 작가의 자질이 있는 것 같은데요.”

멱살 잡혀 흔들려도 태을이 굴하지 않았다. 구석에서 벌서던 벨이 참견했다.

“그간 맞지도 않는 역할을 하느라 그대도 나도 힘들었는데, 차라리 신작은 마음 편하게 여공남수로 하는 게 어떤가?”

저 말 또 나왔다. 자존심이 상한다니까!?

“나는 안 힘들었어. 힘들었다면 그건 다 너희가 똑바로 날 못 때려서야. 남주가 셋이나 있는데 채찍질 제대로 하는 놈이 왜 하나도 없어?”

“은하.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대도 역할이 별로 적성에 맞는 것 같진 않았다. ‘피폐해졌다’고만 서술한다고 해서 피폐해지는 건 아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피폐해졌다.

미카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냥 우리 경험을 소설로 쓰는 건 어때?”

“무슨 헛소리야. 소설 속 소설을 쓰는 소설을 누가 소설로 만들어? 차라리 내가 남주들 죽이고 다니는 소설이 낫겠다.”

“침대에서?”

“오, 괜찮은데…….”

안 괜찮다.

남주인공들은 제각각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지 아이디어를 냈다. 대체로 성노예, 가축, 애완동물, 자위 기구, 이런 것들뿐이었다. 내가 이들을 사디스트로 만들기 위한 80화 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이제는 나를 학대할 필요가 없다 해도 그렇지, 가관이다. 저 많은 의견들 중에서 내 취향을 반영하는 의견이 하나도 없다. 나도 매 맞는 거 좋아한다. 내가 제일 좋아한다. 때려서라도 맞고 싶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채찍을 들어야 했다.

“전부 옷 벗고 엎드려.”

뭐, 그런데,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때리는 것도 좀 즐거울지도 모른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비틀비틀 테라스로 나가, 모든 차기작이 담긴 종이가 한가득 쌓인 세상을 내려다봤다. 온통 하얀 게 눈이라도 내린 것 같았다. 이 정지된 세상이 아름다웠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작가가 남긴 완결 후기를 감상했다. 하늘에는 딱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주를 죽여도 되나요?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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