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신입생(5)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느낌이었다. 변명? 방금 전 그걸 변명할 수 있는 새끼가 있다면 제발 나와보라고 해라. 얼굴로 열기가 확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수치심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게 이렇게 다행일수가 없었다. 그 추태를 다른 새끼들한테도 들켰으면, 그날로 인생 포기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야 했을테니까. 물론 이 새끼한테는 들켜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진짜 어떻게 하지. 죽일까? 근데 죽이면 세계멸망이잖아. 그럼 대가리를 후려칠까? 존나 쎄게 후려치면 기억을 잃거나 하지 않을까? 별 같잖은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할만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온갖 욕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진짜 개같은 종족. 대체 엘프 설정 짠 새끼가 누구야. 아, 그게 나구나.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듯 개소리가 줄을 이었다. 아. 진짜 죽고싶다 그냥.
"괜찮아…?"
괜찮겠냐 새끼야? 순수하게 걱정하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듣자 더욱 솟구치는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는 숫제 고개를 숙인게 아니라 박치기를 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고개가 굽혀졌다. 그리고 얼굴에서 열기가 좀 사라졌을 무렵, 계속되는 침묵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
"아…그…."
"그?"
그래서 여기서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그냥 밝혀버릴까? 아니, 그건 안된다. 물론, 이 새끼가 원작 주인공처럼 호구면 나한테 협박을 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나는 아직 이 새끼가 원작의 그 새끼가 맞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가 호구라도, 내 목줄을 내 손으로 갖다바치는 건 좀 그렇기도 하고.
아니, 그리고 애초에, 내가 사실을 밝혀봐야 믿을지도 의심스럽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얘를 여기로 끌고와서 치한행위를 한 변태새끼니까. 애초에 뭐라고 말해야 되냐? 네 냄새를 맡으면 마나가 회복된다고? 아주 기분이 HIGH해진다고? 이걸 믿겠냐고 시발.
"그…그러니까…."
"그러니까?"
문제는, 딱히 변명할 거리도 없다는 점이다. 아니, 애초에 이걸 어떻게 넘기냐고. 희대의 아가리 파이터들을 데려와도 이건 못 이긴다. 아, 모르겠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다시 밀려오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즙필승이라도 시전해볼까. 개뿔이. 진짜 내가 왜 이런…. 치솟아오르는 감정으로 범벅이 된 뇌가 필터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을 내뱉었다.
"그…너, 향수 뭐 쓰냐?"
아 미친. 이걸 변명이라고. 진짜 등신도 아니고. 그 말을 마치고나서 눈을 맞댈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도 이따위 걸 내뱉네. 돌겠다 진짜.
"어…나 향수는 안 쓰는데…."
그 되도 않는 변명에 당황한게 나 뿐은 아닌지, 당혹스럽다는 기색이 한껏 묻어나는 이도영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에 다시 몰리는 열기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여기서 얼굴을 붉히면 더 쪽팔리니까. 이미 내가 팔 쪽이 더 남아있는지는 둘째치고.
진정하려는 그 필사의 노력이 통했는지, 다시 어느정도 냉정함이 돌아온 얼굴을 들어 이도영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겨우겨우 억눌렀던 수치심이 또 튀어올랐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그러냐. 알, 알겠다."
"그, 그래…."
"그래…고맙다. 잘 가라."
차마 더 이상 이도영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용기가 나지 않아, 멍청하게 대화를 끝내고 최대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미 지금까지 쌓은 흑역사만으로 이불이 남아나지 않겠지만, 매트릭스만은 사수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아, 진짜 개같은 종족.
오만가지 쌍욕을 속으로 쏟아내며 계속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속보로 기숙사를 향했다. 진짜. 이 지랄을 했는데 시스템 안 나오면 죽여버릴거야. 진짜 어떻게든 죽여버릴거야.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도중 예민한 청력을 통해 이도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빨개졌네."
아. 그냥 죽을까.
***
이도영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전력으로 달려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 안에 들어오고나서야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진짜 죽을까. 그냥."
쪽팔려. 진짜 개쪽팔려. 내일도 그 새끼 얼굴 봐야하는데. 그거 하나 조절 못하고. 미친 진짜.
"끄아아아악!"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이마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래. 시발. 이미 조진건 조진거고. 일단 확인부터 해야지.
"후우…시스템."
[순수한 마나가 일부 공급되었습니다.]
[시스템을 재개합니다.]
다행히도 그 지랄을 한 보람은 있었다. 이랬는데도 시스템이 안 나왔으면 진짜 내가 뭘 했을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정상적으로 눈 앞에 나타난 팝업창에 한숨을 돌렸다. 그것도 잠시.
"…뭔데?"
시스템을 재개한다는 말 이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 빡돌게 하네. 뭔데 또. 아, 설마.
"…상태창?"
[보유 특성]
엘프의 친화력
엘프의 신체
[보유 스킬]
(Warning! : 마나 부족으로 스킬 랭크를 온전히 적용할 수 없습니다.)
궁술 (A+)
엘프의 발걸음 (D+)
[마나 부족으로 복구가 완벽하지 않아 현재 인식되지 않은 스킬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보유 포인트]
(마나 부족으로 복구가 완벽하지 않아 포인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보유중인 마나]
(Warning! : 마나를 모두 소모하면 시스템이 휴면상태로 전환됩니다.)
4/20 (극히 부족)
"아니…."
진짜 상태창이라고 말해야 나오는거였냐? 살짝 어이가 없어 눈을 치켜뜨고 눈 앞에 나타난 글자들을 읽었다. 그리고.
"와. 이거 실화냐?"
킹태창이 있긴 있는데, 마나가 부족하다고 죄다 가려놨네. 게다가 밑의 보유중인 마나는 뭐야. 손가락을 들어 상태창을 꾹 누르자 눈 앞에 새 팝업이 마구 떠올랐다.
[현재 시스템 유지 마나 : 24시간당 2]
[스킬 유지 마나 : 등급과 스킬 사용량에 따라 할증되어 차감됩니다.]
[보유 마나 1000을 이용해서 스킬 탭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복구 시, 시스템 유지 마나 사용량이 하루당 3 증가합니다.]
0/1000
[보유 마나 3000을 이용해서 포인트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복구 시, 시스템 유지 마나 사용량이 하루당 10 증가합니다.]
0/3000
"이런 미친."
존나 비싸잖아. 내 마나통이 20인데. 천, 3천을 언제 모으냐고. 게다가 하루 소비량은 뭐냐.
"시발…이러면 이틀이면 나가리잖아…."
아까 전 그 희대의 흑역사를 대가로 얻은 마나가 겨우 4인데. 이틀이면 싹 다 써버릴 위기다. 아니, 하루 소모량이 내 전 재산의 절반이라고. 이게 말이 되냐?
"하…마나코인 같은거 없나?"
마나가 복사가 된다고! 물론 그딴게 있을 리 없다. 정직하게 마나를 벌라고! 낄낄대는 누군가의 인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근데 그 방법이시라는게.
"아아아아악!"
그 생각을 하자마자 또 떠오르는 기억에 대가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미친. 또 그 짓거리를 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짓을 또 하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내가 쪽팔려 죽건, 아니면 내가 쪽팔림을 참지 못하고 그 새끼를 죽이건.
내가 그 새끼한테 가서 또 코를 박으라고? 그러는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진다. 아니, 그래. 사실 마나가 필요한 것 까지는 상관 없다. 상쾌하고, 기분도 좋아지니까. 그딴 식의 방법만 아니었으면, 이 세계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단순히 숨 쉬는 것만으로 그런 쾌감이 느껴지니까.
"근데 왜 방법이 그따위냐고! 미친 새끼야! 아니, 왜 하필 걔뿐이냐고!"
쿵쿵쿵! 깊은 빡침과 수치심을 담아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대상도 불분명한 욕설을 쏟아내며 한참 발광하다 지쳐 엎드렸다. 손에서 찌르르 올라오는 고통에 머리가 조금 차게 식었다. 아, 기숙사가 방음이 잘 되서 망정이지. 이러는 게 옆 방에 들렸으면 흑역사 1스택 추가할 뻔했다.
"하아….일단 식물부터 가져오던 사오던 해야겠네."
진정하자마자 다시 느껴지는 불쾌한 공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진 열이 올라서 제대로 몰랐는데. 아까 맑은 공기를 어느정도 들이마신 탓인지, 지금 들이마시는 숨이 한층 더 역겹게 느껴졌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게 아니라, 숨만 쉬어도 빡치네. 돌겠다 진짜."
시스템이 있는데. 있는건 참 고마운데. 패널티가, 아니 시스템을 쓰려면 필요한 일이 너무 엿같았다. 아. 진짜. 미치겠네.
"시발. 납치해서 가둬놓고 그냥 공기청정기로 써버릴까."
물론 불가능. 납치 자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는 이도영을 숨겨둘 장소도, 관리할 자신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사관학교 학생이 납치당하는 일이 일어나면, 학교 자체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 자체 위신에도 큰 영향을 끼칠테니까. 영웅이라는 존재는 국가 입장에서도, 시민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다. 단신으로 중화기 이상의 화력을 보유한 전략병기기도 하고. 그런 존재를 키워내는 학교에 흠결이 있으면? 바로 칼바람 부는거지.
"그런 것치곤 인성 터진 새끼들이 꽤 많은 것 같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마나를 확보하냐다. 일단 지금 내가 가진 마나는 4. 24시간마다 2씩 소모하니까 이틀을 버틸 수 있는 양이지. 응, 근데 그건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시스템을 켜두기만 했을 때고.
"스킬이라도 쓰면 바로 오링인가. 하아…."
그나마 내일은 필기와 수업 소개만 할테니 여유가 있다고 쳐도, 모레부턴 모른다. 아마 수업은 실습 위주로 흘러가지 않을까. 영웅은 필기도 필기지만, 결국 전투가 주 목적인 존재니까. 즉, 그 말은.
"모레가 다 지나기 전에 어떻게든 마나를 보급해야 한다. 라는 건가."
와. 이거 어떻게 해야하냐? 답이 없는데. 진짜 납치라도 할까? 오늘 일 때문에 얼굴 보기도 쪽팔리는데.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접촉해서 마나를 구하지.
한탄을 내뱉었지만, 어쨌든 해야할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또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다음 날 아침, 아침부터 나를 반겨주는 정말 아름다운 공기 덕에 최악의 컨디션으로 눈을 떴다. 토할 것 같네. 진짜. 일단 급한대로 실내 화초 주문을 넣었으니, 내일부턴 그나마 조금 나아지겠지. 대충 몸을 정돈하고, 교복을 입은 뒤 기숙사를 나섰다. 3월부터 쨍쨍한 햇살이 내 눈을 강하게 찔렀다.
"아니, 원래 엘프면 날씨 맑으면 기분 좋아지고 그래야 하는거 아니냐?"
나는 왜 빡치지?
또 푸념을 내뱉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공기에서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이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흠칫한 이도영을 보고 최대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내 자리로 향했다. 쟤 자리랑 꽤 멀어서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자리에 앉자 상쾌한 공기가 더 옅어졌다. 역시 이 공기의 원인은 쟤구나. 이도영을 살짝 노려보다가, 또 눈이 마주칠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만 마주쳐도 쪽팔려. 진짜.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한참 시간을 때우던 도중, 툭툭 하고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녕!"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웬 소녀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 미친. 깜짝이야."
"아하하! 놀랐어? 미안!
깜짝 놀라 욕설을 내뱉자마자 소녀는 밝게 웃으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뭐지. 이 새끼? 개빡치네. 아니, 근데 이 외모. 어째 조금 익숙하다?
"되게 쿨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말 걸어봤어! 혹시 이름이 뭐야?"
"유시아."
이름을 물어오는 말에 대충 대답하고 눈 앞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둥근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 아니, 이딴 건 상관 없고. 감상을 하고 있네.
허리까지 오는 적색의 머리카락과 홍채에 일렁이는 옅은 불꽃의 형태. 그리고 활자로 옮기면 느낌표 투성이일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말투. 아, 누군지 알겠다.
"시아 양이구나! 나는 김유진이라고 해! 우리 친구하지 않을래?"
원작 소설 1학년 탑 클래스의 화염 마법사이자, 이도영의 두 번째 히로인. 실기시험 2위의 실력자가 내게 친구 신청을 보냈다.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