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신입생(2)
"낯선 천장이다."
헛소리를 지껄이며 몸을 일으킨다. 목소리가 좋으니 이런 헛소리도 제법 괜찮게 들린다. 고개를 들어 바닥을 내려다보자 널부러진 브래지어가 눈에 들어온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브래지어를 집어들어 빨래통에 집어던진다. 그리고 대충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속옷의 착용감을 무시하고 교복을 입는다.
"그래도 치마는 아니네."
매우 다행스럽게도, 사관학교의 기본 복장은 남녀공용 교복, 즉 바지다. 애초에 치마는 전투할때 꽤 불편하니까. 그런 점을 고려해서 설정된 복장이라고 한다.
"아니, 전투할때는 전투복 입는데 치마가 뭔 상관이래."
어이가 없네. 물론 그 덕에 치마를 입을 일은 없으니 감사해야할 일이긴 했다.
쓸데 없는 말을 궁시렁거리며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거울을 보자 서늘한 흑발의 미인이 비쳤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 살짝 치켜올라가 고양이를 연상케하는 눈매. 신기할정도로 또렷한 색의 녹안. 슬랜더하면서도 붙을 건 붙어있는 몸매. 하프엘프라는 설정에 맞게 압도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이다.
"근데 그게 왜 나냐고."
그 생각을 하자 또 밀려오는 짜증에 인상을 살짝 구기며 기숙사를 나섰다.
***
교실 문 앞에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목재질의 문은 충분히 기름을 먹어 고급스러운 검은 빛이 돌았다.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훔쳐보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과연, 한국 유일한 영웅 양성소답게 문짝 하나도 허투루 된게 없다. 이런 문은 얼마나 할까.
"내가 알게 뭐야."
작게 중얼거린 뒤 문을 열었다.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돈을 찍어발랐다는게 절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흰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벽과 바닥 위로 널찍한 책상이 반원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학교라기보단 대학 강의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구석에 앉은 주인공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답게 일찍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주인공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듯 주인공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한 듯 주인공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 책상을 내려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그 반응을 대충 넘기고 걸음을 옮겨 주인공과 적당히 떨어진 구석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자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대부분 남자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
"야, 야. 쟤 존나 이쁘지 않냐."
"와. 미쳤다."
시발. 작게 말하는 것도 이 몸뚱아리의 예민한 청각탓에 다 들린다. 남자새끼들이 나를 보면서 저런 소리를 하니 기분이 좆같았다.
고개를 돌려 속삭거리는 새끼들을 바라보자 놀랐는지 대화가 뚝 끊긴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뒷담을 시작했다. 뭐, 남자한테 그딴 눈으로 보여지는 것보단 차라리 욕을 쳐먹는게 나았다.
-끼익
한참을 앉아있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담당 교관이 들어왔다. 쭉 뻗은 다리와 수련으로 탄탄하게 잡힌 몸매. 교관은 짧은 단발을 가볍게 휘날리며 당당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반갑다. 다들 오늘 뭘 할지는 알고 있겠지만, 일단 인사부터 하지. 나는 1년동안 너희를 담당할 담당 교관 신유정이다."
이름을 듣고 나서야 무슨 캐릭터인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신유정. [아카데미의 낙제생]에서 일단은 주인공의 조력자 포지션에 있는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강해진 후에는 순식간에 비중이 공기가 되지만.
"첫 날이라 다들 기대감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구나. 아마 여러 녀석이 이 안에 있을거다. 입학한 것 만으로 벌써 영웅이 된 것처럼 붕 떠있는 녀석도 있을테고. 미래를 대비해서 벌써부터 훈련을 시작한 녀석도 있을테지."
그렇게 말한 신유정은 표정을 엄하게 굳히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이 사관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녀석은 후자 뿐이다. 이 사관학교는 정말 영웅에 걸맞는 능력을 가진 녀석만이 졸업할 수 있다.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낙오할거라는 말이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진지하게 바뀌었다.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신유정의 목소리만 울려퍼졌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졸업은 커녕, 제적을 면하기도 힘들거다. 영웅이라는 직업은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이 함부로 넘볼 만큼 값싼게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이 녀석들은 훌륭했다."
잠시 말을 멈춘 신유정은 리모컨을 쥐어들고 대형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스크린에는 주인공의 이름을 포함한 몇 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학생들이 스크린을 보고 의문에 빠진 표정을 짓자, 신유정은 이내 입을 열었다.
"이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궁금한 모양이군? 이 녀석들은 어제 입학하자마자 수련실을 이용한 녀석들이다. 입학했다고 벌써부터 헤벌레하고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말이지. 이 화면에 이름이 쓰인 녀석들은 내가 기억해두겠다."
말을 마친 교관은 실내에 가득찬 학생들의 얼굴을 스윽 훑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다들 쓸만한 표정을 짓는군. 좋아. 한 번 더 말하자면, 이곳에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녀석만이 끝까지 남을 수 있다. 이 말을 명심하도록. 자, 그럼 준비해라. 능력 측정 실기를 하러 갈 시간이다."
***
"주로 사용할 무장은 이미 입학 전에 다들 등록했을테지. 오늘은 그에 맞춰 가볍게 실기 시험을 본다. 단순한 수준 측정 시험이기에 성적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기록된 점수는 전부 공개될 예정이다. 하위권은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상위권은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도록."
그렇게 말한 신유정은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뒤편에는 여러가지 설비가 널려 있었다. 대련을 위한 링. 활이나 총 같은 원거리 무기를 훈련하기 위한 사격장. 마나 훈련이나 개인 수련을 위한 널찍한 개인 단련실. 그런 설비가 수십 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훈련실에 처음 와본 모양인지 입을 벌린 채 놀라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공이 보였다.
"다들 놀란 모양이군. 이 훈련시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탑 클래스에 든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나라에서 너희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이다."
근데 어차피 세금 아니냐.
이유 없이 솟은 짜증에 뚱한 표정을 짓고있는 나와는 달리 학생들은 그 말에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했는지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교관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교관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번 신입생들은 꽤 눈이 살아있구나. 그럼 시험 방식을 설명하겠다. 저 단련실이 보이나?."
신유정은 손을 들어 개인 단련실을 가리키고 입을 열었다.
"저 단련실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혼자서 수련을 할 수도 있지만, 환상 마법으로 가상의 적을 소환해서 전투할 수도 있지. 근접 무기를 선택한 이들은 각자 단련실에 들어가서 가상의 적을 상대로 대련을 한다. 몇 번째 적까지 물리치느냐가 시험이다."
그리고 신유정은 팔을 돌려 사격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원거리 무기 사용자나 마법사를 지망한 이들은 저 과녁판에 대고 맞추는 훈련을 한다. 과녁판에 일정 이상의 충격을 가하거나 중앙을 정확히 맞추면 명중이다."
사격 시험. 원작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사격 점수 최하위를 기록해 비웃음을 샀었다. 지금은 내가 되겠지만. 아니, 진짜 특전 없냐고. 또 밀려오는 짜증에 얼굴을 와작 구겼다.
"그러면 근거리와 원거리는 따로 나눠져 입장할 준비를 하도록. 입학식 때 배정된 번호에 맞춰서 입장한다. 순서가 뒤쪽인 이들은 잠시 대기하도록."
아무리 사관학교에 예산을 때려박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는지, 단련실과 사격장의 숫자가 부족해서 한 번에 모든 이들이 시험을 치르기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순서는 꽤 뒤쪽이었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저기...물어볼게 있는데 괜찮을까?"
변성기가 완전히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검녹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주인공. 이도영이었다.
"왜?"
이 새낀 뭔데 귀찮게 말을 걸지. 빙의한 이후부터, 정확히는 빙의했던 방을 나온 이후부터 자꾸 치솟아오르던 짜증을 애써 누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짧게 떨어지는 대답에 이도영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어제부터 시선이 자꾸 느껴져서. 혹시 할 말이 있나 했지."
아. 기다리면서 딱히 할 짓이 없어서 주인공을 좀 구경했는데, 시선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 없는데."
"그래...?"
반복되는 단답에 할 말을 잃었는지 이도영은 이내 말 거는걸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그 동작에 그가 걸치고 있던 외투가 잠시 내 쪽으로 펄럭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
코에서 훅 느껴지는 싱그러운 풀냄새.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심호흡을 하는 것만 같은 상쾌한 감각. 빙의한 이후 쌓여왔던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는 고양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 당황스러운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이건 설마.
"너, 잠시만 멈춰 봐."
"응?"
방금 전 생각해낸 가설이 맞는지 검증하기 위해 주인공을 다급히 불러세웠다. 의문을 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인공을 향해 얼굴을 가져다댄다. 점점 얼굴이 주인공의 몸과 가까워지고, 아까 전 그 향기의 원인이 내가 생각한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다음! 대기하던 원거리 지망자들은 입장하도록!"
"아...미안. 조금 이따가 얘기해줄래?"
이도영은 양해를 구하고는 빠르게 사격장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채 주인공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