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신입생(3) (4/167)



〈 4화 〉신입생(3)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로 방금 전 감각을 되새긴다. 깊은 산 속의 맑은 공기를 응축해서 한 번에 들이킨듯한 시원한 느낌. 녹색식물에서 맡을 수 있는 기분 좋은 풀냄새. 그 감각을 잠깐이라도 느껴버리자, 지금 마시는 공기가 불쾌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건 아마 아직 각성하지 못한 특성, 자연지체의 효과  하나겠지. 주위의 공기와 마나를 정화한다나 뭐라나. 대충 그런 패시브 효과가 있다는 걸 원작에서 읽었던 것도 같다. 다시 밀려오는 짜증을 다시 밀어내며 차분히 생각을 이어갔다.

자연지체는 주변의 공기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 내가 방금 전 경험한 감각은 아마 그 덕분이겠지. 하지만 단순히 맑은 공기를 조금 마셨다고 그 정도로 몸에 활력이 돌 수가 있나?

그 의문은 바로 해결되었다. 하프엘프. 내가 빙의한 루시아 그란데우스의 종족. 그게 원인이겠지.

하프엘프도 절반은 엘프다. 숲에서 살아가는, 숲의 마나가 없으면 생존이 심각하게 위험한 종족. 다행히 인간의 피가 섞인 하프엘프들은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겠지만, 판타지의 맑은 공기와 마나가 아니라 현대의 오염에 찌든 환경에 노출되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 설명이면 아까부터, 아니, 처음 이 육체에 빙의했던 그 방을 나온 이후 솟아오르기 시작한 이유 없는 짜증도 설명된다.

"아니, 그거 그냥 데코레이션 아니었어?"

그냥 집 밖으로 나와서 스트레스 받는 줄 알았는데. 사실 중국산 미세먼지의 소행이었던 모양이다. 엿같은 미세먼지. 숨을 쉴 수가 없네. 일단 기숙사에라도 식물을 왕창 가져다둬야겠다. 미세먼지에는 뭘 심어야하지? 파키라? 세계수 마렵네.

"뭐냐?  사격장."

"2단계에서 실패한데다가 파괴한 표적이 겨우 스무 개라고?"

"와...대체 무슨 생각으로 들어온거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대충 생각을 이어나가던 도중, 예민한 청각에 들려오는 잡담에 헛소리를 멈췄다. 수근거림의 근원지는 주인공이 들어간 사격장. 원작 그대로 최하위 성적을 찍은 모양이다. 소설 내용에 따르면, 원거리 지망생 중 압도적인 꼴찌였다나. 주인공에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원작과는 달리 지금은 주인공이 꼴찌는 아닐  같다는 점이다. 내가 있으니까.

나와 이도영이 사이좋게 꼴찌와  다음을 차지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적어도 주인공은 안 긁은 복권이라도 되지. 나는 긁을 복권도 없는 신세라는게 처량했다. 아니 근데 학교면 기초부터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  신입생부터 이런 시험을 보는건데.

또 치민 스트레스에 쓸데 없는 트집을 잡던 머리를 다시 진정시킨다. 말이 학교지, 사실 이곳은 진짜 전투에 숙련된 이들만을 길러내기 위한 양성소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대부분의 지원자는 입학 전부터 충분한 실력이 있는 이들이다. 애초에 실력이 없으면 유급이나 퇴학으로 걸러지니까. 퇴학당하게 되면 남는 것 하나 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 원래부터 자기 능력에 자신 있는 사람만 지원하는게 정상이다. 주인공이 특이 케이스인거지.

근데 그걸 지원한다고  받아주네. 뭐, 주인공은 필기는 1위니까. 어차피 실기를 조지면 학년 과정에서 떨어져나가니, 대부분의 지원자가 실기에 주력했다는 점을 노렸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에바 아닌가. 입학시험은 묘사가 안 돼서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원작 초반부랑 중요한 사건들 빼면 설렁설렁 읽어서 잘 기억나지도 않아. 그 개망작을 누가 진지하게 읽는다고.

"와. 저 옆에 저긴 뭐냐? 지금 12단계라는데?"

"미친  아냐? 현직 영웅인 동숙이 누나도 졸업 직전에 15단계 겨우 성공했다는데, 신입생이 12단계라고?"

"저 정도면 신입생 시험에서 제일 높은 점수 아냐?"

또 다시 귀에 들려오는 잡담에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높은 점수. 사격장을 사용하는 이의 이름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쟤였구나.

이설화. 빙설계 마법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로, 1학기 내내 시험에서 실기 1위를 차지하는 캐릭터였다. 물론, 2학기부턴 충분히 실력을 쌓은 주인공한테 1위 자리를 빼앗기지만. 아무튼 원작에서 등장한 히로인 중 한 명이었다.

"와...미쳤다. 결국 13단계까지 가네."

"아니,  정도면 거의 3학년 수준인데. 저걸 어떻게 따라잡냐."

저 여자를 제외하면 시험을  치르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는건  이번 순서 응시자들의 시험이 끝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게 도래한 심각한 위기를 깨달았다.

"좆됐다..."

다음 순서가 나네. 심지어 주인공이 들어갔던 사격장. 2명 연속으로 최하위 기록이라니.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을 걸 생각하니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후우. 하아. 심호흡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려 하지만 안정은 개뿔, 엿같은 공기를 들이마신게 문제인지  답답해진다. 진짜 맑은 공기가 필요해.

"원거리 시험을 치를 다음 차례 신입생들은 준비하도록!"

교관의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사격장의 문이 동시에 열린다. 옆의 사격장에서 차가운 인상의 미녀, 이설화가 도도하게 걸어나온다. 히로인답게 꽤나 예뻤다. 빙설계답게 새하얀 피부. 하얗게 새기 시작한 머리. 마치 북극여우를 의인화시킨 것 같은 고양이상의 미녀였다. 어, 근데 여우는 개과 아닌가?  게 뭐야. 아무튼 예뻤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곧 들어갈 사격장에서는 공기청정기, 아니 이도영이 분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걸어나왔다. 지 성적이 어떤지는 알고 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그러더니 옆에서 걸어나오는 이설화를 향해 선망과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보낸다. 쯧쯧, 뒤에서 2등일 예정이라니. 슬프구나. 물론 난 뒤에서 1등이겠지만.

"야."

"....."

 새끼가 씹네.

"야!"

"어, 어?!"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서야 주인공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시험에서 얻은 성적이 수치스러운지 꽤 힘 빠진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딴  내 알  아니고. 맑은 공기를 좀 맡아야겠다.

내 피폐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주인공에게 다가선 순간, 내 외침이 조금 컸던 탓인지, 아니면 최하위 성적을 기록한 사람이 대체 누군지 궁금했는지, 꽤 많은 시선이  쪽으로 몰린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다가가 공기를 들이마시기는 아무래도 무리인  싶었다. 사격장에 바로 들어가야 하기도 하고 말이지.

"하아...씹. 야, 너."

"...왜?"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내가 지금 시험 들어가야 하니까. 나오고 나서 찾기 쉽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시험을 조지고 나면 더 심신이 피폐해질테니. 산림 테라피가 필요할  같거든.

 뜬금 없는 말에 놀랐는지 이도영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차례 대기자들은 빨리 들어가라!"

아 시발. 알았다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솟아오른 짜증을 꾹꾹 눌러담고 사격장으로 들어갔다.

***

[입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름을 말씀해주십시오.]

"유시아."

[확인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격장 내부로 들어오자 맑은 공기가 느껴졌다. 아까 이도영에게서 직접 맡았던 정도로 짙은 건 아니지만, 내가 처음 빙의했던 공간보다 훨씬 나은 공기. 식물이 가득찼던  방보다도 맑은 공기가 내 폐를 가득 채웠다.

와. 개쩐다. 주인공  새끼. 차라리 공기청정기로 취직하는게 낫지 않을까? 1가구 1도영 보급이 시급하다.

[신입생 유시아. 확인되었습니다. 주무기로 등록된 무기는 활입니다. 이상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없어."

맑은 공기를 맡아 갑작스레 올라간 텐션에 개소리를 하던 도중, 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온 기계음이 상념을 끊었다. 아, 결국 시험 보는구나. 활은 진짜 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젠장."

아, 모르겠다. 시험 조진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대충 자기합리화를 돌린 뒤 내부의 맑은 공기를 만끽한다. 이 세계에 와서야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몸으로 뼈저리게 알게 된 느낌이다. 전신이 상쾌함으로 가득 차는 쾌감이 짜릿하게 척추를 자극한다. 지금 닥친 상황조차 잊고 상쾌한 감각에 몸을 맡긴다.

[이제부터 신입생 전투능력 측정이 시작됩니다. 곧 주무기로 설정한 무기가 송출됩니다.]

"아."

 쾌감에 몰두하던 도중 또 집중을 끊는 기계음에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알았다고. 그만 방해하라고. 어차피 조질텐데.

"후우..."

그 짜증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나는 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런 공기를 이제서야 맛보다니. 인생 절반은 손해본 게 아닐까. 숨을 들이킬 때마다 줄어드는 쾌감이 아쉬워지는 찰나, 한 자루의 활과 화살이 가득한 화살통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오. 개쩔어.

[주무기가 송출되었습니다. 곧 원거리 평가가 시작됩니다.]

허공에 떠오른 활에 손을 뻗어 잡아챘다. 올림픽 양궁에서 봤던 자세를 따라 엉성하게 자세를 잡아 본다. 물론 제대로 되진 않았다.

"진짜 좆됐네..."

혹시나 활을 잡으면 몸이 알아서 움직여주지 않을까 했다. 뭐, 몸이 기억한다던가. 그런  있잖아? 근데 그것도 안되네. 등에 맨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활에 메겨봤지만, 능숙하긴 커녕, 제대로 자세도 못 잡고 있었다.

[지금부터 원거리 평가가 시작됩니다. 과녁의 수준은 1단계부터 순차적으로 올라갑니다. 원거리 공격으로 과녁을 맞추어주십시오.]

"아, 그래. 알았다고. 어떻게든 한다 해."

손으로 대충 화살을 던지기라도 해야 하나. 시발. 진짜 어쩌라는 거야. 좆같은 세상. 좆같은 빙의.

속으로 오만 욕을 내뱉는 동시에 과녁이 나타났다. 1단계부터 꽤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일단, 적어도 활을 오늘 처음 쏴보는 내가 맞출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미친...저걸 어떻게 맞춰."

존나 빠르네. 활을 쏘는게 아니라 던져서 맞추래도 못 맞추겠다.

이제야 진짜 좆됐다는 실감이 들었다. 긴장했는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숨을 들이키자 여전히 맑은 공기가 호흡기를 가득 채우고,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던 쾌감이 다시 전신으로 퍼졌다.  덕택에 떨림이 줄어든 손을 내려다보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시스템이라도 주던가."

[순수한 마나가 일부 공급되었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합니다.]

[궁술(A+)가 적용됩니다.]

[마나가 매우 부족합니다. 궁술(A+)가 궁술(C-)로 하향됩니다.]

어, 뭐야.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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