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지리산 던전(3)
“그래,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재미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헤르메스가 내가 말했다. 그 긍정적인 반응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흥미는 끌었네.
“네 말 그대로, 나는 네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헤르메스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꽤 경박해보일 수도 있는 동작임에도, 여전히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래. 나는 너희 인간에게 신이 될 수 있는 길을 전수해주었지. 그런 내가 신의 권위 따위를 중요시 여길 리 없다고 판단한 건가. 그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흥미가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헤르메스의 눈빛이 돌연히 차갑게 식었다. 갑작스레 바뀐 무기질적인 시선에, 긴장으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정돈했다. 역시, 꼴에 신이라고. 압박감 하나는 장난 아니네.
“하지만 너무 미숙하구나.만약, 내 성격이 조금이라도 더 오만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지? 내가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느꼈다면, 네 목숨은 당장에 끊어질 수도 있었다.”
-파아아앙!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헤르메스는 마치 과시하듯 자신의 신격을 완전히 개방했다. 올림포스의 12주신이 지닌 압도적인 격에 순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한 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나를 보며, 헤르메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계획은 좋지만, 그 어떠한 계획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한 법이다. 잘 알아두어라.”
그 말을 끝낸 뒤, 헤르메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아쉬움과 강한 원망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지금 헤르메스는 나에게 자신을 겹쳐보고 있다. 원작, [아카데미의 낙제생]에서 헤르메스는 엘릭서와 암브로시아를 인간들에게 전한 대가로 제우스에게 유폐당했으니까.
그러면 그걸 자극해야지. 처음으로 드러난 용의 역린에, 바로 칼을 찔러넣었다.
“…헤르메스 님은, 제우스 님을 여전히 원망하십니까?”
꿈틀. 처음으로 헤르메스의 눈가에 불쾌함이 맺혔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제우스 님을 원망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내 질문을들은 헤르메스의 표정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기품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헤르메스가 감정 조절에 실패했음을 보여주듯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신격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다잡고 헤르메스의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원망하냐고?”
헤르메스는 손에 쥐인 지팡이, 카두케우스를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움켜쥐었다. 올림포스 12주신의 분노로 터져나오는 신격에, 땅이 흔들리고 강물이 뒤집어졌다.
“원망하지.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전쟁이 끝나고, 나는 신들의 추악함을 보았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승리하자마자, 타락하기 시작한 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를 부득 갈며,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신이라는 족속은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고결한 척 몸을 치장한 신들이 마음껏 세상을 누빈 결과가 무엇이란 말이냐! 인류는 타락하고, 철의 시대가 열려버렸다. 그 죄업에 신들의 책임은 없는 것이냐?”
말을 내뱉은 뒤, 잠시 숨을 들이키며 헤르메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광기에 집어삼켜진 두 눈으로 분노를 뿜어내는 헤르메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스트라이아가 하늘로 올라오면서 말했지. 인간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하지만! 신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냐? 신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고결하다고 할 수 있느냐?”
신의 권위를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저런 주장이라. 제우스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12주신 중 하나가 아니었다면 꼼짝 없이 프로메테우스 꼴이 났겠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헤르메스가 분노할수록, 역설적으로 차갑게 식는 머리로 헤르메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래서 혁명가 타입은 귀찮다니까. 자기 의견에만 취해서, 남이 뭐라고 하건 들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아버지께, 제우스께 진언을 올렸다. 우리 또한 변화해야 한다고! 우리 또한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고! 그 대답이 무엇이었을 것 같으냐?”
형형한 분노를 토해내며, 헤르메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이내 헤르메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미친 놈이네 이거.
“내 의견은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신들을 감히 인간과 동일시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유폐를 당한 그 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 신족 또한,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타락했다는 걸! 하계의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래서, 인간들에게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전했다.”
그 말을 마치고 나서, 순식간에 헤르메스의 표정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평온해진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역시, 원작대로 미친 놈이다. 아니, 지금은 원작보다 더 미친 놈이다. 원작에서는 게이트가 열린 이후, 재앙에 맞서는 이도영을 보며 감화되기라도 했지, 지금은 그냥 신념 있는 또라이일 뿐이니까.
‘이용하는 건 힘들겠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미친 놈을 관리할 자신은 없다. 특히 신념 있는 미친 놈이라면 더더욱. 원래 계획한 대로 물건만 얻고 튀어야겠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뒤, 헤르메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헤르메스 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내 말을 들은 헤르메스가 나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헤르메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신들의 멸망. 그리고 새로운 신계의 탄생.”
아, 그래. 원작에서 처음 나왔던 그대로네. 지금이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직 세상이 멀쩡해 보이니까. 그런데 게이트 열리면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던전과 마인 따위만 신경 쓰면 되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질 거다.
'원작에서 열린 게이트는 총 네 번.'
마나를 이 세계에 전한 첫번째 게이트. 그리고, 원작이 진행되면서 차례차례 세 개의 게이트가 열렸다. 원작에서, 두 번째 게이트까진 인간들이 어떻게든 막아냈기에 신들이 신경쓰지 않았지만, 세 번째 게이트에선 신들조차 좌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재앙이 튀어나왔지. 그리고 네 번째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멸망. 완결이었다.
그래도, 아직 첫 번째 게이트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이도영이 각성한 이후부터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흘러가므로, 지금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분명 첫 번째 게이트에서 나오는 재앙이…. 잠깐.
‘뭐였지?’
왜 기억이 안 나는거지. 갑작스럽게 이질감이 들었다. 내 기억에 공백이 있다. 대체 뭐야 씨발.
갑자기 찾아온 혼란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 기억이 나질 않는거지? 다른 사건들은 대강 기억이 난다. 게이트가 열리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흐릿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재앙에 대한 정보만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단순히 까먹은 게 아냐. 흐릿한 기억조차 없어.'
애초에 그런 중요한 정보를 까먹을 리도 없지만, 까먹었다 해도 약간의 잔상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한다. 재앙에 어떻게 맞서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재앙에 대한 정보만 새까맣게 잊어버린다고? 인간의 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건 역시.
'내 기억에 이상이 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가, 나를 관찰하는 헤르메스의 눈치를 보고 인상을 풀었다.젠장. 지금 고민해봤자 명쾌하게 답이 나올 리 없다. 지금은 헤르메스한테 집중할 때다.
우선순위를 정리한 뒤, 헤르메스에게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
과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헤르메스와 꽤 오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눴다. 의견에 맞춰 몇 마디를 보태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헤르메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참. 쉽네.’
원작에서 읽었던 헤르메스의 신념에 맞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신기할 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 뭐. 생각해보면 수천 년 간 그리스 신들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았을 테니, 의견이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긴 하겠지.
‘그래도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사람을 무슨 열렬한 혁명 동지로 보는 듯한 뜨거운 눈빛에,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아, 이 새끼. 진짜 미친 놈이긴 하네.
“그래! 그러니까 내가….”
“헤르메스 님.”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헤르메스의 말을 끊었다. 중간에 끊었음에도 불쾌감 하나 없이, 경청하겠다는 듯 내 말에 쫑긋 귀를 기울이는 헤르메스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와, 진짜 뭐 이렇게 사람이 휙휙 변하냐.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 그런가?
헛웃음을 꾹꾹 눌러 참은 뒤, 본래 목적을 입에 담았다. 내 진짜 목적은 이거거든. 같잖은 그리스 신계의 유혈 혁명이 아니라. 그건 댁이나 하세요. 전 살아남기도 바쁘니까.
“현자의 돌과 엘릭서를 받고 싶습니다.”
그거 진짜 필요하니까. 내놔. 나한테 그 정도는 줄 수 있지? 혁명 동지잖아. 도울 생각은 없지만.