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지리산 던전(2) (23/167)



〈 23화 〉지리산 던전(2)

시야가 순간 새하얗게 변하고, 귓가에 들려오던 흐르는 물소리가 뚝 끊겼다. 잠깐동안 이어진 감각의 단절 이후, 흰 색으로 표백되었던 시야가 다시 제 색을되찾았다. 그리고, 신비하기 짝이 없는 정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순간 말을 잃을 정도로 신비로운 풍경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새하얀 안개가 장막처럼 나무 사이에 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안개라는 새하얀 베일을 두른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겨, 빛이 새어들어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걸음도 잠시, 숲을 빠져나온 순간, 시야를 가득 채웠던 안개가 걷히고 푸르기 짝이 없는 거대한 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들어왔나 보네.’

원작에서 봤던 묘사 이상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살짝 감탄했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향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아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찾았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녹슨 쇠도끼를 주워들었다. 축축한 도끼자루의 감촉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꽤 무겁네.’

 손으로 들기에는 조금 묵직한 중량에 살짝 헛숨을 내뱉었다. 아, 이거 써먹긴 글렀네. 날은 듬성듬성 빠져서 이빨이 나갔고, 심지어 녹까지 슬어 있었다. 아무래도 습기 탓에 썩어버린 듯, 삐걱 소리를 내는 도끼자루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 도끼, 아무래도 그거지?

‘베이스 설화는 금도끼 은도끼인데, 바둑 관련 속담은 또 왜 들어간거야?’

선유후부가설화(仙遊朽斧柯說話)인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모른다고. 설마, 도끼랑 신선이 나온다고 섞어버린거야?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원작 작가의 기묘하기 그지 없는 센스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손에 든 도끼의 머리 부분을 쥐었다. 이거 까딱하면 던지다가 중간에 자루가 부러질 것 같거든.

-휘이이익!

머리 부분을 잡은 뒤, 자세를 잡고 강가 한복판에 도끼를 집어던졌다. 선명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도끼가, 풍덩 소리를 내며 강물에 가라앉았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라.’

원작, [아카데미의 낙제생]의 설명을 빌리면, 던전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던전. 흔히 미궁형 던전이라고 불리는 던전이었다. 단순하게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길을 나아가, 보스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미궁의 핵을 파괴하면 클리어가 되는 던전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던전이기도 했고. 그리고 설화형 던전이란.

“구전설화를 기반으로 하는 던전이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는 개념이, 게이트에서 뿜어져나온 마나와 결합해 형태를 이룬 것. 이야기를 재연하는 무대장치. 그것이 원작에서 나온 설화형 던전의 짤막한 정의였다.

또한, 설화형 던전은  형성 기전이 판이하기에, 당연히 클리어 방식과 특징도 일반적인 미궁형 던전과는 구분되었다. 물론, 같은 설화형이라고 비슷하지도 않았다. 기반 설화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진행 방식 탓에, 일반적으로 설화형 던전은 까다로운 던전으로 평가받았다.

‘대신, 이미 알고 있는 설화일 경우 클리어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안전한 설화. 지금 내가 들어온 금도끼 은도끼 설화처럼 잘 알려진 설화일 경우, 들어온 사람은 쉽게 클리어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대신 들어오기 전에는 무슨 설화인지  수 없는 탓에, 사실 랜덤 도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원작에서 이도영은  던전에서 금도끼와 은도끼라는 아티팩트를 얻은 다음, 그걸 팔아서 꽤나 큰 돈을 벌었으니까. 그게 설화형 던전의 흔히 알려진 장점이지. 하지만 진짜 장점은 그딴 게 아니었다.

설화형 던전의 진짜 장점은 진행 방식에 따라 보상이 유동적이라는 점이었으니까. 즉,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냐에 따라 더  보상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까짓 금도끼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거든.'

금도끼 은도끼는 꽤나 강력한 아티팩트지만, 그까짓 건 진짜 얻을 수 있는 보상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원작에서는 던전을 해결한 뒤에야 나온 떡밥이라 활용하지 못했다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생각을 마치고 아까 도끼를 던진 곳을 다시 바라보자 강물이 부글부글 거품을 뿜어냈다. 이내, 끓는 거품 한가운데에서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끼날이 전부 황금으로 이루어진 도끼를 들고있는 노인이었다. 인자한 인상에, 곱게 잡힌 이마의 주름. 길게 기른 흰 색의 수염과 성성한 백발까지. 음, 역시나. 나도 몰랐으면 속았겠네.

‘진짜 누가 봐도 산신령이잖아.’

던전이 위치한 곳이 지리산이니까, 그러면 지리산 산신령이라고 해야 하나? 와우, 어째서인지 사람을 100년쯤전으로 타임 리프 시켜줄 것 같은 호칭인데. 역사의 오랜 지병, 현대인으로서 흥미로워야 하는 시점인가. 아니, 그건 됐고.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강물 속에서 튀어나왔음에도, 몸은 커녕 옷조차  한 방울 젖지 않았다. 노인이 들고 있는 금도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력에 살짝 감탄의 신음을 흘리자, 이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 금도끼가 네가 떨어뜨린 도끼이더냐?”

“아니요.”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강으로 들어간 노인이, 이번에는 은으로 된 도끼를 들고 나왔다. 아까 그 금도끼보단 약했지만, 이 은도끼도 꽤나 강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자, 이내 노인이 내게 은도끼를 내밀었다.

“그러면  은도끼가 네 도끼이더냐?”

“아니요.”

이 대답을 끝으로, 다시 강으로 입수한 노인은, 이번에는 꽤나 오래 바닥에 있더니, 이내 쇠도끼를 들고 나왔다. 쇠도끼를 내게 내민 노인이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쇠도끼가 네 도끼이렷다!”

정직하구나. 내  정직함을 높이 보고, 세 도끼를 모두 주겠노라. 여기서 긍정하면 아마 그 세 도끼를 전부 받겠지. 하지만,  그딴 걸 받으러 온게 아니거든. 쇠도끼에서 시선을 치우고, 노인의 눈을 마주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도끼 따위가 아니야.”

“…뭐라?”

처음으로 당황한 낯빛을 띈 산신령, 아니. 산신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을 바라보며 원작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 정직의 대가로 세 도끼를 모두 받은 이도영은 이내 자신이 들어왔던 던전 입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빛나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이도영을 바라보던 산신령이 혀를 차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이아의 힘을 타고난 인간이라."

 마디를 내뱉자마자 노인의 주름졌던 얼굴이 시간이 되돌아가듯 젊음을 되찾았다. 구부러졌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성성하던 백발은 찬란한 금빛을 머금었다.

"인간의 육신만 아니라면, 그 힘을 더욱 잘 다룰 수 있었을 것을."

광휘에 휘감긴 청년은, 이내 자신의 몸에 고급진 망토를 둘렀다.  하나 없이 아름다운 청년의 발에, 마법의 신발이 신겼다.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라면 가능했겠지만, 이미 기회를 놓쳤구나. 불완전하게 각성한 탓에, 힘의 균형이 망가져버렸으니."

완연한 청년의 자태를 되찾은 노인이, 품에서 챙 넓은 모자를꺼냈다. 모자를 머리에  청년은 한번 더 혀를 찬 뒤, 이내 품에서  마리의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청년이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자, 이내 청년의 몸이 던전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때 처음 알았단 말이야. 금도끼 은도끼가 사실 그리스에서 유래했다는 걸.’

원래 이야기에서는 헤르메스가 산신령의 역할을 맡았었다고 했는데. 뭐, 그보다 금도끼 은도끼라. 헤르메스답다고 해야 하나? 피식 웃음을 흘린 뒤, 눈 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그래요?  모습은  어울리는데.”

내 말을 들은 노인이 한쪽 눈을 꿈틀했다. 그 표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자, 이내 픽 웃음을 뱉은 노인의 몸에서 광휘가 뿜어져나왔다. 잠시 후, 헤르메스가 본연의 외모를 되찾았다. 격을 완전히 드러낸 헤르메스의 기세에 숨이  막혔다.

“그래, 님프의 피가 섞인 인간아.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님프의 피라. 아마 엘프를 말하는 거겠지. 음, 뭐. 그런  아무래도 좋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입을 열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런 내 모습을  헤르메스가 경멸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 없구나. 감히 신에게 본신을 드러내라 말하다니. 님프의 피가 섞였다고, 네가 신에게 감히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게냐?”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짙은 오만이 드러나는 말투. 이게 그리스 신들의 종특이지. 물론, 다른 신화라고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리스 신화의 경우 특히 심하다. 하지만.

“아니요. 적어도 헤르메스 님이라면 화를 내지 않을 걸 알았거든요.”

 앞의 상대,  신은 예외 케이스다. [아카데미의 낙제생]의 헤르메스는 그런 그리스 신들의 오만을 혐오하는 신이었으니까. 조금 익숙해진 기세에 입꼬리를 올리자, 헤르메스가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나라면 화를 내지 않는다?”

아까까지 느껴지던 경멸은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사라지고, 흥미만 남아 있는 목소리. 그래, 너라면 그렇게 반응해야지. 인간에게 신이 될 기회를 열어준  너잖아. 겨우 내가 몇 마디 했다고 화를 리가 있겠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눈 앞의 신이 가진 다른 이름을 떠올리며, 긴장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인간들에게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내린 장본인께서 고작  정도 불경에 화를 내실 리 없잖아요?”

현자의 돌과 엘릭서. 다른 명칭으로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 인간이 신이 될  있는 비약을 만들어내는 비술. 연금술의 창시자가 바로 눈 앞의 신이었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 헤르메스가 정답이라는 듯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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