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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김유진(2) (18/167)



〈 18화 〉김유진(2)

생각보다 흔쾌한 긍정에 살짝 놀랐다. 친구라는 건 이렇게 쉽게사귈 수 있는 건가?

“진짜?”

“문제 있냐?”

믿기지 않아 되묻자마자 귀찮다는 듯 말을 끊는  앞의 소녀. 으으, 뭔가 소설에서 봤던 그런 친구 사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소녀의 인상이  차가운 편인데다가, 더해진 무뚝뚝한 반응에 꽤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떻게 들어도 시비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을 내뱉았던 데는, 아마  압박감이 한 몫 했으리라.

“아, 아니! 처음 봤을 때는 인상이 조금차가워보여서…그, 조금 노는 애들 같았다고 해야하나.”

실수했다. 입에서 제멋대로 튀어나간 말을 깨닫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노는 애들이라니. 물론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소녀를 본 대부분이 동의할만한 표현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 그것도 영웅 지망생한테. 역시기분이 나빴는지, 내 말을 듣자마자 소녀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

아무래도 차가운 인상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차갑기는 커녕, 자신보다도 강렬한 감정표현이었다. 그 강렬한 감정이 나를 향하지만 않았어도 좋았을텐데. 구겨진 표정에서 강하게 와닿는 감정에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그런 애는 아닌 것 같아서 말 걸어본거야….그, 욕하는게 아니라….”

으, 진짜 실수했다. 실제로는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관계지만,  친구라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들던 친밀감 때문인지, 나를 향한 싸늘한 시선에 우울한 감정이솟구쳤다. 어깨를 축 내리고 고개를 숙이자, 이내 귓가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확실히 자르는 느낌이 아니라, 여지가 남아있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고개를 번뜩 들고 눈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그리 차갑지 않은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쓰다듬음에 당황해 몸을 퍼뜩 떨고 눈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신이 무언가 했냐는 듯한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소녀는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너, 되게 귀엽네.”

첫인상은 얼음. 말을 처음 걸었을 때는 불이더니, 이번엔 능글맞은 게 바람 같다. 종잡을 틈도 없이 휙휙 바뀌는 인상이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머리를 내어주기도 잠시, 이내  생각에 목을 가다듬었다. 친구하기로 했으니까, 확답을 받아야지!

“흠흠! 아무튼 유시아? 시아 양?”

“그냥 시아라고 불러.”

호칭을 붙이자마자 눈 앞의 소녀가 부담스럽다는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이상하다. 책에선 다들 이렇게 말했는데.

“그, 그럼 시아야! 우리 진짜 친구인거지?”

“응.”

 대답을 듣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시아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첫 친구가 생겼다. 신나는 마음에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얼마 뒤, 시아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응?”

“왜 하필 나한테 말 건거냐?”

왜냐니? 으음…그러게?  생각 없이 이유를 떠올려봐도, 그냥 끌렸다는 이유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어디서 본  같아서? 생각나는대로 그렇게 말하자 시아가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친밀한 느낌이라고?”

 대답을 듣자마자 시아가 고민에 빠졌다. 역시 내가 말을 조금 이상하게 했나? 슬슬 불안감이 들기 시작할 때, 갑자기 시아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었다.

“야,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무슨 부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부탁인지 묻자, 시아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뭐?

“네 냄새 좀 맡아봐도 되냐?”

내, 냄새? 무슨 냄새? 에…나, 나 혹시 냄새나나? 아닌데. 오늘 아침에도 제대로 씻고 왔는데. 이상한 냄새가 날리가 없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에 패닉 상태에 빠진 내 얼굴을 응시하며 시아가 한   물었다.

“안돼?”

이건 반칙이잖아. 그렇게 물어보면, 안된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 그래도 부끄러운데….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허락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아의 눈에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아, 알았어! 맡아봐!”

진짜 이상한 냄새가 나진 않겠지. 으으…방금 긴장해서 살짝 땀 난  같은데. 땀냄새가 나진 않겠지? 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내밀자, 이내 목덜미에 따뜻한 숨결이 와닿았다.

“히잇…!”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놀라기도 잠시, 시아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목에 코를 가져다댄채 숨을 들이마셨다. 귓가로 들리는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빨리. 빨리.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인 채, 시아가 코를 떼기만을 기다렸다.

“아니네.”

한참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시아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에 실눈을 뜨고 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아는 이상하다는 듯,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한숨을 내뱉는 시아를 보고 끝난 거냐고 물었다.

“그래. 고맙다. 내겐 꽤 중요한 일이어서.”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시아의 손길에 얼굴이 또 다시 붉어졌다.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보고 픽 웃은 시아가 내 볼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항의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한참을 더  볼을 주물럭거리던 시아는 내가 울상을 짓자 그제야 손을 뗐다.

“으으…너 이런 성격이었어?”

살짝 화가 나서 눈을 매섭게 뜨고 시아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음 섞인 시선을 보내던 시아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흥, 꽁해진 기분에 시아를 노려보던 도중, 시아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놀랐다는  살짝 커진 눈이, 이내 불쾌함이 담겨 좁혀졌다. 그 갑작스러운감정에 시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어떤 남자애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녹색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조금 작은 소년. 시아보다는  약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친밀감이 느껴졌다. 아니, 살짝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그 느낌에 빤히 소년을 바라보자, 이내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후.

“…!”

시아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변했다. 와, 이런 표정도 짓는 애였구나. 수치심으로 가득 물든 얼굴로 부들부들 경련하던 시아가 이내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아까 그 소년에게 시선을 돌리자, 소년도 부끄러운 듯 내 시선을 피했다.헤에…. 무슨 관계일까? 궁금함을 품기도 잠시, 이내 교실에 들어오는 교관을 보며 교과서를 꺼냈다.

***



역사 수업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자던지 말던지 강의에만 열중하는 교관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상에 엎드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과서를 읽고 있는 시아가 보였다.

‘예쁘네….’

처음 사귄 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교과서를 읽는 모습도 예뻤다. 신기한 눈빛으로 시아를 바라보던 도중, 시아가 교과서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옮겼다. 아, 쟤. 아까 걔구나.

아까 얼굴을 붉혔던  남자애였다.  남자애를 빤히 바라보던 시아는, 남자애가 시선을 돌리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음, 맞지? 내가 생각하는 거 맞지?

“헤에….”

친구의 꽤 흥미로운 모습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은 시아가 나를 째릿하고 쳐다봤지만 아까처럼 강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얼버무린 뒤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자, 이내 시아도 따라 잠에 들었다. 고른 숨소리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아까  소년을 바라보았다.

“으음…저런 타입이 취향인가?”

미남이라기보단 미소년에 가까운 외모. 수업에 성실하게 집중하는 모습은 꽤 인상 깊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적당히 평범한 소년이었다. 시아랑 비슷한 기묘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건 조금 신기했지만.

소년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이내  시선을 눈치 챈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당황한 낯빛을 띠는 소년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냈다. 소년은 내 인사에 고개를 까딱여 화답했다가, 내 옆에서 잠에  시아를 보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시아랑 똑같은 반응이네.

으음, 시아랑 쟤는 무슨 관계일까?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곰곰히 생각하던 도중, 불현듯 아침의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냄새 좀 맡아봐도 되냐?’

‘아니네.’

기대와 달라서 유감이라는 듯한 시아의 표정. 시아와 나를 보고 얼굴을 붉혔던  소년. 그리고 시아의 표정. 비슷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시아와 저 소년.

 가지 단서가엮여 대충 얼개가 잡혔다. 비슷한 내용을 즐겨보던 로맨스 소설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의 체취는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했던가? 그런 묘사가 있었다.

‘아니네.’

시아의 그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기대와는 달라서 실망했다는 듯한 목소리. 그런데 하필 나한테  그런 기대를 했을까? 그 답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했던 말이니까.

‘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만약, 친근한 느낌이 나만 들었던 게 아니라, 시아도 마찬가지였다면? 그러면 설명이 된다. 아마, 저 소년과 비슷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나에게서도 그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사실상 억지에 가까운 추론이지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맞아야 한다.

‘그래야 로맨틱하잖아.’

즐겨보던 소설에서 봤던 클리셰나 다름 없는 장면에, 흥미로운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헤에…그렇구나. 잠에 빠진 시아와,  시선을 피하며 다시 고개를 교관에게 향하는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와아, 이러면  완전 조력자 포지션 아니야? 즐겨보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은 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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