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김유진(5)
다음 날, 대련 수업을 위해 시아와 함께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돌려 시아를 바라보았다. 으음, 시아는 누구랑 겨루게 되려나? 원거리 3위가 누구였지? 아, 걔구나. 유성 그룹 쪽의.
생각도 잠시, 귓가로 들려오는 교관의 말에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확인했다. 내 순서는 아닌지, 아직 내 이름이 보이지는 않았다. 차례차례 링에 오르고, 잠시 후, 링 위에서 대련을 시작한 이들을 바라보다가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시아야. 다음 차례는 누굴까?"
"글쎄. 적어도 순서가 순위별은아닌 것 같은데."
내 질문을 받은 시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아, 순위별이라…. 답답한 마음에 바닥을 쳐다보았다. 역시…이설화겠지.
대화가 멈추고, 이내 첫번째 시합이 끝난 뒤 다음으로 링에 오를 사람의 이름이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김유진. 이설화. 아, 나구나.
올게 왔다는 생각에 긴장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링을 향하려던 순간, 시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불편한 듯 차갑게 굳은 표정. 처음 봤을 때 느껴졌던 그 차가운 느낌에, 이설화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리고 이내 시아가 손을 들었다.
“야. 기왕 하는거면 당당하게 나가. 축 처져서 그러지 말고.”
어…. 이거 격려해주는 거지?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에 단단히 굳었던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감각. 심장에 깃든 마나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야…? 시아는 궁수 아니었어…?
갑자기 돌기 시작한 몸의 활력에 당황한 눈길을 보내자, 시아가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다는 표정. 그 표정을 보고,당황한 표정을 지운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답과 동시에 교관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웃음을 보내주는 시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링을 향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활력이 따뜻했다. 미약한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혹시라도 이기면, 시아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
‘무리였네….’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더 강했다. 그래도 시아 덕분에 선전했으니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링에서 내려 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차게 시아를 부르려던 순간.
“네가 없으면 숨 쉬기도 힘들어지니까.”
열렬한 고백 현장을 마주했다. 어…? 귓가에 들려온 말에, 입이 저절로 닫혔다. 아, 늦었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시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그…방해해서 미안해….”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방해했나 보네…. 급격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입을 닫았다.
*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이내 시아가 변명을 시작했다. 방금 그 말이 고백이 아니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반박을 보내자, 시아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진짜 답답한건 난데.
여태까지 봤던 시아의 행동들을 일일히 들어 시아의 변명을 논파하자, 옆에 있는 도영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아의 표정에 어제 있었던 비밀을 폭로하려던 순간, 시아가 손을 뻗어 내 입을 막았다.
“읍!”
내 입을 틀어막은 채, 시아가 눈으로 그 일은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숨 막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아가 그제서야 손을 풀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시아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도영이를좋아하지 않는다는 첫 말로 시작해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특이 체질인 탓에 마나 회복을 못하기에, 유일하게 마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영이한테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음….
‘그게 말이 돼…?’
그 말을 듣자마자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체질이 있다는 건 알지만, 마나를 쓸 수는 있지만 마나를 회복하려면 도영이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니. 너무 편의주의적이잖아. 그리고.
‘정작 도영이는 사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만났다면서….’
그러면 시아는, 마나를 회복할 방법도 없이 사관학교에 들어왔다는게 된다. 말이 돼, 그게?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듯 했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시아는 왜 사관학교에 온거야?”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시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도영이를 바라보는 시아의 모습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아무래도 지금 대답해주기는 힘든 모양이니까.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지. 그보다, 방금 전 말에서 진짜 의문이었던 건.
‘단순히 마나를 위해서라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볼 때마다 시선이 따뜻하게 변하고, 가까이 다가갈때마다 표정이 헤실헤실 풀리면서 감정이 없다니. 자꾸 빈 자리를 바라보고, 가까이 가고 싶어서 움찔대는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설마 진짜 모르는 건가? 으음…. 모를 수도 있긴 하겠지. 나도 소설에서 그런 장면 많이 봤으니까. 흐음….
“헤에…그렇구나.”
다시 피어나는 흥미를 적당히 누르고 대답하자, 내 반응에 그제야 안심한 듯 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갑자기 시아가 도영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띄우고 도영이에게 얼굴을 가져다댔다. 마나를 회복하겠다는 핑계로.
‘헐….’
저러면서 감정이 없다는 걸 믿으라고?
당황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니터에 표시된 시아와 도영이의 이름에 조심스럽게 둘을 불렀다.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시아는 한 번 표정을 찌푸리고는 링을 향했다. 그때까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영이의 등을 떠밀어 링으로 보냈다. 나 참…. 나만 고생하는 것 같단 말이야.
*
시합은 꽤 빠르게 끝났다. 기권을 선언한 뒤 링에서 내려온 도영이가 내게 다가왔다. 음…둘이서만 이야기 해본 적은 없어서 조금 어색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곁눈질로 도영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경기에서 기권한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도영이는 처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입을 닫고 가만히 있자, 이내 시아가 링에서 내려왔다. 압승이었다.
그리고 시아가 내려와 이 쪽을 바라보자마자 갑작스레 나와 도영이에게 시선이 몰렸다. 흥미가 담긴 무수한 시선에 도영이가 주눅든 표정을 지었다. 으으…이런 분위기는 질색인데. 우울한 분위기를 떨쳐내려, 다가오는 시아를 환한 표정으로 반기며 입을 열었다.
“시아야!”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시아가 자리를 옮기자는 눈짓을 보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지, 도영이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시아와 함께 따라가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마나가 부족하다고….
에…. 그럼 아까 그거 또 하겠다는 거야? 앞에서 걸음을 옮기던 도영이도 들었는지, 몸이 퍼뜩 떨렸다. 그 순진한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인기척이 드문 곳에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도중,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시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 걔구나. 박휘성.
‘엄멈머…설마 삼각관계야?’
박휘성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시아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박휘성의 식사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며 경계심 섞인 시선을 보내는 시아를 보며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설마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는거야?
‘진짜 신기하네.’
저렇게 열렬하게 바라보는데 모를 수가 있나?
의문도 잠시, 이내 시아의 거절에 실망한 모양인지, 박휘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어라, 이렇게 끝이야? 약간 실망스러운 기분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시아를 따라 식당을 향했다.
*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박휘성이 시아에게 다가왔다. 되게 끈기 있네. 시아와 비교하긴 불쌍하지만,그래도 객관적으로 보면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실력도, 아까 시아한테는 압도당했지만 충분히 대단하고. 으음…시아가 너무 대단한게 문제네.
'도영이가 좀 밀리는 거 아니야? 저렇게 적극적인데. 애초에 도영이는 시아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라, 차라리 박휘성이 낫지 않을까? 그 생각에 시아를 바라보자,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왜 이런 반응이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도영이와 나를 제외하면 시아가 다른사람한테 말을 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의외로 낯을 가리나…? 아니,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역시…조금 이상해.’
“그, 그러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아니, 싫어.”
아무래도, 과할 정도로 거부감이 심하다. 시아가 조금 입이 험하긴 해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 정도로 차갑게 대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차가운 반응이지? 아는 사이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진짜 처음 말 건 것 같은데.’
칼같은 거절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박휘성을 흘끗 바라본 뒤, 시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경계심이 깃들어 있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과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시아를 보며,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저…시아야. 그래도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을 듣고, 시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단순히 낯을 가리는게 아니라, 진짜로 꺼리는 모습이었다. 그 이상할 정도로 꺼리는 반응에 고민하기도 잠시, 박휘성이 한 말을 듣자마자 숨을 멈췄다.
“호, 혹시 아까 걔랑 사귀는 사이야?”
헐…이걸 바로 물어보네? 되게 저돌적인 질문이었다. 갑작스레 피어오르는 흥미에 눈을 빛내기도 잠시, 시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뭔, 개소리야."
짜증으로 가득차 내뱉은 욕설에, 박휘성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를 더 나누고, 고개를 숙인 뒤 사라지는 박휘성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심하다구…?’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시아는 단순히 감정에 무심한 게 아니었다. 이제서야 선명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민에 빠졌다.
‘으음…역시 뭔가 사연이 있는 걸까?’
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람이랑 대화하는 걸 꺼리고, 분명 좋아하는 티를 풀풀 내면서도 정작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불쾌해한다니. 으으음….
‘조금 소설 같네.’
비슷한 캐릭터를 소설에서 봤던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사람한테 크게 배신을 당한 캐릭터였는데. 그 탓에 사람을 못 믿는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만나 점차 마음을 여는 스토리였지. 어라…? 뭔가 익숙한데.
어느새 심각해진 내 표정을 빤히 쳐다보는 시아의 얼굴에, 아까 지었던 표정을 연기하자 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시아에게 표정이 들키지 않게 살짝 뒤에서 따라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도영이랑 더 가까워지도록 도와주는 게 맞는 거겠지. 다시 한 번 다짐한 후, 앞서서 걷는 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반응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본다고 대답해주진 않겠지. 으음…. 아버지한테 한 번 부탁해볼까. 이번 주말에 집에 가면, 몰래 시아에 대해 조금 알아봐야겠다. 생각을 마친 뒤, 표정을 정리하고 시아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팔짱을 풀진 않는 시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