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신입생(4)
-쐐애액!
쏘아진 화살이 거친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 과녁에 꽂힌다. 정중앙. 명중 판정이었다. 그 뒤에 나타나 마구잡이로 이동하는 과녁들. 제법 빠른 속도였지만.
-쐐액! 쐐액! 쐐액!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활에 메겨 쏘아낸다. 한 번에 3발. 전부 정중앙이었다.
[4단계 클리어. 5단계를 시작합니다.]
"미친."
궁술(C-). 겨우 C-등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몸으로 직접 체감하고 나니 그런 말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가히 신궁이라고 칭할 만한 실력이 내 몸에 때려박혀 자동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게 C-면, A+는 대체 뭐하는 등급이야?"
대충 예상은 간다. A+. 아마 원작에서 루시아 그란데우스가 다다른 경지겠지. 물론 이 세계에서도 파워밸런스 최상위에 위치한 등장인물에게 비비기는 부족할 것이다. 내 소설에서도 완결 -정확히는 연중- 직전에는 거의 정령술만 사용했으니. 하지만, 그건 최상위 중 최상위.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진짜 괴물들한테 비했을 때 하는 말이고.
-쐐액!
"A+는 커녕 C-로도 충분하겠는데?"
학생 수준에서 압살하는 건.
6단계. 7단계. 그리고 8단계까지 클리어하자 과녁판의 양이 점점 불어난다. 압도적인 수량, 단순히 정중앙을 맞추는 걸로는 부족하다. 이 단계쯤 되면 적어도 광역 공격 한 번은 갈기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쐐애액!
화살 한 발. 마나가 가득 담긴 화살 한 발이 쏘아지던 도중 분열해 각자 다른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전부 명중이다.
[9단계 클리어. 10단계를 시작합니다.]
"진짜 미쳤단 말밖에 안 나오네."
무감정한 기계음이 울려퍼지고, 무수한 과녁이 쏟아져나온다. 내 멍청한 대가리로는 위치를 다 계산하기도 힘든 수량.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스템 보정은 내 대가리보다 빠르니까. 이게 시스템, 이게 빙의물이지.
넘쳐흐르는 고양감에 씨익 웃으며 과녁을 향해 활대를 돌린다. 화살을 시위에 메긴 후 다시 쏘아낸다. 그러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마나가 부족합니다. 궁술(C-)이 제한됩니다.]
"...어?"
방금 전까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던 몸이 갑자기 느려진다. 손에 쥐인 활과 화살이 급격히 낯설어진다. 다급히 숨을 들이키지만 더 이상 상쾌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게 뭔..."
아까까지의 감각을 살려 어떻게든 화살을 메겨 마구 쏘아내지만 빗나가기 일쑤. 이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모양인지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울려퍼진다.
[클리어 실패. 유시아 학생의 기록은 10단계입니다.]
아니 시발. 뭔데. 내 궁술 돌려줘요.
"시스템! 스테이터스! 상태창!"
[마나가 부족합니다.]
"씨발!"
***
아무래도 이번 차례에선 내가 제일 우수생이었던 모양인지 내가 실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격장의 문이 열렸다. 줬다 뺏기라는 참혹한 술수를 당해 거지같은 기분으로 걸어나오자 더 거지같은 공기가 내 호흡기를 후드려팼다.
"아, 진짜 공기 돌겠네."
이게 다 미세먼지 때문이다. 좆같은 환경오염. 좆같은 대기. 그나마 코로나는 없는게 다행인가. 식목일엔 나무를 좀 심으세요. 시발. 나도 안 심어서 할 말이 없네.
치솟는 스트레스에 개소리를 중얼거린다. 고개를 돌려 성적이 표시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1위. 이설화 13단계. 명중한 과녁 1388개.]
[2위. 김유진 11단계. 명중한 과녁 924개.]
[3위. 박희성 10단계. 명중한 과녁 873개.]
[4위. 유시아 10단계. 명중한 과녁 831개.]
4위. 아쉽게 메달권 외인 등수. 물론, 그건 내가 존나게 노력했을때에나 할 말이고. 아니 그래도 기만질이지만. 아무튼 내가 활도 안 잡아본 새끼라는 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게 높은 등수다. 이래서 시스템 시스템 하는건가. 근데 마나가 부족하시다고 파업하셨잖아.
아니,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줬다 뺏는게 어딨냐고. 치사하게. 그보다 마나. 마나. 예상가는게 있긴 한데. 에반데.
생각을 잇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아, 설마 주인공한테서 맡았던 그거냐? 진짜? 방금 전 사격장의 그거야? 아, 그래. 내 소설에서도 그런 설정이 있긴 했지. 엘프는 맑은 마나를 가진 사람한테 이끌린다고. 그리고 자연지체는 설정상 이 세상에서 순수한 마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특성이다. 아니, 근데 이끌린다고 했지, 마나를 흡수한다는 정신 나간 설정은 없었잖아. 뭔데 대체?
짜증을 가득 실어 걸음을 옮기자 엿같은 시선이 잔뜩 날아와 꽂힌다. 흥미와 질시가 뒤섞인 익숙하지 않은 시선이다. 뭘 꼬라봐 이 새끼들은. 안 그래도 공기 때문에 빡치는데. 고개를 돌려 공기청정기를 찾자, 금새 눈에 띄는 검녹색의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기려던 찰나, 귓가로 들어온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야, 꼴찌. 넌 뭔데 사관학교에 들어왔냐?"
"쪽팔리지도 않냐? 겨우 2단계라니. 다른 사람들은 다 5단계는 갔는데."
"솔직히 2단계면 그냥 민간인 수준 아니냐? 뭔 깡으로 들어온거래?"
와! 클리셰! 지랄났네 진짜.
병신들 한 무리가 주인공한테 달라붙어 시비를 털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딱히 비중 없는 일회용 엑스트라들. 꽤 소란스러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들이 얼마나 크게 씨부리는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이건 그냥 내 청각이 예민한건가.
"아무 말도 안하네. 벙어리야?"
"앞으로 내 눈 앞에 띄지 마라. 니가 보일때마다 학교 격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쏟아지는 비난에도 이도영이 반응하지 않자 흥미를 잃었는지, 엑스트라들은 병신같은 경고를 남기고 흩어졌다. 시비 터는 엑스트라들 앞에서 티 내진 않았지만, 기분은 좆같았는지 이도영의 표정에 살짝 우울함이 비쳤다. 그래도 내 말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건 칭찬해줄 만했다. 발을 옮겨 근처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야."
"...어? 어."
"뭐하는데 대답이 늦냐?"
이 새끼가 대답을 따박따박 안 하시네.
이도영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이내 점수가 표시된 모니터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아아. 이게 4위라는 것이다. 가 아니라.
"왜 죽상이야?"
"..."
아, 또 씹네. 그래. 성적 조져서 기분 좆같다고 말하긴 쪽팔리겠지. 근데 그건 니 사정이고.
가만히 주인공을 응시하고 있자, 주위에서 시선이 빽빽하게 꽂혔다. 나를 바라보던 새끼들. 주인공이 까이는 걸 구경하던 새끼들. 와, 이 새끼들은 왜 이리 남한테 관심이 많지? 안 그래도 공기 때문에 빡치는 머리에 열이 확 돌았다.
"야, 따라와."
"어? 어? 잠깐만...!"
"아, 닥치고 따라와. 새끼야."
"그만! 신입생들은 전부 모여라!"
더 모여드는 시선을 피해 이도영을 끌고 구석탱이로 향하려던 순간, 교관이 학생들을 전부 불러모았다. 아, 왜 죄다 방해질이냐.
"하아...야. 이따가 단둘이서 얼굴 좀 보자."
대답은 듣지 않고 이도영에게서 몸을 돌렸다. 내가 보겠다는데 지가 어쩔꺼야.
***
"다들 수고했다. 신입생부터 13단계에 10단계도 3명인가. 슈퍼 루키가 많구나."
"교관님! 슈퍼 루저도 있는 것 같은데요!"
신유정이 점수판을 보고 칭찬의 말을 남긴 순간, 아까 이도영한테 시비를 털던 이 중 하나가 깝죽거렸다. 자기 얘기인 줄 알아들은 모양인지 이도영이 살짝 표정을 구겼다. 학생들 사이로 웃음이 퍼졌다.
"푸흡..."
"크크큭."
그 순간이었다.
"우습나?"
신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짧게 읊조렸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각됐다. 당황으로 물든 표정의 학생들 사이, 방금 전 깝쳤던 새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병신. 대가리로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나? 주제도 모르고 교관한테 깝치네.
"너. 나와라."
"네, 네!"
파랑을 넘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튀어나온 남자를 신유정이 노려보았다.
"우습냐고 물었다. 내가 우습나?"
"아, 아닙니다!"
"내가 실기 시험 전에 뭐라고 말했지? 하위권은 따라잡기 위해, 상위권은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했을텐데."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동기를 함부로 비웃는다. 절대 추월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네, 네? 그..."
어떻게 대답할지 쩔쩔매는 남자를 노려보며 신유정이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무시한 벌은 따로 주지 않겠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은 져야겠지. 지금 네 실기시험 순위가 몇 위지?"
"3, 314위입니다!"
병신인데? 아니, 상위권도 아니고. 중하위권 새끼가 왜 부심질이지? 이해가 안 가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신유정이 머저리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래. 앞으로의 시험에서 네 등수가 그 이하로 떨어진다면, 그땐 내 권한으로 너를 제적하도록 하겠다."
"...네?"
당황으로 물든 남자의 표정을 보고, 신유정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대 뒤쳐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었나?"
"그...그게..."
"아니면, 첫 날부터 내 말을 무시한 벌로 즉시 제적할 수도 있는데, 뭘 택하겠나?"
"전...전자를 택하겠습니다."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빠진 남자를 무시하고, 신유정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너희는 사관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영웅의 새싹이다. 그리고 영웅이라는 이름은 그리 값 싼 게 아니지. 책임지지도 못할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마라. 알겠나?"
"예!"
긴장으로 얼어붙은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본 신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이상. 실기 시험을 마치겠다. 해산하도록."
오...존나 멋있네. 할 말 딱 마치고 보내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이게 참교관이지. 입학식에서 연설하던 새낀 너무 좆같았어.
아까 깝죽대던 새끼가 사색이 된 채 자리로 들어가고, 신유정이 이내 자리를 비우자 학생들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도영은 무슨 감정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신유정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사람이 거진 빠진 주위를 대충 둘러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야, 따라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팔을 강제로 잡아끌어 걷기 시작하자, 이도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저기?"
응. 닥치고 따라와.
"시끄러워. 따라와."
***
이도영을 끌고 얼마간 걸자 사람 하나 없이 한적한 길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팔을 놓아주자 그제서야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저기. 왜 여기까지 온거야?"
약간의 자격지심. 우울함. 답답함. 부정적인 감정이 다채롭게 섞인 표정을 지으며 이도영이 힘 없이 말했다. 엥간한 다른 사람이라면 달래주겠지. 근데 난 아니거든. 아까부터 호흡기로 들어오는 공기가 따갑다고. 진짜 뇌가 지져지는 것 같아.
걸어오면서 펄럭이던 옷에서 상쾌한 공기가 소량 나왔지만, 한참 부족했다. 탈수로 죽기 직전인 사람한테 물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고 갈증이 사라지겠는가. 오히려 더 목이 메었다. 짜증으로 뇌가 타버릴 것 같았다.
"말했잖아. 물어볼 게 있다고."
"물어볼 거?"
의문에 찬 표정을 짓는 이도영의 멱살을 부여잡고, 그대로 어깨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의문. 당황. 경악. 팔레트처럼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이도영의 얼굴을 대충 올려다보며,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맑은 공기를 그대로 들이마신다. 한 번 정도는 세이프겠지. 그냥 향수 쓰냐고 물어보면 되는거잖아? 오케이. 핑계 준비 끝.
"후우...하아..."
그리고 숨을 들이마신 순간, 어마어마한 쾌감이 뇌리를 강타했다. 와. 진짜 미칠 것 같아. 무슨 마약도 아니고. 이 몸뚱아리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거야.
숨을 들이키는 순간, 폐에 냉수를 쏟아부은 것처럼 시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예를 들자면, 식후 찝찝한 입으로 양치질을 끝냈을 때의 개운함. 그보다 몇 백, 몇 천 배는 증폭된 상쾌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흐으으..."
"저, 저기?!"
아. 못 참겠다. 이걸 어떻게 참아.
눈 앞의 공기청정기가 당황하건 말건 마구 숨을 들이마신다. 마실수록 익숙해지기는 커녕 더욱 짙어지는 싱그러운 향기. 그 중독적인 향에 정신 없이 숨을 들이마신다. 한 번만 마시긴 개뿔. 목 말라 뒤질 것 같은데 한 모금만 마실 수 있겠냐.
"자...잠시만!"
그렇게 얼마나 코를 박고 있었을까. 이도영이 새빨개진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아 강제로 머리를 떼어냈다.
"...아."
코끝에서 풀내음이 사라지고, 역한 매연의 냄새가 쾌감으로 들뜬 내 정신에 냉수를 쏟아부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자,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행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내새끼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마구 냄새를 맡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나는 마나를 흡수한거지만. 이 새끼 입장에서 보면 자길 갑자기 한적한 곳으로 끌고 오더니 자기 냄새에 헤롱대는 변태새끼나 다름 없었다. 아니, 잠깐만. 아. 미친.
"아...이런...씨발..."
이, 미친. 좆같은 몸뚱아리.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밀려오는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이 새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아...시발.
자살마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